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이였던

 

월남전 전쟁중 가장 처참했던

 

최악의 시가전 '후에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1968년 1월 30일 베트남 인민해방군(월맹군)과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합작한

 

베트남의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을

 

테트 공세(구정대공세)가 남 베트남 전역

 

41개의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양의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구정(설날)은

 

가장 큰 명절이었고, 1967년까지만 하더라도

 

북베트남(월맹)남베트(자유월남)은 이시기에

 

일시적으로 휴전에 들어갔었습니다.

 

하지만 월맹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베트콩과 합작하여

 

자유 월남을 점령하기 위해

 

테트 공세를 일으켰습니다.

 

▲베트콩이 미 대사관 경비들을 살해하고

대사관을 점령하여 죽은 미군 경비들 옆으로

헌병들이 대기하고있는 모습.

 

▲미 대사관을 테러하고 체포된

마지막 베트콩

 

▲테트공세의 상징이자 사진기자

애디 애덤스가 퓰리처상을 받은사진

 

자유월남 응우옌 응록 루안 사이공 경찰 서장이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반전 여론을

 

들끓게 하였지만 실상은 자유월남의 지식인을

 

살해한 베트콩의 소대장을 처형하는모습입니다.

 

1967년 말 월맹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남베트남

 

지원군 사령부(MACV)는 대부분의 전투부대를

 

전방인 캄보디아,베트남 비무장 지대에 배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후방 도시 방어는 자유 월남군에게 맡기고

 

전방에서의 전투에 집중하던 MACV는 자유월남군

 

전투 능력을 믿지 않았기에 몇몇대대를

 

후방으로 재배치하였습니다.

 

 

암묵적인 휴전기간에 철저한 방어준비를

 

한 군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주월 파병 한국군이었고

 

그 결과 테트 공세중 5만명의 한국군은 단 하루만에

 

월맹의 공격을 격퇴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월남전 최강의 군대 한국군

 

 

베트남 중부에 있으며, 응 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는 도시 중심에 흐르는 흐엉강을 기준으로

 

 

북쪽 구시가지와 남쪽 신시가지로 구성된

 

마치 대한민국의 서울과같은 도시였습니다.

 

▲따이 럭 비행장

 

북쪽에는 후에 성과 그 안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 월남군 제 1사단 사령부, 미공군 제20전술

 

항공지원대대와 미육군 제 220항공중대

 

월남 제219비행대대가 주둔하고있는

 

따이 럭 비행장이 있었고 남쪽에는

 

베트남 지원군 사령부(MACV)가 있었습니다.

 

▲MACV 사령부

 

1968년 1월 31일 새벽 2시30분 공격개시를

 

알리는 조명탄이 하늘로 치솟으자

 

월맹군 제6연대 소속 2개대대가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 개시전 자유월남군으로 변장한 4명의

 

월맹군병사가 후에 성의 서쪽 검문소의

 

경비들을 제거하고 대기하다가 조명탄이

 

터지자 문을 개방하였습니다

 

월맹군 제800대대제802대대 병사들은

 

강하게 자유월남군을 밀어 부쳤습니다.

 

제800대대는 따이 럭 비행장을 공격하여

 

방어하던 제사단 제1보급중대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제802대대는 자유월남 제1사단 사령부가있는

 

망카를 공격하였습니다.

 

제1사단 오 광 쯔엉 장군은 제1보급중대에게

 

사단사령부방어를 지원하도록 명령했었지만

 

헛 수고였습니다.

 

▲후에 성 북쪽의 상황지도

 

아침 8시가 되자 월맹의 깃발이 후에 성

 

꼭대기에 걸렸습니다.

 

유서깊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후에성이

 

월맹의 손에 넘어가자 MACV와 자유월남군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후에 북쪽 14km 지점에 주둔하고있던 자유월남

 

제1사단제3연대 제3중대와 제1공수사단 제7대대

 

후에의 북쪽을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고

 

후에 신시가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3연대 나머지

 

병력들은 후헤 성을 공격하다가 역으로

 

공격을 당해 대패하였고 판 후치 자유월남중령이

 

지휘하는 제7기병대대미 해병대의 지원을

 

약속받고 3대의 M-24 채피 경전차로 안 쿠 다리를

 

건너 후에 성을 공격하다가 그가 탄 전차가

 

RPG-2로켓에 공격당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제7기병대대는 퇴각하였습니다.

