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낙동강방어선전투[ 洛東江防禦線戰鬪 ]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습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워커장군>

 

잠시 미8군 초대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에대해 알아보고지나갈게요.

 

워커 장군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여기에 있겠다."

(I will stay here to project Korea until my death.)

 

라고 결의하고 융단폭격 등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대한민국의 최후보루였던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여 인천상륙작전,

 

 38선돌파 등 북진의 승기를 잡았기에

 

오늘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도록 한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그는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서 북진 중에

 

있을 때 보좌관(중령)과 함께 중부전선으로

 

 이동 중 서울시 도봉구 도봉1동 596-5 앞

 

도로에서 1950.12.23.10:45 교통사고

 

(가해자 한국군 6사단 2연대 소속 박경래;1924년생)로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UN군 장병들의 고귀한 짧은 삶을

 

 높이 평가하고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바로 낙동강 1차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전력이 부족한 국군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

 여겨 8월 11일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여긴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의 각오로 싸웠다>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을하였어요.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습니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

 

·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다부동전투[]

워커 미8군사령관은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군부대를

 

왜관 북쪽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워커 장군이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왜관 북쪽

 

미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서부 지역과 국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고리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지역의 국군이 무너지면 미군마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대구 북방 산악지대에서는 국군1사단과

 

북한군 사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난타전이 벌어졌습니다.

 

 1사단의 방어전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는데,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해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사전에 주 저항선으로

 

선정됐던 주요 고지군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선점해 버린 유학산 등지를 탈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위기의 순간이 많았으나,

 

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으로 결국 전선을 지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장군>

 

마침내,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였습니다.

 

 

 

 

제1사단은 주 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彼我)

 

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어습니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습니다.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낙동강전선에서 죽은 북한군의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로 징집한 젊은이들이었다고전해집니다. 

 

<강제로 징집된 의용군>

 

다부동전투는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 장교 중 일부는 유사시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국군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수많은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부동전투 과정에서 국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병력 부족으로 인해 학도병도

 

 자원 참전을 하였습니다.

 

<6.25전쟁당시 학도병>

 

남한 국토의 90% 이상이 이미 점령된

 

상태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운 국군과 미군, 학도병들이 아니었다면,

 

<영화 " 포화속으로"中 학도병>

 

한국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고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합니다.

 

 

 

 

 

 

 

영천전투[ ]

 

영천지역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의 9월 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을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의 공방전을

 

통해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전투입니다.

 

 

<7사단칠성부대.8사단오뚜기부대마크>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 및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어요.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영천에서의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을 해왔어요.

 

이에 따라 국군은 방어선이 취약하여

 

분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의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천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해 병력을 운용하였어요.

 

 

 <1사단과 6사단청성부대마크>

 

 2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9월 10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였어요.

 

 제8사단과 제7사단을 작전계획에 따라 배치하여

 

 남, 서, 북쪽의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적 제15사단의

 

전차 및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3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적 제2군단에 맞서 국군은 제8사단과

 

 제7사단 및 추가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습니다.

 

 

 

 

이러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구글

 

 

 

 

 

 

6ㆍ25전은 끝을 맺지 못한 전쟁입니다.

 

국토는 전쟁 이전처럼 계속 분단된 상태고,

 

 북의 계속되는 도발로 인해 이전보다

 

더 팽팽히 대치중인 상태입니다.

 

정확하게 3년 1개월 2일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6ㆍ25전쟁은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1950년 미군 제7보병사단과 국군17연대의 도보행군 모습>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

 

그런데 3년이 넘는 시간

 

이 전쟁을 분석해 보면 군사적으로

 

가장 극적인 전투가 벌어진 순간은

 

 전쟁 초기 1년간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거의 1년이 되는

 

1951년 5월말의 중공군 제6차 공세 이후부터

 

 휴전까지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전쟁 초기 1년 동안

 

서울의 주인이 무려 4번이나 바뀌었을 만큼

 

남북으로 무려 2,300여 킬로미터를

 

 쉴 새 없이 오르내렸지만, 나머지 2년 동안은

 

겨우 50여 킬로미터 정도를 밀고

 

 당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 한반도에 내려온 중공군은 엄연히

 

교전 대상이었는데 단지 이들을 만주로

 

몰아낸다고 과연 중국이 전쟁을

 

포기할 것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입장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정치적 한계였지만,

 

참전을 단행한 중공군 입장에서는

 

 단지 하나의 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치 외교적으로 종전을 이루지 못하는

 

 한, 군사적 공세로 전쟁을

 

마무리 짖지 못할 가능성이 컸고,

 

때문에 군사적으로 우위에 섰음에도

 

 재 북진을 주저한 것입니다.

 

 

 

중국도 미국도 전쟁을 일방의

 

 승리로 끝낼 수 없다고 판단이 서자,

 

 지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짖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전선이

 

 형성된 바로 지금, 휴전을 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었습니다.

 

 결국 회담은 시작되었고, 그러다보니 전쟁의 목표는

 

 휴전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6ㆍ25전쟁 후반기를 상징하는

 

 고지전이 개시된 것입니다.

