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6월 25일

 

 한국전쟁 66주년이네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같이 피흘리며 싸워준

 

고마운 한국전쟁 참전국에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사람들이 아는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국가들이 참전을 해주었어요..

 

 

 

천천히 하나하나 알아보고갈게요..

 

1.미국

 

 

참전인원 : 1,789,000 명

 

지상군 : 보병사단 8 , 해병사단 1 , 연대전투단 2 , 병력 302,483명

 

해군 : 극동해군 미 제7함대

 

공군 : 극동공군

 

전사/사망 : 36,940명 부상 : 92,134명 실종 : 3,737명 포로 : 4,439명 계 : 137,250명

 

올림피아 한국전 참전비 (Olym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워싱턴주 올림피아시 올림피아공원내에 위치해있습니다.

 

 1993년에 건립됬는데 여기는 2차대전, 베트남전쟁 참전비가

 

같이 모여있는 현충원 같은곳입니다.


 

 

 

 

 

2.영국

 

참전인원 : 56,000 명

 

지상군 : 보병여단 2 , 해병특공대 1  , 병력 14,198명

 

해군 : 함정 17척 (항공모함 1척포함)

 

전사/사망 : 1,078명 부상 : 2,674명 실종 : 179명 포로 : 977명 계 : 4,908명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비 (Memorial Garden at National Memorial)

 

영국 국립묘지 내 추모의 숲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시설은 2000년에

 

영국 한국전 참전용사회에 의해 건립됬습니다.

 

참전시설은 6개의 비석과 벤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석의 동판에는

 

각각 참전자 추모, 한국전 정보, 영국군대의 한국전에서의 활약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특히 눈에 띠는 조형물이 있는데 희생당한 병사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되면 조형물 뒤쪽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중앙의 브론즈 화환을 비춘다고 합니다.

 

 

 

3.오스트레일리아

 

 

 

 

참전인원 : 8,407 명

 

지상군 : 보병대대 2 , 병력 2,282명

 

해군 : 항공모함 1척 , 구축함 2척 , 피리킷함 1척

 

공군 : 전투비행대대 1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339명 부상 : 1,216명 실종 : 3명 포로 : 26명 계 : 1,584명

 

국립 전쟁기념관 한국전 참전비 (Australian National Korean War Memorial)

 

2000년에 호주 정부와 한국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고 캔버라에 있는 국립 전쟁기념관 내에 있어요. 

 

추모의 공간과 함께 12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벨리스크 벽면에는 6∙25전쟁 참전 전사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구요.

 

 한쪽에는 철제 봉이 꽂혀진 마당 위의 3명의 군인 형상물이 있는데,

 

 철제 봉은 빽빽한 숲의 험난한 지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운데 서 있는 군인 형상물은 실제 호주 참전군인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4.캐나다

 

 

 

참전인원 : 25,687 명

 

지상군 : 보병여단 1 , 병력 819명

 

해군 : 구축함 1척

 

공군 : 수송기대대 1

 

전사/사망 : 312명 부상 : 1,212명 실종 : 1명 포로 : 32명 계 : 1,557명

 

오타와 한국전 전사자 기념비(Monument to the Canadian Fallen)

 


오타와 정부청사 앞 광장에 위치한 캐나다의 이 기념비는 6∙25전쟁 참전자였던

 

Vince Courtenay가 디자인하고 한국인 유영문이 조각한 비입니다.

 

6∙25전쟁 참전용사와 정전 후 평화 복구를 위해 한국에 주둔했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건립됬습니다 . 상징물은 캐나다 군인이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잎을 든 한국 소녀를 품에 안고, 무궁화를 든 한국 소년과 함께 서 있는 동상이고, 

 

이 동상의 기단에는 전사자 51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는 캐나다의 용감한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5.네덜란드

 

 

참전인원 : 5,322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819명

 

해군 : 국축함 1척

 

전사/사망 : 120명 부상 : 645명 실종 : 0명 포로 : 3명 계 : 768명


 

생제르망앙레 한국전 참전비(Saint-Germain en Laye Korean War Menorial )

 

로테르담 시내에 위치해있고 1970년 UN에 의해 세워졌구요.

 

태극문양 아래 네덜란드 한국전 전사자 명단과 유엔마크,

 

네덜란드 참전부대 (NVDA) 마크가 새겨져 있습니다.

 

 

 

 

 

6.뉴질랜드

 

 

 

참전인원 : 3,794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389명

 

해군 : 프리킷함 1척

 

전사/사망 : 23명 부상 : 79명 실종 : 1명 포로 : 0명 계 : 103명

 

웰링턴 아오테아 한국전 참전비(A Heritage Memorial, Aotea Quay)

 

 

웰링턴에 있는 이 참전비는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군인회에서 2000년에 건립했습니다.

 

1749명의 뉴질랜드 군인이 유엔연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아오테아 선창가에서

 

승선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건데, 콘크리트 위의 발자국은

 

 

군인들의 출발과 귀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비문내용 : 1749명의 뉴질랜드 군인은 유엔연합군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이 항구에서 승선했다


 

 

 

 

 

7.프랑스

 

 

참전인원 : 3,421 명

 

지상군 : 보병대대 1 , 병력 1,185명

 

해군 : 구축함 1척

 

전사/사망 : 262명 부상 : 1,008명 실종 : 7명 포로 : 12명 계 : 1,289명

 

파리 한국전 참전비 (Paris Korean War Memorial)

 

프랑스 파리  제4구에 위치해있고 유엔에 의해 1989년에 건립됬습니다.

 

 프랑스 대대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인데 

 

한반도 지도 모형으로 제작된게 특징이에요.

 

프랑스 대대는 625 당시 프랑스가 UN 결의에 따라 파견한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입니다.

 

주로 미국 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어요.

 

뒷면에는 프랑스 대대 상징 마크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4개의 도로가 만나 이루어진 네모난 인도인데,

 

 도로명도 한국전 참전 프랑스 대대명 그대로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8.필리핀 

 

 

 

참전인원 : 7,420 명

 

지상군 : 보병대대 1 , 병력 1,496명

 

전사/사망 : 112명 부상 : 229명 실종 : 16명 포로 : 41명 계 : 398명


마닐라 리잘파크 한국전 참전 기념비

 

(Rizal Park Korean War Monument & Filipino-Korean Soldier Monument)

 

2010년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한국 필리핀 수교 60주년기념회 등에 의해 건립됬습니다.

 

마닐라시 리잘공원에 위치하고 있고 조형물은 1명의 군인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됬는데 한국과 필리핀의 우호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조형물과 곡선의 철제 조형물로 이루어져있어요

 

 

 

 

9.터키 

 


참전인원 : 7,420 명

 

지상군 : 보병여대 1 , 병력 5,455명

 

전사/사망 : 741명 부상 : 2,068명 실종 : 163명 포로 : 244명 계 : 3,216명

 

이스켄데룬 한국전 참전비(Iskenderun Korean War Memorial)


 

터키 정부에 의해 1953년 건립됬고 이스켄데룬시 공원에 위치하고 있어요

 

 터키 770명의 6∙25전쟁 전사자(건립당시)를 추모하고 있는 기념비에는 추모의 글과

 

 

전사자 명단이 적혀 있으며, 가족과 작별하는 군인의 모습 등 부조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문내용 : 신성한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의 영웅적인 군인들을 기리며


 

10.태국 


 

참전인원 : 6,326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2,274명

 

해군 : 프리킷함 7척 , 수송선 1척

 

공군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129명 부상 : 1,139명 실종 : 5명 포로 : 0명 계 : 1,273명

 

방콕 참전협회 한국전 참전비(Bangkok Korean War Memorial)


 

대한민국 정부가 1982년에 건립한 태국 방콕에 위치한 참전비에는

 

 

 추모의 글과 함께 유엔군과 태국 국기, 태극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비문 내용 : 태국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유엔 연합군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한

태국 군과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사하신 138명의 용감한

태국군인을 추모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한다


 

 

 

11.그리스

 

 

 

참전인원 : 4,992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263

 

공군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192명 부상 : 543명 실종 : 0명 포로 : 3명 계 : 738

 

파파고스 한국전 참전비 (Monument of Greek soldiers fallen in the Korean War)


그리스 파파고스에 위치한 이 참전비는 2003년 대한민국 정부와

 

그리스 국방부에 의해 건립됬었어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4개 기둥의 참전 기념물로

 

가운데 기념비의 동판에는 고대 그리스 역사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고,

 

양쪽의 기념비에는 186명의 그리스 전사자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12.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인원 : 826 명

 

공군 : 전투비행대대

 

전사/사망 : 34명 부상 : 0명 실종 : 0명 포로 : 9명 계 : 43

 

케이프타운 한국전 참전비(Cape Town War Memorial)

 

남아공의 6∙25전쟁, 1, 2차 세계대전 참전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시설로

 

 1924년 처음 건립됬는데, 1959년 625 참전비가 추가됬어요.

 

기념비 상층부에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고 기념비 중앙에는

 

전투 중인 군인의 모습이 담긴 동판 부조물이 있습니다.

 

기념비 하단에는 625전쟁 전사자에 대한 추모문이 새겨져 있어요.

 

 


 

 

13.벨기에

 

 

 

참전인원 : 3,498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900

 

전사/사망 : 99명 부상 : 336명 실종 : 4명 포로 : 1명 계 : 440명

 

 

국립대성심성당 한국전 참전 기념물(Campaign For Peace, Nationale Basiliek)

 

벨기에 국립대성심성당은 브뤼셀 시모니스에 있는 곳인데 1996년 벨기에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성당안에 건립했어요. 브뤼셀 국립 대성심성당 안에 설치된

 

625전쟁 참전 기념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9개의 유리창을 3개 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어있고,

 

 전쟁을 상징하는 야간 순찰대, 희망과 평화의 비둘기가 한반도 위를 나는 모습,

 

그리고 한국의 풍경이 각각 유리창 3개씩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4.에티오피아

 

 

 

참전인원 : 3,518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271명

 

전사/사망 : 121명 부상 : 536명 실종 : 0명 포로 : 0명 계 : 657

 

 한국전 참전 기념탑(Ethio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Monument)

 

에티오피아의 참전 기념시설은 에티오피아후원회, 춘천시와 함께

 

국가보훈처에 의해 2006년에 건립됬는데 625전쟁 참전 기념탑,

 

에티오피아 122명의 위패, 참전용사회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탑은 625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부상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춘천시 공지천에 세웠던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과 동일한

 

 모양과 규모로 춘천시가 아디스아바바 현지에 제작, 건립한거에요.

 

 


 

 

15.콜롬비아

 

 

 



참전인원 : 5,100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068명

 

해군 : 프리킷함 1척

 

전사/사망 : 163명 부상 : 448 실종 : 0명 포로 : 28명 계 : 639

 

보고타 한국전 기념비(Bogotá Korean War Memorial)

 

보고타에 위치한 기념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73년에 건립됬습니다. 

 

보고타 군부대 내에 위치한 이 기념비는 석가탑과 같은 모양과 재질로 만들어졌는데

 

 625전쟁 참전 당시 콜롬비아군이 배속되었던 미 24사단 사단장의 콜롬비아 군인의 용맹성을

 

 찬양한 비문과 함께 전사자 213 명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어요.

 

주 콜롬비아 신임 한국 대사가 취임하거나 625전쟁 기념식을

 

가질 때 헌화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습니다.

 

 


 

16.룩셈부르크 

 

 

 


참전인원 : 83명

 

지상군 : 보병소대 1 , 병력 48명

 

 

전사/사망 : 2명 부상 : 13실종 : 0명 포로 : 0명 계 : 15명

 

헌법광장 한국전 참전비(The Monument of Remembrance, Constitution Square)

 

룩셈부르크 헌법광장 내에 위치해있는데 황금여신상으로 불려요.

 

기념비 아래 부분에는 두 명의 룩셈부르크 군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조국을 위해 전사한 동료를 애도하는 모습을 표현한거에요.


 

 

이밖에도 의료 지원해준 나라들도 있는데요

 

인도. 노르웨이 . 덴마크 . 스웨덴 .이탈리아와

 

물자지원을해준 과테말라.미얀마.이스라엘.우루과이.코스타리카.도미니카.

 

이란.베네수에라.온두라스.파나마.독일.이집트.엘살바도르.파라과이.라이베리아.

 

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자메이카.파키스탄.월남임시중앙정부.리히텐슈타인.

 

시리아.일본.대만.페루.레바논.스위스.아이티.칠레.헝가리.모나코.아르헨티나.에콰도르

 

쿠바.교황청.멕시코.아이슬란드.오스트리아.캄보디아 등 고마운나라가 많습니다..

 

<사진자료:보훈처>

 

 

모두가 잊지않고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처및참고자료:구글.위키백과.국방부

 

 

 

 

 

 

 

미국이 전쟁할때 투입되는 첨단무기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

 

파병 때 우리가 알게 모르게

 

미국은 첨단무기들을 실전에 투입시켰어요.

 

이번엔 지금 2016년에 만약 실전상황이

 

벌어진다면 투입될 수 있는

 

 미국의 첨단무기들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1. B-2스피릿

 

가격 : 한화 약 2조원

 

다들 많이 알고 있는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 B-2 입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싼 2조원의 몸값을

 

자랑하고 있고 현재 괌에 전진배치 되어있어요.

 

15km 고도에서도 작전수행이 가능하고

 

총 22t의 무기를 내부에 탑재할 수

 

 있으며 전술핵폭탄과 MOP이라는

 

지옥까지 뚫고 들어가는

 

벙커버스터 폭탄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레이더에 탐지되어도 화면상엔 기러기

 

크기로밖에 나오지 않는 괴물입니다.

 

 

유사시 한반도에는 적 중요시설과 핵시설,

 

정으니벙커를 타격하게 될거라고 예상합니다.


B-2 스피릿에 더 자세한걸 알고싶으시면

http://kimssine51.tistory.com/61

 

 

 

 

2. F-22 렙터 

 

 

 

가격 : 한화 약 2000억원

 

이것도 다들 많이 알고있는 F-22 전투기입니다..

 

현존 최강  전투기로써 지구상에 1:1로

 

 F-22를 이길 수 있는 전투기는 없어요.

 (예외가 있다. 뒤에서 설명할게요)

 

 미 해군/ 공군 주력기들을 상대로

 

 모의전투 결과 144:0 이라는

 

 외계인급의 격추비를 보여줬습니다.

