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영화 고지전中

 

안녕하세요 !

 

벌써 6.25 한국전쟁 66주년이네요..

 

이번에는 정말 치열했지만

 

많은 분들이 잘모르는

 

한국전쟁당시 정말 처참했던

 

양구에서 벌어졌던 한국전쟁

 

최대의 고지전에 대해 알아볼게요

 

모두가 아시다시피 전쟁초기엔 낙동강까지

 

북한군에게 밀리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통일 직전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지금의 3.8선 휴전선 부근에 전선이 고착화되었죠.

 

사실 휴전회담이 오가며 전선이 고착화 된 시기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합니다.

 

휴전회담이 오가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위해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피터지게

 

싸우는 치열한 고지전이 이 시기에 중요한

 

전투였어요.. 그 중에서도 강원도 부근,

 

특히 양구에서 1951년 한국전쟁 최대의

 

고지전이 벌어지게됩니다.

 

 

 

도솔산 전투 (1951. 6. 4 ~ 1951. 6. 19)


아군 : 한국해병대 제 1연대

 

적군 : 북괴 공산군 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양구 지구 전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전투는

 

양구와 인제 사이에 위치한 해발 1000m 이상의

 

 봉우리가 즐비한 도솔산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양구는 지금과 달리 중공과 북한의 손에

 

 넘어가있었고, 험준한 산맥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지를 잇는 방어선 때문에

 

여의도의 6배에 달하는 분지가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있었고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당한 형태였습니다.


또 경기도부근 전선은 휴전회담이

 

 직접 진행 중이어서 영토확장이 어려웠지만

 

강원도는 휴전회담 진행 중에도

 

계속해서 전투가 가능했습니다.


 

도솔산은 특히 양구, 인제를 관통하는 도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꼭 점령해야한다고

 

 판단한 UN군은 공격을 시작합니다.
 

처음엔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가

 

공격을 했지만 실패하고

 

 한국해병대 1연대가 교대하여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강력한 포병 지원과 폭격을 바탕으로

 

 공격했지만 험준한 산에 벙커를 지어놓은

 

빨갱이들에게 별 피해를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이를 착안한 한국해병대는

 

낮에 포격지원을 바탕으로한 점령전을

 

야간 기습공격으로 바꾸어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고립된 적을 3개 대대가

 

 번갈아 공격하는 식으로

 

 적의 물자를 바닥내고 피로도를 극대화하는

 

 전략에 북한군은 결국 도솔산에서

 

후퇴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해병대 5대 전투로 기록에 남게되고

 

미군이 못한 일을 우리 국군이 해냄으로써

 

 나름대로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거기에 도솔산을 점령하여 북한군들의

 

 방어선은 약 10km 후방으로 밀려납니다

 


 

해병대 1연대는 123명 전사를 포함한

 

 7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북한군 2000여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해서

 

 대승을 거뒀다고해도 무방합니다.

 

 


 

 

 

 

 

 


 


대우산 전투(1951. 7. 15 ~ 1951. 7. 31)


 

아군 : 미군 제 2사단 38연대, 23연대

네덜란드 대대, 국군 해병대 1연대

 

적군 : 북괴 공산군 제 27사단 32연대


도솔산을 탈환한 해병대는 계속되는 공방으로

 

 피해가 일어나자 미군과의 교대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교대를 1주일 앞두고 대우산을 점령을 위한

 

 작전이 시행되고 1연대가 모두 육탄전을

 

 펼친 끝에 중간지점을 점령했습니다.


임무를 마친 해병대는 곧 미군 2사단,

 

네덜란드 대대와 임무를 교대했습니다.

 


그리고 잠깐의 평화 중 중공군들이 휴전회담을

 

 거부하자 유엔군은 중공군들을 회담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다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UN군은 100톤이 넘는 폭탄을 퍼부었지만

 

 북한군은 이를 버텨냈습니다.


그래서 폭탄을 더 퍼부어서 결국

 

 북한군을 물리치고 대우산을 점령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UN군은 적 3690명이 사살했고

 

55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나

 

전사, 실종 205명을 포함한 946명의 피해를 봤습니다.


 

 

 



피의 능선 전투 (1951. 8. 18 ~ 1951. 9. 7)


아군 : 국군 제 5사단 36연대, 미군 제 2사단

 

적군 : 북괴 공산군 제 27사단

 


중공은 결국 회담장으로 오지 않았고

 

장마가 끝나자 다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연합군은 983-940-773고지로 이루어진 후에

 

피의 능선으로 명명되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국군 5사단36연대가 선제공격을

 

 시작했지만 북한군의 지뢰밭에 전진이

 

 힘들어 작전에 실패했습니다.


지뢰밭 제거를 위해 미2사단이 지뢰밭에

 

포격을 가했지만 지뢰로 도배를 해놨는지

 

여전히 남아있는 지뢰에 다시 작전은 실패합니다.


결국 국군은 정면공격을 포기하고

 

 983고지를 우회해 940, 773고지를

 

기습공격하게됩니다.

 

 


지뢰밭만 믿고 벙커에서 놀던 북한군은

 

 순식간에 모든 고지를 내줬습니다.