 

▲부상자들을 옮기는 자유월남군

 

자유 월남군의 무능을 지켜본 MACV는

 

후에 남쪽 16km 지점 푸 베이 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5해병 연대소속 3개 해병대대를

 

후에로 투입시키게됩니다.

 

연대장 스탠리 S. 휴즈대령은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으로 해군십자장과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사실 푸 베이 기지도 같은 날 월맹군과

 

베트콩의 연합공격을 받았었지만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의 공세를 꺾었습니다.

 

여유가 생긴 미 해병대는 1월 31일 오전 10시

 

제5해병연대 2대대 소속 G중대를 오후4시에는

 

F중대를 격전이 벌어지는 후에로 트럭을

 

이용하여 수송하였습니다.

 

▲ 후에 전투에 투입되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가 후에의 남부에 도착하였을때

 

도시에 숨어있던 베트콩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북쪽에서 날아오는 박격포 그리고

 

길에 깔려있는 부비트랩들로 건물 하나하나를

 

제압해가며 전진하였습니다.

 

오후 3시 미 해병대가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는

 

MACV사령부에 도착하자 월맹군은 북쪽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시가전 중 M-48전차뒤에 엄폐하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 가블중령은 자유월남 제1사단 군사고문관

 

조지 O.에킨스 미 육군 대령을 만나

 

후에의 정보를 얻었고 A중대를 사령부 방어에

 

▲후에에서 전차와 진격하는 미 해병대

 

남겨두고 제 3전차대대가 보낸 M-48패튼 전차를

 

앞세워 북쪽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흐엉 강을 건너 북쪽 구시가지를

 

공격하려던 미 해병대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M-48패튼 전차들이 강에 놓여져있는 다리를

 

건너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결국 자유월남군 소속 M-24채피 경전차들을

 

앞세워 미 해병대는 진격했습니다

 

M-48전차들은 화력지원으로 아군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매복해있던 월맹군의 기관총공격과

 

박격포 공격에 전차가 파괴되고

 

베트콩 저격수들의 조준 사격에 미 해병대원들이

 

쓰러져 나가자 미 해병대는 퇴각을 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쓰러진 해병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버려진

 

차량들을 급하게 구급차로 개조하여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미 해병대 제1대대 작전장교 월터 M.머피 소령은

 

부상자들을 구찰하다가 자신도 부상을 당하였고

 

결국 과다출혈로 전사하였습니다.

 

▲부상을 입은 전우를 치료하는

미 해병대 의무병

 

오후 8시 푸 베이 기지의 상황을 정리한

 

미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 주력병력이

 

UH-1 휴이 헬기로 후에로 도착했고

 

미해군 LCU상륙정들이 보급을 위해

 

후에 남쪽에 도착하였습니다.

 

 

UH-1 헬기들은 MACV 사령부 착륙장을 이용하여

 

부상자들은 푸 베이 기지로 옮겼고 증원병력은

 

후에로 옮겼습니다.

 

1968년 2월 1일 오전 7시 미 해병대는 감옥과

 

투아틴엔후에 도청을 탈환하기 위해

 

M-48전차를 앞세워 전진했습니다.

 

▲M-48전차뒤에 엄폐하는 미 해병대

 

하지만 베트콩 저격수들의 조준사격에

 

해병대 대원들이 또 쓰러져갔고 57mm 무반동포

 

공격에 M-48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결국 공격은 취소가 되었고 미 해병대는

 

MACV사령부로 퇴각하게되었습니다.

 

 

반면 북쪽에서는 자유월남군 제1사단제3연대

 

제1공수사단제2대대제7대대

 

따이 럭 비행장을 탈환하여 제1보급중대

 

잔존병력을 구출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는 제1사단 사령부 망 카를

 

탈환하였습니다.

 

 

자유월남 제2연대미 해병대의 헬기지원으로

 

북쪽에 착륙하여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착륙지점이 월맹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무력화 되어 철수하였습니다.