 

 

 

북한전투기들은 아마 하늘에서 

 

이녀석들 얼굴도 못보고 격추당할겁니다.

 

기본적으로 스텔스기이며 레이더에는

 

거의 까마귀 정도 크기로 나타납니다.

 

오키나와 전투기지에

 

전진배치되어있고 유사시에

 

한반도 제공권 장악 및 중요시설

 

 폭격임무를 맡고있습니다.

 

 

F-22렙터에 대해 더 자세한걸 알고싶으시면

 http://kimssine51.tistory.com/56


 

 

 

 

3. EA-18G 그라울러  

 

 

가격 : 한화약 1400억원

 

해군 주력기 FA-18F 수퍼호넷을

 

개조해 만든 전자전기 그라울러입니다.

 

 EA-6B 프라울러의 대체기로

 

전자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전시에는 적의 레이더 기지의 파악,

 

레이더와 방공미사일 기지 무력화,

 

대레이더 미사일로 레이더기지

 

파괴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냐면 F-22와

 

모의 공중전을 치뤄서 F-22를 격추시켯습니다.

 

어떻게 격추했냐면 먼저 전파방해로

 

랩터의 레이더를 피해 접근했고

 

랩터가 쓰는 미사일 유도시스템과 레이더를

 

무력화 시킨다음 요격시켰어요.


 

 

 

그래서 랩터를 격추한 521호기에 

 

보는봐야같이 F-22의 킬마크가 그려져있습니다.


 

 

 

  4. F - 35 Lightning II

 

 

 

가격 : 한화 약 1400억원

 

많이들 알고 있는 우리나라가 갖게될

 

5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 라이트닝 입니다.

 

명칭의 유래는 미국의 P-38 라이트닝과,

 

공동개발국인 영국의 BAC 라이트닝으로써,

 

이 두 기종 모두를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Lightning II가 되었습니다.

 

 

 

개발부터 완성까지 잡음이 많았던 전투기이지만

 

 F-35B 해군형이 처음으로

 

 미 해병대에 실전배치가 되었습니다


 

 

 

 

F-22만큼은 아니지만 강력한 스텔스 기능과

 

공대지, 공대공 전투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전경험을 쌓게될 것 같습니다.


 

 

 

  5. X - 47B

 

 

가격 : 한화 약 1조 5천억원

 

 X-47B는 미해군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스텔스 무인전투기입니다.

 

근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양산은 안할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항공모함에서 이착함 테스트,

 

공중급유 테스트까지 모두 마치고

 

 비행능력이 검증된 X-47B가

 

이렇게 폐기시킬까요..

 

만약 전쟁이 터지면 미국은 추가로

 

 데이터 수집을 하려고

 

 실증기 2대를 몰래 작전에

 

투입할거라고 믿고있습니다.


 

 

 

<날개가접히는X-47B >

 

이 비행기의 임무는 2개의

 

내부 무장창에 2,000kg의 무장을 싣고

 

 적진 깊숙히 들어가 목표를 타격하는 것입니다.

 

후속기는 얘보다 더 싼가격으로 현재 개발이

 

진행중이며 2022년도에 배치가 된다고 합니다.


 

 

 

 

   6. RQ - 180

 

 

가격 : ?

 

미공군의 무인스텔스 전투기 RQ-180입니다.

 

현재 외부로 공개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공개된것도 이란넘들이 RQ-170

 

센티넬이라는 무인스텔스기를

 

 납치(GPS 교란을 통해 자신들의 기지에 착륙시킴) 해서

 

그 후속기의 정보가 공개된 것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재 비밀리에

 

비행성능과 작전능력을 테스트 하고

 

 있으며 실전배치 전 까지는

 

공개가 안될 거라고 합니다.

 

전쟁나면 한반도에 들어와 실컷 실전 수행 능력을

 

테스트하고 갈거라고 생각됩니다.


  .

 

 

  7. Phantom Ray

 

 

가격 : ?

 

미공군의 무인스텔스 제공전투기

 

팬텀레이입니다.

 

X-45C 라는 무인전투기의 후속 버전으로

 

 랩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인기는 유인기와는 다르게

 

조종사가 없어서 엄청난 급기동과

 

고(高)각기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인기를 유인기가 이기기 힘듭니다.


 

 

 

 

 

 

제공권 장악 임무와 주요시설

 

폭격 임무를 수행합니다.

 

 

 

   8. Zumwalt Class Destroyer DDG - 1000


 

가격 : 한화 약 5조원

 

미국국 첨단무기의 끝판왕

 

미 해군의 줌왈트급 스텔스 구축함

 

DDG-1000 입니다.

 

 이미 1호기가 일본에 전진배치 되어있습니다.

 

가격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국방예산의 1/7 수준입니다.

 

스텔스 성능이 어느정도냐 하면

 

함포까지도 스텔스 성능 향상을 위해

 

숨겨놓아서 레이더에는 꽃게잡이

 

어선 정도로 표시된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녀석은 알레이버크급

 

미국 이지스 구축함 보다

 

긴 182m 선체를 가지고 있고

 

 만재배수량이 무려 1만4000톤입니다.

 

토마호크 미사일과 SM-3 탄도미사일 요격 미사일,

 

 ESSM 대공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으며

 

62구경장 155mm  AGS(Advanced Gun System) 

 

함포 2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함포 성능이 너무 좋아서

 

일반탄으로도 41km 까지 발사 가능하고

 

 LRLAP 탄을 쓰면 140km~180km 까지

 

 타격 가능하다고합니다.

 

한반도에 유사시 일본에서 서해로

 

올라와서 엄청난 화력지원을

 

해줄거라고 생각됩니다.

 

 

 

 

 

이상 갈수록 발전하는 미국의 첨단무기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미국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전쟁당시 미국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낙동강방어선전투[ 洛東江防禦線戰鬪 ]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습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워커장군>

 

잠시 미8군 초대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에대해 알아보고지나갈게요.

 

워커 장군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여기에 있겠다."

(I will stay here to project Korea until my death.)

 

라고 결의하고 융단폭격 등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대한민국의 최후보루였던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여 인천상륙작전,

 

 38선돌파 등 북진의 승기를 잡았기에

 

오늘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도록 한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그는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서 북진 중에

 

있을 때 보좌관(중령)과 함께 중부전선으로

 

 이동 중 서울시 도봉구 도봉1동 596-5 앞

 

도로에서 1950.12.23.10:45 교통사고

 

(가해자 한국군 6사단 2연대 소속 박경래;1924년생)로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UN군 장병들의 고귀한 짧은 삶을

 

 높이 평가하고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바로 낙동강 1차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전력이 부족한 국군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

 여겨 8월 11일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여긴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의 각오로 싸웠다>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을하였어요.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습니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

 

·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다부동전투[]

워커 미8군사령관은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군부대를

 

왜관 북쪽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워커 장군이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왜관 북쪽

 

미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서부 지역과 국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고리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지역의 국군이 무너지면 미군마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대구 북방 산악지대에서는 국군1사단과

 

북한군 사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난타전이 벌어졌습니다.

 

 1사단의 방어전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는데,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해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사전에 주 저항선으로

 

선정됐던 주요 고지군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선점해 버린 유학산 등지를 탈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위기의 순간이 많았으나,

 

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으로 결국 전선을 지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장군>

 

마침내,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였습니다.

 

 

 

 

제1사단은 주 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彼我)

 

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어습니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습니다.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낙동강전선에서 죽은 북한군의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로 징집한 젊은이들이었다고전해집니다. 

 

<강제로 징집된 의용군>

 

다부동전투는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 장교 중 일부는 유사시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국군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수많은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부동전투 과정에서 국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병력 부족으로 인해 학도병도

 

 자원 참전을 하였습니다.

 

<6.25전쟁당시 학도병>

 

남한 국토의 90% 이상이 이미 점령된

 

상태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운 국군과 미군, 학도병들이 아니었다면,

 

<영화 " 포화속으로"中 학도병>

 

한국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고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합니다.

 

 

 

 

 

 

 

영천전투[ ]

 

영천지역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의 9월 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을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의 공방전을

 

통해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전투입니다.

 

 

<7사단칠성부대.8사단오뚜기부대마크>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 및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어요.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영천에서의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을 해왔어요.

 

이에 따라 국군은 방어선이 취약하여

 

분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의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천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해 병력을 운용하였어요.

 

 

 <1사단과 6사단청성부대마크>

 

 2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9월 10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였어요.

 

 제8사단과 제7사단을 작전계획에 따라 배치하여

 

 남, 서, 북쪽의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적 제15사단의

 

전차 및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3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적 제2군단에 맞서 국군은 제8사단과

 

 제7사단 및 추가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습니다.

 

 

 

 

이러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구글

 

 

 

 

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의

 

명작전중 손꼽히는 작전 

 

코드네임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

 

작전인천상륙작전에대해 써볼게요.

 

우리민족 최대의 격변이었던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몰아붙히며 끝날것처럼

 

보였던 전쟁이 뒤집어지게 만든

 

역사적인 작전이 천상륙작전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는 해병대>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북한군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됩니다.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칠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타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어요.

 

 <그당시 낙동강 전선>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지경이었다고합니다.

 

<맥아더장군> 

 

 

 맥아더장군은 전쟁 직후 한강에

 

이르러 전선을 시찰할 때 구상했었던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이 후보로 있었습니다.

 

전북 군산으로 상륙작전을

 

감행 할려고 했으나

 

 극동사령관겸 태평양 사령관이었던 멕아더 장군은

 

 적의 심장부에 가까운

 

인천상륙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작전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최종 검토과정에서 유엔군 총사령부의

 

상부기관인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은

 

 큰 모험이라고 하면서 작전하기에 훨씬 안전하고

 

 또 성과가 확실시되는 군산으로

 

 상륙하라고 종용하였습니다.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과 해군 및

 

 해병대 장교들 사이의 중론은

 

인천상륙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인천은 세 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이어서 작전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수·간만·지형 등 자연조건도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의 험준함

 

1.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의 수치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적의

 

 반격시 탈출하기도 힘들다.

 

2.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3.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

 

4.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5.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디에프상륙작전 아픔은 2년 후

 흔히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일컬어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안이함으로 인해 겪은 아픔은 너무 컸다>

 

6.썰물이 되면 선박이 통행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일부 참모는 과장삼아

 

"성공율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했던겁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았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불리한 점 때문에 공산군도

 

인천 일대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며,

 

따라서 그 허점을 찔러 기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던거죠.


또한,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어서

 

 유엔군이 한번 경인지구를 장악하게 되면

 

 북한 공산군의 병참선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어요.


미합동참모본부의 수뇌들은 인천상륙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현지 야전 지휘관에게 최대한의 작전 재량권을

 

 부여해 주는 미국 군부의 오랜 전통과,

 

대일전(對日戰)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원수에 대한 신망으로 인하여,

 

그의 계획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승인하게되었던겁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습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습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어요.

 

 그리고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어요.

 

<서울시가지전투중인 제1해병사단 병사>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을 차출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습니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입니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입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하였어요.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로 하여금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상륙작전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일이 있으며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진행하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한/미 해병대가

 

처음 상륙했을때 당장 인천 일대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밖에 없었던겁니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에 제거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어요.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그렇게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거였죠.

 

<함포사격중인 전함>.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습니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어요.

 

제1단계(월미도상륙) :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을하였고.

 

새벽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합니다.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어요.

 

오전8시 월미도를 점령하고

 

오전 11시 15분 소월미도까지 점령을합니다.

 

 

<F4U 콜세어 >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하엿고.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습니다.

 

 

 제2단계(레드비치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합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는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습니다.

H-아워 8분 전에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어요.

해병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습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적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고합니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제5연대는

 

인천 시가지 소탕, 해안 경비를

 

맡으며 작전을 진행해갔습니다.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전략으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습니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인천항의 주요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고

 

 인천항의 도크를 확보하였으며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엔군과 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히 성공시켰습니다.

이 때 총 지휘는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고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고.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천은 다음날 아침까지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북한군의 이렇다 할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 결과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어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인천상륙작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버금가는 

 

성공적인 작전이엇습니다

 

이후 멕아더 장군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인

 

한만국경을 원자탄으로 공격하자라고

 

 했지만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못 마당하여

 

멕아더 장군을 미국 본국으로 소환하게 됩니다

 

<트루먼대통령>

 

인천상륙 작전에는 미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금은 월미도가 섬이 아니지만

 

 그당시는 섬이었으며 인천의 월미도에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고 

 

우리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그당시 인천을 향하여 수하늘이 검은 연기로

 

안보일 정도로 많은 함포 사격을 감행하고

 

 북한군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고

 

인천에 상륙했다라 합니다^^

 

6.25전쟁에 가장 위대했었던 작전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조금있으면 개봉하는 인천상륙작전 영화도 꼭 보러가고싶네요..

 

 

참고 및 출처:위키백과.두산백과.한국민족문화대박과.구글

 

핵무기는 핵분열이나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각종 시설을 파괴하는 무기이며, 

 

잘못 이용하면 전장에서 사용되어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며

 

 각 대도시를 파괴하기도 하는

 

 아주 무서운 무기입니다..

 

현재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공인받은 국가는 5개국이며,

 

사실상 핵무기 보유가 확실한 국가는 4개국,

 

핵무기를 포기한 나라도 4개국이 있습니다.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공인받은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이 5개국이 있습니다.

이 5개국은 모두 최소 200기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중이고

 

실용적인 무기로 사용할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국가들이에요.

자그럼 이 5개 국가가 가진

 

핵을 알아보도록 하죠.


1. 미국


 

 

 

 

미국은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핵을

 

보유하고 있는 핵강국입니다.


 

 

미국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때

 

 인류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일본에게 딱 두발을 투하해

 

약 8만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은 총 74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중 2014년 기준 진짜 보유중인

 

핵탄두는 4650기이고 해체 예정

 

 퇴역 핵탄두는 2700여기입니다.


 

 

 

 

 

미국 핵무기의 중심은

 

미니트맨 III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미니트맨은 미국이 보유한

 

 유일한 지상발사형 ICBM이고,

 

현재 배치된건 1970년대에 개량된

 

 아주 오래 굴려지고 있는 무기입니다.