그러나 국군의 피해도 심각했고

 

 북한군이 다시 재정비 후 공격할 것을 예상한

 

연대장은 미군과 교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고

 

 북한군의 재공격에 포위당하고

 

다시 983고지를 내주게 됐습니다.

 


이후 포병전력을 강화한 36연대는 포격을

 

 바탕으로 미군과 합동공격해서 983고지를

 

재점령하며 전투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투로 국군은 1000여명, 미군은 2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북한군은 15000여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투 중에 화력지원을한 미 2사단은

 

 하루 평균 3만발의 105, 155mm 포를 발사했고

 

미군 지휘관은 '한국전 발발 후 가장 많은 포를 쐈다'고

 

 했으며 능선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여

 

종군기자들이 '피의 능선'이라 이름붙였습니다.

 


참고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마지막에

 

장동건과 원빈이 만나는 전투가

 

 바로 이 피의 능선 전투입니다.

 

 

 







펀치볼 전투 (1951. 8.30 ~ 9.20)

 

  

아군 : 미군 제 1해병사단, 국군 제1 해병연대

 

적군 : 북한 공산군 제 1사단

 

 


 휴전회담이 드디어 재개되자 이번엔 조금이라도

 

영토를 더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이 펼쳐졌습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겠지만 펀치볼이라는

 

거대한 분지와 그 옆을 지나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선 펀치볼 위의 고지라인을

 

 

 꼭 점령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유엔군은 펀치볼 일대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로써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시되어 펀치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펀치볼 일대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국군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 였습니다.

 

 

 

비록 불리한 지형과 적의 지뢰, 탄막공격 등에

 

 피해를 입었으나 포병화력, 항공지원에 힘입어

 

 효과적으로 적을 격퇴하였고 적 1사단을 격멸하며

 

 비슷한 시기의 두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작전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전투로 적 2799명 사살, 포로 557명의

 

 

성과를 냈으며 전사 428명, 부상 106명

 

 실종 3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칠봉 전투 (1951. 9. 4 ~ 1951. 10. 14)

  

아군 : 국군 제 5사단 27연대

 

적군 : 북괴 공산당 제 12사단, 27사단

 

 


금강상의 마지막 봉우리인 가칠봉에서

 

펼쳐진 가칠봉 전투는 펀치볼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개시되었습니다.


5사단 27연대을 전력으로 1122m의

 

 김일성 고지를 중심으로한 가칠봉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피아 간 전선 거리가

 

 너무 가까워 대포병, 항공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로 개시되었습니다.

 


북한군은 견고한 진지와 고도의 이점을 통해

 

 고지를 지켰지만 육탄전을 불사한 공격에

 

결국 고지를 내줬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야습으로 고지를 내준 국군은,

 

 이후에도 육탄전을 반복하며 6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고지를

 

사수하며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북괴 1102명이 사살되고 250명의 포로가 잡혔지만

 

 아군도 전사 692명, 실종 437명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장의 능선 전투 (1951. 9. 13~ 1951. 10. 13)


아군 : 미 10군단 예하 제 2보병사단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적군 : 북괴군 6, 12, 13사단, 중공군 204사단

 


피의 능선 전투에 승리한 미 2사단은

 

다음 공격목표인 양구 북방 문등리의

 

894, 931, 851 고지로 이루어진

 

 능선을 공격했습니다.


처음에는 미2사단의 정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북한군 6사단의 강렬한 저항에 막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후 공격루트를 바꾸고

 

 기갑전력의 30만발에

 

 달하는 포격지원과 항공지원을 바탕으로

 

 반격해 1개월 간의 사투 끝에 931 고지를

 

 점령하며 전투를 끝냅니다.

 


이 전투를 보도한 종군기자가 부상병이

 

 "심장이 끊어지는 것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Heart Break Ridgeline이라는 호칭이 붙였습니다.

 


전투로 UN군은 3700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은 2만5000명에

 

달하는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 됩니다.. 

 


여담이지만 23연대 휘하로 참여했던

 

프랑스대대의 대원이 자신의 유골을 전우가 죽은

 

 단장의 능선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2007년 육군이 유언대로 뼈를 뿌려주었어요

 

 

 


백석산 전투 (1951. 9. 24 ~ 1951. 10. 1)


아군 : 국군 제 7사단, 8사단

 

적군 : 북괴군 12, 32사단

 

 


 

위의 전투들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고

 

백석산 일대를 수복하고, 단장의 능선

 

가칠봉 일대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이후 어은산에 대한 공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최초에 7사단이 32사단을 상대로

 

작전을 전개하여 1142고지를 탈취하였지만

 

 곧 반격을 받아 4일 만에 다시 후퇴하고

 

 

8사단이 뒤를 이어 공격을 개시하여

 

2일 만에 고지를 탈환했습니다.


전투결과, 아군은 전사 244명,

 

실종 14명을 포함 1423명의 피해를 입었고

 

 북한군은 1561명의 사살

 

포로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해 진지 강화에

 

 힘썼지만 곧 휴전회담이 진척을 보이며

 

전선은 안정화 되면서 양구일대의

 

주요고지전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됐습니다.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1951. 12. 25 ~ 1951. 12. 28)


아군 : 국군 제7사단

 

적군 : 중공군 204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