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

 

오늘은 시대를 잘못타고난 소련

 

 반자동소총 SKS에 대해 써보도록할게요

 

 

Simonov SKS

 

가장 짧은 기간동안 채택된

 

 구소련의 제식소총입니다

 

 

Самозарядный карабин системы Симонова (СКС)

 

사모자랴드늬 카라빈 시스테믜 시모노바

 

(시모노프 자동급탄 기병총)

 

 

사용국가 : 구소련, 중국, 북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외 동구권 국가 다수

 

개발시기 : 1945년

 

사용시기 : 1949년 ~ 현재

 

무게 : 4.105 kg

 

길이 : 1.02m

 

사용탄환 : 7.62 x 39mm M43

 

장탄 수 : 고정식 탄창, 10발 클립


 

 

 

구소련의 명총 모신나강, AK-47, 드라구노프 등에

 

밀려 거의 알려지지 않은데다

 

제식소총으로 채용된지 1년도 안되어

 

 AK-47에 그 자리를 뺏기고

 

3년도 안되어 2선급 장비로 도태,

 

지금까지 후방의 어느 창고에서 먼지 샤워를

 

 하고 계시는 퇴실 소총입니다 ㅠㅠ

 


 

 

 

Mosin - Nagant (모신나강 소총)

 

2차대전 소련군의 제식 볼트액션 소총으로서

 

 강한 화력과 높은 사거리, 명중율을

 

자랑하는 볼트액션계의 대부입니다.

 

 

1945년, 2차대전이 종전되고 소련에서는

 

이제까지 사용되어진 총기들의 데이터를

 

 분석하게 되는데

 

제식소총인 모신나강 소총의 경우,

 

 일반 보병의 소총이라기엔 너무 강한 화력,

 

 너무 강한 반동, 너무 높은 사거리 등등으로

 

" 필요 이상의 화력 "을 가졌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대전 말 혜성처럼 등장한 독일군의

 

 STG44 돌격소총의 영향으로 소구경 탄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새로운 탄환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 탄환이 바로 M43 탄환이에요.


 

 

 

7.62 x 51mm NATO (Top)

 

7.62 x 39mm M43 (Bottom)

 

 

탄두만 7.62mm 로서 같지만 탄피와 화약량이

 

다르기 때문에 파워와 사거리가 크게 차이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신나강 소총의 탄환이었던

 

 7.62mm x 54R 탄환은 너무나 강력하고 반동이 셌기 때문에

 

탄피 길이와 화약량을 수정한 탄환이 바로 M43 탄환입니다.

 

 

소련군에서는  이 탄환을 사용하는 반자동 소총,

 

돌격소총, 경기관총 3가지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SKS


 

 

AK-47

RPD 경기관총

 

 

SKS 소총은 모신나강 소총과 같이

 

고정식 탄창을 채용한 반자동 소총이며,

 

사진과 같이 10발 클립을 사용하여

 

 탄환을 밀어넣어 장전합니다.


 

 

 

탄창 옆부분의 힌지를 내리면

 

탄창 아랫 부분이 열리는데,

 

이 곳을 통하여 한발씩 총알을

 

장전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영화  <미이라3> 中에서)

 

중국제 SKS 소총 (56식 반자동 소총)을

 

사용하는 중국군의 모습이에요

 

 

 

 

세르게이 가브릴리비치 시모노프

 

SKS 소총을 개발한 소련의 총기개발자

 

 

반자동 소총인 AVS-36과  PTRS-1941 14.5mm

 

대전차 소총을 개발한 소련의 총기

 

 개발자인 시모노프입니다.

 

여담으로 AVS-36 소총은 반자동 소총이었으나

 

소련제 총기답지 않게 정밀한 기계

 

 부품들을 많이 사용하여,

 

야전에서 고장나기 일쑤였던 관계로

 

곧바로 퇴역, SVT-40 반자동 소총이

 

 그 자리에 채용되기에 이릅니다.

 

 

 

 1945년, M43 탄환이 개발되자 시모노프는

 

자신의 PTRS 대전차 소총을 참고하여

 

SKS 소총을 개발했는데,

 

14.5mm 탄환을 사용하는 대전차 소총을

 

M43 탄환을 사용하는 일반 소총으로

 

 바꾼 것과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SKS 소총은 야전에서의 실전 테스트 및

 

 개량을 통하여 마침내 1949년,

 

소련군에 제식소총으로 채용되었습니다.


 

 

 

SKS 소총은 반자동 소총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괜찮은 소총이었습니다.

 

소련제 무기답게 내구성과 작동성은 최고였으며,

 

우수한 명중율을 가졌고 관리도 쉬웠습니다.

 

사용탄환인 M43 탄환도 종래의 7.62 x 54R 탄환과

 

 같이 지나치게 강력하지 않아 병사들의 호응도

 

 높았다고 합니다.


 

 

2년 뒤인 1947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돌격소총이라는

 

 평가를 받는 AK-47 소총이 등판하면서

 

SKS은 곧바로 뒷전이 되버리고말았죠.

 

같은 M43 탄환을 사용하며 30발 탄창 장전,

 

 심지어 명중율까지 우수한데다

 

 외관까지 현대적이었습니다.

 

 

SKS 소총은 조금 더 긴 총열로 인한

 

 높은 명중율과 M43탄환을 사용한 덕에

 

얼마간은 AK-47 소총과 같이 사용되어졌으나

 

1950년대 말, 소련군부는 더 이상 SKS 소총을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

 

 2선급 장비로 도태되고 맙니다.

 

 

개발된지 15년, 제식채용된지 10여 년 만에

 

 후방부대 및 경비부대, 경찰 등지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SKS 소총, 중국 노링코 56식 소총

 유고슬라비아 수출판 SKS 소총

 

 

중국에서는 소련의 SKS 소총에 큰 관심을 보이며

 

56식 반자동 소총이라는 이름으로

 

노링코 社에서 카피되어졌습니다.

 

흔히 Chiness SKS 로 불리우는데

 

 사진과 같이 외관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에서

사용중인 56식 반자동 소총

 

클래식한 외관으로 인해 각국의 의장대에서

 

아직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국 노링코 社에서 만들어진 56식 반자동 소총,

 

 Chinese SKS 라는 이름으로 서구권으로

 

 수출되어 민수용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Type. 63 (63식 반자동 소총)

 

 

기존 56식 반자동 소총에 20발 탄창을 결합한

 

개량형 버젼으로, 중월전쟁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사용중인 63식 소총

 

 

1979년 국경 문제 및 화교 추방문제로 중국 - 베트남 간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바로 중월전쟁입니다.

 

베트남을 과거부터 속국이라 생각한 중국은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인민해방군을 파병했으나,

 

의외로 베트남 민병대의 반격이 거세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소득없이 철수하였습니다.

 

(당시 베트남군의 주력은 국경 문제로

캄보디아 국경에 거의 배치되어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중국군은 56식, 63식

 

 반자동 소총 즉 SKS 소총을 사용하였으나

 

AK-47 소총을 든 베트남 민병대에게 털려버리는

 

 수모를 겪은 후에야 SKS 소총을 버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질주>

 

우수한 명중율과 간단한 내구성 덕분에 SKS 소총은

 

 지정사수용 스나이퍼건으로도 애용되었습니다


 

 

SKS 소총에 레일 마운트를 설치하여 스코프를 장착한 모습


 

 

소련은 SKS 소총을 2선급으로 도태시킨것뿐만 아니라

 

 각지의 우방국들에 공여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주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유고슬라비아 등의

 

 동구권 국가들과 중국, 심지어

 

북한에도 SKS 소총이 공여되었으며

 

앞서 언급한대로 중국에서 56식, 63식 소총이라는

 

 이름으로 복제하여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또한 56식 반자동 소총 및 63식 소총을

 

사용한 전례가 있으며,

 

특히 많은 수가 모신나강 소총과 함께 저격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시기상

 

한국전쟁에서 SKS 소총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됩니다.

 


 

 

영화 < 위 워 솔져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은 대량의 AK-47 소총,

 

SKS 소총을 공여받았습니다.

 

당시 북베트남군의 주력 소총은 AK-47 소총이었지만

 

 이 소총이 모든 게릴라 부대에 전달되어

 

사용되기는 힘들었고

 

보조무기로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AK-47 소총과 같은 탄환을 사용하여,

보급에 유리한 점도 포함됩니다.)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여자 반군이 SKS 소총을 들고있는 모습

 

아직 군사 무기고에 SKS 소총이

 

 비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산 SKS 소총, 즉 56식 반자동 소총을 덤핑하는 광고

 

M43 탄환 1,440 발도 285불에 모십니다.

 

 

실제로 SKS 소총 및 56식 반자동 소총은

 

 미국 일대에서 사냥용, 레저용 소총으로서

 

 각광받고 있으며

 

대량의 중국제가 풀리며 가격도 아주 싸다고해요.


 

 

믿기 힘들겠지만 SKS 소총을 불펍 방식으로 개조한 모습

 

스톡만 따로 팔고, 내부 부품 (노리쇠, 바렐 등)을

 

 따로 장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SKS 소총과 56식 반자동 소총이

 

 대량으로 민수용으로 풀린만큼

 

스코프를 장비할 수 있는 레일이나 AK-47 소총의 30발 탄창을

 

 장착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어댑터도 존재합니다.

 


 

 

SKS 소총의 고정식 탄창을 제거하고 AK 계열 탄창을 장전할 수 있습니다.


 

 

 

 

SKS 소총은 괜찮은 성능을 가진 반자동 소총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대표적인 총기입니다.

 

만약 AK-47 소총과 같은 시대에 제작되지 않았다면

 

 많은 분들이 잘 알고있을거에요..