최고 속도 시속 24,100k, 항속 거리 13,000km에

 

달하고 만약 무기로 쓰인다면

 

 공격대상을 파멸로 만들수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입니다.


미국은 이 미니트맨을 450기 정도 보유하고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은 1972년

 

 러시아가 전략미사일 잠수함인 델타-I를

 

 취역시키자 이에 맞서 대항하기 위해 개발되었고,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이기도 했습니다. 


2개의 스팀터빈과 1개의 가압수로형 원자로가 탑재되있고,

 

트라이던트-2를 24발이나 적재할 수 있어요.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은 약 14척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트라이던트2 D-5 SLBM는 정확도가 높기 때문에,

 

 간단하게 보복 공격으로

 

 도시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적 ICBM의 사일로에

 

 대한 공격에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사거리는 약 6천해리고,

 

사실상 지구 어디든지 핵보복이 가능합니다


트라이던트2 D-5 SLBM는

 

약 336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 76대, 

 

B-1 전략폭격기 93대, B-2

 

전략폭격기 18대를 보유하고 있어서

 

 핵폭격도 쉽게 가능합니다.


 

 

 

 

 

GBI, 사드, SM-3, ABM, 레이저 요격시스템등의

 

MD전력도 완벽구비되어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지스함 80여척, 공격핵잠 60여척, 핵항모 10여척 ,

 

 

 

 전투기 수천대에 탑재된 순항미사일,

 

정밀유도폭탄, 자유낙하폭탄

 

등으로 공격대상을 손쉽게 초토화시킬수있어요.



 

 


 

 

 

 

2. 러시아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핵강국입니다.

 

2014년 기준으로 약 8500개의 핵탄두를 보유중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시절부터 쌓아올려온

 

핵무기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요.


또한 각종 다양한 미사일, 전략폭격기,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최대의 ICBM라 불리는

 

R-36도 58기도 배치되어있으며


 

 

 

 

 

사거리가 1만km에 달하는 UR-100N 136기도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거리가 1만 500km에 달하는

 

RT-2UTTH 차량탑재형도 144기나 보유중입니다.


 

 

 

 

소련 붕괴후 러시아가 최초로

 

개발한 ICBM인 RT-2UTTKh도

 

사거리가 1만 1천Km나 된다고합니다.

 

그 외에 RT-2UTTH 78기(사일로랑 차량탑재 합친양)랑 

 

RS-24 18기 등을 보유하고 있고,


러시아가 보유한 ICBM의 수는

 

434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또한 SLBM와 원잠도 갖추고 있는데,

 

러시아가 보유한 SLBM의 양은

 

204기라고 합니다.


보레이급 원잠은 SLBM 12기를

 

탑재할수 있을 정도이고, 2척이 건조되어있습니다.


 

 

 

 

지구의 절반을 날려버릴수도 있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인 타이푼급도

 

 당연히 탑재가 가능한데,

 

20기나 탑재가 가능합니다.


 

 

 

델타4급, 델타3급 핵잠도

 

각각 12기씩 탑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전략폭격기는 TU-160 블랙잭 폭격기 14대, 

 

TU-22 백파이어 폭격기 93대,

 

 

TU-95 베어 폭격기 63대를 보유하고 있어

 

 핵폭격이 가능합니다.


 

 

 

 

A-135라는 탄도 미사일 방어시스템도 갖추고 있고,

지대공 미사일 53T6 63기,

 

51T6 16기를 보유중입니다.


이외에도 러시아군은 공격 핵잠수함 수십척,

 

전투기 수천대에 탑재된 순항미사일,

 

정밀유도폭탄, 자유낙하폭탄 등을

 

통해 핵공격이 가능합니다.


 

 

 

 

3. 중국

 

 

중국은 핵탄두 250개로 UN 상임이사국 중에서는

 

 영국에 이어 꼴지에서 두번째에요.


중국은 1962년부터 개발을 추진했고,

 

2년만인 1964년 고비사막에서 핵실험을 성공했습니다.

 

 1967년에는 수소폭탄의 개발에도 성공했어요,

 

 

 

 

중국은 둥펑 미사일 DF-31A 30기와

 

 DF-5 24기를 보유하고 있고

ICBM은 총 54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잠과 SLBM으로는 094형 진급 핵잠수함 4척과

 

 XIA급 핵잠수함 1척, JL-2 SLBM 60기가 있어요.

 

(여담으로,2009년에 JL-2를 수중에서 발사했는데

 

수면을 벗어난 직후 점화가 안 되어

 

물속에 있던 발사 잠수함 위로 떨어져서 미사일을 맞은

 

 골프급 잠수함이 침몰할 뻔한 사건도 있습니다)

 

또한 IRBM으로는 DF-3A (사거리 3000km) 20기, 

 

DF-4 (사거리 5400km) 20기,

 

 DF-21 (사거리 1750km) 95기를 보유하고 있고

SRBM, 순항미사일으로는 DF-15 (사거리 600km) 400기,

 

 DF-11 (사거리 300km) 750기, 

 

CJ-10 (사거리 1500km) 500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4. 영국

 

 

 

영국은 UN 상임이사국 5개국 중

 

가장 적은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225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은 1946년부터 독자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우선 핵잠으로는 영국 유일

 

핵잠인 뱅가드급 4척이 있어요


수중 배수량은 17,560톤이고, 

 

10개의 핵탄두를 장착한 트라이던트

 

미사일 16발을 탑재하여,

 

총 160개의 핵탄두 발사능력을 갖췄습니다.

 

 

 

영국의 유일한 핵전력은 트라이던트2 D-5 SLBM 뿐인데

 

총 64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5. 프랑스

 

 

프랑스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3번째로 많은 핵을 보유중입니다..


프랑스는 300기의 핵탄두를 보유중이라고 해요.


드골은 1945년 10월, 핵폭탄의

 

개발을 비밀리에 명했고,

 

15년뒤인 1960년 2월 알제리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보유국이 되었어요!

 

 

프랑스는 르트리옹팡급 핵잠 4척과

 

 M45/M51 SLBM 64기를 보유하고 있어요

 

 

샤를 드 골급 핵항모도 1척 보유하고 있으며


 

ASMP-A 공대지 순항미사일 84기를

 

보유중이라고 합니다.



 

 UN 상임이사국 5개국은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핵무기 보유국이고 핵을 실용적인

 

무기로 만든 핵강국이에요

.

 다른 핵개발국은 이들처럼 아직 핵무기를

 

완벽하게 실용적으로 만들지 못한다고합니다.


<참고사진>

 

 

출처 : 구글.나무위키.네이버캐스트 

 

 

 

안녕하세요 오늘은 2016년 세계 군사력 순위

 

에대해 알아볼꺼에요..

 

일단 전체적순위(육군.해군.공군)

 

살펴보려구하는데요 ...

 

자료는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 ( GFP ) 가

 

 집계한 국가별 군사력 순위로

 

1위부터 4위까지는 2013년부터 쭉

 

변함없이 그대로라고합니다.

 

 

 

 

자자 후딱 시작할게요 ! 재밌게 봐주셧으면 좋겟어요.

 

 

 

 

2016년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 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

 

 

경제력 1위, 육군 1위. 해군1위. 공군1위 ....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정말

 

초강대국 미국이 당연히 1위입니다...

 

 

<전세계 공군력의 54%라는 미국의 힘>

 

<우주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미국 전투기 저장구역>

 

 

 

 

 

 

2위 : Russia (러시아)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의 군사력이

 

경제력의 저하와 함께 상당히

 

 약화되었다고하지만

 

소련시절부터 축적해온 각종

 

군사관련 자료들과 노하우드을 통해서

 

여전히 군사강국

 

2위자리를 지키고있어요^^

 

 

 

2000년대 중후반 들어오면서 군비증강에

 

다시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보여주고있구요

 

핵전력에서는 미국과 1~2위를

 

 다투는 강대국이죠.

 

인구수와 경제력,궁방비등에 있어서

 

 중국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거나 크게밀리기에

 

향후 또는 장기적으로 2위 자리를

 

중국에게 넘겨줄꺼에요..

 

 

하지만 국방개혁 2020을 통해서

 

3위 이상은 장기간 유지할것으로 보여요

 

 

 

 

 

 

3위 : China (중국)

 

 

 

1980년대부터 군현대화를 추진해왔었구요

 

1990년대부터 더욱 큰폭으로

 

 추진하기시직한 중국입니다.

 

2010년에 들어서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르면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국방비를 쏟아내고있는

 

강대국으로 거듭났어요...

 

수많은 연기인력과 경제력및

 

국방비를 통해서 전체적인 군사력과

 

군사과학기술이 생각보다 빠르고

 

강하게 성장되어가고있습니다..

 

 

 

모든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현재의 중국은

 

 기존강대국수준을 넘어서는

 

초강대국 반열에 들어설것으로 보여집니다...

 

 

 

 

 

 

 

 

4위 : India (인도)

 

 

많은 사람들이 인도가 못사는

 

나라라고 생각하시는분들이 많은데요...

 

실제로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5년기준 1,600달러뿐이 되지않는데요...

 

빈곤층도 워낙많아서

 

맞는 생각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인도는 2015년 기준 세계 명목 GDP 7위,

 

 구매평가력기준 GDP 4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국방비 등을

 

고려해보면 신흥강대국인것은 분명합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더불어 핵탄두를 보유한

 

신흥강대국이며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항공모함을

 

운용해온 나라에요.. 또한 아시아 국가들중에서는

 

 중국외에 원자력 잠수함을 보유하고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5위 : France (프랑스)

 

프랑스는 군비감축을 진행하는 추세이기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축적해온

 

군사관련 기술과 노하우가 뛰어납니다.

 

 

 

경제력 또한 상위 10위권 안에들어가고 공격원잠과

 

략원잠을 보유하고있는

 

군사력강국입니다^^

 

 

 

 

 

 

6위 : United Kingdom (영국)

 

영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군비감축을 진행하는 추세에요..

 

영국도 무시못한 기술력과 노하우를

 

갖추고있고 경제력도 받쳐주고있어요

 

 

 

미국에 영원한 형제의 국가 영국이

 

군사력순위 6위에 올라있습니다.

 

 

 

 

7위 : Japan (일본)

 

일본이 2016년에 7위로 뛰어올랐는데요..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범국가이지만

 

 군대를 보유하고있는 독일과는

 

달리 군대에 준하는 자위대를 보유하고있어요.

 

 

현재 일본은 세계 5위권 내에 들어가는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있구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핵탄두를

 

얼마든지 제조할수있는 강대국이죠..

 

 

 

 

 

8위 : Turkey (터키)

 

 

터키는 특별한 군사기술이나 자본력같은건

 

없지만 무기를 엄청 수입하는 나라에요..

 

그덕분에 군사력이 강력하다는거죠...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보다

 

위에있다는게 조금 놀랍긴합니다...

 

 

 

 

 

9위 : Germany (독일)

 

일본이나 터키보다 군사기술이

 

많이 앞선 독일이 군사력순위가

 

더 낮다는게 좀 의아하긴합니다...

 

독일은 세계 4위 경제대국이구요 높은

 

군사기술을 보유하고있는 나라입니다.

 

 

 

 

 

 

10위 : Italy (이탈리아)

 

 

이탈리아가 왜 우리나라보다

 

높은줄모르겠지만 이렇게 나왔네요..ㅎㅎ

 

 

 

 

 

 

 

이밖에 저희나라는 11위

 

북한이 25위에 올라와있는게 눈에 띄네요^^

 

 

출처 및 참고자료: GFP . 나무위키. 구글

 

 

AH-64 아파치란?


 

 

일단 아파치의 역사부터 알아보고갈게요

 

때는 베트남전 당시로 올라가요

 

당시에는 베트남전 전까지는

 

미 육군은 공격헬기에

 

관해 관심은 있었으나 필요성도

 

 못 느꼈으며 미 공군의 반대로

 

 인해 결국 무산되었어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베트남전

 

당시에는 보병이 뛰어다니는 일이 많아서

 

정찰헬기가 내려주면 알아서 작전 수행한 뒤

 

상부에 무전 날려서

 

어디 어디를 점령했다고 말하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전략이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헬리콥터는 착륙할 때가 가장 취약해서,

 

숲에 있던 베트콩들은 헬리콥터가

 

착륙하는 사이에 공격한 뒤,

 

숲 안에서 교전하는 전술을 썼어요

 

이에 대해 미군은 정찰헬기인 UH-1 이로쿼이 (휴이)를

 

공격형으로 개량한 UH-1C를 써요

 

<UH-1>


 

<UH-1C>

 

UH-1C는 장시간 체공을 위해

 

연료탱크의 용량을 크게 늘리고,

 

 피탄했을 경우를 대비해

 

이중 유압계통을 사용했어요.

 

 물론 엔진도 바꿨고,하지만

 

본래 정찰헬기로 쓰이던 놈이니까

 

 방어력은 물론이고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면 느려질 수밖에 없죠,

 

 더군다나 보병과 같이 다니면서 비교적 근거리에서

 

 교전하는 일이 잦다 보니 격추율이 높았어요

 

(물론 위력적이었지만 기체 형상의 문제로

무기사용 시 반동과 기체에도 무리가 많이 갔죠)


 

 

결국 미 육군은 공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공격헬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때, 공격헬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벨 항공사와,

 

 록히드 마틴의 경쟁이 일어났어요.


우선 첫번째 경쟁에서는

 

록히드 마틴의 승리했습니다.

 

 

 

 

 


AH-56 샤이엔

 

 

개발 시작은 1965년 첫 비행은

 

1967년 9월 21일이었어요

 

미 육군은 "오 괜찮은데? 너, 나와 계약해서

 

이걸 양산해라!"라며 양산계획을 잡아요

 

하지만 양산계획이 잡힌 뒤에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해서 결국 계획은 취소됐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수송헬기와의 운용 문제였어요

 

 록히드 마틴은 현대 공격헬기와 같이

 

강한 화력으로 적을 압도한 뒤 빠져나가는

 

 전술을 택했었어요,

 

미 육군은 수송헬기와 운용 가능한 호위용이었습니다.)

 

 

 

 



결국, AH-56이 취소된 뒤 미 육군이

 

눈독 들인 건 벨 사가 개발했던 AH-1이었어요

 

AH-1은 딱히 별 검증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왜냐구요?