 

 

 

 

출처: 국가보훈처

 

당시 전선의 중앙인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무명의 395고지는

 

 특히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연일 혈전이 계속되던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에서

 

이 고지가 서남쪽 꼭짓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이 연속하여 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 국군의 전설이 피로 쓰여 지게 됩니다.

 

 

 

<철의삼각지: 철원,평강,금화(김화)지구를 삼각형으로

 이은 전략적요충지 서울과 그밖의

여러곳을 연결해주는 교통중심지였다>

395고지를 아군이 점령하더라도

 

 북쪽에는 이곳을 내려다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크게 유리한 측면은 없었지만, 반대로 적이

 

 이곳을 차지하면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약 15킬로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야 하며

 

 중부전선의 주요 통로를

 

차단당하게 되는 위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북악산을 적이 차지한다면

 

남산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쳐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395고지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본 철원평야 일대>

 

1951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미 제3사단과

 

교대한 제9사단이 계속하여

 

395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952년 10월이 되면서

 

 쉽게 타결될 것 같은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전선은

 

상대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기 위해 격화되었고

 

 395고지 일대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395고지를 공격하려 북쪽 효성산에 3개 師(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제 38군이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여타 중공군 부대와

 

달리 이곳에 투입을 목적으로

 

오랫동안 후방에서 훈련받았고 화력도

 

 막강하게 편성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적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격전은 예견되었습니다.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면 화력이었는데,

 

 문제는 피아가 뒤엉켜 싸우는

 

 고지전에서 화력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고지전" 中>

 

당연히 병력이 많은 쪽이 우세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때문에 아군은 반드시 고수할

 

고지만 선별적으로 확보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395고지는 반드시 사수해야 했고

 

 당연히 피를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집결한 적을 향하여

 

 화력을 집중시킬 타이밍이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적들이 역곡천을 고의로

 

 범람시켜 아군의 증원을 차단시킨 후,

 

제30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395고지 일대의

 

 진지에 격렬한 포격을 개시하면서

 

 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포격 후 연이어 개시한 중공군의 3차례 공격을

 

 아군이 모두 격퇴하였지만 병력을

 

 대폭 증강한 적이 너무 지쳐있던 아군을

 

 

10월 7일 재차 공격하자 고지가 피탈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습니다.


 

<점령된 고지위에 남겨진 적 시신>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제28연대가 즉시 반격에

 

 나서 고지를 탈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아군은 최대한 불필요한 사상을 막고

 

전투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해 순차적으로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군의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395고지는 아군과 적들이 흘린 피로 뻘겋게

 

 물들어가면서 양측 모두 인명 피해가

 

 급격히 늘어갔습니다.

 

 



전투 개시 불과 3일이 경과하였을 때,

 

 돌아가며 방어와 탈환에 나섰던

 

제28, 30연대들은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되기 곤란할 만큼

 

출혈이 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적 제113, 114사 또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예비로

 

 아껴두었던 제29연대와 제112사 마저 동원되었고

 

 이들 또한 처절하게 피를 흘려 고지를 적셔갔습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장장 열흘에 걸친

 

전투로 무려 12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의 임자가 바뀌었습니다.

 

 

<영화"고지전"中>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이 퍼부었던 포탄만 해도 무려 30만

 

 발 정도로 추정되고 하루 동안에 주인이 서로

 

 뒤바뀐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인내심은 중공군을 압도했고

 

이런 놀라운 9사단의 모습에 중공군은

 

서서히 질려갔습니다.

결국 10월 15일, 9사단의 놀라운 분투에

 

중공군은 백기를 던졌습니다.

 

사실 중공군 38군은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더 이상 투입할 자원도 없었습니다.

 

 고지 주변에서 확인된 중공군 시신만도

 

1만 4,389구였는데 이는 38군의 60퍼센트 정도였고

 

 부상자까지 따진다면 38군이 전투를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참하게 녹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희생됐습니다.

 

 

 

 

<영화"고지전"中>

 

 하지만 전쟁 내내 국군이 하나의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더 이상은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에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병력을 마구 소모할 줄만 알던

 

중공군도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국군은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작전 주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95고지는 전투 중 실시된 엄청난 포격으로

 

말미암아 높이가 1미터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황폐화됐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 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국

 

군 역사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적 1개 군단을 궤멸시킨 제9사단에게는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한국군 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소비를한 전투입니다..

 

 

 

 

 

한국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자랑하는 중국군의 궁식전사에도 드물정도로

 

한국군의 승리를 인정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마전투에 백마3군신이라

 

불리우는분들도 기억해주시길바랍니다..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 . 요봉규 하사 . 안영권 하사 등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공격정면에서

 

지형상 포병 및 공군 화력으로

 

 도저히 제압할수없는

 

난공불락의 적 특화점에 수류탄 다발을 안고

 

 육탄 돌입하여 파괴함으로써

 

국군이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마고지 3군신으로

 

 불리우고있는 용사들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그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헌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

 

오늘은 6.25 한국전쟁 당시 치열하게 싸웠던 무기

 

 그중에서도 top10에 대해 한번 알아보려고합니다.

 

 

 

 

1. M1개런드

 

 

M1 개런드

 

(M1 Garand. 공식 명칭은 the United States Rifle, Caliber .30, M1)는

 

세계 최초로 보병 부대에 널리

 

보급된 반자동 소총이다.

