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1년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공산군과 UN군의 대규모 공세는 멈추었습니다. 그 당시 양측 모두 상대를 궤멸시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전선을 유지한 채 휴전을 하기로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선을 유지한다고 해서 양측의 교전이 멈춘 것은 아니였으며 조금이라도 중요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 전투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치열한 고지 전투 가운데 정말 후세에 영원히 전해질 전설적인 고지 전투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티고지전투

국군 36vs 중공군 800의 신화

주요부대 제1사단 전진부대

 

베티고지전투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인 7·13공세 당시 중공군 1군단 예하 1사단이 임진강 서안 고양대 부근의 국군1사단 11연대의 전초 베티고지를 공격하자 김만술 소위를 비롯한 소대 병력이 이틀간 백병전을 펼친 끝에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한 방어전투입니다. 서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베티고지는 그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 간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습니다.

 

 

김만술 대위(당시 계급은 소위)

 

김만술 소위의 소대가 베티고지에 투입되었을 당시에 3개의 봉우리중 중앙과 동쪽은 제 1 보병사단이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서봉은 중공군에게 빼았긴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사실상 1개 소대로 그 수많은 중공군을 공격하는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나 김만술 소위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었습니다. 항상 공격에 급급했던 중공군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당황하였고 김만술 소대는 8부 능선을 돌파하여 서봉을 탈환했습니다.

 

 

 

서봉을 탈환 후에 김만술 대위는 바로 소대원들에게 방어선 구축을 명령하고 19시 30분 중공군은 서봉 재탈환을 위하여 2개 중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공군 중대는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만술 소위는 상부에 포격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마저도 포격으로 인해 통신두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총과 수류탄으로 대항하던 김만술 대위의 소대는 중공군 2개 중대가 공격해오자 백병전을 통해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2개 중대가 박살나자 화난 중공군은 2개 대대를 투입하였는데 대략 800명정도 되는 인원이었습니다. 김만술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참호에 들어갈것을 명령하였고

상부에는 진지에 계속해서 포격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김만술 소대는 소총과 수류탄이 모자라자 철모와 야전삽 , 개머리판 손에 닥치는데로 무기가 되는것을 집어서 중공군을 사살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는 19시 30분에 시작되어 13시간 동안 새벽 동이 틀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4차례 막아내고 승리하였습니다. 비록 소대원 36명중 24명이 전사하였지만 중공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 450명, 포로 3명으로 엄청났습니다.

 

 

 

 

425고지 전투

휴전선을 35km 북상시키다.

주요부대 제7사단 칠성부대

 

화천 425고지 고지전은 정전협정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전투입니다. 425고지는 강원도 화천군 북방 철책선 1.2km 앞 비무장지대(DMZ)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이르는 요충지였습니다. 중공군 135사단은 전략고지인 425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특유의 인해전술을 펼치는 등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국군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김한준 대위는 60밀리미터 박격포를 이용해 1개 중대 병력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였으며 196명 중대원들은 굳건한 의지와 단결로 사흘간에 걸친 최후의 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국군은 화천댐을 사수하고 휴전선을 38선으로부터 35km나 북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9사단 백마부대

  주인이 12번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주요부대 백마고지전투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이 중공군 내 정예 부대라 불렸던 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이나 이를 막아내며 고지를 사수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 9사단은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국군 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중공군 1만여 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의 전투기간 동안에만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6.25 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소비 전투이며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