 

 

 

 

 

출처 및 참고자료: 구글.나무위키.위키백과.ORG.IMFDB

 

 


 

 

 

안녕하세요

 

제가 6사단 출신이라 그런지

 

6사단에대해서 글을 자주 쓰는거같네요^^;;

 

 

 

이번엔 한국전쟁당시 청성부대 6사단

 

활약에대해 빠르고 쉽게 써보도록할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북괴 김일성(金日成)의 명령으로

 

완전무장한 20만의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시작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북괴군은 국군보다

 

약 2배 병력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북괴군의 병력 중 3만여 정도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었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 온 김일성의 노력으로

북괴군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

 

 부담을 느낀 미국은 국군에게 군수물품 및

 

 

무기를 지원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도,

 

장비 면에서도 열세인 상황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군은 동시다발적인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즉 북한군의 연속적인 승리와

 

대한민국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등장하니,


그것은 바로 김종오(
金鍾五)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의 활약이었습니다

 

 

 

 

신화의 시작, 춘천대첩


 

 

북괴군의 초기 남침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괴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공략하고,


 

북괴군 제2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공략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 주력의 후미를 차단,

 

제1군단과 협력하여 격멸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의 주력은 북괴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6월 30일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전세가 유리했던

 

 그들은 왜 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던걸까요

 

 

그 이유는 김종오(金鍾五) 장군 예하

 

6사단 장병들이


춘천에서 북한군 제2군단 병력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성공,


북괴군의 전쟁 전략에 대한 막대한 차질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 24일.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외출 및 외박,

 

휴가를 가지 못했던 장병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군을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개전 초기 국군은 인원 편제가 부족한 상태에서

 

 적을 맞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개전 발발 2주 전,

 

 6사단장에 부임하였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판단 하에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


전쟁에 대비한 진지공사와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혼란없이 적군에 대한

 

전투를 차질없이 시행할 수 있었던겁니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은

 

춘천에 주둔한 6사단 7연대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방어준비가 되어있는

 

7연대 병력들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심일(沈鎰) 소위가 이끄는 특공대에 의해

 

 자주포(SU-76) 2대가 파괴당하고 맙니다.

 

 

(가운데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당시 북괴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은

 

강원도 인제로 진격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북괴군 제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제2사단이

 

춘천 제압에 실패하자


제7사단을 춘천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제7사단은 인제에 최소의 병력만 남기게 됩니다.

 

 

 

제2사단의 공격은 잘 막아내었으나,

 

제7사단이 원군으로 합세하여


춘천을 공격하자 신성모(
申性模) 국방부장관은

 

 6사단에 대한 철수 명령을 하달합니다.


 

 

 

이미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었고,

 

아군의 주력이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만이 춘천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적에 의해 6사단이 포위되어

 

 

격멸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6사단은 6월 29일 춘천을 포기,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6사단 19연대 소속 조달진(趙達珍) 일병은

 

 

자신을 포함한11명의 특공대를 구성,

 

6월 28일 10시경 홍천 말고개를 지나던


북괴군 전차대열에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하는

 

 성과를 이루게됩니다.

-그를 비롯한 육탄 11용사

 

현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춘천에서의 승리는 적군의 발을

 

 멈추게 하였으며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남침에 대한 논의와


 

 패퇴한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는 등의

 

소중한 시간을 벌인 전투였으며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춘천에서의 패배를 겪은 북괴군 지휘관들은

 

 일제히 교체되게 됩니다.

 

 


 (김무정 - 훗날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한다.)

춘천에서 패배한
김광협(金光俠) 대신

 

 김무정(金武亭)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제2사단장 이청송 대신 최현(崔賢)이 임명되었고


제7사단장 전우 대신
최춘국(崔春國)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제7사단은 제12사단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대통령 부대표창 1호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전투

 

 


 

 

임부택(林富澤) 장군은

 

 당시 6사단 7연대장이었습니다.


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충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쉴 틈도 없이 7연대에

 

 김종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
"우리를 따라 내려온

 

북괴군 제15사단을 격퇴하라."

7연대 병력들에게는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644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6사단 7연대 2대대 병력 앞으로


 

웬 여성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재옥(金在玉)
이었으며

 

 동락국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녀는 2대대장
김종수(金鍾洙) 소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북한군 15연대 병력들이

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김종수 소령을 비롯한 2대대의

 

각 중대장들은 김재옥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하였더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북한군이 경계병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들은 동락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적15사단

 

48연대 병력에 대한 기습을 실시하였고

 

 

 

북괴군 천여 명을 사살하고

 

중장비를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데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국군은

 

 북한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무기를 획득하였고


정부는 이 무기를 UN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내

 

 

 

소련이 북한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게됩니다.

 

국군이 반격한 전투 중 최초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 대한 1계급 특진과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김재옥 여교사는 이때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득주(李得周) 소위와 결혼하게 됩니다.

 

 

 

 

 

 

 

 

 

 

가자, 압록강으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으며…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합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北進)

 

 시작하게됩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쳤고


국군은 통일을 위하여 북한군을 추격하며

 

 

압록강을 바라고 진격했습니다.


 

1950년 10월 22일

6사단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장군이

 

지휘하는 수색대대원들이


평안북도 묘향산 부근에서

 

 김일성의 캐딜락을

 

 노획하는데에 성공합니다.


 

 

1950년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1대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게 됩니다.


국군과 UN군 중 이들을 제외하고는

 

압록강에 도달한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얼마 안 있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날 비극은 시작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뼈저린 6사단의 패배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수락한 택동(毛泽东)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키게됩니다.

 

이에 압록강까지 홀로 진격했던 7연대는

 

 순식간에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으며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불행히도 그 당시 김종오 장군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자신의 6사단을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김종오 장군은 6사단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장도영(張都暎) 장군이 6사단장에 임명됩니다.


 

 

 

국군과 UN군은 어렵게 점령했던

 

38선 이북의 영토를 포기하고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중공군은 이를 계속하여 추격했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제6사단은 강원도 화천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벌였으나


화천리 전투에서 패배
하게 되고

 

또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의 패전으로 6사단은

 

 미군들의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決死의 다짐, 용문산 전투

 

 

 

6사단은 화천리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개전 초기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아내고,

 

 충북 음성에서 최초의 승전을 거두고


국군과 UN군 중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압록강 진격을 이뤄냈던 부대였건만,

 

하루 아침에 패배하여 미군의 조롱을

 

받는 부대가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6사단은 얼마 안 있어

 

중공군에게 설욕을 함과 동시에

 


6.25전쟁에서 발생했었던 전투 중

 

 

 최고의 전과를 이뤄낸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1951년 5월 17일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

(187, 188, 189)이

 

아군 제6사단 2연대 병력들이 사수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게됩니다.

중공군은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였는데,


2연대 병력들이 도망치지 않고

 

용문산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는


용문산이 국군의 주 방어선이라고 착각,

 

'저 곳을 뚫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6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게 설욕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문산을 지키기 위해


방탄에
'결사(決死)'
라는 글자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용문산 전투 후 포로가 된 중공군들)

당시 중공군은 2연대가 지키고 있던

 

용문산을 계속하여 공격하였는데,


용문산 양 옆으로는 아군 제7연대,

 

제19연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고

 

2연대만 뚫으면 된다고 판단하여


용문산만 하염없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군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일제히 양 옆에서 튀어나와


용문산을 집중공격하고 있던

 

중공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중공군은 때 아닌 아군의 기습에 놀라

 

5월 21일, 퇴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용문산을 지키고 있던

 

 2연대 병력도 산에서 내려와


6사단은 2연대, 7연대, 19연대 병력들이

 

모두 합류한 상태로


퇴각하는 중공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화천 저수지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17,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2,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국군의 피해는 아군 전사(戰死) 107명,

 

부상 494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서는 화천 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라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중공군)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이였습니다.

 

 

 

이 전투로 6사단은 중공군에

 

 설욕함과 동시에

 

 

 

한국전쟁 역사상 최고의 성과

 

얻는 등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6사단은 강원도 홍천, 경기도 포천 등에

 

 주둔하다가 1966년, 철원으로 이동하여

 

 

 지금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켰던

 

 

 북한군 정예 제4사단이

 

 

 

바로 6사단 바로 전방에 주둔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3년 11월 20일

GOP 초병 경계를 서고 있던 상병 이기태,

 

 일병 김효섭미상 폭음을 청취하여

 

 상부에 보고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미상 폭음 청취

 

보고가 들어오자


군에서는 7연대 GOP 지역에

 

북한군의 땅굴을 의심하여

 

 시추 작업을 실시하였고


1975년 3월 19일,
제2땅굴
을 발견하였습니다.


 

 

제2땅굴 시추 작업동안 꽃다운 생명들이

 

 전사(戰死)하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1966년 철원 축선을 담당한 이후로

적의 침투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이 순간.


6사단은 철원 축선의 철책선을 담당하며

 

365일 24시간 완전경계작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맞서 용문산을 지켜내고,


중공군을 격파한 그들의 전공

 

 


 

투광등 불빛 아래 고생하는 GOP 대대원들….

그대들이 있어 이 나라가 존재합니다

 

 

雖死不敗 靑星鬪魂

압록강 물을 다시 마시자!


 

 

사진및자료출처: 육군블로그 아미누리. 구글. 위키백과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군의 노후전투기 보관소인

 

 AMARC에 대해서 알아보도록할게요


 정식 명칭이  309 AMARG로 바뀌었는데

 

 간단하게  AMARC로 쓸게요


 

AMARC의 구역과 몽산공군기지의 구역을 나눈 모습 >

 

저 AMARC 구역만 해도  2,600 에이커

 

 (318만 평, 1,052 헥타르)라고 합니다. 


그 옆 몽산은 A-10C 공격기를

 

운용하는 공군기지입니다.

 

AMARC는

 

Aerospace Maintenance and Regeneration Center의

 

 약자로서 항공기의 

 

유지 보수,재생을 맡는 기지에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1946년 몽산 공군기지에

 

 B-29와 C-47 등의 기종들을

 

 저장할 보관소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전까지

 

AMARC(Aerospace Maintenance and Regeneration Center)

 

로 불렸으나,

 

 지금은 309 AMARG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국내 사람들은 "에이 맑"이라 읽는다고 합니다.

 

땅의 지질이 알칼리성이고 강수량이 극히 적은데다가

 

습도가 매우 낮아, 비행기의 부식과 손상이

 

최소화된다고 해서 대부분 모든 군용기는

 

 이곳에 보관중이에요.

 

거의 모든 미국 내 군용기들은

 

퇴역하면 이곳에 오도록 되어있고

 

 (여의치 않은경우 NAS North Island에

 보내서 폐기처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급한 일이나 美 국내외 중고를 사려는 고객이

 

있을경우에는 여기서 보수와

 

재생을 받은다음 날려보내요.