 

그 이유는 AH-1은 양산 계획이 잡힌 뒤

 

 현장에 투입됐기 때문이에요

(AH-56이 양산될 때까지 임시로 쓰이는 기체 취급이었죠)

 

하지만 양산 계획이 취소되자 신뢰성도 좋고,

 

 성능도 좋은 AH-1을 그 자리에서 바로 채택합니다.

 

 



 

 

AH-1 코브라


 

 

 

이후 AH-1, 코브라는 개발된 뒤

 

전장에서 수 많은 베트콩들을 죽이고,

 

 구정 공세에서 MACV(당시 미군의 특수부대)

 

본부 방어에 많은 도움을 줬어요


베트남전 이후에도 많은 공을 세웠는데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이나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쓰였어요

 

각 전쟁 당시의 교환비는 당연히 코브라가 우세!


심지어 시리아군과의 교전 당시

 

기갑차량과의 교환비가 1:80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전투로 인정받으면서

 

두고두고 업그레이드 해가며

 

 다양한 나라에서 쓰고있어요


아무튼, AH-1은 각종 업그레이드를

 

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AH-64 아파치는 1981년에야 맥도널드-더글러스 사에

 

 의해 시제기가 만들어져서 첫 비행을 시작합니다

 

첫 실전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 침공 작전에서 겪었어요.

 

 

이후 1990년 8월 2일 걸프전에서 

 

500대의 전차,500대의 장갑차와

 

대공포 기지 30곳,포병기지 120곳을 쓸어버려요

 

이런 대단한 성능을 본 미군은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어

 

하지만 이런 대단한 성능에도

 

부족한 점이 있는 마련이죠

 

하지만 미군은 "나의 강력한 아파치는 약해선 안 된다!"라며

 

 개조를 하게됩니다

 

이후 생겨난 결과물이 AH-64D, 롱보우 아파치에요


 

 

 

 

 

저 위에 초코파이처럼 생긴 게 레이더에요

 

저 레이더는 약 8km 정도를 탐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A형(기본형)과 D형의 차이점은

 

 레이더의 유무 차이에요

 

하지만 이 레이더의 유무 차이는

 

 헌터-킬러 전술의 아주 뛰어난 강점이 될 수 있어요

 (헌터-표적 탐지역할, 킬러-표적 사살역할)

 

그리고 무장 중에 하나인

 

헬파이어 미사일과도 호환이 돼서 동시에

 

16개를 조준할 수 있기 때문에 순간 화력이

 

뛰어난 공격헬기입니다.


무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파치의 무장은

 


30 × 113mm 체인건 1문 (탄환 약 1200발 적재가능)

 

히드라 70 혹은 CVR7 공대지 로켓

 

AGM-114 헬파이어, AGM-65 메버릭, AIM-92 스팅어,

 

 AIM-9 사이드와인더 혼용


이렇게 사용해요!

 

이상 전투헬기 아파치에 대해 알아봤어요^^

 


 

6.25전쟁 발발직후 우리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이유가

 

 바로 북한의 전차부대때문이라는건 전쟁에 관심없는 많은분들도 알고있으시죠.

 

 그럼 오늘은 이토록 "무서웠던" 북한군 전차의 현재 운용수량, 제원등을 한번 알아볼게요 

 

 


먼저, 북한군 전차는 크게 4종류가있어요. T55,천마호,폭풍호,선군호입니다.

 

이들의 수량은 총 4000여대 가량으로, 국군의 전차수량보다 1700대정도 많아요.

 

하지만 지금부터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큰 위협이 되지않는다는걸 알수있게될거에요!.

 

 


T55

 

 

북한의 양적주력, 2000여대 가량을 운용하고있어요. 

 

기본적으로 1947년도부터 생산된 1세대 전차이고, 소련이 북한한테 대량으로 공여해준거에요.

 

100mm포를 장착하고있어서 개발당시에는 서방권 전차들을 보는족족 격파시킬수있을줄알았으나,

 

실상은 서방권의 90mm포에비해 명중률이 매우떨어지고, 위력도 별 차이가 없었고,

 

 방호력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몇십년도 전부터 동네북취급당하고있어요.

 

 

전면장갑은 200mm 정도로, 한국군의 K21의 40mm기관포한테도 전면장갑이 관통당합니다

 

 

 

 

-Type59

 

중국이 T55를 베껴서 만든전차입니다. 기본적인 사항은 T55랑 동일한데,

 

야간작전용 적외선 서치라이트와 주포안정장치가 빠져있어서

 

 쓰레기취급받는 T55보다도 더 못한전차에요.

 

북한은 이 전차를 약 175대 보유중인걸로 추정됩니다.

 

 

 

 

 

천마호(T-62)

 

 


 

 

<천마호 마형>

 

천마호는 북한이 소련의 T-62전차를 카피,개량한 전차에요.

 

북한군 최초의 2세대 전차이고, 1000대이상 운용중이라 개량형도 많은데,

 

 가~바 형까지 개량형이 있어요. 천마호 가 형은 T-62랑 동일하고,

 

 

<천마호 가형> 

 

 

나 형부터는 점차 개량되어 마지막 마 형정도되면 본판인 T62모습을 찾기힘들정도입니다.

 

그러나, 원판불변의 법칙으로 여전히 별로 성능이 좋지못해요.

 

 

 

천마호는 115mm활강포와 14.5mm KPVT 대공기관총, 7.62mm PKT 동축기관총을 장착하고있습니다.

 

 대공기관총은 특이하게 다른 동구권 국가들처럼 12.7mm를 쓰지않고 14.5mm를 사용하는데,

 

이는 북한의 낙후된 대공전력때문으로 추정되고있어요.

 

<천마호 바형>

 

 

 

 대공화기가 충분치않으니, 전차에도 대구경 기관총을 달아서 헬리콥터 등에

 

대해서 최소한의 생존성을 보장할수있게만들겠다는 노력인거죠. 


천마호의 방호력은 개량형마다 다르지만, 240-350정도라서,

 

초기형의 경우 한국군 M48a4k패튼의 90mm 포에도 생존성을 보장못해요.

 

우리국군에선 낡아서 거의다  퇴역한 전차가 북괴군에선 1000대이상 운용하는전차보다

 

비슷하거나 좋다고해요 !

 

 

 

폭풍호

 

 

 

폭풍호는 천마호 개량형을 바탕으로만들어진 전차이고, 약 500여대가 운용중인 북한군에서 비교적 신형이에요.

 

물론 2세대 전차라는점은 변함없어요.

 

대충보면 천마호 마 형과는 구별이 잘 되지않을수도있는데, 이녀석은 차체가 달라요.

 

기존 T62계열의 차체를 바탕으로 길이를 좀더 늘려서,

 

좀더많은 하중을 버틸수있게하고 공간도 넓혀놓았습니다.

 

천마호는 보기륜이 5개, 이녀석은 보기륜(바퀴)이 6개구요. 거기다가

 

포탑 뒤쪽이 좀더 튀어나와서 구별이 가능해요.

 

거기다가 장갑재와 사격통제장비 등을 개량하여 좀더 좋아졌다하는데

 

북한군 전차의 정보는 워낙 제한적이라 자세하게 뭐가 어떻게 좋아졌는지는 확실치않아요.


2000년대 들어서 생산된 이녀석은 115mm활강포와 14.5mm KPVT 대공기관총,

 

 7.62mm PKT 동축기관총을 장착하고있습니다. 천마호와 별다를게 없어요.

 

2000년대 생산된 전차와 1960년대 생산된 전차가 화력에서 별 차이없다는거에요

 

무게는 39t가량, 최고속력은 60km. 엔진은 800마력 이하로 추정되고, 방호력은 450mm 이하로 알려져있어요.

 

현대 전차와 비해서는 매우 뒤떨어지는 방호력입니다. 

 

 

M48/K1 전차의 105mm탄에 구멍이송송나는거죠

 

폭풍호도 마찬가지로 개량형이있는데

 

기존 폭풍호에다가 SA-16 이글라 지대공 미사일과 9M111 (AT-4) 대전차 미사일 2 개를 얹었어요.

 

 이글라 지대공 미사일도 14.5mm기관총과 마찬가지로 부족한 북한의 대공전력을

 

조금이나마 보완하기위해서 올려놓은거고, AT-4대전차미사일도 영 좋지않은 주포의

 

화력을 보조하기위해서 설치한거에요. 돈이없어서 어쩔수없이 하는거죠.


 

 

선군호

 

 

 북한군의 최신전차인 선군호입니다. 

최신전차라고 해봤자 T62계열이고, 2.5세대에요

약 4-500여대가 배치되어있는것으로 알려져있고

북한군이 가지고있는전차중에 가장 성능이 좋은 전차에요

포탑이 기존 전차들에 비해 대형화되어서 방호력과 거주성이 향상된것으로 추정되고,

차체전면 글라시스에 반응장갑을 붙여서 방호력을 증가시켰어요.

 그러나, 포탑이 대형화된것에 비해 무게는 5톤정도밖에 증가하지않은 44t이라,

 방호력은 크게 향상되지않은것같아요. 전자장비쪽 개량에 중점을 두고 개발한듯합니다.


포는 115mm냐 125mm냐 많은 논란이있었는데, 아직도 확정된 바가 없어요.

신형탄을 사용해서 포탑이 커진듯보여요

그러나 115mm던 125mm던 국군전차에 큰 타격을 주지못하는건 변함없어요^^


스펙은 115mm활강포(혹은 125mm활강포), 14.5mm KPVT대공기관총, 7.62mm

PKT동축기관총, SA-16이글라 지대공 미사일이에요. 50년전이랑 무장이 변함없어요.;;

방호력은 450mm정도로 추정되고 최고속도는 70km/h , 엔진은 1000마력 정도로

폭풍호와 비교했을때 기동성이 상승했어요.

북한군의 최신전차라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K1전차보다도 못한성능이죠..


이 선군호도 개량형이있는데, 반응장갑을 포탑전면에 장착한 형태에요.

 북한기술력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기껏해야 보병의 대전차 화기에만 작동하는

기초적인 수준의 반응장갑으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북괴군의 전차는 국군의 K1/K1a1/K2의 전면장갑을 뚫을수가없어요.

그러나 모든 국군의 전차는북한군 전차를 쉽게 뚫어버릴수있죠.

 

 

 

 게다가 북한군 전차의 사격통제장비 등은

한국군에비해 한참 뒤떨어지는수준이고, 엔진기술도 매우 뒤처져있어요. 

국군의 M48계열은 북괴의 115mm포에 맞으면 관통이될수도있지만,

 곧 퇴역시킬예정이라 괜찮아요. 국군의 숫적 주력은 K1/K1a1시리즈이고

이 전차들은 북괴군 전차에 비해 몇십배는 뛰어난 전차들이니, 걱정안해도됩니다!!


 

 

 



 


 

 

 

 

 

 

정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MP5 기관단총에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전세계 특수부대의 상징, MP5 기관단총을 알아보죠

 

 


 

 

 

MP5A2 (Maschinenpistole 5)

 

 

 

종류 : 기관단총

 

개발국가 : 독일 (H&K 社)

 

사용국가 :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한국, 일본, 대만 외 상당수 국가

 

설계생산시기 : 1964년~66년

 

무게 : 2.54 Kg

 

길이 : 680mm

 

사용탄환 : 9 x 19mm Parabellum

 

장탄 수 : 15발 / 30발 박스탄창

 

유효사거리 : 200m

 

발사 속도 : 분당 800발

종류는 기관단총으로 "권총탄 등

 

약한 탄환을 연발로 발사하는

 

가벼운 무게를 가진 총기" 이다.

 

 

1966년, 생산이 시작된 이래 120여 종에

 

이르는 파생형이 존재하여

 

정확한 무게와 길이를 제시하기 힘든데

 

평균적으로 2.5 ~3 Kg 의 무게와 680~ 700mm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Maschinenpistole 5


독일어로 기관단총 5이며 제작사인

 

H&K 社에서 기관단총을 5로 표기하는 관계로

 

처음에는 HK54 (5: 기관단총, 4: 9mm 권총탄) 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으나,

 

MP5 기관단총이라 명명되었다.

 

 

전세계에 수많은 기관단총들이 존재하지만

 

MP5 기관단총은 현대 기관단총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성공한 원조이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국가의 군대,

 

경찰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Heckler & Koch (H&K)

 

 

헤클러 - 코흐 社 , 독일의 총기회사이다.

 

세계 3대 돌격소총이라 불리우는

 

독일군의 前 제식소총 G3 소총,

 

현 독일군 제식소총 G36소총과

 

전세계의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MP5 기관단총 등을 설계,

 

제작한 굉장히 유명한 회사이다.


 

 

9 x 19mm Parabellum

 

 

MP5 기관단총에서 사용되는 9mm 권총탄으로,

 

베레타, 글록 등 상당수 권총에서 사용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흔한 권총탄으로서

 

크기가 작고 공격력, 사거리, 관통력이 낮지만

 

 명중율이 높은 탄환이다.


 

 

 

 

MP18 기관단총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군에 의해

 

개발된 세계최초의 기관단총


 

 

MP40 기관단총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독일군의 기관단총

 

 

독일은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세계최초로 기관단총을 개발한 이래

 

2차 세계대전에서는 유명한 MP40 기관단총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영화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中에서)

 

 

당시의 기관단총은 오픈볼트 방식을

 

채용한 관계로 초탄 명중율이 상당히 낮았다.

 

(오픈볼트 : 방아쇠를 당기면 노리쇠가 전진해

 

약실에 탄을 밀어 넣고 폐쇄된 뒤

 

격발해서 발사하는 방식이다.

 

즉, 발사준비 상태에 약실이 개방되어 있고,

 

방아쇠를 당기면 노리쇠가 전진하며

 

 탄환의 뇌관을 쳐서, 격발시킨다.

 

 

오픈볼트 방식은 공이나 용수철 등

 

부품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 비용이

 

 절감되고 무게가 가벼우며,

 

무엇보다도 빠른 연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노리쇠가

 

 움직이기 때문에 명중율은 낮다.

 


 

 

(영화 <D-WAR> 中에서)

 

 

반대로 클로즈드 볼트 방식은,

 

 오픈볼트 방식과는 반대로 발사준비 상태에

 

 약실이 닫혀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면 노리쇠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공이만 움직여서 탄의 뇌관을 쳐서, 발사한다.

 

(M16 소총이나 K2 소총을 분해

 

조립하면 나오는 그 공이다.