 

1936년 M1 개런드M1903 스프링필드를 대체하는

 

 표준 제식 소총으로 미군에 공식 채택되었다.

 

 1957년 미군에서 M1 개런드는 M14 소총에 의해 대체된다.

 

 

 

한국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군

 

M1 개런드를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로

 

 제공받아 주력 소총으로 사용하였다.

 

 대한민국군에서는 M16 소총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

M1 개런드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서 많이

 

쓰였으며 베트남 전쟁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30-06 스프링필드 탄을 사용하고 롱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 회전 노리쇠 방식으로 작동한다.

 

 

2. M1 카빈

 

 

 

 

M1 Carbine (M1 카빈)

2차 세계대전 - 한국전 미군의 반자동 소총

사용국가 : 미국, 한국 등

생산연도 : 1941년 - 1964년

무게 : 2.4 kg

길이 : 90 cm

사용탄환 : .30 Carbine (7.62x33mm)

장탄 수 : 15발 / 30발

유효사거리 : 270m

생산량 : 600만 정

 

사진으로는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지방에 사는 예비역 남자들은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길이는 90cm로 K2 소총(97cm)보다 짧으며

 

무게 또한 2.4kg으로 M16A1 (2.8kg), K2 소총 (3.2kg) 과

 

 비교해서 굉장히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포확속으로] 中에서>

 

 

2차대전 종전 후, 1945년 9월 한반도로

 

 진주한 미군에 의해 M1 카빈이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M1 개런드는 미군에게도 크고 무겁고

 

반동이 센 총인 관계로 당시 한국인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총이었는데,

 

M1 카빈은 거의 아시안에 맞췄다고 봐도

 

될만한 총이라 한국전쟁에서도 인기가 아주 높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초기, M1 카빈을 메고

행군 중인 국군의 모습이다. >

 

<인민군 포로를 잡은 한국군 병사, 좌측의 병사는

 M1 카빈을, 오른쪽 병사는 M1 개런드와

 노획한 것으로 보이는

 총검이 꽂힌 모신 나간트 소총을 메고 있는모습>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국군은 M1개런드와

 

 M1 카빈을 계속해서 제식총기로서 운용하게 된다.

 

특히 북파공작원에게 주로

 

지급되는 무기가 M1 카빈이었으며,

 

고증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이 M2 카빈을 가지고 훈련하는 모습이 나온다.

 

 

2016년 현재까지 지방의 향토예비군 사단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거의 폐급 수준의 M1 카빈이 많으며,

 

지원자에 한해 사격하기도 하고

 

지급만 하고 사격은 M16A1 으로 하던가

 

심지어 조교가 옆에서 도와주며

 

한발씩 장전해서 쏘기도 하는등...

 

거의 총기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해본 예비역들의 증언에

 

따르면 반동도 적고 명중율도 좋으며

 

탄착군이 잘 모이는 착한 총이란 평가가 많다.

 

어르신들은 "애무왕" 또는 "칼빈"이라고

 

하면 다들 아실거다.

 

 

 

 

 

3. M1918 브라우닝

 

 

구경: 7.62 mm
탄약: .30-06 스프링필드(7.62mm×63mm Springfield)
급탄: 20발들이 사다리꼴 탄창
작동방식: 가스 작동식, 틸팅 볼트 방식, 오픈 볼트
총열: 610 mm
전장: 1214 mm
중량: 8.8 kg (탄창 없이)
발사속도: 분당 300발(저속), 분당 650발(고속)
총구속도: 805 m/s
유효사거리: 548 m (600 야드)

 

 

1952년 12월 한국 전쟁 당시 노리고지 전투에서

 

1사단 소속 박관욱 일병이 이 총 한 자루를

 

들고 고지를 점령해 낸 적이 있다.

 

 이 일로 '노리 고지의 불사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국군은

 

 물론 미 제1 군단장(John W. Kendall 중장)은

 

이 광경을 보고 '내 군생활 30년 동안 저런 병사는 처음본다'라고

 

놀라기도 했고,

 

 이 병사에게 미국 은성훈장을 수여받도록 조치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도 한국군 병사가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현대 한국 밀덕이 읽는 '바'가 아니라 '에이알'이라고 읽는 점이다

 

 

<6.25 사변 당시 M4 셔먼전차 뒤에서 중국 공산군의 거점에

 M1918A2 브라우닝 자동소총으로 사격을 가하는 미군 병사 - 1951년>

 

 

 

4. PPSH-41 기관단총

 

종류 기관단총
생산년도 1941~1950
구경 7.62mm
사용탄약 7.62x25mm 토카레프
탄창 35발들이 바나나 탄창
71발들이 드럼 탄창
무게 3.63kg(탄창 없을 때),5.5kg (71발 드럼탄창)
작동방식 블로우백, 오픈 볼트
연사속도 900발/분
최대사거리 200m
길이 269mm
전장 843mm

 

한국전쟁 당시의 북한군, 베트남전 당시의

 

북베트남군 등 공산진영에서 사용하였다.