 

 

 

퇴역한 노후항공기의 처리

 

1.퇴역 항공기의 수령

 

먼저 AMARC에서는 퇴역한 항공기를 수령해야

 

 보관을 하든말든 하는데 미군에서 

 

퇴역한 항공기는 비행이 가능하면


 

 

 

 

 

이렇게 제발로 비행해서 기어오거나

 

어디 부분이 좋지 않거나.

 

비행이 불가능한 상황일 경우

 

육로,해상수송,철도편을 통해

 

어떻게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이런식으로

 

 

C-5 수송기나 C-17 수송편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비행해서 들어올때는

 

몽산 영내 활주로를 이용하게 되는데

 

 그 활주로를 거쳐서 정비창에 도달하여

 

최종 수령된다고 보면 됩니다.

 

 

 

 

노란선: 정비창으로 들어가는 길

 

파란선: 정비창내 유도로

 

적선녹선은 공군기지와 보관소를 구분하는 선입니다.

 

이렇게 정비창에 수령된 비행기들은

 

이제 보존 처리를 시작하게됩니다.

 

 

 

2.기체 내 위험요소 제거 작업


 

 

 

퇴역 항공기 내에 있는 각종 위험요소

 

 (폭발 가능성이 있는 탈출좌석,

 

서바이벌 키트,채프,플레어 디스펜서)

 

들을 제거한 다음,

 

남아있는 연료와 모든 유압을

 

남김없이 빼버립니다.

 

 

 

 

3.기체의 부품을 확인기록한다.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한 폐기체는

 

항공기 저장작업구역으로 옮겨지는데.

 

여기에서는 기체가 비행하는데에 있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기재들의

 

이상유무를 체크하고

 

혹시라도 보안상의 문제가 있는

 

부품은 따로 비밀구역으로

 

 이동시키고 심하게 손상되어서

 

작동이 불가한 부품들은

 

 폐처리를 시키게됩니다.

 

그다음 각 부분별로 코드를

 

부여한다음 잘라낼곳은

 

 잘라내고 엔진을 떼야하는 경우에는 엔진을 떼서

 

 이걸 또 둥그런 컨테이너에 보관을 합니다.


 

 

 

사진은 밀봉이 안되어있지만 많은 엔진들이

 

 아직 가동이 가능한지 컨테이너 위 아래

 

다 밀봉해서 보관중이에요.


참고로 항공기와 엔진자체를 한번에 밀봉하는

 

경우도 있는데 F-14나 F-15같은

 

기체들이 해당됩니다.

 

 

 

 

 


4. 기체의 세척을 실시한다.


 

 

 

위험요소와 부식될 위험이 있는 부품들,

 

그리고 여러 잡다한 요소를 제거했으니

 

대대적인 세척을 실시합니다

.

밀봉을 하기 전 잡다한 것들을 씻어내서

 

깔끔하게 보관하기 위해서겠죠.

 

 

 

 

 


5.봉인작업 실시

 

 

 

깨끗하게 세척까지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봉인작업에 들어가게됩니다.


빈 공간의 파이프에는 완충물질을 채워넣고

 

대응 공간이 필요한 부분에는

 

 다른 부품으로 채워넣습니다.. 


 비닐 컴파운드 소재의 '스프레이랏'이라는

 

마감재를 이용해 두겹으로 기체를 감싸는데.


처음에는 검정색 스프레이랏으로 기체의 각종 구멍을

 

 모두 막아서 사막의 모래와 먼지, 수분, 각종 동물 과

 

 곤충들로부터 기체를 보호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백색의 스프레이랏을 덮어

 

 외부의 자외선을 막아 기체내부의 온도가

 

 균일하게 유지되게끔 합니다.


 

 

 

이 스프레이랏은 비닐처럼 된 것이 있고,

 

페인트로 뿌리는 형태,

 

이 두가지가 있는데 기체의 형상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표면이 매끄러운 캐노피 부분은 아크릴 소재로

 

 된 전용 마감재로 처리하기도 하는데


아예 폐기상태로 보거나 전시용은 이 마감재를

 

 쓰지 않고 그냥 방치상태로 놔둔다고 해요.


이렇게 마감작업까지 끝나게 되면,

 

 기체내부의 온도는 외부의 기온보다 약 9~15도

 

 정도 아래로 유지되는데.

 

혹시라도 마감작업이 잘못되어서 

 

내부 온도가 상승할 것을 대비하여 온도센서를

 

 부착해놓는다고 합니다

 

 사막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온도센서는

 

 섭씨 90도 정도가 되면 작동한다고해요.


근데 그 센서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떼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아예 보관할때부터 안붙이고 버려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엄청 늙어서 다시 비행할 기미가 안보이는

 

 C-141 수송기나 타 기체들은 이런걸 안하거나

 

 떼어버린다고 합니다.

 

 

 

 


6. 보관장소로 이동.


봉인작업까지 끝냈으니 이제 보관 주기장소로 옮기게됩니다.


보관되는 곳은 두곳인데 한곳은 비행기를 보관하는 곳이고

 

 또 한곳은 비행기의 주요 부품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부품은 컨테이너에 담기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다반사구요.


부품과 비행기는 따로 떨어져 보관되고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 C-5 기체는 창쪽은 밀봉을 안하는듯 합니다.

 

 

 이렇게 보관장소까지 옮겨진 비행기는

 

특별한 사정이 없을때까지

 

 이곳에서 대기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진속 비행기는 막 퇴역한 노르웨이 공군 C-130 인데


미국한테 보관해달라고 부탁해서 보내준것 같아요.

 

물론 이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공군의

 

 비행기들도 이곳에 와서 보관이 된다고해요.


 

 

<영길리 해리어 전투훈련기 (TAV-8B)가 보관된 모습>


 

 

 

<단좌형들>


 

 

 

<911 테러이후 아프간전에 참전했던

 C-130E 수송기. Let's Roll 마크>

 

 

 저 렛츠 롤은 911 테러 당시 빌딩에

 

충돌하지 않은 항공편인 

 

Flight 93 편의 승객이었던

 

 Todd Beamer가 이슬람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기 전 외쳤던 구호에요.


그 플라이트 93의 승객들은 기내에서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이슬람놈들이

 

 "못가면 여기서 죽는다"라고하면서

 

결국 땅에 엄청난 속도로 곤두박질해

 

 추락하여 승객들이 전원 사망하게되요.

 

 

 

911 테러를 비롯한 이 플라이트 93 사건으로

 

 인해서 미국인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2001년 이후 참전나가는

 

 미국의 군용기들은 저 Let's Roll 마크를

 

 붙이고 나가게 됩니다.

 

이슬람에 대한 모든 미국인의 항전을 뜻하는겁니다.


 

 

 


이제 항공기의 재 판매와 부품판매에 대해서도 알아볼게요

 

<쓸만한 부품을 가져가려는 모습>


약 50% 정도의 항공기는 약간의 수리를 통해

 

유사시 비행할 수 있고 전체 항공기의 가격은 

 

약 400억 달러로 알려져 있으나 기체의 상태에

 

 따라 약간 더 저렴해질 수도 있어요. 


 해외 판매가 가능해요.


지금은 퇴역한 한국 공군 T-38,

 

추가도입 목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져간 P-3B 등은

 

 모두 AMARC에서 도입했던것들입니다.


 

 

 <KAI 사천공장에서 P-3CK로

개조중인 미 해군 퇴역 P-3B 초계기>


이 밖에도 파키스탄에 F-16과 P-3를 팔기도 했고.

 

 미 공군도 필요하면 이곳의 기체들을

 

 끌어내서 사용하는데, 

 

베를린 공수작전 때 여기 저장해두었던

 

수송기들을 아주 유용하게 썼다고 합니다. 


 

 

 

 

항공기가 심하게 망가져서 복원이 불가능한 경우나

 

 보관할 필요가 없어질 경우에는 해체해서

 

각종 예비 부품들을 떼어서 판매하는데


2005년에는 19,194개의 부품을

 

 5억 6천 8백만 달러에 판매하였다고해요, 


 

 

 

예비 부품으로조차 쓰기

어려운 기체들은 모두 해체됩니다>


이 해체한 것들은 CPU같은

 

 전자 장비등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있고 고철이니 재활용을 하기도 합니다.

 

 


7.보존 관리 등급


이곳에 보관중인 항공기는 크게 5가지 기준에 따라

 

보존, 관리가 되고있어요.



1. Type 1000

 

 비행가능 상태로 복귀가 가능한 상태의 항공기를 뜻해요


 

 

 

E-2C 호크아이 2000 개수기체  Type 1000

 

개수한지 10년도 안되었고 프로펠러도

 

신형 프로펠러인데 왜 퇴역했는지 모르겠어요. 


Type 1000으로 분류된 항공기는

 

 부품의 동류전용이

 

 금지되고 매 6개월마다 보존검사를 받고

 

 매 4년마다 재 보존처리를 받습니다.

 

 

 

 


2.Type 1500

 

 완전한 보존처리는 되어 있고 부품의 동류전용은

 

 금지하며 재 보존처리를 하지 않는 항공기를 뜻합니다


 

 

 

 

3.Type 2000

 

기본적으로 보존처리의 수준은

 

같지만 부품의 동류전용을

 

 위한 장탈이 가능하고 재 보존처리는 하지 않아요.

 

 

 

4. Type 3000

 

 비행가능한 상태로 임시로 저장되는 방식.

 

저장 관리에 많은 노력이 필요해서 자주 사용되는

 

 보존기준은 아니에요



 

 5. Type 4000

 

엔진은 분리해 보존처리 하며 캐노피,주요 부분만

 

 보존처리를 합니다.

 

 최 하위 등급이며  B-52G,B-52D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주요 부품은 국방물자 재이용 판매소

(DRMO;Defence Reutilization and Marketing Office)

 

를 통해 매각됩니다.


 

 

 

 

등급이 매겨지지 않는 기체는

 

폐기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참고로 이곳에 보내는 비행기들 중

 

 상황이 괜찮은데도

 

 보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법정 내구연한을

 

 넘겼을때도 예외없이 바로 보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 날던 헬리콥터가

 

 

 

한순간에 퇴역 수순을 밟았어요.

 

 기령이 오래됐다고는 하지만..

 

참 아쉽지. SH-60F이라고 하는

 

 헬리콥터인데 대잠임무/대함임무/구조임무를

 

 두루 맡은 헬기에요.

 

 

 

 

스페셜 마킹 기체도 속속 도착합니다.

 

오는 기체들은 309 AMARG 페이스북

 

 사진란에서 소식을 받을수있어요. 