 

 

따라서 내부부품이 적게 움직여

 

초탄명중율이 우수하지만,

 

오픈볼트 방식보다는 복잡하고 부품이 많아져

 

 가격과 무게가 올라간다.


 

 

1960년대, 서독의 국경경비대 (GSG-9)와

 

 경찰의 기관단총을 개발하게 된 H&K 社는

 

기존의 오픈볼트 방식에서 클로즈드 방식을

 

 적용한 기관단총을 설계한다.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한 군용 기관단총이 아닌,

 

 경찰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탄 명중율이 높은 클로즈드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G3A3 소총

 

M16, AK47 소총과 더불어 세계 3대 소총으로

 

 유명한 독일군의 前 제식소총

 

 

또한 H&K 社는 자사가 만든 G3 소총의 장점 몇가지를

 

 가져와 MP5 소총 개발에 접목시켰는데,

 

롤러 지연식 블로우백 시스템과 가늠자,

 

가늠쇠 부분이 채택되어 그대로 적용되었다.

 

 

1966년, 마침내 기관단총 역사에 엄청난 획을

 

 그은 대작 기관단총이 탄생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서독 국경경비대

 

(GSG-9)와 경찰에 채용되었지만,

 

비싼 가격으로 인해 그리스, 이란 등

 

일부 국가의 경찰 또는 경비 목적으로

 

소수가 판매되었다.

 

 

더군다나 자동소총이 실용화되면서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각국의 군대에서는

 

오히려 "그런거 왜 만드는거야?"

 

라는 분위기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1970년대, 두 차례의 사건으로 인해

 

MP5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 사건 (1977)

 

 

1977년 10월 13일,

 

스페인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루프트한자 181편 여객기가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전선 공작원 4명에 의해 납치된다.

 

기장을 살해하고 부기장을 시켜

 

최종적으로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착륙하였는데,

 

독일에서 파견한 국경경비대 GSG-9 특수부대에 의해

 

3명이 사망, 1명이 생포되며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국한 독일 GSG-9 특수부대원들의 모습>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대테러부대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델타포스 (Delta Force) 를

 

창설하게 되었고,

 

덩달아 GSG-9 부대원들이 사용한 정체불명의

 

기관단총 또한 주목받게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 그런 총이 있었어?"

 

정도의 분위기였다.


 

 

 

이란 대사관 인질구출 작전 (1980)

 

SAS's Operatre Nimrode (SAS 님로드 구출작전)

 

 

1980년 4월 30일 오전 11시 20분,

 

런던의 이란대사관에 '아라비스탄해방 민주혁명운동'

 

극렬분자 6명이 총기를 들고 난입하여

 

수감된 아라비스탄 테러리스트 91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이란 대사관에는 26명의 인질이 있었으며

 

작전개시 전, 인질의 40%가 사망할 수 있다는

 

 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특수부대 SAS는 불과 11분만에

 

 테러리스트 5명을 사살, 1명을 생포하였고

 

 인질 1명이 사망했지만

 

SAS 특수부대의 피해는 부상자 몇 뿐이었다.

 

이 작전은 "인질구출 작전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리고 SAS 특수부대가 사용한 MP5 기관단총

 

또한 엄청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담으로 SAS 특수부대는

 

얼마 전까지 자국의 스털링 기관단총을 사용하였는데,

 

독일 GSG-9의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사건에서

 

 MP5를 보고 삘을 받아 제식채용하여 쓰고 있던 터였다.

 

결국 독일산 기관단총을 독일 특수부대가

 

광고한 셈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란 대사관 인질구출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계 특수부대에서는 MP5 기관단총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고,

 

MP5 기관단총은 말그대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최고의 특수부대들이

 

큰 사건에서 성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이제보니 인질구출 작전에서

 

이만한 물건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얼마안가 전세계 상당수의 특수부대는

 

 이미 MP5 기관단총을 채용했거나,

 

채용 예정이거나 둘 중 하나인 지경에 이르렀고

 

MP5 기관단총은 "특수부대 기관단총의 대명사"

 

로 알려지게 되었다.


 

 

MP5 N 기관단총

 

 

미군에서도 이러한 물건을 놓칠리 없었고

 

오히려 네이비씰 등지에서 자기들의 요구에

 

맞춰 주문생산까지 하였다.

 

이 물건들이 MP5N으로 알려진

 

 네이비씰의 기관단총이다.


 

 

영화 <다크나이트> 中에서

 

 

MP5 기관단총은 전세계의 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기관단총으로,

 

주로 경찰 특수부대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경찰에서 주로 기관단총을 쓰는 주된

 

이유는 2가지를 들 수 있다.


 

 

영화 <다크나이트> 中에서

 

 

1. 강한 화력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대로 기관단총은

 

권총탄을 주로 쓰는 화기이기 때문에

 

소총에 비해 공격력도 낮고 사거리도 낮으며,

 

 관통력 또한 낮다.

 

 

주로 도심이나 좁은 건물 내에서

 

전투하는 경찰의 특성상

 

강한 화력을 가진 무기가 필요하지 않고

 

명중율이 높아야 한다.


 


 

2. 인질구출 작전에 투입될 경우가 잦다.

 

경찰특공대의 주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인질구출 작전이다.

 

 

이 경우 소수의 범죄자와 다수의 인질,

 

시민들 사이에서

 

정확히 범죄자를 제압해야한다.

 

따라서 공격력과 관통력이 낮고 명중율이 높은

 

기관단총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일반 소총을 사용할 경우,

 

 범죄자를 관통하여

 

뒤에 있는 인질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SWAT, SEAL과

 

독일 GSG-9, 영국 SAS 등 세계적인

 

특수부대에서 사용중이며

 

한국의 특전사 (특수전 사령부) 707특임대와

 

경찰특공대 등지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특전사 부대와 경찰특공대를

 

비롯한 다수의 특수부대에서

 

MP5 기관단총을 사용중이다.


 

 

2011년, 소말리아 해상에서 납치된

 

"삼호 주얼리호"를 구출하기 위한

 

"아덴만 여명작전" 에서

 

 한국 UDT/SEAL 에서 MP5 기관단총을

 

 사용하였다.


 

 

<MP5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전세계 특수부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MP5 기관단총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테러, 인질구출의 목적으로 사용된

 

9mm 기관단총은 너무 공격력이 낮고 사거리가

 

낮아서 제한된 상황에서만 사용이 가능하였다.

 

 

예를 들면 실내전투에서나

 

사용이 가능하지 야전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또한 방탄복의 기본성능이 9mm 권총탄쯤은

 

막아내는 것이라 방탄복을 입고 있는

 

적에게는 데미지를 줄 수가 없었다.

 

 

또한 독일제 무기답게

 

내부구조가 복잡하고 정교하여

 

야전에서 막 굴릴 경우, 이물질의 유입으로

 

 고장이 잦다는 문제점 또한 발견되었다.

 

 

MP5 / 10

 

 

90년대에 이르러서 FBI 등의

 

요구에 따라 10mm 권총탄을 사용하는

 

 MP5/10 기관단총이 개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변했고, 방탄복을 뚫는 것이

 

주 목적인 PDW (Personal Defence Weapon) 총기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하며

 

MP5 기관단총의 시대는 이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P90 PDW 기관단총 (일명 피구공)


 

 

KAC PDW 기관단총

 

 

대표적인 PDW (Personal Defence Weapon)

기관단총들이다.

 

200m 거리에서 교전이 가능할 것,

 

방탄복을 관통할 수 있는 탄환을 사용할 것,

 

무겁거나 길면 안될 것,

 

사용이 편리하고 반동이 적을 것 등의

 

조건이 붙는다.

 

즉, 후방부대나 비전투 요원들, 경비부대, 전차승무원 등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쉽게 다룰 수 있는 현대적인 기관단총" 계획이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MP5 기관단총의 수요는 오히려 대폭 증가하게 된다.

 

사실 PDW 기관단총들은

 

이제 막 뜨기 시작한 "검증되지 못한"

 

총기들이었는데 반해

 

MP5 기관단총은 수십년간 다양한 작전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낸 "검증된"

 

기관단총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터미네이터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 中에서)

 

 

또한 방탄복은 고사하고 총기조차 구하기

 

 어려운 한국 등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아직까지 MP5 기관단총

 

충분히 현역의 위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총기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미국, 유럽의 경우에는 도저히 권총탄이나

 

 쓰는 MP5 기관단총이 못 미더운지

 

다시끔 M4A1 소총 등 강력한 위력을

 

 가진 소총으로 갈아타고 있는 추세이다.

 

이미 미국 SWAT에서는 MP5 기관단총

 

상당수가 물러났고 M4A1 소총으로 대체되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범죄자들이 방탄복을 갖춰입고

 

 소총을 들고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데,

 

몇몇 사건에서는 MP5 기관단총

 

무력함이 제대로 부각되기도 했다.


 

 

 

MP7A1 기관단총

 

 

MP5 기관단총의 후계자 역할을 맡게 된

 

 MP7 기관단총으로서, 택티컬한 외관과

 

뛰어난 휴대성을 자랑하는 PDW 총기이다.

 

무엇보다도 현대전에 맞추어 방탄복을

 

관통할 수 있는 4.6mm 탄환을 사용한다.

 

한국 경찰특공대에서 MP5 기관단총

 

더불어 사용중인 모습이 확인되었다.

 


 

 

 

<MP7 기관단총을 사용중인 한국 경찰특공대의 모습>


 

 

MP5SD5 기관단총

 

 

MP5 기관단총의 베이스에 소음기가

 

결합된 특수목적용 기관단총이다.

 

뛰어난 소음효과를 자랑하여 후방 침투나

 

야간 침투시 활용가능하다


 

MP5K 기관단총

 

 

다양한 전장의 요구에 맞춰 제작된

 

MP5 기관단총의 단축형 모델이다.

 

K는 독일어 Kurz, (쿠르츠, 짧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 2 : 아포칼립스> 中에서)

 

극중 앨리스 (밀라 요보비치 분)가

 

양손으로 사격하는 MP5K의 모습이다.


 

 

 

비록 특수부대에서는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선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들은

아직도 MP5 기관단총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2010년 G20 정상회담 당시 MP5 기관단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한국 경찰특공대의 모습>

 

 


이상으로 MP5 기관단총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

 

 

 

 

<일부 참고, 인용된 사진 및 설명자료 출처>

 

사진 : 네이버 캐스트 <무기의 세계 : MP5 기관단총> , 나무위키 및 구글 해외사이트

 

설명 : 네이버 캐스트 <무기의 세계 : MP5 기관단총>,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나무위키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포병!

 

엄청난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포병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건군시기의 한국군 포병

 

건국과 건군 이후 모든 분야가

 

 그렇치만 역시 미국의 의해서

 

대한민국 땅에 화포라는 물건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처음 들어온 재대로된 화포는 박격포나 

 

 바주카포 같은 것은 재외하면

 

사실상 M3 105MM 견인곡사포와

 

 M1 57MM 대전차포 정도였어요.

 

<한국전 발발전에 훈련중인 포병들과 M3 견인포>

 

 M3 견인곡사포는 미국에서 2400여문 정도

 

 생산이 되었던 포였는데

 

공수부대나 산악부대, 해병대등

 

가벼운 화포가 필요한 부대들을

 

 위해 만들어진 화포다 보니

 

가볍기는 하지만 사거리가 겨우 6.5KM 정도로

 

 당시 박격포보다 조금 더 날라가는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91문 밖에 인수하지 못한대다가

 

이중에 3문은 이미 고장난 상태에서

 

 넘겨진 것이었어요. 

 

당시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군수지원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로 

 

 그 이전에는 미국내 악성재고를

 

 넘기는 수준이었어요.

 

 M1 57MM 대전차포는 영국군이 사용하던

 

 6파운드 대전차포를 미국이 복제생산을 한 것으로

 

2차 대전당시 많이 쓰인 것이지만

 

이미 2차대전 당시에도 위력부족으로

 

 도태가 시작되던 화기였고

 

제고로 처박혀 있던 것을 한국군에 인계한 것이죠.

 

 수량도 100여문 정도였어요.


 
 

<M1 57MM 대전차포와 대전차포병들>

 

이 것으로는 당연히 T-34 전차를 격파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군 대전차포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여서 의외로 궤도를 파괴하거나

 

전차의 관측창을 격파하는 등의 사격으로

 

북한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북한군 T-34전차를 향해 57MM 대전차포탄을

 장전하는 포병들..거의 자살공격이나 다른 바 없었다.>

 

 야전부대에서는 57MM 대전차포가

 

크게 고전을 하자 급히 미군으로부터

 

당시 최신형이었던 M20 3.5인치 바주카포를

 

인수하여 일선부대에 보급하였고

 

금방 전과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M20 3.5인치 슈퍼바주카포와 한국군 사수들.

앞에 서있는 사수는 M3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있다. >

(M20은 80년대까지 한국육군에서  

현역으로 사용되었다)

 

 한국군이 3.5인치 대전차 로켓으로 최초의 전과를

 

 거둔 것은 1950년 8월 대구 북방 가산 전투에서였는데,

 

 8월 초 한국 육군1사단은 미군으로부터

 

 3.5인치 대전차 로켓 3문을 최초로 인수했습니다.

 

 1사단 12연대에서 사수·부사수·탄약수 2명 등

 

4명으로 구성된 대전차특공조 세 개를 편성,

 

일주일 동안 특별 훈련을 거쳐

 

8월9일 최초로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12명의 대전차특공조 대원은 특공대장 김성룡 대위의

 

 지휘 아래 대구 북방 석적부락 부근에서

 

단숨에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처음 올렸습니다.

 

 낙동강전투와 인천 상륙작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북괴군전차가

 

 전멸해 버려서 57MM 대전차포도 점차 전장에서

 

 사라지고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형 화포가

 

 속속 한국군에 지원되기 시작합니다.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 신응균 중장

 

 

여기서 잠깐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고 불린

 

 신응균 예비역 중장에 대해서 알아보고갈게요. 

 

 일본육사 53기이므로

 

박정희 대통령보다 4기수 선배였어요.

 

그리고 일본군내에서도 인정을 받은

 

 엘리트 장교로써 일본육군과학교를 이수하고

 

포병장교로써 근무하였고 대본영에서도

 

잠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육군내에서도 총명한 신응균을

 

무척 아껴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참모장교로

 

 주로 근무할 수 있었다고합니다.