 

2월1일 오후3시 해병대의 새로운 증원병력이

 

도착하였습니다.

 

미 해병대는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여 베트콩

 

점령하고있던 MACV 통신건물을 되찾습니다.

 

북쪽의 DMZ와 케산기지를 연결하는 통신망이

 

재가동되었고 고립되어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던

 

미 육군제337통신중대까지 구출하게됩니다.

 

▲엄폐하며 뒤에서 대기하는 해병대원들

 

오후 10시 후에 전투지원명령을 받은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제3여단 병력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제3연단은 도착과 동시에 남쪽에 있는 적의

 

보급선을 끊고 베트콩을 섬멸했습니다.

 

2월 2일 정오 제12기병연대 제2대대

 

후에 북쪽에 착륙하여 월맹군의 보급차단과

 

섬멸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UH-1헬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월맹군

 

공격하였지만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벌여서 인명손실이 컷습니다.

 

▲남쪽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 해병대와 전우들의 시체

 

반면 남쪽의 해병대는 치열한 시가전으로

 

진격속도가 느렸습니다.

 

후에 대학교에서 버티고있는 베트콩과 3시간이

 

넘게 전투를 벌였는데 지난 밤 미 해병대

 

몰래 강을 건너온 월맹군이 전투를

 

돕고있기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 미 해병대제2대대 H중대

 

흐엉 강을 건너 공격을하였습니다.

 

지원화력으로 M2중기관총을 4정 합쳐서 만든

 

M45 고기분쇄기와 6문의 106mm무반동포를

 

탑재한 M50온토스가 불을 뿜자 월맹군

 

갈려나갔습니다.

 

월맹군이 75mm 무반동포로 M50온토스를

 

격파했을때 이미 150명의

 

 월맹군이 죽은뒤였습니다.

 

▲M50 온토스는 작은크기에 강력한

화력으로 M-48전차보다 인기가많았습니다.

 

미 해병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후에의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시가전,근접전 경험이 거의 없는 미 해병대

 

미 육군은 인명손실이 계속되자 도시 전체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날려버릴 생각도 했지만

 

역사적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MACV가 선택한 방법은 일대일로 적을

 

상대하여 도시를 탈환한다는 계획이었고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시가전은 한달이나

 

계속되게 됩니다..

 

▲M60기관총을 사격하는 미 해병대

 

남쪽에서는 미 해병대가 주력인 MACV가

 

북쪽에서는 자유 월남군 제1사단이 협공해오자

 

수세에 몰린 후에의 월맹군시민 4,856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공무원,지식인은 물론 평범한 시민들까지 눈에

 

띄는 대로 무차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1968년 2월 24일 해군의

 

함포 사격과 A-4스카이호크 공격기의

 

근접지원으로 후에 성은 자유 월남군

 

제1사단이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투의 주력은 MACV였습니다.

 

▲후에 성을 공격하는 미 해병대

 

한달간의 전투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MCAV 216명 전사 1,584명 부상

 

자유월남 452명전사 2,121명 부상

 

월맹군과 베트콩은 8,113명 전사

 

98명 포로였습니다.

 

▲전사한 전우의 인식표를거두는 병사

 

유서깊은 역사적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길거리에는 시민들의 시체가 널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MCAV의 전략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시를 지키는 것은 손해가 크니 적이 이용할 것

 

같은곳, 은신하고 있을곳은 파괴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고가는 미군 병사

 

▲ 네이팜공격으로 화상입은 베트남소녀

 

이후 미군의 무차별적인 마을 파괴로 민심은

 

더욱 나빠져갔고 전략에 실패한 미군은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불패신화 월남전 최강 한국군

 

6.25치열했던 결사항전 용문산전투

 

자랑스러운 한국군 보병화기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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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지옥도가 펼쳐진 이오지마전투의

 

잘알려지지않은 비화들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1. 도널드 럴 일병

 

 

스리바치 산의 일본군들과 교전하던 도중

 

소대 한가운데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도널드 럴 일병이 수류탄이 떨어졌다며

 

 주변의 소대원에게 소리지르고,

 

 

 곧바로 수류탄에 몸을 날려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소대원들의 생명을 구했다고합니다.