 

 

 


몇년전에 우리나라가 AMARC에서 들여온

 

T-38을 T-50 도입전까지 리스로 운용했었다가

 

반납을 했는데 그 반납된 기체가

 

 AMARC로 다시 왔습니다.

 

 자세히 보면 도장도 똑같아요.


 

 

 

 

이제 재활용의 예시를 한번 볼게요


 

 

<보관되던 WB-57 기체>

 

 이 기체는 퇴역한지 4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사에서 이 기체를

 

고고도 관측 연구기로 사용한다고

 

재사용을 요청해왔어요. 


 

 

 

<신너로 쫙 벗겨낸다음 재 정비를 받은 WB-57의 모습>

 

 

 나사가 사용하기 위해 여러 관측장비를

 

 달고 재 정비를 받았죠


 

 

 

완전 변신 성공


 

 

 

시험비행 장면

 

 

<재도색을 하고 나사에 인도된 WB-57>

 

 


 

 

<C-27J 스파르탄 전술 수송기가 보존 처리를 위해 AMARC에 입성한모습>


 

 

<퇴역 F-15에서 재 보존 처리를 하는 모습>


 

<비행가능 상태로 복귀해 QRF-4E 표적기로 개조될 기체>


 

 

 

F-14 톰캣 전투기는 이제 AMARC에

 

몇대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란으로의 부품 유출을 막기위해 어쩔수 없이

 

 몇몇 기체를 빼고는 모두 고철처리가 되거나

 

 조종석이 제거된채 박물관에 가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남자라면 의무적으로

 

다녀와야할 군대 !!

 

그 중에 가장많이 가게되는 육군!

 

각 사단들에 특징대해 좀

 

간략하게 적어볼게요 ㅎ

 

1사단

 

 

전진부대

 

단 한번도 북한군에게 진 적이 없는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를 한 적은 있다) 부대

 

파주에있어서 서울하고 가까워요.

 

문산일대 근무는 빡세다고합니다.

 

제1사단이라는 자부심이강해서

 

훈련도 강하게한다고합니다!

 

 

 

2사단

 

 

 

노도부대

 

휴전선 중동부 전선을 맡고있으며

 

17 연대가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훈련양이 엄청 많아 힘들다고합니다.

 

그 중에서도 부대주력인 17연대에

 

떨어지면 정말 알차게군생활할거라고해요^^

 

 

 

3사단

 

백골부대

 

대한민국 육군에서 역사가 오래된

 

보병 사단 중 하나입니다.

 

 

 

백골부대는 이름도 많이알려져있고

 

자부심이 육군계의 해병대로합니다.

 

전우회도 있고

 

306보충대에서 가게되는

 

지옥에사단중하나입니다.

 

 

 

 

5사단

 

열쇠부대

 

. 휴전선 최전방 지역에 주둔하며,

 

연천에 위치하고있어요

 

 

 

속된말로는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부대마크처럼 휠체어타고

 

전역하게된다고합니다^^;

 

 

 

6사단

 

 

 

청성부대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방어전투, 용문산 전투

 

 전쟁기간동안 154여 회의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적 92,669명을 사살하고

 

6,437명을 생포하는 등의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대다수의 남한 국군

 

 사단들이 6.25전쟁 초기에

 

북한 인민군의 대대적인 기습공세에

 

밀려 엄청난 피해를 입어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몇번씩의

 

 재편과정으로 초기편제가 없어지는

 

등의 일을 겪었으나, 이 6사단 만큼은

 

춘천방어에 성공하다가

 

 서울지역이 함락되고 나서야 전선유지를 위하여

 

명령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술상 후퇴를 하게 되었기에

 

6.25전쟁 이전에 편성된 부대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초창기 편제를 유지해온 유일한 부대

 

 

푸른별마크가 아주이쁜부대에요

 

6.25전쟁때 가장 이름을 날린 부대만큼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부대이고

 

철원에 위치하여있어서

 

날씨가 엄청춥고 엄청덥고

 

완전 다른나라느낌이에요.

 

경래구호는 '필승'!

 

 

 

7사단

 

 

 

칠성부대

 

 

한국 전쟁 당시 총 28회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특히 낙동강방어전을 수행할

 

 당시 영천지구 전투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개 사단을 격멸해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하였습니다..

 

지리적으로 험악한 산악에 위치하여있으며

 

근무.훈련 힘들다고합니다.

 

 

 

 

8사단

 

 

오뚜기부대

 

한국 전사에 길이 빛나는 최강 돌격 부대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8기계화보병사단

 

 

경기도 포천에 위치하여있는 오뚜기부대

 

3군단에 3사단.6사단 후방에위치하여있는

 

후방부대로서 전쟁시 행군을많이해야하기떄문에

 

평소에도 행군을 많이한다고합니다.

 

그래서 마크가 오뚜기인가....^^;;

 

 

 

9사단

 

 

 

백마부대

 

휴전선 중서부 전선을 맡고 있는 사단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였고

 

 백마고지전투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고지명에서 유래한 백마를 고유의

 

경례 구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비전력이라 훈련이 많습니다.

 

환경과 부대시설이 다른부대에 비해

 

아주 잘되어있다고합니다.

 

그만큼 힘들다고해요 ㅎㅎ

 

 

 

11사단

 

 

화랑부대

 

 제1야전군 산하의 기계화 보병 사단으로,

 

군단으로 편제되지 않은

 

 직할 부대인 외에 유일한,

 

기동타격을 목적으로 한 기계화 보병 사단입니다.

 

 

예전에는 지구3바퀴돌고 전역한다는

 

소리가 많은 부대였습니다.

 

요즘은 예전 명성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고하지만

 

그래도 메이커부대!

 

 

 

12사단

 

 

 

을지부대

 

고구려 시대 장군인 을지문덕의 호를 따서

 

을지부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산악에서 주로 훈련을하고

 

눈도많이 내리며

 

훈련보다는 근무가 빡세다고합니다

 

 

15사단

 

 

승리부대

 

전투보병사단으로 7사단과 함께 DMZ 책임지역을

 

관리하고 1차적으로

 

적의 도발을 방어하는 최일선 부대

 

 

 

화천.휴전선 중앙을 마크로하고있어요

 

주변에 워낙 메이커부대들이 많아

 

인지도는 다른부대에비해 떨어져도

 

엄청 훈련이 강한부대라고해요

 

가끔보면 계란후라이부대라고 부르기도했어요

 

 

20사단

 

 

결전부대

 

계화단, 줄여서 양기사로도 불리웁니다.

 

 

 

 

기계화사단으로 휴가가 많다고합니다.

 

훈련뛰면 휴가도 많이주긴하는데

 

그만큼 훈련이 엄청힘들어서 그렇다고해요

 

민간인상대로 행사도 많이해서

 

여러므로 바쁘다고합니다.

 

 

 

21사단

 

 

 

백두산부대

 

백두산까지 진격하여 태극기를 꽂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백두산 부대로 이름 붙여졌습니다

 

작계지역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전방 사단 중 가장 길고 넓은 섹터의

 

철책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백두산부대지만

 

강원도 양구 2사단근처에 위치하여있어요

 

2사단에가면 재설능력은

 

최상급으로 찍고전역한다고합니다.

 

훈련강도도 강하다고해요.

 

 

 

 

22사단

 

 

 

율곡부대

 

DMZ와 동해안을 동시에 경계하는부대에요

 

이쪽으로 귀순하는북한주민도많고

 

총기사고가 잘나는부대로 알고있어요.

 

 

 

 

 

 

 

 

26사단

 

 

 

불무리부대

 

기계화보병사단입니다.

 

이런저런 훈련양이 많고

 

빡새다고는해도 예전같지는 않다고해요.

 

 

27사단

 

 

 

이기자부대

 

경례 구호가 전군 최초의 순우리말 구호이자

 

 3음절인 "이기자"입니다.

 

 

 

6.25전쟁때 북한군에게 사단기를뺏기고

 

한번도 전투에서 승리하지못하여서

 

부대가 이기자로 명칭이 바꼇다고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훈련도 빡세다고해요

 

강원도 화천 눈도많고 아주 깊은

 

산속에 있는걸로알고있어요.

 

 

 

 

 

28사단

 

태풍부대

 

지난 58년 동안 신병양성임무, 대간첩작전 임무,

 

상비전투 및 휴전선 경계임무 등

 

 다양한 분야의 임무를

 

수행해 온 부대로서, 그간 대통령 부대표창 12회,

 

국방부장관 부대표창 18회 등 총 55회의 표창!

 

창설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44회에 걸친 대간첩작전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적 사살 63명, 생포 8명,

 

노획 1,308점이라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연천에위치하여있고

 

GP총기난사.윤일병 폭행사건등으로

 

부대 군기나 훈련이

 

더욱강화되어 힘들다고합니다.

 

 

 

 

30사단

 

 

필승부대

 

부대마크가 촌스러운느낌인데

 

팬티브라자부대로 유명합니다.

 

 

 

수기사

 

 

맹호부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기계화 편제를

 

갖춘 사단입니다.

 

 녹색 바탕에 호랑이 마크가 새겨진 부대 마크를

 

사용하고 있으며 경례 구호는

 

 "맹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가해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훈련도 자주하고 행사도 많다고합니다.

 

장비들이 다양해서

 

군기도 엄청 강한편이라고해요.

 

 

 

 

 

 

 

음 그리고 좀 다르게

 

많은분들이 속된말로 꿀빠는부대에

 

대해 잠깐 알아보고 마칠게요.

 

 

 

 

 

 

 

 

37사단 충청북도 52사단 경기도광명

 

 55사단 용인 56사단 고양 북한산

 

50사단 대구 39사단 경상남도

 

 51사단 경기도화성

 

 

전 6사단 나왔네요... 흠 그냥 재미로

 

재밋게 봐주셧으면 공감! 부탁해요 ^^;;

 

 

 

 

출처:구글.위키백과

 

 

위태로운 조국을 위해 총을 든 학생들이 대다수였던

 

"태극단"

 

 

 

1950년 6월29일

 

파주 어느민가...

 

4명의 중학생들이 모여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민국 지하 공작대"라 적고

 

반공투쟁에 목숨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보통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태극단이란

 

 이름을 들으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단체를 떠올리게될꺼에요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조국을 위해 싸운

 

반공유격대 "태극단"이랑은 다른 조직입니다.

