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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일등상사는 1946년 10월에 자원입대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제대한 군인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재소집되어 23살에 나이로 일등상사로 임용되었고 국군 제3사단 22연대 3대대 소대장 대리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7월 파죽지세로 남하를 하던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선을 공격하고 대구와 부산의 길목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신속히 포항 점령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를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3사단은 포항 북쪽의 영덕과 강구 중간지점의 요충지인 181고지 점령이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제3사단은 18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특공대를 편성해 아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중대장은 소대장을 모아 "누가 특공대를 조직해 적 탱크를 파괴하겠는가"라고 물었고 그때 이명수 일등상사는 "제가 맡겠습니다"며 손을 들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은 이 불가능한 임무에 이명수 일등상사를 중심으로 12명의 특공대가 선발되었습니다. 1조 조장은 이명수  일등상사, 2조 조장 황명일 이등중사, 3조 조장 김근태 일등중사로 나누었습니다. 전우의 목숨을 무수히 짓밟은 북한군의 전차에 조국의 땅이 더는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들은 분연히 적 전차에 맞서기로 다짐합니다.

 

 

이명수 일등상사는 "우리의 임무는 적 전차를 파괴하는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포항까지 후퇴하거나 동해안의 물귀신이 되어야 한다. 필승의 신념으로 임해주기 바란다" 며 대원들을 독려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몇 발의 수류탄만이 쥐어졌습니다. 이명수 일등상사와 대원들은 적진에 침투하여 먼저 북한군 1개소대를 기습해 사살하고 1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암구호 '새'와 '쥐'를 알아낸 뒤 북한군의 복장을 하고 은폐 중인 적 전차를 발견한 특공대는 곧바로 전차 위에 올라타 수류탄을 안으로 투척해 총 3대의 전차를 차례로 무력화시켰습니다. 밤하늘을 찢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적 전차를 폭파시켰습니다.

 

 

그렇게 되자 북한군 2군단 5사단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북한군 5사단장 마상철 소장이 직접 나서 5사단 전체가 이명수 일등상사 특공대 체포에 투입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특공대는 인민군 정찰 소대에 대한 기습과 대전차 공격, 그리고 인민군 추격대와의 교전으로 수류탄과 탄환을 모두 소진해버립니다. 결국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특공대 3명이 인민군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작전 도중 적에게 생포된 부하 3명까지 모두 구출해내며 포위망을 뚫고 귀환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탱크 잡이의 명수'라는 별명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와 특공대원들의 목숨을 건 용기로 적군은 포항 진격에 차질을 빚게 됐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맨손으로 탱크에 맞섰던 그의 투혼은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사병 최초로 받는 전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훈장을 받으면서 "특공대 전원이 함께 세운 전공인데 나 혼자 받아 정말 죄송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그에게 영광과 함께 시련을 안겼습니다. 전상 후유증으로 병치레가 잦았다고 합니다. 자다가 악몽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며 깬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후 1954년 장교로 지원해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1963년 중위로 전역할 때까지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지난 2015년 1월 8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며 국군 최고의 영예까지 누리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마지막까지 동료를 구해내었던 용기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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