 

 1945년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에 맞서

 

수비군의 중포부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부대는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부하들과 산으로 올라가 게릴라전을 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본인 여성에게 구조되어

 

 1946년까지 은거생활을 하기도 하였어요.   

 

 신응균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남편이기도 하였다습니다.


 

<30대 시절 노라노>

 

  1945년 그가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

 

시댁의 압박으로 노라노는

 

강제 이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노라노의 증언에 따르면 유족보상금과 연금을

 

막 시집온 며느리에게 나누어 줄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당사자만 알 일이죠.

 

 

 신응균은 이후 진명여고에서 수학교사를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자 돌연 집을 나와

 

 육군에 이등병으로 입대를 하였습니다.

 

주변의 지인들이 한사코 장교임관을

 

독려하였지만 일본군출신임을

 

속죄하여야 한다면서 계속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임박해지고 확군이 시작되자

 

 결국 포병장교로 임관합니다.

 

 그는 군내 신망을 받았고 바로 포병사령관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박정희 소령도 한때 신응균의 제자이자

 

 부하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한국군 포병의 체계를 잡고 미군과는

 

 약간 다른 한국군 포병의 기초와 뿌리를

 

 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응균은 51년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왔고 59년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나 5.16혁명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신응균을 기억하고 그를 중요하게 쓰셨습니다. 

 

 

 

 

한국전 발발 이후 미군 포병장비의 도입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낮은수준에

 

 포병화기만 가지고 있던 한국군은

 

122MM 곡사포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크게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군에서 긴급히 50년 7월부터 M2 105MM

 

견인곡사포 13문을 시작으로 한국군 포병화력을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중에 가장 많은 공급은 단연 105MM M2 견인포였어요.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수량이 생산된 모델이고

 미군내에 치장물자도 충분하였구요.

 성능도 당시 동급 화포중에 가장 성능이 좋았어요.


 

 

무게가 2톤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고

 

 사거리도 11KM로 나쁘지않은 수준이었습니다.

 

RAP탄을 사용하면 14.6KM까지 날라갑니다.

 

추진장약과 탄두가 일체형이다보니 장전속도도 빨라서

 

분당 3발에서 빨리 속사를 하면 10발까지

 

 사격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속사 능력

 

 때문에 이 구식화포를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도태시키지 않고

 

 운영을 하고있어요.

 

50년 9월부터 이미 구식인 M3 곡사포를

 

 대체하여 한국군의 주력화포가 되었습니다.


 

 

 

<휴전후 1950년대 중반 1사단의 105MM 견인포>


 

 M2 견인포는 중복명칭이 많아 후에  M101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M2 / M101 / KM101 모두 같은 포에요.

 

 

 미국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살리기위해

 

한국 전쟁 기간에 육군장비만

 

M2 105㎜ 곡사포 1,127문을 비롯하여

 

 M114 155㎜ 곡사포 303문, M1 소총 47만여 정

 

 M1/M2카빈 21만9000여 정

 

M1919A4 경기관총 7700여 정 등

 

필수 장비의 대부분을 지원했구요.

 

여기에 3억4300만 발의 M1 소총탄 등

 

 막대한 양의 탄약까지 지원했어요.

 

 이승만의 외교력과 미국의 한국 수호의지는

 

지금의 국제사회의 기준으로는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었죠

 

 1950년 당시 한국군 포병대의 숙원사원은

 

 미군의 M114 155MM 견인포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백선엽이나 신응균과 같은 전선의

 

야전장교들은 미군의 155MM포의 위력에

 

큰 감동을 받은 상태였고 미군에게

 

155MM 견인포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였지만

 

미군입장에서도 워낙 중화기라서 쉽게

 

인도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114 155MM 곡사견인포>

 

이 때 밴플리트장군과 같은 친한파 장교들의 많은 도움으로

 

155MM 견인포가 한국군에도 303문이

 

 종전시까지 인계되었습니다..

 

 

 

 

한국육군의 아버지라 불린 밴플리트 대장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

 

 밴플리트는 그외에도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하였습니다.

 

 미군 1일 포격량을 5배가 늘리는 밴플리트포격을

 

 구사하여 미의회로부터 출석요구를 받기까지 하였고

 

 1951년에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재신축하여서 한국군 사관생도를 양성시켰죠.

 

 이때 배출된 신임소위들이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

 

 김복동 같은 육사11기 장교들이었습니다.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기장 큰 문제가

 

장교들의 경력이 너무 짧다는데 있다고 보고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영관급 장교들은 미국유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전선의 위관급

 

장교들도 OBC /  OAC (초군반/고군반) 교육을

 

 다시 받도록 배려하였는데요.

 

이때 신응균과 박정희도 미국에서

 

군사유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군

 장교단 앞에서 화동을 보고 있다.>

 

 

1950년대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온 많은 영관급 장교들은

 

훗날 한국군의 엘리트 장교단으로 성장하였고

 

 5.16혁명의 주도세력이 되었습니다.


 

<한국전 당시 용맹을 떨친 박태준 중령.  당시 만 24세였다.>

 

 포병장교들은 양성이 아주 어려운 편이고

 

수학적 소양과 지식은 물론 냉철한 판단력과 공간감각이

 

필요한 일이어서 한국군 수뇌부들은 일찍이

 

포병병과의 양성이 노력을 하였고

 

많은 우수한 보병장교들이

 

포병으로 전과를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당시 박정희 대령이었습니다.

 


 

 

<한국전 당시 박정희 중령. 맨 오른쪽이다.>

 

밴플리트는 퇴역후에도 57년에 코리아소사이어트를

 

 설립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으로

 

한국을 지원하였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한국의 재철소와 발전소등 중공업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김종필을 보내서 밴플리트를 방문시켰는데

 

 

 이때 많은 미국산업계 인사들과의

 

인맥을 주선해주었다고 합니다.



 

 밴플리트가 이토록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에 경이로운 지원을

 

 한 것은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밴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공군중위가 52년 4월 3일

 

 B-26을 조종하고 북한의 순천지역의 군용열차를

 

야간폭격하는 임무를 수행중 북한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실종처리 되었다고해요.


 

<B-26 폭격기>


 재임스중위의 네 번째 출격이면서

 

최초의 단독 폭격임무였습니다

 

 그의 B-26폭격기는 03:00쯤

 

김포공항 레이더에 잡혔고, 03:30분에는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새로운 예비 표적을 받고

 

 날아갔으나 그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어요.

 

밴 플리트는 10:30분 미5공군사령관

 

 에베레스트 중장에게 이 소식을 듣고도,

 

다음날 4월 5일 내색없이 국군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고해요. 그는 아들이 실종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밴플리트 장군은 결국 더큰 피해를 막기위해

 

 아들의 수색작전의 중단을 직접 명령하였다고해요.

 

 이 것은 당시 회의에 참석하였된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벤플리트의 한국군 지원정책과 한국전의

 

적극적인 전투행위는 워싱턴의 비판을

 

 자주 받았다고합니다.

 

 당시 워싱턴은 유럽의 NATO육성과 소련군의

 

 유럽전선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는 입장이었고

 

밴플리트의 한국군지원은

 

자신들의 역량을 소모하는 것이라

 

 믿었고 한국전에 빠른 휴전에만 골몰하고 있었어요.


 

 

 

 

<1953년 8군 사령관직의 퇴임을 앞두고

 전쟁고아원을 방문한  밴플리트 대장.>

 

하지만 밴플리트는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53년 3월 퇴임할 때까지 엄청난 지원을

 

한국군에 쏫아부었고 훗날

 

한국육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미국 군사원조 화포시대

 

 이런 미국의 군사원조품중에는 105MM 견인포 이외에도

 

 중요한 장비들이 많았습니다.


 

 

 


 

 

 

M2A1 4.2" 박격포는 군사원조로 한국군에 도입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포병에서 운영을 하였어요.

 

군필남자들은 잘 알겠지만 박격포는

 

 보병이 운영하는 화포입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차량보급률이 너무 낮았고 보병부대는

 

대부분 도보나 우마차 정도로 이동하는 수준이어서

 

도저히 4.2" 박격포를 보병부대에서 운영할 수가

 

없어서 포병에서 함께 운영을 하였죠.

 

 1964년이 되어서야 겨우 보병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운영이 가능해졌습니다.


 

 

<파월 해병2여단의 4.2" 박격포>

 

 4.2 인치는 구경이 105MM 견인포보다 커서

 

 사거리는 짧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훨씬 강해서 중요한 화력지원수단으로

 

 고지전에서 크게 활약을 하였어요.

 

 

 M114 155MM 곡사견인포는 1951년 5월에

 

 처음 한국군에 도입이 되기

 

시작하였는데 강력한 위력으로 한국군에게는

 

금쪽같이 귀중한 포였습니다.


 

 

 

<최대 3분에 4발을 발사할 수 있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것이

 흠이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워낙 강하여서

 중요한 공격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파월 포병과 M114 155MM 견인포>

 

 한국전 이후에는 미군이 철수하거나 장비를 교체할 때마다

 

물려받아서 거의 1000문을 보유하게 되었고

 

지금도 사용중입니다.


 

 

<소량이기는 하지만 8인치 M115 곡사포도 휴전이

 가까워지는 1953년에 50여문이 한국군에 인도되었다>


 

<한국전 당시 8인치 곡사견인포>

 

 사거리가 16KM정도에 운영인원이 16명이나

 

 필요한데다가 무게만 14.5t이 나가는 포는

 

 분당 발사속도는 최대 3분에 2발에 불과함에도

 

200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되었는데 고폭탄의 위력이

 

155mm견인포에 비해 거의 1.7배 정도에 반경79m를

 

 초토화할 수 있는 위력이어서

 

 군단포병대에서 아주 아끼며 사용되었습니다


 

일단 고폭탄의 위력면에서는 지금기준으로도 엄청 강력하다.


 

 

<군단포병 8인치 견인포의 야간사격. 

 조명탄이 필요없을 정도다. >


 

<포구를 떠나는 거대한 포탄이 보인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거대하고 강력한 포임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치만 M59 155MM견인포도

 

 한국군에게 53년에 50여문이 인계되었어요.


 

 

 

사거리가 23KM에 분당 2발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군단급 포병화기로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한국군이 국산화한 KM114가 대량 생산이

 

 되면서 80년에 퇴역하였어요.

 

일부는 전시물로 사용중이고  극히 일부만

 

 치장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군에 인계된 포병장비중에 좀 특이한 놈이

 

있는데 바로 M36 대전차 자주포에요.


 

 

<한국군의 M36 대전차 자주포>

 

이 놈은 전차처럼 생기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포병장비인 대전차 자주포에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5호전차 판터, 6호 전차 타이거같은

 

 야수전차들에게 미군기갑부대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고 응급처치로 만들어진

 

 자주포로 대공포로 쓰이던 90포를

 

 대전차포로 개조한 것을 부착하여

 

포병이 운영하였던 장비였습니다.


 

 

 

<나치 독일의 야수 타이거탱크. 

이녀석 잡을려고 만든 것이 M36이다.>


 

 

당시 미군에서는 M36을 이미 퇴역시키던 상태여서

 

제고가 충분하였고 한국전 기간중

 

 264대가 인계되었어요.

 

 당시 한국군 포병이나 기갑이나 보병 모두

 

아직 병과 구분이 명확하지않은

 

 시절이었고 그 정도로 체계도 잡혀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죠.

 

기갑병과는 있었지만 겨우 경장갑차 정도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이 자주포를 기

 

갑병과에서 운영을 하였습니다.

 

 M36이 도입될 시기에 이미 북괴군의 전차들이

 

대부분 미군의 전폭기나 전차에 격파된

 

 시기여서 M36은 자주포로써 운영이 되었어요

 

 특히 강력한 직사화력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거나 고지전에서

 

북한군 진지를 초토화시키는 전법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36>

 

치열한 한국전이 휴전된 이후에 219대의 M36이

 

살아남았고 미군으로부터 M47을 인계받을 때까지

 

기갑부대의 중요한 장비로 사용되었고

 

 1959년에 퇴역을 하였습니다


 

 

<1957년 중부전선의 M36 자주포진지.>


 

<1950년 후반의 한국군

M36자주포와  승무원들>

 

 M36은 엄청난 구식장비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까지 예비치장되었습니다. 

 

 M36의 주포가 지금도 현역으로

 

 사용되는 90MM대전차포이다보니

 

현재도 엄청나게 재고로 가지고 있는 포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M36 자주포와 동일한 90MM 대전차포를

사용하는 M348A3K 전차. 아직도 현역이다>.

 

 

 

 

 

 

한국군 곡사자주포 시대의 시작


  60년대 초는 한국도 격변기였지만

 

다른 곳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냉전이 극으로 치달아서 쿠바에서 핵미사일건으로

 

 미해군과 소련해군이 전쟁 할뻔하고 ,

 

중동에서는 유태인들과 샌드니거들의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967년 6일전쟁 당시 아랍동맹군을 향해

 돌격하는 이스라엘군의 M50 개조셔먼.>

 

 북한은 이미 후루시초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전 당시보다 더욱 한국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어요.

 

쉽게 알려주면 한국군이 M1소총으로 땅야땅야 할 때

 

 AK-47소총을 들여와서 드르르륵 갈기는

 

 수준이었던 것이죠.

 

  이때 박정희대통령은 J.F케네디와

 

한국군의 파병을 협상하셨어요.

 

주한미군의 월남차출을 막고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위한 대통령의 도박이었습니다.

 


 

 

<파월 해병 2여단 장병들>

 

 월남에서 전사한 5,000여명의 희생덕에

 

 결국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미친 빨갱이들로 지키고 후손에게 번영을

 

 남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미국은 당시 국제 왕따였어요. 심지어는

 

영국도 미국의 파병요청을 거절하던 시기였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군이 파병은

 

 하였지만 숫자상 미미했죠.

 

한국군은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하였고

 

5만의 병력을 상시주둔하였습니다.

 


 

 

 

즉 한국군의  8%가 항상 월남에서 정글을

 

치고 북배트남군과 배트콩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월 해병 포병들>

 

69년부터 미군이 썰물처럼 철수를 시작하였고

 

 70년부터는 사실상 한국군이

 

자유연합군의 최대군대였고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어요.