 

때는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됩니다

 

6월 27일 파주 금촌에 살고있던 경성상공중학교 4학년

 

 이순창씨는 동생이었던 휘문중학교

 

 3학년생 이순호씨와 함께

 

금촌역 부근에서 국군의 M1개런드 소총3정을

 

 습득하게 됩니다.

 

아마 국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간

 

소총으로 생각됩니다.

 

 

 

6월 29일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한 후 바로그날

 

이순창, 이순호는 뜻을 모은 학생 2명

 

 경기사범학교 3학년 황상균, 김정규와 함께

 

버려진 1사단 사령부에 영내로 잠입하여

 

배낭 3개에 수류탄 10여발씩을 챙겨

 

김정규 집에다가 숨겨놓고 M.1 소총 3정과

 

수류탄 30여발을 가지고 이들 4명은

 

태극기에 "대한민국 지하 공작대" 라는

 

 혈서를 쓰고 유격대를 결성합니다

 

<경주학도병태극기서명문>

 

7월 1일 고양군(지금은 고양시) 에서는

 

중학생,교사,낙오군인들이 유격대를 결성하게됩니다.

 

7월 5일 공무원이었던 이장복을 중심으로

 

고양군 일산리에서 학생,공무원 등이

 

 "태극단"(일명T.K)을 결성하게됩니다.

 

하지만 통합된 세력이 아닌 따로 활동하던

 

세력들이고 총도 안쏴본 이들은 세력도

 

 

전투력도 미약했었죠.

 

 


 

 

(구월산유격대 예하 동키부대)

 

8월 이들은 이장복을 단장으로  "태극단" 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유격대로 재편되어

 

활동을 시작하게됩니다.

 

구성은 1개 본단, 1개 별동대,12개 지단

(수색, 능곡, 행주, 백마, 송포, 산남, 교하, 청석, 금촌, 광탄, 문산, 철도)

 

부대원들은 학생, 교사, 경찰, 낙오군인

 

그밖의 공무원과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극단에는 대다수를

 

차지하던건 학생들이었고

 

부대원 수는 240여명까지 늘어났게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사진은 구월산유격대 여성대원들)

 

신규정씨 등 9명의 여자유격대원들이

 

 존재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기록된 대원 숫자이고

 더 있을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규정(숙명여대)등을

 

 비롯해 서울여상, 동명여중,성신여중 등등

 

여학생들이었고

 

이 아가다(김병찬소령 부인), 김병숙(김병찬소령 여동생)

 

 같은 군인가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원들의 규모는 9.28수복 이전까지

 

240명으로 경기관총1정과 각 소총54정

 

수류탄 270여발 실탄 수천발을 보유한

 

큰 결사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사를 전담하는 일도 했지만 몇몇은

 

실제 남자들과 함께 유격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나이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그들은 오직 자유대한을 위해 싸웠던겁니다.


 

 

이들은 태극문양이 찍힌 머리띠를 썼고

 

 

태극단이라는 완장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7월말 북괴 의용군으로 징병당한 30여명의

 

 민간인을 구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북한군 통신선을 끊어 북한군 통신망을 방해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처단하고

 

관공서에서 총격전을 하고

 

유엔군이 북진하자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에도 참가합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작전은 경의선을 철로 끊어 수송을 방해하는거였고


 

 

 

행주나루에서 북한군의식량수송선을

 

침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물리적인 작전뿐만 아니라

 

 

삐라들을 제작해서 북괴점령 지역에 뿌리는

 

 심리전도 수행했는데

 

유엔군이 참전했다.

 

곧 북진할것이다.

 

이런 내용들로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적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바로 나와 도망쳐라 이 포고를 준수하지 않으면

 

가족과 함께 멸살을 면하지 못할것이다"

 

라는 경고성 삐라들을 인민위원회 건물벽과

 

주요 도로변에 부착하여 공산분자들을

 

당혹케 하였습니다.

 

이게 경고가 아닌 현실로 들어난 사건이 있어요

 

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다시 수복되자 경찰과 태극단이 고양시에 있는

 

 금정굴에서 부역혐의자와 가족들 153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건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겠지만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9월19일

 

철도 교환원 유춘화씨가 태극단에 첩보를 보냅니다.

(유춘화씨도 여성 태극단원)

 

내용은

 

"피랍인사들을 태운 열차가 수색역을 지나 북쪽으로 향한다"

 

라는 내용이였습니다.

 

태극단은 경의선을 끊고 습격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목표열차가 아닌

 

북괴군 탄약을 만재한 12량의 열차가 오고 있었고

 

열차는 곧 끊긴 경의선에 탈선하게됩니다.

 

태극단은 유엔군에 첩보를 보내

 

 

유엔공군이 열차를 폭격하는 전과도 올리게됩니다.

 

1950년 10월 말에

 

태극단은 국군에 무기를 자진반납하고

 

해체하며 3개월의 짧은 활동을 마치게됩니다.

 

짧으면서도 굵직했던 그들...

 

항상 좋았던것만은 아닙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유격대원 45명이 부역자들의 밀고로

 

북한군에 잡혀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부역자들의 밀고로 전우를

 

잃어버린 태극단 입장에서는 분노할만하고

 

그게 금정굴 학살로 나온거겠죠..

 

고양시의회에서 태극단유공자 지원조례랑

 

 금정굴희생자 지원조례 모두 계류됐다고 합니다

 

빨갱이를 왜 도와주냐? vs 살인마들을 왜 도와주냐?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앙금은 지속되고 있어요

 

전 태극단이 어찌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오래된 갈등을 보여주는 축소판인거 같습니다


 

사진 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inutdiyTravelLeaderList.kto?articleId=62517&func_name=view

 

고양시 일산구 덕이동에는 정부에서 지정한

 

제1호 반공유적지  "현충공원"이라고 있는데

 

여기에 학살당한 45명과 전사한 6명의

 

 태극단원들이 잠들어 있어요

 

(51개의 무덤중에 몇몇은 시신없는

묘임 못찾은 시신들이 많다고 합니다)

 

시간있으면 한번쯤 가보는것도 좋을꺼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태극단과 한국전쟁 시절 태극단은

 

시기도 성격도 다르지만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바로


 

 

내 나라를 위해 일어났던 어린 학생들...

 

교복이 전투복이 되고

 

연필대신 총을 잡았던

 

모든 학도병들 ...


 

 

감사합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구글.http://blog.naver.com/dubuioi/220496074505

 


 

 

안녕하세요

 

오늘은 특이한 모습을 한 화기들 몇가지를

 

소개할까하는데요..

 

보시면 오잉? 이런반응이 나오지않을까

 

싶어요^^

 

시작해볼게요 재밋게봐주세요

 

 

 

1. TP-82

 

냉전 초반에 러시아가 개발.

 

생산한 서바이벌용 복합화기 TP-82입니다.


그 당시 우주항공산업은 국가적 경쟁의 정점이었고,

 

그만큼 파일럿, 특히 우주비행사의

 

 가치는 매우매우 높았어요.

 

냉전 초반에는 오늘날과 같이 정해진 코스로

 

완벽하게 착륙/귀환할 수 있을 정도의

 

정밀한 기술력이 부족했었습니다.

 

 

 

 

파일럿이 적국에 떨어지면 파일럿의 생존 문제 뿐만

 

 아니라 기술유출의 문제도 크고,

 

적국이 아니더라도 숲에 떨어졌다가

 

곰한테 맞아죽으면 말그대로 국가적 손실이 컸던거죠


그래서 개발된 것이 TP-82

 

복합화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총열이 3개입니다.

 

위에 2개: 32게이지 산탄 - 근거리에서 야생동물 사냥/처지, 적군 사살.

 

밑에 1개: 5.45x39mm 소총탄(AK-74가 쓰는 탄) - 중/장거리 전투


그리고 서바이벌용이므로

 

개머리판의 커버를 벗기면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이런 칼이 나오게됩니다.


아주좋은 아이디어라는 평가를 받고 1986년 부터

 

 2006년 까지 SPESK (Soyuz Portable Emergency Survival Kits)으로

 

 사용됩니다.

 

2006년이면 생긴거에 비해 꽤 최근까지 사용하였으며,

 

2007년에 노후화로 교체하게되어

 

고성능의 자동권총이나 pdw의 발전으로

 

 굳이 단발사격의 한계가 있는 TP-82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거죠.

 

 

 

 

 

 

 

2. Pedersen device

 

 

 


 

이건 정확히 말하면 화기가 아니에요,

 

 이거 자체는 볼트액션 소총을

 

반자동 소총으로 업글시켜 주는 장비에요


볼트액션을 한 발 쏘고나서

 

 일일히 볼트를 당겨 급탄을 해야하기 때문에

 

 반자동에 비하면 화력이 딸릴수 밖에 없고

 

 

위급한 상황 대처시에도 불리하게되죠


그래서 1차대전 때 볼트액션을 한계를

 

 느끼고 2차대전 때 각국에서 

 

반자동 소총을 많이 개발하고

 

 

Stg-44 같은 고성능 반자동 소총이 양산하죠

 

<Stg-44>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기관단총이나 중기관총은 분대당 1개 정도의

 

 보급률이었고 반자동소총의 양산은

 

 생각못하고 있었죠.

 

볼트액션이 더 좋다 .반자동 고장이 심하다. 라는게

 

군부에 생각이었고 보병 대부분의 개인화기는

 

볼트액션이 주를 이뤘는데....



 

 


 

 

 

미군부는 반자동권총은 아무래도 권총탄을 쓰기때문에

 

중장거리 교전에는 어울리지않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패더슨은 권총 작동방식을 가진 소총을 만들면된다고

 

생각을하고 페더슨이 직접 개발하고 이름도

 

페더슨 장비라고 명칭을 지었어요.

 

 

 

<페더슨이 만든 반자동장비>

 

근데 이 장비를 장착하는 소총(m1903)의

 

구조상 밑으로는 못 넣고,

 

탄창을 위로 45도 기울여 꽂아야 했어요

 

(m1903 은 탄창이 총 자체에 고정되어있는 구조,

사실 탄창이 없다고 보는게 맞아요)


그리고 막상쏴보니 원래 사용하던

 

소총탄(30-06 스프링 필드탄)보다는

 

30 탄약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

 

 총 40발이 들어가는 탄창을 장착할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아이디어였고

 

작은 부품의 보급만으로도 개인화기의 반자동화가

 

 가능했으니 꽤 좋은 평가를 받게됬죠


페더슨 혼자 이악물고 만들고 공급한거라

 

퀄리티가떨어지게 나왔어요.

