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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백골병단은 한국군이 적 후방침투와

 

 첩보수집을 위해 창설한 부대입니다.

 

적에게 부대 규모를 과장되게 속이기 위해

 

집단군급'병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50년대에도 유격대가 있었는데

 

왜 51년에 창설된 백골병단이 최총인지

 

의아해하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전에 창설된 유격대들은 군에서 만든

 

부대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조직하거나

 

낙오된 군인들이 합류해 만들어진 유격대였습니다.

 

그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부대였습니다.

 

▲백골병단 임시군번과 계급

 

하지만 백골병단은 1951년 1월 체력,정신력

 

애국심이 투철한 647명을 선발하여

 

육군정보학교에서 교육을 더 받은뒤에

 

군번과 계급을 주었던 육군 본부직할

 

정식부대입니다.

 

 "백골병단"(陸軍本部直轄決死隊"白骨兵團")

 

 

하지만 너무 급하게 만든조직이라

 

대원들은 신병수준이었고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백골병단 편성과 교육을 위해

 

초빙되었던 채명신장군은 백골병단

 

수준을 보고 회고록에서

 

'이런 아마추어 부대들은 실전에 투입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며 직접 11연대장에

 

지원을 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들

 

오른쪽에서 2번째 채명신장군

 

하지만 채명신장군(당시중령)이 11연대장을

 

맡은거 외에 12,13연대는 선발인원에서

 

대학교나 의용경찰 출신자들로 지휘관을

 

뽑았다고 합니다.

 

모두가 백골이 되겟다는 의지를 나타댄

 

백골병단은 우여곡절끝에 교육이끝나자마자

 

▲북한군복을 입고 김백일 1군단장

 

사열을 받고있는 11연대

 

11연대가 1월 30일 실전투입을

 

시작으로

 

정일권 참모총장, 1군단장, 수도사단장

 

미 군사고문 등이 북한군복을 입은

 

12연대 출정식 사열을 받고있는모습

 

12연대 , 13연대가 차례대로 투입됐습니다.

 

그들은 북한군 무기와 장비를 들고

 

전장으로 향하였고 그곳은 바로

 

김일성 최측근이자 최룡해에 아버지인

 

최현 중장이 이끈는 군단과 105전차여단과

 

김일성이 총애해 현재 북한 사단이름으로

 

남아있는 류경수가 지휘하는 군단까지

 

2개의 군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 북방산악지대와

 

혹독한 추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던

 

백골병단은 게릴라를 통해서 분산된

 

적 소부대들을 전멸시키고 검문소를 설치해

 

지나가는 북한군관들을 처치하고 정보를

 

캐냈다고 합니다.

 

▲백골병단 침투경로

 

획득한 정보는 곧장 아군에게 전달됐고

 

그 정보로 수도사단이 적들을 크게 격파하는

 

전과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만든 남파유격대를 조기에

 

식별해 수뇌부 전원 생포하였습니다.

 

생포된 인원들 중에는 빨치산 총사령관

 

김원팔 중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전과를 올린 유격대는 기뻐할

 

틈도 없이 생포했던 포로가 도망치면서 상황이

 

뒤바뀌게 됩니다.

 

백골병단은 적의 추격이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은 전부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얼마 후 북한군은

 

추격해왔고 백골병단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60일동안 북한군과 혈투를 벌입니다.

 

11연대 2대대장이었던 윤창규 대위는

 

부상을 집자 전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적들에게 다가가

 

"야이 새끼들아! 내가 대대장이다!" 외치며

 

생포하려고 온 적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강원북부 산악지대에서 2주치

 

미숫가루 식량만 들고 60일동안 320km를

 

이동하였습니다.

 

3월 30일 전선이 북상하며 더이상의 추격은

 

없어졌고 북진하던 국군 7사단과 조우하며

 

이들의 춥고 길었던 전투는 끝났습니다.

 

적 고위간부 13명과 480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적 통신교란과 첩보수집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살아서 귀환한 11연대원들

 

하지만 647명의 용사들중에 364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포상이 아닌 군번과 계급이 인정받지

 

못한채 백골병단 해체라는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전역한 사람들은 군번도 계급도 인정 못받은

 

미필상태로 남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고

 

그 뜻은 다시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는

 

미친 상황이 벌어집니다.

 

채명신 장군은 육분에 항의를 하였지만

 

육본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당연히 유가족들 또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을 위해 지옥을 갔다온 용사들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만 흘렀습니다.

 

1980년대 말 생존자들과 유가족을은

 

힘을 모아 겨우겨우 백골병단 전적비 승인을

 

받았고 그리고 2004년 53년만에 국회에서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인정 및 보상등에 관한 별률안이

 

 통과되면서 아주 늦었지만......

 

생존자는 계급과 군번을 인정 받을 수 있었고

 

유가족들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6월 25일 육본 대연병장에서

 

 

59년만의 전역식이 열렸습니다.

 

 

이미 수많은 전우들은 먼저 떠나갔고

 

 

26명만이 남아 먼저 간 전우들과

 

함께라는생각으로

 

 

기쁜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슬픈마음으로

 

전역을 하게되었습니다.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은

 

"백골병단 선배들께 오늘에야 전역증을 드리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늦었지만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라며 사죄하였지만 조국을 위해 사지로

 

향하였던 그들에 대한 예우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백골병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늘이 누볐던 곳은

 

 

그들의 후예들이 굳건히

 

지키고있습니다(703특공연대)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가면 백골유격대에

 

전적비가 있으니 혹시라도 지나가는 길이면

 

한번쯤 들려보는것도 좋습니다.

 

 

"백골병단 전적비"(白骨兵團 戰蹟碑)

 

 1990년에 건립되어 해마다 백골병단 전적비

 

 앞에서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립니다

 

▲전적비에 새겨진 백골병단 전투요도

 

대한민국 많은사람들이 백골병단은 물론이고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산화한 용사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대한이여, 그 날의 우리를 잊지 말아다오

 

 

 

너무늦어서 죄송합니다 백골병단 용사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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