 

독일군은 휴대법과 모양 때문에 발랄라이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따발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어 키릴 문자로 읽으면 입에 착 감기게 "뻬뻬샤"라고 부른다.

 

'아빠'라는 뜻의 '파파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밀덕계에서는 별명 '파파샤'가 정식명칭보다 더 알려져 있었다.

 

 

6.25 직전 북한에서는 PPSh-41 를

 

"따발총 49식 기관단총"이라는 이름으로

 

자체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김일성이 각료, 군지휘관들과 한 컷.

 

김일성 바로 왼쪽이 심복인 김책이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자체 제작된 연발총기라고 생각된다.

 

 북한에서는 49식이라는 이름으로 제식화했으며,

 

이후 6.25 남침의 상징이 되었다.


 

 

 

5. M1/M2 박격포

 

포열 전장: 1.22 m
전체 중량: 151 kg
포열: 48 kg
포다리: 24 kg
포판: 79 kg
유효 사거리: 515 m~
최대 사거리: 4 023 m

2차대전 때 미군이 개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원래 연막탄과 화학탄을 운용하기 위한

 

M1 화학탄 박격포의 후신으로 개발되었다.

 

1차 대전 이후 화학무기 규제 풍조 때문에 작열탄을 쓰는

 

 방향으로 돌아서서 M1 기반으로 개발한 것이 M2.

포다리가 양각대가 아니라 단각대 형태였다.

 

그리고 박격포에서는 비교적 드문 편인

 

강선식 포신, 탄 역시 일반적

 

 박격포탄의 안정핀이 없는 일반 총탄이나 포탄 형태에 가깝다.

 

강선식은 연사속도가 좀 느려지고,

 

 강선의 두께 만큼 포가

 

 과열에 약해지는 단점이 있으나 바람에 영향을 덜 받는다.

 

조준경을 포구 근처에 끼워서 조준하기

 

 때문에 쏘기 전에 반드시 분리 했던 점 또한

 

 M2의 특징이자 단점 중 하나.

3분할해서 도수운반 가능하지만,

 

보다시피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포판은 2인이 앞뒤에서 들고

 

운반하게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다.

 

 

 

 

 

6. M3/곡사포

 

구경 105mm
전장 3.94m(견인상태)/포신장 1.88m
전폭 1.70m
전고 1.27m
전비중량 1,130kg
포탄중량 14.98kg(유탄)
발사속도 최고 분당 4발, 지속 분당 2발
포구초속 311m/s
최대사정 7,586m
유효사정 6,525m
부앙각 -9〜30도
좌우사각 45도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야포에 비해

 

국군의 대응 전력은 사거리나 화력

 

 모두에서 절대 열세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쟁 초기에도 국군 포병부대는

 

 그야말로 놀라운 분투를 펼쳤고 오히려

 

북한군을 압도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창군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고의

 

중화기였던 105밀리미터 M3 곡사포(이하 M3)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신화를 썼던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국군은 창설 당시에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을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였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 이후에도 국군이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65,000명의 병력을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지원하기로

 

한국 정부와 1949년 9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남침을 위해 북한에게 충분한 물자를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국군이 38선 경비와 국내 치안 유지에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만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M3 곡사포 발사 장면

<사진:육군 한국전쟁사 싸이트>



M3 곡사포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대 중화기였다.

 
흔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북한군 전차가 튀어나와 아군이 당황한 것처럼

 

 묘사된 글이 많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북한군의 전력 증강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전쟁 전에 수 차례에 걸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전차와

 

야포 그리고 전투기의 공급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남북간의 전력

 

격차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북한이 남침 능력을 오판하여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포병 장비도 당시 미군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155밀리미터 M1(이후 M114) 곡사포는

 

 고사하고 보병 지원용으로 대량 사용하던 105밀리미터

 

 M2(이후 M101) 곡사포도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국군에게 2.36인치 로켓포와 57밀리미터

 

대전차포 그리고 M3을 공급하여 주었지만

 

 이마저도 대부분 정비를 요하던 상태였다. 하지만 국군은 이를

 

 해방된 내 나라를 지켜 주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 귀하게 다루었다.

 

<출처및참고자료:유용원의군사세계>

 

 

 

 

7. SU-76 경자주포

 

 

SU-76
중량 10.6t
전장 4.88m
전폭 2.73m
전고 2.17m
승무원 4명 (전차장, 포수, 장전수, 조종수)
장갑 16mm ~ 35mm
주무장 76.2mm ZiS-3 대전차포 1문
부무장 없음.병사들의 개인화기로 방어
엔진 GAZ-203 가솔린 엔진 2기 (170hp)
출력비 17hp/t
현가장치 토션 바
항속거리 320km
속도 45km/h
생산량 14,292대 이상

<한국전쟁 당시 촬영된 사진. 미군과 국군이 격파된 SU-76을 둘러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북한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당시 T-34/85 수량의 절반이 넘는

 

 150대 이상을 남침에 사용하여,

 

초반에 장비가 부족한 국군에 크나큰 출혈을 강요했다.