 

그래도 고장이 나면 총을 버리는게 아니라

 

 저 부품만 뽑아서 버리고 다시 원래 볼트를

 

 넣으면 볼트액션 소총이 되기 때문에

 

위에 나왔던 고성능 반자동 소총이

 

등장하기 전까진 잘 사용했습니다.

 

 

 

 

3. Welrod 볼트액션 무소음 권총

 

 


 

영국의 소음권총 월로드(Welrod)

 

 

2차 대전때 영국이 사용한 화기에요

 

적진뒤에서 활약을 하는 특수부대나 레지스탕스같은

 

경우에 제대로 된 화력지원이나

 

병력지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극도로 적은 소음을 내는 화기를 사용하여

 

적을 사살할수있으며 동시에 다른 적군의 주의를

 

끌지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죠.

 

 


권총인데 볼트액션이어서 다수의 적과

 

교전하기 위한 물건은 절대 아니겠죠?^^;

 

유효사거리도 20m 여서 코앞에

 

있지 않는 이상 급소를 맞춰야겠죠.

 

굳이 볼트액션으로 만든 이유는 오로지 소음효과를 위해서,

 

총열자체가 소음총열이고 구조상 볼트액션이 내장되있어요.

 

 

부품갯수가 적으니 당연히 구조가

 

 단순하고 내구성도 높았습니다.


 

 

 

 


또 구조상 특이한 점이라면,

 

권총 손잡이를 따로 분리해서

 

가지고 다닐수 있기 때문에

 

적진에 가서 조립하기 전까지는

 

 총처럼 보이지 않는 장점도 있습니다.

 

 


장탄수는 6발(9mm 파라블럼)/8발(.32 ACP)

 

전체무게 : 1,090 g

 

전체길이 : 310 mm

 

총열기리 : 95mm

 

사용탄약 : 32ACP / 9 x 19mm파라블럼

 

엄청난 소음효과와, 휴대성, 극도의 내구성

 

 등으로 암살용으로도 잘쓰였습니다.

 

 

 

 

 

4. M86 PDM

 

 

PDM(Persuit Deterrnt Munition)  추적방지용 탄약

 

 

 특수부대를 위해 만들어진 무기에요.

 

적의 추격을 받을 때 추격속도를

 

늦춰줄 아이템이 필요했고

 

일반 대인지뢰는 설치하는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걸린다고 판단,

 

 특수부대 작전 특성상 부적합하기에

 

새로운 지뢰를 만들었습니다.

 

 

 

<Area Denail Anti-personnel Mine (ADAM)>


M86 PDM모티브라고 할수 있는 ADAM

 

그림이 설명 잘 해주듯이 이 ADAM은

 

비행기나 견인포를 이용해서 특정지역에

 

수많은 대인지뢰를 자동으로 설치,

 

적의 움직임을 둔화시킬수 있어요.

 

저 치즈같은거 하나하나가 다 지뢰고,

 

치즈구멍에서 나오는 전선을 건드리면

 

 마지막 그림에 나오듯이 공중으로

 

튀어올라서 폭발합니다.



이제 저 치즈 하나를 수류탄처럼 안전핀을 달고,

 

거기에 타이머를 달아서 보병이 쓸수 있도록 만든게

 

M86 PDM 입니다.

 

 

 


 

 

 


 

 

그래서 사용법도 걍 수류탄과 다를게 없어요

 

안전핀 뽑고 던지고 빠지면되요


안전핀 제거 후 25초 후에

 

7개의 전선이 튀어나와요

 

최대길이 6m 인 7개의 전선은

 

다양한 각도로 나와서 다른 표면에 부착됩니다.

 

(전선이 튀어나오고 65초 후부터)

 

전선을 건드리면 액체연료 추진제 작동,

 

 지뢰가 1~2m 위로 튀어오르는데

 

 600 개의 파편이 적군을 사살합니다.


또한 

 

 지뢰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4시간 후 자폭하며

 

불발일 경우를 대비해서

 

 배터리의 수명은 14일정도갑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나무위키. 구글. 해외사이트

 



 

 

 

 

 

 

안녕하세요!

 

6월25일이 다가오면서

 

포스팅 초점이 한국전쟁으로 계속

 

맞춰지는거같네요...

 

한국전쟁하면 많은분들이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투.용문산전투.춘천전투등을 많이

 

떠올리실꺼라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때 금성지역 북방에 위치하여있던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대전투가 금성전투입니다.

 

7.13 공세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럼 금성전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0일까지 벌어졌어요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임부택 제11사단장 .

 

김용배 제7사단장이였구요

 

중공군 지휘관은 현리전투에도

 

나왔던 펑더화이였습니다.

 

대한민국 병력은 11사단.8사단.6사단.5사단.3사단.

 

수도사단.L-20경비행기30대였구요.

 

중공군은 제24군.54군.60군.67군.68군.

 

산하 12개 사단이나 됬습니다.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며 전황을

 

지지부진 끌게 만들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53년 4월 즈음 휴전은

 

 미국중국 내부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만이

 

 휴전은 불가하다면서

 

단독 북진을 외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6월, 휴전협상은

 

종반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중국은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내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전쟁 중 항상 미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렸고,

 

이런 결정에 따라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금성 돌출부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 때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공격하는데

 

6개 사단을 동원했으며, 다시 후방에서 4개 사단을 증원시켰고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와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도

 

 동원하는 등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병력을 투입하였습니다.

 

 

<중공군 출정식>



물론 한국군도 이에 맞서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포격과함께 돌진하는 중공군>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비록 전선 전체의 돌파에는

 

실패했으나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지키던

 

국군의 방어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중국이 휴전 직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듯이 한국 또한 마지막 전투를 패배로 기록해두고

 

싶지 않았기에 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3년 7월 중공군 5개 군(약 24만명)이

 

금성 돌출부로 모이기 시작하자 긴장한 한국군 또한

 

 6개 사단을 동원해 방어에 나섰으며, 휴전을 직전에 둔

 

 시점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은

 

그 규모가 개전 이래 최대급이었습니다.

 

 

<중공군 전차부대>



7월 13일부터 중공군은 한국군이 방어하는 전선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하여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 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저지했습니다.

 

더욱이 홍수로 인해 보급이 곤란해진 중공군에 비해

 

 한국군은 미군의 막대한 보급물자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으며,

 

새로 도착한 증원군들에 힘입어 병력을 보충하고

 

화력을 충원하여 반격을 시작하게됩니다.

폭우로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의 활약과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 선

 

(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중국군이 전선 전체를 돌파당할 경우 증원군을 투입하여

 

 반격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휴전을 눈앞에 두고

 

 대규모 전투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은

 

 UN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의 공방전만 이어가다가

 

종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습니다.

 

중공군은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지만

 

 점령지의 절반을 다시 내어준것과 화천댐 공략 실패로

 

 인해 국군보다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국군에 비해 3~4배 발생하였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전과가 이긴합니다...

 

 1주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전사 및 실종자 수천 명을

 

 포함하여 14,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중공군은 66,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됩니다.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 것은 양측

 

모두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군이 중국군에 비해 자질 및 장비 면에서

 

 그다지 나은 점이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한국군의 자질을 강화하고

 

무기 및 장비를 새로 지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전 협정의 조인

 

휴전 2주만 남겨둔 상태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연기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소규모 전투만을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언제 전쟁이 재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가오는 6월25일 우리는 항상 잊지말고

 

준비하고있어야 합니다.

 

 

사진 및 참고자료 : 구글.나무위키.위키백과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전쟁중

 

가장 참담한 패전 현리전투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날짜는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동안 펼쳐졌구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일대에서

 

펼쳐진 전투입니다.

 

현리 전투는 아마 한국군 전쟁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vs 북한군.중공군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3군단장 유재흥.7사단장 김형일,

9사단장 최석,3사단장 김종오

 

중공군 지휘관은 펑더화이 였습니다.

 

우리나라 국군 제 3군단과

 

종궁군 제9병단 12군,20군,27군과

 

북한군 제2,3,5군단이 치룬 전투입니다.

 

 

 

이제부터 좀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1951년 4월, 신규병력을 충원해 전력을

 

확충한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전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4월 공세,

 

혹은 춘계 1차 공세로 불리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그야말로 이영호의 반땅 가르기

 

싸움과도 같은 무제한 화력과

 

우주방어로 저지에 성공하게됩니다.

결국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

 

 전력을 온존, 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특히 약한 국군을 제대로 박살내기로 결정합니다.

2차 춘계공세, 혹은 5월 공세라 불리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9사단을 앞세운 한국 육군 제3군단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 육군 5사단, 7사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9병단 예하

 

지상군 12, 20, 27군단이 미 10군단

 

 휘하 5사단과 7사단을 돌파해 깊숙이 파고들고

 

동해안 쪽에선 인민군 육군 2군단, 5군단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싸먹어 완전히 결딴을 내고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3군단의 왼쪽을 맡은 중공군 9병단은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뚫어제껴 버렸으나, 옆 미 2사단이 한국군의 패주로

 

 동쪽이 휑하니 비어버린 상황에서도 벙커고지에서

 

화력과 우주방어로 돌파가 확대되는 걸 저지하면서

 

 애초 의도대로 돌파구를 열지 못했고,

 

이 덕에 5사단과 7사단은 막 밀려나고 연대가 통째로

 

 날아가고 하면서도 완전 붕괴까진 안 되고

 

 물러서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3군단의 오른쪽을 파고들었어야 했을

 

인민군 2군단, 5군단마저도 돌파조차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들의 계획은 엉켜버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려 오마치 고개에 도달하게됩니다.

당시 한국 육군 3군단은 오마치라는

 

 단 하나의 고개후방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고개가 미 10군단 휘하 한국 육군 7사단의

 

 관할구역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군단에서

 

오마치 고개에 수비 병력을 두려고 했는데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무슨 생각으로 구역 침범 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오마치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중공군 역시 오마치 고개를 잡으면

 

국군 3군단의 목줄을 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공세 개시 후 5월 16일 국군 7사단을 뚫어버리자마자

 

 60사 178연대 2대대 병력들을 고개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었고,

 

 이 와중에도 선두 5중대는 한밤중에 산을 타고

 

 30km를 돌파한 끝에 5월 17일 새벽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국군 7사단은 두들겨 맞으며 밀려나는 와중에

 

 오마치가 점령당한 걸 알았지만 한국 육군 3사단이나

 

 9사단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전하지도 않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결국 3군단 쪽에서 오마치가 점령당했단 사실을 안 건

 

17일 새벽에 부대 차량들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철수시키다 오마치에서

 

총알 세례를 받고 나서였습니다.