 

72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승리한 안케패스는

 

당시 자유연합군이 승리한

 

거의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 동맹군대들도 철수를 하였고

 

 월남군은 엄청나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미군도 상당한 성의표시를 하고 있었어요.

 

 66년에 처음으로 M110 자주포가 넘겨지기 시작하였고

 

총 99대가 한국군에 인계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에게도 비교적 신형장비였고

 

 전술핵포탄을 쏠 수 있어서 미군도

 

 금쪽같이 아끼던 장비였어요.

 

  13명의 운영이 필요한 중포였고 강력한 위력의

 

8인치 (203MM)곡사포가 부착된 놈으로

 

포탄의 위력만큼은 지금 기준에도

 

 엄청난 놈이었죠.

 

16.8KM/ RAP탄 30KM의 사거리를

 

가졌고 분당2발 발사가 최대였구요.

 

 포탄이 워낙 커서 이 이상의 속도로

 

발사는 불가능하였어요.

 

한국군은 금쪽같이 아끼며 사용하였고

 

 군단 직할 포병이 2000년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지금은 퇴역을 하여서 일부는 외부전시물로

 

사용중이고 일부는 치장되고 있습니다,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은 포탄제고가

 

 너무 많아서 한동안은 계속 치장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워낙 구형이고

 

 아무런 방호장갑이 없는

 

덕분에 자주포병들이 이동할 때 포상위에

 

 방울방울 매달려서 눈,비 다맞고 이동을합니다;;


 

 

자주포치고는 방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노가다도 좀 많았다고 .


 

 

M110과 M548 탄약운반차가 항상 세트로 다녔다. 지금은 둘다 예비 치장장비다.

 

1971년에는 M107 175MM 자주포도 인계되었는데

 

 미군에서도 괴물자주포로 통하는 물건이었어요

 
 

 

 

 

사거리도 30KM/ RAP탄 40KM에 달하는

 

 괴력을 가졌고 강력한 전술핵포탄을

 

사격하는 놈이었어요.

 

90년대까지 주한미군 포병들과 함께 실제로

 

 핵포탄 사격훈련도 하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군단 포병여단의 M107>

 

물론 사격속도가 최대 분당 2발이라서 지금 기준으로는

 

별로지만 67KG에 달하는 고폭탄을

 

 날리는 굉장한 놈이었어요.

 

군단급 포병의 핵심자주포로 수량은 50량 정도를

 

 운영하였다고합니다


 

 

 

M110/M107 모두 미군에서는 90년대 초에

 

 퇴역을 하였는데 이 때 100여대의

 

 예비차채와 60만톤의

 

포탄을 한국군에 넘겨주어서 엄청나게

 

쟁겨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M107도 K9이 실전배치되면서 퇴역을 하였지만

 

한반도 통일결전에 순간에는 치장시설에서

 

 나와서 엄청난 포격을 할 것이 틀림없어요^^.


 

<M110과 M107은  항상 국군의 날 주인공이었다.>

 

 

 번개사업 그리고 국산화포시대

 

 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소련의 지원에 취한

 

 김일성은 자기 환갑잔치는 서울에서 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어요.

 

사실 이말이 헛소리는 아닌 것이 미군이 이미

 

 월남전에서 자신감을 골로 보내고

 

 고립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고

 

주한미군도 호시탐탐 철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엇죠.

 

 월남전도 점점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하였어요.

 

그동안 꽁짜로 원조하던 장비들을

 

돈주고 사가라고 하기 시작한 거죠.


 

박정희대통령은 깊은 시름에 빠졌어요.

 

미국이 한국군의 월남참전의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장비확충, 차관지원, 한국업자의 월남사업지원등의

 

 양해각서인 브라운 각서의 이행도

 

저조해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실제로 워싱턴에서는 한미상호조약이고

 

나발이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고 성화였고

 

71년 미 7사단이 철수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합니다...

 

이제 미2사단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오면서

 

국방을 더 이상 미군에 의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오고말아요..
 

 박정희대통령은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주국방의 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설립된 것인

 

ADD 국방과학연구소에요..

 

박정희대통령은 자신의 포병 스승이자

 

 일본육사 선배인 신응균을 부르게됩니다.


 

 

 

 

신응균 소장. 무척 미남이어서 청년 장교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오키나와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에 일본여자에게 구조되어

 

 살아남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신응균은 1959년 중장으로

 

예편후 한동안 직업외교관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신응균은 의외로 한국현대사의 많은 페이지에

 

 등장을 하는데 주서독대사시절 재독한국인들과 함께

 

서독의 광부/간호사 파견에도

 

 많은 역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정희대통령으로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신응균 ADD소장>

 

 신응균이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먼저 연구진을 찾아다녀야 했어요..

 

당시 의뢰를 받았던 대학교수란 자들은

 

전부 대한민국에서는 화포를 만들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발언한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거지나라에 인재가 있을리가 없었고

 

민간 / 군 모두 쓸만한 인재들이 없어서

 

한참 고생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육사/해사/공사의 현역장교

 

이공계교관들을 차출해서

 

특무부대 건물 한칸을 빌린 사무실에

 

처넣은 것이 ADD의 시초였어요.

 

당시 끌려온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책상하고 의자만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간단했어요.

 

예비군 20개사단을 무장할 장비를

 

 당장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M16은 오원철 수석이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만든 베트남의 위장고철회사에 밀반입한 것을

 

 역설계해서 시제품을 만든 후에

 

설계도를 미국콜트사에 받아내었지만,

 

60만정만 만들 수 있었고 1985년까지만

 

면허생산을 할 수 있어서 예비군용으로

 

M1, 카빈, M1919, 박격포, 3.5인치 로켓포를

 

 미군몰래 역설계해서 양산해서 공급하는 계획이었죠.


 

 

번개사업으로 만든 시제 국산총기

(미제복제)를 시찰하시는 박정희대통령

(출처:동아일보)

 

 공돌이들을 갈아넣어서 소병기들은 겨우

 

 성공하였지만 각하는 예비군도 포병을 편성해야한다고

 

지시하셔서 처음으로 105MM 곡사 견인포

 

 복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알보병이었던 예비군에게도

 

105MM 견인포를 배치하실 계획이었습니다.

 

 총기하고 포는 차원을 달리 하는 물건이고 하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ADD의 해군사관학교출신

 

 구상회 연구원이 미대사관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ADD의 구상회 해군소령.

 

훗날 대한민국 육군화포와 탄도미사일사업을

 

주도하게 됩니다.

 

ADD 부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구상회연구원은 포병대에서 105MM 견인포를

 

 하나 가져와서 완전분해를 한 후에

 

역설계를 하였어요.

 

 포신깍을 가공장비가 없어서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하고 또 ADD 직원들이 청계천상가에서

 

 미군기술교범 같은 것을 수거해서

 

천신만고 끝에 1973년 허름한 구로동 대한중기

 

 공장에서 처음 시제 M101 105MM 곡사견인포를

 

 완성한 것이 한국군 화포의 시초가 되었어요.

 

대한중기는 훗날 기아그룹에 인수되어 기아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현재는 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현대위아'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당시 브라운각서의 이행차원에서 한국군에 있는

 

 미군장비의 정비와 부품조달의

 

기술지원하기위해 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하는 기술지원팀 5명이 ADD에 파견되어 있었어요.


 


 

 

Clyde D. Hardin 단장.

 

하딘은 2차대전에 미해군으로

 

참전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단원이었던 Urich는 미육군 대령출신으로

 

 총포전문 병기장교출신이었어요.

 

 처음에 하딘은 ADD가 105MM 견인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심드렁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105MM 견인포 시제품이 나오고

 

젊은 연구원들이 아무런 안전장비없이 목숨을 걸고

 

시험사격을 직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미군의 도면이나 기술자료를

 

넘기기 시작했어요.

 


 

 

<다락대 사격장에서 국산 105MM 견인포를

 시험사격중인 ADD 직원들>

 

 같은 엔지니어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고

 

이들은 곳 친한파로 변신하여서 막대한 자료를

 

 넘기고 도면해석기술과 자신의 노하우를 넘겼어요.

 

 당시 하딘팀의 이런 지원을 미군당국에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감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어요.

 

 하딘팀은 미국의 방산기밀자료까지 자신들의 권한으로

 

 최대한 수집하여서 넘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Urich가 넘긴 극비자료가

 

결국 미군당국에 감시에 발각이 되면서

 

하딘팀 5명은 미국으로 강제송환되고 말아요..

 

후에 이들 대신 현역장교들로 구성된

 

JUSMAK-K팀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기술지원보다는

 

 오히려 ADD의 감시와

 

 본국보고에 주력하였었어요.

 

미국은 한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죠.


본국으로 돌아간 하딘은 방산연구자로써

 

계속 일을 하였고 자신의 연구논문과

 

기술자료집을 한국ADD에

 

기증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종종 방문하여

 

ADD에서 강연을 하시는 등

 

한국에 대한 많은 도움을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하였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신응균 ADD소장이 과로로 건강을

 

망쳐 결국 쓰러지고 마는 등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합해서 1977년에 대한중기에서

 

KM101 105MM 곡사견인포가 양산되었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어요.


 

 

 

105MM 견인포는 포탄과 추진장약이 한덩어리여서

재장전이 엄청빠르다. 물론 견인포병들의

강한 체력은 기본 옵션이다.

 

 105MM 곡사 견인포는 군사원조로 받은 것까지 합하면

 

 거의 3000문을 가지고 있고, 너무 수량이 많아서

 

 1000문은 전시예비치장을 하고 2000문은

 

동원사단이나 향토사단에서 사용중이에요.


 

 

 

<보병사단 포병연대에서 지금도 잘만 쓰고 있다.

사격DATA가 많이 축적되어서 엄청 잘맞는다고 한다.>


 

<중량이 가벼워서 UH-60으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하다.> 

 

 

 미군이 105MM급 화포를 전부 퇴역시키면서

 

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포탄을 넘겨받아서

 

앞으로 수십년은 더 현역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ADD는 자신감에 충만해서

 

KM114 155MM 곡사견인포도 바로 국산화에 성공하고

 

 1977년에 국산 155MM 견인포로 장비한

 

 포병대대를 창설하는데 이르렀어요.


 

 

<KM114는 지금도 동원사단의 주력견인포로 운용중이다>

 

 

 

자체개발 견인포 KH-178, KH-179의 성공.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ADD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의 견인포를

 

 만들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이 KH-178이었어요.


 

 

M101의 포신을 연장하고 각종 구성품의

 

 성능을 계량하고 강화하는 형태로

 

ADD와 기아중공업이 중심이 되어

 

개발이 된 KH-178은 당대 최고의

 

105MM 곡사견인포였어요.

 

 사거리가 14.7KM/RAP탄 18KM에 발사속도도

 

 최대 분당 15발 사격이 가능한 엄청난 속도를

 

가진 최고의 105MM 견인포였어요.

 

 1983년에 개발성공한 화포는 한국군보다는

 

 인도네시아와 칠레등 수출용으로

 

 더많이 만들어졌어요.

 
 이미 한국군포병은 105MM 포로는

 

성이 안차는 상황이었고 북한포병을

 

대포병사격으로 분쇄하기위해 보다

 

 강력한 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KH-179 155MM 곡사견인포입니다.

 

 KM114를 기본으로 포신을 연장하고 구성품을

 

강화한 것으로 M114보다

 

1톤만 중량이 증가한 것에 반에

 

거의 2배길이의 거대한 포신을 장착하고 있고

 

 나토표준 155MM 포탄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사거리는 23KM/RAP 30KM로

 

북한의 대부분의 화포들과

 

 대포병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어요.

 

 발사속도도 분당 최대 4발이어서

 

 중화포치고는 아주 빠른 편입니다.

 

몰론 포병들의 고릴라 같은 팔힘과 강한 체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죠

 

 

 

 

 

 한국군 포병대에서는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해서 수출용으로 주로

 

생산된 KH-178와는 달리

 

1000여문 가까이 생산되어 대부분 사단포병연대에

 

 배치되었고 당연히 지금도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어요.


 

 

철주를 박아줘야 한다.


 

 

 

 

발사!

 

지금은 K9이 대량배치되면서

 

 K55 자주포가 사단급까지

 

 내려오면서 지금은 점차 후방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이에요.

 

 

 

 

정말 방열할 때 보면 '저것이

진짜 포병이구나'라는 생각이 누구나 들거에요.


 

 

 

수출도 재법 잘되어서 동남아국가와 중동국가에

상당히 많이 수출했고 지금도 구매문의가

 자주 들어오고 있다고해요


 

 

 

대통령의 특별지시속에 만들어진

 

K-136 구룡다연장 로켓포


박정희 대통령께서 갑자기 북괴군이

 

보유한 것과 동일한 다연장 로켓을

 

개발할 것을 ADD에 지시하셨어요.

 

당시 ADD는 맨붕에 빠지게 되는데 각하의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무기를

 

개발하고 만들어온 ADD연구진이지만

 

다연장은 정말 미지의 영역이었어요.

 

지금이야 저 정도야 껌이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서독이외에 다련장이라는 장르를

 

 취급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데 다련장 로켓포라는

 

것이 단시간에 엄청난 고폭탄을 갈기는 맛이 있지만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명중률이 좋지않고

 

자원의 낭비가 상당히 심한 무기인 것이

 

사실이고 항공기의 발달도

 

그다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미국도 2차대전때 약간 만들어 쓰다가

 

 버렸기 때문에 물어볼 곳도 없었죠.

 

 우리의 ADD는 다시 맥가이버 빙의하여 자료를

 

찾기위해 서독을 가서 자료달라고도 해보고

 

 첩보사진으로 소련군이 많이 사용하는 BM-21 방사포 사진

 

을 연구하기도 하고 엄청 고생을했다고해요.


 

 

<ADD가 많이 참조한 소련제 BM-21 방사포>

 

 여러분들도 박정희대통령이

 

 포병장교출신인 것은 잘 알거에요.

 

한반도 전장은 인류역사상 아주 좁은 횡심에

 

막대한 병력과 장비가 집결한 전장이고 예비군까지

 

 집결하면 정말 미어터질 지경이 됩니다.

 

인류최대의 전장이라는 2차대전 독소전장도

 

 이 정도의 병력집결도는 나오지 않을 거에요.

 

 군간부출신 남자들은 북한군 전술 배우면서

 

 군포군 / 연포군 / 사포군이라는 용어를

 

공부한 적이 있을겁니다.