 

 이후 국군에 장비가 인도되고 UN군이 증원되면서,

 

 역시 상부 개방식 경장갑 전투실 덕분에 다수의 SU-76

 

 유엔군과 한국군의 바주카, 대전차포,

 

육박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또한 그 당시 국군은 훈련도 빈약하고

 

기갑장비 자체를 본 일이 극히 적어서 M8 그레이하운드

 

정찰 장갑차를 전차로 오인할 정도였으므로

 

 SU-76을 격파해도 전차 격파로 센 일이 많다.

 

 

이후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대다수가 장비를 버리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다량의 SU-76이 UN군에게 노획되었으며,

 

이중 일부 차량은 정비를 하고 국군 표시를

 

페인트로 칠한 다음 국군에 의해 운용되었다.

 

그러나 노획 차량이므로 장기간의 정비운용이 어렵기 때문에

 

 정식으로 한국군에 기갑장비가 인도되면서

 

 차차 소모돼서 사라졌다.

 

이후로 모두 폐기처분되었는지 국내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한국전쟁 외에도 공여된 국가나 제3국에서 실전에

 

간간히 투입되었으며,

 

 워낙 생산된 숫자가 많기 때문에

 

구공산권의 군사박물관에 1대씩은 보존되어 있다

 

 

 

8. M8 그레이하운드

 

 

  • 전장 : 5.01m
  • 전폭 : 2.54m
  • 높이 : 2.64m
  • 중량 : 7.8t
  • 엔진 : Hercules 6기통 가솔린
  • 출력 : 110hp
  • 최대속력 : 90km/h
  • 항속거리 : 640km
  • 무장 : 37mm M6 전차포 1문, 7.62mm 기관총 1정, 12.7mm 기관총 1정
  • 장갑 : 최대 19mm
  • 장갑 : 8~15mm
  • 승무원 : 4명
  •  M8한국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이었다.

     

     총 27대를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았으며

     

    모두 독립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미국이 이 장갑차를 공여한 이유는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에 기갑부대를 창설할 필요는 있으며

    ,

    그 때 경험이 있는 기갑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얼핏 보기에는 전차와 비슷하며 탑승원 수나

     

     좌석 위치가 전차와 비슷하나

     

    장갑차이며 방어력 및 화력이 약해

     

    공세적으로 쓰기에는 어렵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레이하운드가 한국에 도입된 후에는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38선을 순회하면서

     

     아군측 전차로 선전하기도 했고,

     

    심지어 T-34를 상대로 대전차전(!!)을 벌여

     

     장갑차 2대의 연계 플레이로 우선 1대가 T-34의 무한궤도

     

    맞추어 기동불능에 빠지게 한 후,

     

    무한궤도를 수리하려고 운전병이

     

    전면장갑에 있는 해치를 열고 나올 때 바로

     

    그 해치를 매복한 나머지 1대의 장갑차가 사격,

     

     T-34를 격파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태생이 장갑차인지라 무리하게 전차전에

     

    투입된 결과 크나큰 피해를 입어야 했고,

     

     이후로도 연이은 격전에 잇달아

     

     투입되면서 점차 소모되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시작할 무렵에는 극소수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운용 기록은 1950년 11월의

     

     청진 전투에 투입된 것이지만 그해 12월 흥남 철수에서는

     

    적재 물자 목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시점에서 전량 소진된 것으로 추측되었지만

     

    사실은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 손실분 중

     

    일부는 타 부대로 파견된 것들이고 이후에

     

    미국의 원조로 넘겨받아 52년도 광복절 사열식

     

     사진에도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가 나온다.

     

     

     

    9. M36 잭슨 구축전차

     

  • 중량: 29t
  • 전장: 7.46m (돌출된 포신 포함)
  • 전폭: 3.05m
  • 전고: 3.28m
  • 승무원: 5명 (전차장, 조종수, 포조작원 3명)
  • 장갑: 9mm ~ 108mm
  • 주무장: 90mm M3 전차포 1문 (47발)
  • 부무장: M2 중기관총 1정 (1,000발)
  • 엔진: 포드 GAA V-8 가솔린 엔진 (450hp)
  • 출력비: 15.5hp/t
  • 변속기: Synchromesh 기어박스형 (5단가속 1단후퇴)
  • 현가장치: 수직 벌류트 스프링 현가장치 (VVSS)
  • 항속거리: 240km
  • 속도: 42km/h
  • 생산량: 1,413대
  •  

    물론 M36은 본격적인 전차는 아니어서

     

    사실상 경전차 취급을 받았지만 전차가

     

     아쉬웠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게다가 화력만큼은 당시 미국의 주력전차인

     

    M46 패튼과 사실상 동일했으며,

     

    구경도 90mm라 지원포격용으로도 쓸만했다.

     

    1953년 1월부터 정전 때까지 53전차중대

     

    3소대장으로 M36 경전차를 몰고 전장을

     

    누빈 김봉기(金鳳起·75·갑종24기)예비역 대령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M36 경전차를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M36 경전차는 주로

     

     소대급 단위(전차 5대로 구성)로

     

    실전에 투입돼 주로 보병의 돌격전에 기동간 화력지원을

     

    하는 형태로 운용됐을 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같이 대규모 전차전을

     

     벌인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미 북한의 주요 전차인 T-34/85는 퍼싱과

     

     이지에잇, M46 패튼한테 다  갈려나갔다.