 

 

<참호를판뒤 공격하는 중공군>


한편 옆 동네 7사단의 방어선이 뻥 뚫리고

 

오마치 고개도 차단당한 사실을 안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에 대한 전면 공격은 없었지만 포위를 우려해

 

 휘하 부대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렸고,

 

9사단도 후퇴하자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후퇴 지시를 내리게됩니다.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3군단 병력은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현리의 남쪽 방대산을 오르며

 

 남쪽으로 도망쳐 갔고,

 

방대산은 수만 명의 인파에 뒤덮일 지경이었습니다.

 

 작전도 없고 지휘도 없는 발걸음이었으며,

 

그러니 보급도 없고 식량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수가 결집해 도망갈 경우에는

 

 적의 추격을 막거나 차단막을 강행돌파하는 게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리고 운 나쁘게 산을 헤메다가 체력이

 

바닥난 뒤 숨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중국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에게 포로간된 한국군>


산속에서 헤매는 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할

 

병력도 계획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군단 본부에

 

 있던 인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산속 곳곳에

 

쌓아 두는 게 그나마 가능했고,

 

이런 주먹밥을 얻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걸 막고자 미 공군은 현리 일대에서

 

 3군단 장비를 폭격하는

 

어이 없는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3군단 본부에선 어떻게 창촌에서 병력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패주 행렬이 창촌에 왔을 때는

 

 소수 중공군 부대가 이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창촌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사기가

 

떨어진 한국군 병력은 다시 후퇴했고,

 

결국 산을 넘고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하진부리에서야 겨우 수습되었습니다.

 

이렇게 3군단이 나흘만에 70km를 도망치면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대위기 상황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육군대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예비대를

 

 빼내 전선을 틀어막고,

 

포위된 사단을 구출하여 겨우겨우

 

전선유지에 성공했으며

 

 

 국군 1군단 병력이 대관령 방어에 성공한 덕분에

 

그나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8군에서는 3군단에 더 이상

 

 밀려나지 말고 현 방어선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3군단은 하진부리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또 다시 밀려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1일이 되자 3군단 병력은

 

또 다시 패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상황은 현리 때처럼 군단 지휘부가 병력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현리 때보다

 

 이 때가 유 장군이 제대로

 

움직였어야 했었습니다.

 

 장비는 없고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라지만

 

부대 수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이시기에 유재흥 장군은 수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 합니다.


결국 이 상황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 해체를 명령하게 됩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닙니다.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 해체를 결심하게 한 것이죠

이 당시 유재흥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의 대화는

 

지금도 전설로 회자될 정도입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벤 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 ,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5월 23일부터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그때까지도 쫄쫄 굶어가며 산속을 헤메고 있던

 

 한국군 낙오병들이 대규모로 수습되었고,

 

그 결과 27일까지는 병력의 약 70%와

 

장비의 30%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전사 혹은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수습은 했으나 전투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편제에서 빠진 병력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70퍼센트나 되는 병력이 전투 이후에도 건재했던 건

 

중공군의 포위 작전이 계획대로 제대로 되지 않은 덕으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와 창촌을

 

차단하면서 3군단의 철수 경로를 어느 정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래 의도했던 촘촘한 포위망을

 

짜는 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소수 병력만이 차단과 추격에

 

 나설 수 있었으며 게다가 한국군이 그냥 퇴각한 게 아니라

 

 나름 무리를 지어 도망쳤기 때문에 어설프게

 

 차단했다가 다수의 한국군 패잔병들에게 깔려

 

역으로 전멸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패잔병이 산을 타고 후방으로 오는데

 

성공한 건 그 때문입니다.

 

(중공군이 제대로 포위망을 구성했던

 횡성 전투 같은 경우에는 생환하여

추후 전투 투입이 가능한 병력이

고작 30퍼센트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더 참담한 일은 열받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을

 

 모조리 해체하여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폐쇄했고,

 

 한국 육군 제1군단을 미 제8군의

 

직접통제로 바꿔버린 일이었습니다.

 

 3군단의 해체로 인해 육군은 오직 단 하나의

 

 군단급 제대만을 가진 존재로 전락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육군본부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이후로는

 

후방지원업무만 담당하게 됩니다.

 

패전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직도 3군단 시설 몇개가 현리에 세워져 있으며,

 

육군 어느 부대든 정신교육 시간에 수시로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맙니다.

 

 

 

현리 전투 당시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한국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었지만,

 

현리 전투에선 계급장 뗀

 

낙오군인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명예를 회복을 합니다.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그랬지만,

 

특히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특히 9사단장 최석 장군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심지어 광인이라는 폭언까지 등장합니다.

 

유재흥 장군조차 애둘러서 최석의 무능력함에

 

 대해 비판을 합니다.

 

 

3사단 18연대는 백골연대란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지금은 진백골연대로 변경),

 

이들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제대로 시도도 못 하고 흩어져 패주행렬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패주행렬을 쫒거나 차단하는

 

적 병력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있던 백골부대원들이

 

 힘을 합쳐 적 병력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여줬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나무위키.구글



 

 

 

각 국가마다 비밀예산을 투입하여 신무기

 

개발 및 극비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비밀스러운 군사기지에 대해서 좀 알아보까합니다!

 

 

 

 

5위 Gora Yamantau -러시아-

 

 

러시아에는 Yamantau라는 산이 있습니다.

 우랄 남부 우랄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총 1,640m에요

 

 

그런데 이 산에서 1990년대 후반에 미국 인공위성이

 

엄청난 규모의 굴착공사가 포착을 하게됩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그냥 광산일 뿐이다, 음식 저장소다!

 

전쟁을 대비한 벙커다!라는 변명만 하면서

 

확실한 답변은 주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핵무기가 저장되어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론가들은 이것보다 더한 주장을 내새우게 됩니다

 

 

그 주장은 러시아 땅에 핵이 떨어진다는 걸

 

탐지했을 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핵을 폭발시킬 수 있는

 

슈퍼컴퓨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핵은 코발트로 둘러쌓여있고,

 

독성의 원소가 포함되어있고, 

이 핵의 폭발로 인한 방사능이 지구 전체로

 

퍼질만큼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말해요

그리고 만약 이런 핵이 터진다면

 

인류는 멸망하게되겠죠? 


 

 

 

 

4위 Sanya Base -중국-

 

 

중국의 최고의 피서지 중 하나인 Hainan에요

 

모래로 뒤덮인 해변과, 호텔,

 

그리고 엄청난 떼의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인데요

하지만 이 곳을 관광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거죠.

 

 

이 섬 해안가의 동굴 깊이에는

 

20개의 핵잠수함을 숨길 수 있는

 

지하기지가 있어요.

또 핵기지로 활동하는 대신에 Sanya는

 

중국의 남해를 통해 중국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중국은 자연스럽게 '094핵잠수함'의

 

발전의 기반으로 삼게되는데

094핵잠수함은 각각 12개의

 

'JL-2 핵미사일'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머지않아

 

6개의 새로운 항공모함이 들어오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3위 Porton Down -영국-

 

 

잉글랜드 Wiltshare라는 곳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세계에서 첫 번째로 지어진 화학전쟁에

 

관해 연구를 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1945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험을 당하게 되는데요

 

 


참가자들은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 채,

 

그저 참가하게 되면 돈을 준다는

 

말만 듣고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화학 약품에 노출이 된 실험 참가자들은

 

호흡곤란,청각상실,고열,두통 등 

 

정체를 알수없는 심각한 증상들을 겪습니다.

 

 

 

그 뿐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던 과학자가 페스트에 걸려서

 

사망하게되고 실험자중 한명이

 

유럽에서 유일하게 에볼라를 걸리기도 합니다.

 

 

이 시설은 약물을 테스트하고 동물들에게

 

실험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직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보는 단지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라는 것이라는거죠.

 

 

 2 Pine Gap -호주-

 

 

이곳은 미국과 호주가 동시에 운영하는

 

인공위성 추적 시설이에요

 

 


정부가 공식적인 언급을 거절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곳에서

 

미국의 스파이 인공위성을 조종해서

 

 

중국, 러시아, 중동 등을

감시한다고 믿고 있어요

 

이곳은 아주 철저한 보안으로

 

지키고 있어요

5마일 이내에서는 비행이 불가하며,

 

외부의 전기는 사용하지 않는다고해요.

게다가 이곳은 전략적으로 아주 먼  외딴 지역에

 

있어서 이곳의 통신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해요

정말 베일에 싸여진 장소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고 생각됩니다.

 

 

 

 

 1 Dugway Providing Ground -미국-

 

일본인들이 진주만을 습격한 후 2달 뒤,

 

루즈벨트 대통령에 지도 하에 이곳이 생기게 됩니다.

 

 

 

 

곧 이곳에서 생물학적 화학적 무기들이

 

테스트되기 시작했고


 

 

폭탄, 화염방사기, 1급 비밀의 군사적

 

정보들이 보관됐습니다.

 

 

 


 

 

또 여러 이상한 모양의 비행 물체들이

 

이곳에서 보고되는 것을 보고

 


Area51이라는 구역을 궁금해하고 탐색하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로 지은 장소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1위인 만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RqQ0zqyp6_g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전쟁에 아주 중요한 돌격소총

 

각 소총들이 장.단점이있는데요..

 

 

역사적으로 많이 쓰여지고 정확도.사용편의성.공포도.사용기간등

 

 성능이검증된것을 바탕으로

 

 

 

순위 탑 10을 정해서 한번 살펴볼께요

 

 

 

 

10위 M14

 

M14 재원부터볼게요~

 

사용연도 : 1959년 ~ 현재

 

개발 및 제작 : 미국 스프링필드 조병창

 

구경 : 7.62mm

 

탄약 : 7.62x51mm NATO

 

작동방식 : 가스작동식,회전노리쇠

 

중량 : 4.1kg/20발들이 탄창 장전시 5.2kg

 

전장 : 1118mm

 

총열길이 : 559mm(22인치)

 

발사속도 :  700~750발/분

 

탄속 : 초속 850m

 

유효사거리 460m(500야드)

 

 

 M14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채용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쓰인

 

최초의 전투소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렴한비용 정확성 전투효율성이좋습니다.