 

군단이나 사단의 예하포병을 집결하여서

 

화력투사를 한다는 개념인데 워낙 포장비가

 

 많고 제대가 많다보니

 

어느정도 집결하여서 운영할 수 밖에 없어서

 

이런 개념이 나오는 거에요.


 

 

즉 좁은 한반도의 전장에서 다련장로켓은

 

 상당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판단이었죠.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인데 당시 한국군은

 

비밀리에 소련제 BM-21 1대와 포탄을

 

입수하는데 성공하여서

 

 비밀리에 개발에 성공을 거두었죠.

 

국군의 구룡은 상당히 BM-21가 비슷하게

 

생겨먹게 된 것이이죠^^.


 

 

 구룡은 일단 단기간에 158문이 생산/배치가

 

되어 군단급 직할 포병의 핵심화력이 되었어요.

 

 130MM 36연장 로켓을 18초만에

 

퍼불 수 있는 강력한 놈이었는데

 

 사거리만 초기형이 22KM,

 

후기형은 36KG에 달하는 대다가

 

 64KG의 고폭탄을 날리는 강력한 놈이죠.

 

 제인연감에 올라갈 정도로 서방세계에서는

 

 독보적인 놈이었어요

 

 물론 지금 나오는 최신형 천무에 비하면

 

구식이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에요.

 

일단 장전을 포병들이 일일이 한발씩 포신에

 

넣어야 하는 데 상당한 노가다이고 시간도 오래 걸려요..


 

다련장포병의 얼굴에서 힘듬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폭탄 역시 인마살상용만 생산이 되어서

 

 전차와 같은 중장갑장비를 완전격파가

 

 약간 어려운 편이에요.

 

아직까지는 워낙 제고포탄들이 많아서

 

전혀 퇴역할 기미가 없는 무기체계이고

 

 한동안 대한민국을 지킬예정입니다.

 

 

 K55 자주포의 도입


8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군의 신형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을 하고 있었고 신나게

 

야전포병부대에 보급을 하고 있었어요.

 

한국군의 첩보망에 북괴가 자주포를 엄청나게

 

대량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성능이야 조잡하지만

 

 북한포병의 절반은 자행포로써 배치를 마무리한

 

상태라는 충격적은 내용이었어요.


 

 

 

<북한군의 170MM 자주포. 

 사거리 54KM에 자동장전장치가 달린 자주포다.>

 

소련군이 쓰다버린 해안포를 받아서 T55전차위에

 

 올린 형태로 사거리는 길지만 명중률이

 

 낮고 발사속도도 느리다고합니다.

 

당시 ADD에도 자주포 개발을 위한 선행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당장 짧은 기간내에 개발을 해서

 

 배치하는 것은 무리인 상황이었어요.

 

 한국군에는 M107 / M110 자주포가 있기는

 

 하였지만 수량이 너무 적고 구식이라

 

 당장 장만을 하여야 하였어요.

 

일단 물색을 해보았는데 서방군대들은

 

전부 미국의 M109를 사서쓰고 있는 상황이었죠.


 

 

 

면허생산권을 미국에 부탁하여 받기로했는데 

 

 단 조건은 주포와 포탑부 일부는 미국에서

 

 사서쓰는 조건이었어요.

 

당시 주포를 생산하는 미국공장이

 

워싱턴주에 있었는데

 

 그곳 하원의원이 동네경제 망한난다고

 

 주의회에 양해각서고 나발이고

 

그 동네공장에 있는 포를 해외에서 생산을

 

 못하게 법안을 내놓았는데

 

이게 통과가 된 것이죠...

 

결국 주포는 기아중공업에서 KH-179 155MM 포신을

 

 잘 만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사서달아야 했어요.

 

당시 생산입찰은 삼성항공이 받아서 정말 4~5년의

 

 단기간에 1,180대나 뽑아댔는데

 

미국도 놀랄 정도의 생산속도였다고 해요.

 

K55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면허생산을 하였고 지금은 세계최대의 운영국입니다.


 

K55는 원래 18KM/RAP 24KM 사거리에

 

 최대 분당 4발을 쏘는 준수한 놈이었어요.

 

방열이나 사격재원 넣는 것은 반자동식으로

 

 K9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낫던거였어요.

 

 기존 자주포와는 달리 밀폐형 포탑이 있고

 

 알루미늄 합금장갑으로 포병들의 방호력도 좋아졌죠. 

 

 삼성항공에서 면허생산을 위해 많은 기술자료를

 

 미국으로부터 받아서 기술력도 엄청나게

 

 축적할 수 있었어요.

 

 세월이 지나 지금 다른 M109도입국들은

 

창정비를 못해 전전긍긍하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한국군 생산라인과 정비시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지금도 가동률이 좋은 상황이에요.

 

독일/이스라엘/다른 유럽국가들이 부러워 한다고해요^^

 

한국에서 잘 만들어쓰다보니

 

이름도 M109를 버리고 K-55라는

 

독자이름으로 사용중이에요.

 

 단 주한미군은 곧 죽어도 절대 K-55라고

 

 안부르고 M109A2K라고 부르고 있어요.

 

 세월이 강산을 2번은 바꾸면서 K-55도 연식이 되었고

 

K-9에 점차 주력의 지위를 넘기고 있지만

 

절대 이 정도만 쓰고 버릴 포방부가 아니었어요.

 

 K-9을 개발하면서 축적된 기술을 K-55에 드리부어서

 

 개량하는 개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올리는 데

 

 K55A1개량사업이에요.

 

혹은 PIP개조사업이라고도 부르고 있어.

 

목표는 K55를 K9의 70%정도로 성능을

 

높히는 개조작업입니다.

 

 주요내용은 이래와 같다.

 

1. 포의 차제/현수장치/주퇴복좌기를 강화하여 최대사거리 32KM연장하고


2. 방열속도를 K9급으로 강화하고 (약 45초) 아예 스페이드도 때버림.


3. GPS를 달아서 측지속도를 단축시키고


4. 사격통제장치를 K9급으로 교체하기
 
  거의 미군의 주력인 M109A6 팔라딘보다 우수한 성능의

 

 자주포로 대개조를 한다는 것인데 전량을

 

 지금도 개조중이라고 합니다.

 

 

 

 MLRS M270의 직도입과 국산

신형 다련장 천무

 

걸프전에서 한국군 포병장교들은

 

다른 건 몰라도 MLRS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깜놀한 상황이었어요.

 

사실 MLRS를 보고 그냥 구룡보다

 

좀더 쌔겠지 정도였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로켓탄의 위력이 한국군이 쓰는

 

155MM 곡사포8발을 동시에 쏘는 것보다

 

 강력하였던 것입니다.

 

한발을 쏘면 그것이 공중에서 자탄으로 분해되면서

 

 포탄낙하지점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물건이었죠. 

 

 정말 왠만하면 자체개발을 하던가,

 

아님 최소한 면허생산이라도 하는

 

대한민국이지만 MLRS만큼은

 

정말 급하게 사서 총 58대를 도입하였어요.


 

 


 

 

 


일단 주한미군과 완벽하게 동일한 무기체계여서

 

탄약보급이나 정비까지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에요.

 

한때 한국군은 MLRS에 너무 놀라서 1개 대대 위력이

 

 155MM 곡사포 36개 대대  위력이 난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사거리 45KM의 다련장탄은 물론

 

 사거리 160/300KM짜리 에이테킴스 로켓탄도

 

 장만한 상태에요.

 

총12연장의 로켓포탄을 발사가 가능하고

 

 구룡과 달리 로켓발사관을 통채로 넣었다 뻬는

 

 방식이라 재장전에 신형은 3분이면

 

가능하다고합니다.

 

그리고 궤도차량베이스라서 진동이

 

 적어서 명중률도 최고였어요.

 

구룡의 경우 인마살상용 고폭탄만 있었지만

 

MLRS의 경우 이중목적고폭탄이어서

 

전차나 장갑차를 터트리는 게

 

 가능한 강력한 로켓탄이에요.

 

포방부에서는 더 사들이고 싶었지만 포탄/ 차량 모두

 

 가격이 너무 비싸서 결국 포기하여

 

M270를 굴린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형 다련장 발사체인 천무를 개발하게 됩니다.


 

 
 

<신형 국산 다련장 로켓포 천무.. 워낙 신형이어서 

엄청 강한 놈이란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끝판왕 K-9의 개발


 

 

 

 

 

국산 자주포의 개발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요,

 

당연히 그 중심에는 ADD가 있었죠

 

70년대부터 선행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KH-179가 대성공을 거두고 M109까지

 

 국산화에 성공을 거두자 ADD의 연구진들은

 

 야전포병장교들과 구체적인 요구성능을

 

 체크해 나가기 시작하였어요.

 

당시 이미 미국은 꿈의 자주포인

 

크루세이더 계획이 있었고 갓독일은 PZH2000사업을,

 

 영국은 AS90사업을 진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한국은 약간 후발주자의 위치였었죠.

 

 ADD와 포병, 삼성항공은 이제는 꿀릴게 없다는

 

 입장이었고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어요.

 

당시 ADD의 목표성능발표에

 

육군 포병장교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적극적으로

 

국방부를 설득하였고 예산확보에 성공하여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던거죠.

 

 그와중에 미국은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가볍고 기동력있는

 

장비로 개편하는 중이어서 크루세이더계획을

 

 백지화한 상황이었어요.

 

크루세이더는 일단 가격이 너무 비쌋어요.

 

 PZH2000을 4~5대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서 결국 취소시킨 것인데

 

 이 것으로 미군수뇌부와 국방부가 정면대결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고 결국 럼스팰트가

 

사임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죠.

 

결국 이 일로 주한미군에 한국군 포병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죠.


 

 

 

 

 

<순탄치 않은 재임시절은 보낸 럼스팰트 국방장관>


 

물론 이게 전부 럼스팰트의 잘못은 아닌 것이

 

미국방산업체들이 정치권에 로비를하면서

 

 엄청나게 폭리를 취하는게 사실이고

 

 이미 미군도 학을 띄는 상황이죠.

 

심지어 많은 친미국가들도 미국제무기를

 

외면하면 지경이이에요. 

 

 지금 미공군 훈련기사업도

 

미국업체들이 엄청난 개발기간과

 

 천문학적인 가격을 부르면서

 

미공군을 질리게 하였고

 

 결국 한국이 T50을 앞세워 강력한 후보로

 

입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에요

 

 

  92년 당시 미국의 방산업체들도

 

한국의 움직임을 눈치까고 공동개발제의를

 

 하는등 분주하게 접촉을

 

시작하였지만 ADD와 삼성항공 모두 추후 수출진행에

 

 발목이 잡힐까봐 모두 거절하였다고해.요

 

야심차게 개발을 9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었어요.

 

육군과 국방부에 약속한 전력일정인

 

 98년에 맞추어 박차를 가하였죠.

 

 

 


 

 

K10 탄약수송장갑차를 통하여 자동 송탄이 가능하다

 

 K9은 외화별이에도 재미를 봐서 터키에

 

기술수출을 하였는데 그동안 독일제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던

 

터키군은 K2흑표전차와 함께 한국군의 무기체계로

 

가져오게 되어서 독일을 따돌리고 방산거래의

 

활성화가 가능해진 소득을 얻었죠


 

 

<포신 길이에서 이미 넘사벽이다.>

 

 

 현재 노르웨이군 입찰에 참여 중인데 

 

 스위스의 M109G, 독일의 PZ2000, 

 

케사르자주포와 경쟁중이에요.

 

M109G와 케사르자주포 성능이 별로고

 

독일의 PZH2000은 발사속도과 포탄적재능력이

 

K9보다 아주 약간 앞서지만 기동력이 딸리고

 

가격이 2배가 넘으므로 K9이 유리한 상황이에요.


 

 

 

<독일연방군의 PZH2000>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주포중에 

 

 유일하게 가격이 2배 비싼

 

독일의 PZH2000만이 K9과 대등한 수준이어서 

 

 많은 외화벌이가 가능할 전망이에요.


 

 

 

<영국 육군의 AS-90>

<

 

폴란드의 경우 포탑은 영국에서 AS-90을

 

도입하고 차재는 국산을 쓰기로 하였는데

 

 폴란드 방선업체가 성능과

 

납기준수에 실패를 하면서 어부지리로  폴란드군으로부터 

 

 차제를 120대 주문받아서 팔아먹고 있어요.

 

 그리고 인도군에서도 약 100여대의

 

발주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

 

 

 

K9은  K55와 비슷한 수량을 배치할 예정이고 이미

 

운영을 한지가 10년이 넘어서

 

개조작업이 예정되어 있어요.

 

 

 

 

 

105MM 똥포 아직 안죽었다.

105MM 자주포 개조사업

 

한국군에서 약 3,000문의105MM 견인포가 있고

 

 이중에 1000문은 치장중이에요.

 

 즉 아직도 2,000문이 시퍼렇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인데 천조국으로부터 받은 것,

 

국내생산한 것까지 모두 350만발의

 

포탄재고가 한국에 있다고합니다.

 

지구상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즉 퇴역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는 상황인거죠.

 

그래서 포방부에서 약 500문을 5톤 포차에

 

결합하는 개조작업을 하기로 하였고 

 

 보병연대에 4.2" 박격포를 퇴역시키면서

 

이 빈자리에 105MM 자주포 포병대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계획중입니다. 

 

 

 

이 자주포는 기존 견인포에 비해

 

운영포병을 11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K9과 같은

 

신형사격통제장치를 달아서 대포병전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수준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죠. 

 

 장전을 재외하고는 모두 K9급의 자동방열,

 

 재원입력이어서 약 56초만에 초탄 발사가

 

가능한 수준이에요.

 

장갑판도 부착해서 포병의 생존성도 높힐 계획이에요.

 

 이것이 예정대로 진행이 되면

 

보병연대의 화력이 강해지면서

 

더 이상 사단사령부의 노예가 아닌

 

연대전투단으로써 탈바꿈하는 거죠.

 

 한화태크윈에서 사업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외화벌이를 위해 수출판촉도 열시미 하고 있는 중이에요.

 

 주로 동남아나 남미같은 개도국에서

 

많이 문의가 오고 있다고합니다.

 

 

드디어 세계3위 포병강국 대한민국

 

 포병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