    한국 육군에서는 1959년 퇴역했으며 이후

     

    상당 기간 전방 지역 고지에서 고정포로 운용됐다.

     

    현재는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이나 상무대에 위치한

     

     육군기계화학교에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

     

     

    <광주 금남로를 행진하며 지나 가는 대한민국 건군

     최초의 기갑부대 창설 전차 M36 잭슨 구축 전차대 - 1955년 3월 1일>

     

     

     

     

    10. T-34 중형전차

     

    중량 32톤 /전장 6.68m  전폭 3.0m / 전고 2.45m /

    승무원 4명 / ZiS-S-53 85mm 전차포 (적재탄수 60여발)

    / 7.62mm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360km / 최대속도 53km/h

     T-34는 2차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차임에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기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북한군이 T-34

     

    앞세워 남침을 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지원으로 가장 최신형이라

     

     할 수 있는 T-34/85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고 당시 가지고

     

    있던 대전차화기로 격파하기도 어려웠다.

     

     

    사실 북한군이 보유한 T-34는 전쟁의 모든 것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전쟁 발발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말부터

     

    다양한 전차 저지 수단이 확보되면서 이를 격파하는데

     

    그다지 애를 먹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부터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던 쓰라린 아픔과

     

    서울 도심을 질주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T-34는 개발국이자 최대 사용국이었던 소련에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하여 조국을 구한

     

     귀한 전차로 지금도 대접받고 있지만 이처럼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상징물이 되어버렸다.

     

     같은 사물이라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각각 다른 이에게

     

    혜택과 피해가 동시에 나타나는 무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까지 6.25 한국전쟁에 사용되었던

     

     대표적인무기 TOP10을 살펴보았는데요..

     

    5시간동안 앉아서 열심히썻는데

     

    모자란부분은 이해부탁드려요~

     

    곧 돌아오는 6.25를 생각해서 써봣습니다

     

    재밋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및출처:나무위키.구글.유용원의군사세계>

     

     

     

     

     

     

    그동안 많은사람이 알지못했던 6.25전쟁 이후 미국의 영웅이 된 한국 출신의 말 한마리 이야기

     

     

     

     

    갈색의 몸에 발과 얼굴 앞쪽은 하얗게 털이난 사랑스러운 암말의 이름은 여명이었다.

    여명은 경주마로 서울 신설동 경마장 부근에서 소년마주 김혁문이라는 사람이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누나 김정숙이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자 의족을 사기 위해 
    사랑하는 세살배기 여명을 미해군에게 250달러에 팔게 되었다.


    여명을 구입한 사람은 미 해병 1사단 5연대 소속의 대전차 무반동포 소대의 소대장 에릭 피더슨 중위였다.
    그는 산악지형이 많고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한국에서 수송용으로 쓰기 위해 자신의 사비로 구입하였다.

    1952년 10월 26일 피더슨 중위는 윌라드 베리 병장, 필립 카터 상병과 함께 
    서울경마장에서 돈을 지불하고 수송차량에 여명을 실었다.
    소년 김혁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사랑하는 여명과 이별을 하였다.
    유망했던 경주마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군용마로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 레클러스와 조셉 레담 중사 >





     
    미해군부대로 오게 된 여명은 처음에는 리코일스(무반동) 이라고 부르다가 
    곧 소대의 별명인  '레클러스 라이플 Reckless Rifles' (겁을 상실한 포)을 따서 '레클러스' 라고 불렀다.


    레클러스는 조셉 레담 중사를 비롯하여 많은 해병들이 훈련시키고 돌봐주었다.
    그녀는 전장에서 살아 남기 위한 여러 훈련을 받았다.
    '적이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리면 벙커로 도망가 숨는것이 가장 먼저 배운 훈련이었다.


     

     


    얌전하고 순한 그녀는 훈련이 없을때에는 부대 부근을 자유롭게 돌아 다닐수 있도록 고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레담 중사의 텐트에 들어와 옆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여러가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소대원들을 즐겁게 하였다.
    스크램블 에그를 먹고, 코카콜라와 맥주를 마셨다. 
    심지어 베이컨, 토스트, 초콜릿바, 사탕, 피넛 버터 샌드위치, 으깬 감자까지 모조리 다 먹었다.
    이렇게 소대원들에게 있어서 레클러스의 존재는 전장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움도 잠시였다.
    미군들이 ' 헤디 (당시 헐리웃 섹시여배우 헤디 라마)의 사타구니 ' 라고 부르던 곽촌리 부근의 전투에서
    레클러스는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개당 11kg인 무반동포의 포탄을 그녀의 등에 6개를 싣고 운반하는 첫 임무가 주어졌다.
    귀를 찢는 포탄과 총의 소음에 바들바들 떨며 두려워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1953년 3월 정전 협정을 4개월 앞두고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중 판문점에서 16킬로 떨어진 지점인 현 연천군 장남면 매향리 지역인 네바다 기지 ( 베가스, 레노, 카슨 세개의 전초로 이뤄짐) 가
    전략적 요충지로 중공군 120 사단이 침공을 하였다.