 

 

 

 

 

 

9위 STG44

 

 

9위는 STG44 재원부터 알아보도록할게요

 

종류 : 돌격소총

 

구경 : 7.92mm x 33Kurz

 

급탄 : 30발들이 바나나형 탄창

 

무게 : 4.62kg(탄창 미포함),5.13kg(탄창포함)

 

작동박식 : 반자동/전자동, 가스작동식,공랭식

 

발사속도 : 500-600rpm

 

유효사거리 : 300m(자동사격),600m(반자동사격)

 

최대사거리 : 1,830m

 

길이 : 940mm

 

총신길이 : 419mm

세계 최초의 돌격소총이자 모든 돌격소총의 아버지

 

 세기의 명총으로 칭송받는 AK-47

 

1949년에 나온것을 생각하면

 

 이 총이 무려 5년이나 더 먼저 나왔습니다..

 

 

탄환이 가벼워 군인들이 더 많이 소지할수있었으며

 
자동발사되는 탄환의 정확도 편리성

 

공격효율성 모두 우수하였습니다.

 

 

 

 

 

8위 M1903 스프링필드

 

 

8위를 차지한 M1903 스프링필드 재원부터볼까요

 

작동형식 : 볼트액션

 

종류 : 볼트액션 소총

 

강선 : 4조 우선

 

구경 : 7.62mm x 63mm

 

전체길이 : 1.104mm

 

총신길이 : 610mm

 

무게 : 3.64kg

 

탄창장전수 : 5발

 

탄속 : 823m/sec

 

발사속도 15발/min

 

최대거리 : 2,700m

 

유효사거리 : 600m

 

생산연도 : 1903년~1965년

 

1차세계대전 때 사용되었으며, 2차세계대전 때

 

M1개런드에 밀려 제식화 되지는 못했으나

 

저격수들에게 다수 보급되었습니다.

 

조용한 죽음의 무기라는 별명이 있을정도로

 

적에게는 아주 무서운 총이였어요.

 

 

 

 

 

7위 슈타이어 AUG 


 

7위는 슈타이어 AUG 입니다 재원부터 살펴볼게요

 

종류 : 불펍식 돌격소총

 

국가 : 오스트리아

 

구경 : 5.56mm

 

탄약 : 5.56 x 45mm NATO 9 x 19mm Parabellum

 

급탑 : 30,42발 들이 전용 탄창

 

작동방식 : 가스작동식,회전 노리쇠방식

 

중량 : 3.6kg (기본형)

 

총열길이 : 508mm(기본형)

 

발사속도 : 680~750 rpm

 

탄속 :  970 m/s

 

유효사거리 : 300m

 

최대사거리 : 2,700m

 

 

슈타이어 AUG는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불펍식 돌격소총입니다.

 

AUG를 사용하는 병사들의 평가는 좋은 편입니다.

 

 AUG는 영국 SAS 및 다른 대테러 관련 기관들에 의해

 

사용되며, 미국 세관에서도 사용 중입니다.

 

손잡이가 두개달려있는 최초의 소총이기도합니다 

 

불펍은 급탄, 격발과 같은 화기 작동이 방아쇠 뒤쪽(개머리판)에서

 

 이루어지는 화기 구성 방식을 말합니다.

 

 불펍식 소총 및 기관단총 들은 기존의 화기들과 비교했을 때,

 

총열 길이는 비슷하면서도 전체 길이는 짧습니다.

 

 

 

 

6위 모제르 98k 카빈 

 

 

6위 모제르 98k 카빈 재원부터볼게요

 

 

종류: 볼트액션소총 


제조국: 독일

 
구경: 7.92 x 57mm 


탄창: 5발 


탄속: 초속 860m 


발사속도: 분당 10-15발 

 

 

1935년 6월 21일 독일 국방군에 의해

 

표준 제식소총으로 채택된 볼트액션 소총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반자동, 자동 소총들이 등장했지만,

 

K98k는 1945년 종전까지 핵심적인 독일 제식소총 역할을 했습니다.

 

엄청난 정확성을 갖고있어서


영국에서 독일에 스파이를 심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을때 이총이 사용될뻔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에 수백만 정이 소련에 노획되었으며,

 

군사원조로서 많은 국가에 제공되었다.

 

 

 

5위 FN FAL 

 

 

5위는 FN FAL 입니다 재원볼게요!

 

종류 : 전투소총

 

국가 : 벨기에

 

사용연도 : 1954년 ~현제

 

생산수 : 200만정 이상

 

구경 : 7.62mm

 

탄약 : 7.62 x 51mm NATO

 

급탄 : 20,30발 들이 탄창,50발 들이 드럼 탄창

 

작동방식 : 가스작동식, 틸팅볼트방식

 

중량 : 4.3kg

 

전장 : 1,090mm

 

총열길이 : 533mm

 

발사속도 : 650~700 rpm

 

탄속 : 840 m/s

 

유효사거리 : 400~600m

 

 

냉전 중 벨기에의 파브리크 나시오날 드 에르스탈사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많은 NATO 국가들 및

 

비 NATO 국가들이 채용하습니다.

 

FN FAL의 반동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연사시 명중률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성공적인 군용 소총 중 하나이며,

 

서방세계에 가장 널리 보급된 총입니다.

 

 

 

 

 

4위 M1 개런드

 

 

4위는 너무 유명한 M1 Garand

 

종류 : 반자동소총

 

사용탄 : 30-06 Springfield

 

장탄수 : 8발 고정식 탄창

 

무게 : 4.5kg

 

길이 :  1107mm

 

사격속도 : 16.24발/분

 

사격형식 : 반자동

 

제조국 : 미국

 

유효사거리 : 600야드(약450m)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아르덴에서 태평양 전쟁의 이오지마,

 

 오키나와를 지나 한국전쟁의 인천, 장진호까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던 용사들의 손에 들려

 

 오랜시간동안 고군분투한 역전의 소총입니다.

 

 


 

 

 

3위 리 엔필드 SMLE

 

 

 

3위는 영국군주력소총 리엔필드 입니다.

 

종류:볼트액션 소총 


제조국:영국 


구경:.303 엔필드 


탄창:10발 


탄속:초속743m 


발사속도:분당 15-20발 

 

 최초 리엔필드 영국 육군에서 에서

 

1895년부터 1957년까지 공식 채택되어 사용된

 

볼트 액션 소총입니다.

 

 이후 개량된 리 엔필드 SMLE가 1907년 부터 현재까지

 

 거듭된 개량으로 지속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정확성과 발사속도가 우수하여 볼트액션이 짧았고

 

총구에 뚜껑이 있어 먼지가

 

 

 들어가는것을 막을수 있었습니다.

 

 

오래 쓰인 만큼 여러가지 모델을 거쳐왔습니다.
.

 

 

2위 M16 시리즈

 

 

 

2위는 모두가 다아실만한 M16시리즈입니다.

 

종류 : 돌격소총

 

국가 : 미국

 

사용연도 : 1962년 ~ 현재

 

생산수 : 약 800만정

 

구경 : 5.56mm

 

탄약 : 223레밍턴 . 5.56 x 45mm NATO

 

급탄 : 20 , 30발 들이 STANAG탄창

 

작동방식 : 가스작동식 , 회전 노리쇠방식

 

중량 : 2.89kg(M16 , M16A1) 3.77kg(M16A2 ~ A4)

 

총열길이 : 508mm (20인치)

 

전장 : 986mm

 

발사속도 : 650~750 rpm(M16 , M16A1)

750~900 rpm(M16A2 ~ A4)

 

탄속 : 975m/s (M16 , M16A1)

875m/s(M16A2 ~ A4)

 

유효사거리 : 460mm(M16 , M16A1) 

500mm(M16A2 ~ A4)

 

최대사거리 : 2653m (M16 , M16A1)

3600m(M16A2 ~ A4)

 

 

M16 소총은 미군의 주력 제식소총입니다

 

트남 전쟁을 계기로 M14 소총을 밀어내고

 

주력 소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가스직동식으로 동작하는 몇 안되는 돌격소총 중 하나이구요.

 

국에서는 M4카빈, M4A1등으로

 

대체되고 후방 부대 에서만 쓰입니다.

 

가스 직동식은 가스 작동식 으로 작동하는

 

 자동화기 중 가스피스톤 없이 연소 가스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노리쇠 뭉치를 후퇴시키는 방법입니다.

 

 M16 소총이 가스 직동식으로 작동하는

 

 대표적인 자동소총입니다.

 

 

 

 

 

 

1위 칼라슈니코프 AK-47 

 

 

 

드디어 1위 !! 칼라슈니코프 AK-47 입니다.

 

 

종류 : 돌격소총

사용년도 : 1949년 ~ 현재

개발 :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구경 : 7.62mm

탄약 : 7.62 x 39 mm M43

 

급탄 : 5,10,20발 들이 박스 탄창

30,40발 들이 바나나 탄창

75,100발들이 드럼탄창

작동방식 : 가스작동식,회전노리쇠방식

중량 : 4.3kg(탄창없이)

전장 : 목재개머리판 880mm

접이식개머리판 645mm(접었을때)

총열길이 : 415mm

발사속도 : 600 rpm

탄속 : 715 m/s

유효사거리 : 350m

최대사거리 : 3000m

 

돌격소총 1위에 등극한 총


지금도 어디선가 이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상징! 

전쟁의 신이라고도 불리웁니다.


대표적인 AK-47(1947년형 칼라시니코프 돌격소총)은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1947년에 발명한 돌격소총입니다.

 

단순함과 높은 신뢰성, 저렴한 가격으로 유명하죠.

 

AK-47은 가장 많이 생산된 돌격소총입니다.

 

정품과 비정품 생산 대수를 합하면

 

1억정 정도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

 

AK-47이 가장 많이 사용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인데 

북부 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보급되었어요. 

라이벌격인 미국의 M16과 맞대결을

 

펼쳤고 우세한 편에 속했습니다. 
 
 

또한 소말리아 내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동 전쟁등에 사용 되었으며,

 

현재에도 많은 국가에서 애용되고 있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