    가장 고지였던 베가스 전초기지가 먼저 공격을 받았고 이곳이 무너질 경우 나머지 전초기지도 함락되는것이다.
    이 때의 포사격은 판문점의 평화협상테이블에 까지 생생히 들릴 지경이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 마저도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포격전이 펼쳐졌다.

    이 5일 밤낮으로 지속된 베가스 전투에서 레클리스는 전설적인 활약을 하게된다.

    분당 500발의 포가 사방에서 터지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비탈진 산의 정상으로
    혼자서 포탄을 싣고 운반하던 것이다.

    한번에 11킬로의 포탄을 6~8개식 등에 싣고 45도의 급경사진 산을 올라 가기글 하루동안 380 여회.
    거리로 따지면 5~60 km가 넘는 거리였다.

    이렇게 그녀는 하루만에 4000 kg의 포탄을 날랐다. 
    그 전투에서 사용된 포탄의 95프로의 물량이었다.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레클러스가 말 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진작되어 적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전 해병대 상병 바빗

     

     

     

    그녀는 용감하고 똑똑했다. 포탄이 근처에 날라오면 피하기도 재빨리 다른곳으로 돌아 가기도 했고
    통신선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움직였다.

    포탄을 배달하고 내려갈때에는 부상자를 태워 운반하였다.

     

    "상처를 입은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외로이 충성스럽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녀의 모습이 나의 머리속과 가슴에 영원히 각인되었습니다. " --- 전 해병대 하사 해롤드 워들리  

    이 전투에서 그녀는 두번이나 부상을 입었다. 왼쪽 귀와 옆구리에 포탄의 파편이 박혔지만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렇게 부상을 당한 레클러스를 보호하기 위해 미해병대는 전우애을 발휘하여 자신들이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레클러스의 활약으로 짱깨군은 1300여명이 사망하는 전과를 올렸다. (미군 사망은 118명)
    이 전투에 승리한 덕분에 한국은 많은 땅을 더 획득할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그녀의 활약에 감동을 받은 미군은 그녀를 상병으로 특진시켰다.

    그 후 부상으로 전면으로 나서진 못하지만 후방에서 많은 물품들을 실어 나르며 활약을 하였다.


     

     

     

    "저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능에 정말 놀랐습니다.
    믿으실지는 몰라도 그녀는 다른 해병대와 같은 단결심과 소속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우와 함께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모두의 관심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모든 해병들이 그녀를 사랑하는것이 분명합니다. "
     ---- 전 해병대 사령관, 해병대 1사단장 대장 랜돌프 페이트 

    전쟁이 끝나고 몇개월이 지난 1954년 4월 10일 
    미해병 1사단장인 랜돌프 M. 페이트는 레클러스의 활약을 치하하며 하사로 진급시켰다.
    이 진급식에서 그녀는 부대휘장이 새겨진 금색과 빨간색의 화려한 담요도 상으로 받았다.

     

     

    <레클러스의 하사 진급 축하행사 >




    그리고 자신을 처음으로 해병대에 입단시킨 에릭 피더슨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땅을 밟게 되었다.

    그 전부터 언론을 통해 미국 본토에서도 그녀의 영웅담이 알려지며 관심을 한몸에 받았지만
    해병대는 그녀를 단순한 상업적인 흥미에 노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 하였다.

     

     

    < 미국에 도착한 레클러스와 피더슨 중위 >


    그 후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있는 미해병 1사단 5연대 소속 캠프 펜들튼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VIP 대접을 받으며 관리되며 세 마리의 자손을 낳았다.

     

     

     


    1955년 미국에서는 레클러스의 영웅담을 다룬 책 " 레클러스 : 해병대의 자랑 " 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페이트쨩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해병대 사령관 (4스타) 까지 진급한 뒤
    1959년 8월 31일 다시 한번 레클리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행사를 자신이 직접 주최를 하였다.
    이 행사에서 1700명의 해병대원이 그녀에게 거총경례를 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1968년 캠프 펜들튼에서 잘 지내던중 목에 가시철사 펜스가 박히는 부상으로 숨을 거두었다.
    미해병대는 정식으로 군장례식을 치뤄주고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그녀가 생전에 받았던 훈장은 다음과 같다.

    Purple Hearts (베가스 전투의 부상으로 받음) 
    Good Conduct Medal (선행장; 부사관에게 교부되는 근무기장)
    Presidential Unit Citation (미국 대통령 표창)
    National Defense Service Medal (국방 종군기장)
    Korean Service Medal (한국 종군기장)
    United Nations Korea Medal (UN 종군기장)
    Navy Unit Commendation (미해군 표창)
    Republic of Korea Presidential Unit Citation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1997년 미국의 유명한 잡지 LIFE 에서는 미국의 100대 영웅들 ( 링컨, 루즈벨트등 미국 역사의 영웅들을 뽑은 리스트)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2013년 7월 26일. 국립 미해병대박물관이 있는 기념공원에 한국전쟁 종전 60주년 기념으로 레클러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동상의 아랫부분에는 그녀의 꼬리털 묶음도 함께 전시되었다.

     


    2014년 7월 29일 레클러스가 활약했던 판문점-베가스 전투가 벌어졌던 연천군은 레클러스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공원을 만들기로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조국에서는 알려지지 않던 레클러스의 헌신과 노력이 알려지길 기대해본다.

     

     

     

    출처 : 구글. 위키피디아, 엔하위키

    동영상참조 :http://www.youtube.com/watch?v=YIo3ZfA9da0

     

     

     

    6.25하면 보통 인천 상륙작전이나

     

    낙동강전선 다부동전투,

     

    아니면 백마고지 전투 같은거

     

     많이 떠올리는게 일반적인데

     

    나는 6.25 전쟁의 방향을 결정지은건

     

    다름아닌 6사단의 춘천전투라고 봅니다.

     

    6사단이 춘천에서 북괴 2군단을 발라버리면서

     

     적의 주요 전략을 완전히 뒤틀어버렸고,

     

    그 덕에 그나마 남은 병력과 장비를

     

     추스려서 낙동강 전선이라도

     

     구축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6.25 개전 당시, 북괴의 개전 초 전략입니다.

     

    서울을 위시로한 서부전선에는 시가지도 있고,

     

     국군도 3개 사단이나 있고, 인구도 많아

     

    징집 땜빵이 쉬울 것으로 보이니

     

    이곳 전선을 모루로 삼고

     

    동부전선의 2군단을 망치로 삼아

     

    춘천을 거쳐 수원방향으로 우회하여

     

    서부전선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던 게

     

     북괴의 주 전략이었습니다.

     

    이게 성공했다면 장비를 버렸더라도

     

     병력이라도 건진 1사단이나 7사단, 수도사단이나

     

     피난민들은 뒤에서 북괴 1군단, 앞에서 북괴 2군단을

     

     만나 포위 섬멸당했을 것이고, 한반도 남부에 있던

     

    서너 개 사단은 집결하기도 전에 휩쓸리고,

     

    김일성의 장담대로 8월 15일에

     

    북괴군은 부산까지 도달했었겠죠.


    이를 위해서는 망치의 진격로상에 있는

     

     6사단을 초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북괴는 서부전선보다도 더한 병력집중을 시켰습니다.

     

     6사단 하나 잡으려고 2개 사단에다가 자주포,

     

    모터찌클연대까지 증원시켰고 예비사단까지 뒀습니다.

     

     병력격차가 세배쯤 났을거에요


     

     

     

    근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춘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7연대는

     

     북괴 2사단의 초전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소양강 도하를 준비하던 적을 상대로

     

     오히려 아군이 역 도하하여

     

    기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심일소위 및 특공대가 한국전쟁

     

    최초의 적 기갑 격파 타이틀도 따냈습니다.


    거기에 적의 진격로를 예측했던

     

     6사단 포병대대가 성공적인 화력지원을 수행해,

     

    강안을 따라 진격하던 북괴 6연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수십문의 북괴 곡사포 및

     

     대전차포 등을 격파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인제-홍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2연대는

     

    배속받은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작전에 돌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적 12사단의 공격을 저지해냈습니다.


    사단 예비였던 19연대는 춘천과 인제를

     

    오가며 효율적으로 예비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춘천에서 북괴 2사단이 소멸당하자, 북괴는 12사단에서

     

     일부 전력을 빼내어 춘천 쪽으로 돌렸고,

     

    그동안에 6사단 예비였던 19연대가 춘천에서

     

    인제-홍천쪽으로 이동하고, 6사단 포병대대도 일부를

     

     이동하여 인제-홍천방면을 지원. 여기서도 매우 효과적인

     

    포병대대의 지원에 힘입어 오히려

     

    적 12사단 잔류병력까지 괴멸시켰습니다.

     

    개전 3일도 안되서 사단 두개가 사라졌죠

     

    망치와 모루를 하고싶었던 것 같은데

     

     망치가 파괴됬죠 ㅎ


    이때 더 소름돋는게 있는데, 춘천과 인제를 왔다갔다

     

     하면서 연대급 적을 궤멸시키고 적 포병도

     

     소멸시키던 6사단의 포병대대 전력은

     

    사거리 10km도 안되는 105mm

     

     M3 견인곡사포 13문이 전부였습니다.

     

    꼴랑 13문가지고 이리쪼개고

     

    저리쪼개서 적시에 적소에 화력지원.


     

     

     

    비록 서울이 함락되긴 했으나,

     

    6사단이 적 망치의 핵심 진격로였던 춘천을 방어하고

     

    오히려 망치를 때려잡아버렸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아군 병력을 상당수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기습 상륙한 적에게 포위되었던 8사단은 병력과

     

     장비를 상당수 보존하며 대관령을 타고

     

    철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고 때맞춰 도착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굳히기를 시전했죠.

     

    북괴의 공세종말점은 거기였고, 낙동강 전선은

     

     좁은 전선폭과 전선의 형태가 예비대를

     

    굴리기 매우 적절했던 까닭에, 당시의

     

     치열한 전투랑은 별개로

     

     매우 효율적인 방어선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다들 알다시피 북진이었고...

     

    6.25 전쟁 초 북괴의 전략을

     

    6사단이 완전히 뒤엎어 놨습니다

     

    만약 안그랬으면 낙동강 전선이고

     

    뭐고 한국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6사단의 춘천전투는 널리 알려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