이후 럴 일병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 헨리 힌리치 소위

 

미군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해상에서 실종된

 

조종사들을 찾으려고 함재기 8대를 날렸는데

 

 2대가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격추된 조종사중 1명인

 

헨리 힌리치 소위는 다행히 미군 초계정에

 

 발견되긴 했는데, 수병들이 일본군 조종사인줄

 

 착각을하고맙니다.


그래서 그 "일본군 조종사"가 구조해달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질까봐 소총을 겨냥하고

 

 큰 소리로 욕을해서 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구조해달랬더니 총을 조준하는 모습을 보고

 

힌리치 소위가 영어로 더 큰 소리로

 

별 오만가지 듣도보도못한 욕

 

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수병들은 미군 파일럿이라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그후 구조작업을 시작하고나서도

 

 힌리치 소위가 수병들에게 밑도끝도없이

 

평생동안 듣기도 힘들 오만가지

 

 욕을 했다고 합니다.

 

 

 

3. 지뢰

 

 

지뢰 제거를 위해 지뢰제거전차를 사용했는데

 

일본군은 예상을 하고 지뢰에 어뢰탄두와

 

폭뢰.기뢰등으로 개조하여

 

 

전차가 파괴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오지마 모래엔 철 성분이 많아 지뢰탐지기가

 

제역활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병들이 일일이 하나하나 나무막대기나

 

칼로 모래속에 꽂아가면서 지뢰를

 

제거해야 했다고 합니다


 

4. 월시 중사

 이분도 위에 소개했던 럴 일병이랑

 

비슷합니다.

 

이오지마 북부 일본군 소탕작전 중

 

 막 장악한 고지 정상에 방어선을 편성하는 도중

 

 일본군 수류탄이 또 소대원 한가운데 떨어집니다.


월시 중사가 그대로 수류탄을 덮쳐

 

 소대원들을 구하였습니다.

 

 

5. 잭 러머스 중위

 

 


베일리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

 

 베일리 대학이 미식축구에서

 

 우승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장래의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러머스 중위는 입대하기 전부터 유명인이었습니다.

 

이오지마 북부 일본군 격퇴중에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바위와 골짜기 틈에서 일본군은

 

 해병대의 진격을 악착같이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교착 상태에서 러머스 중위는

 

 일본군의 방어선을 앞장서 꺠트리기로 결심하고

 

 가까이 보이는 일본군 엄폐호로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신으로 달려드는 러머스 중위에게

 

일본군의 수류탄이 날라와

 

그 충격으로 러머스 중위는 넘어졌으나

 

벌떡 일어나 엄폐호에 뛰어들어

 

일본군을 소탕하였습니다.


엄폐호를 나서는 순간 또다시 수류탄이 날아와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러머스 중위는 두번째

 

 엄폐호에 뛰어들어 내부의 일본군을

 

 또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어서 3번째 엄폐호까지 소탕하고 나온

 

 러머스 중위는 놀라서 지켜보던 부하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명령에 그의 소대가 돌진을 시작

 

 또한 E 중대 전체가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중대의 선두에서 돌격하던 러머스 중위는

 

 지뢰를 밟고 말았고,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자

 

 러머스 중위는 피투성이의 웅덩이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였다고 합니다.


러머스 중위는 지뢰의 폭발로 두 다리가

 

 날아가 버렸고 이로 인해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로

 

 보장되던 그의 화려한 미래도 동시에

 

날아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러머스 중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으나, 그 상황에서도

 

러머스 중위는 계속 북쪽을 가리키며

 

돌격하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병사들의 마음속에 소대장에 대한

 

존경과 연민,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휘몰아쳤고, 미국판 반자이 돌격이라 할만큼

 

 엄청난 함성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내달렸습니다.

 


 

결국 냉정하고 침착하게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군들도 괴성을 지르면서 돌격해오는

 

 E 중대의 기세에 눌려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야했습니다.


그날 E 중대는 저녁때까지 작전구역 내의

 

 일본군을 모조리 사살하고 북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게됩니다..


후송된 러머스 중위는 그날 저녁에 사망하였고

 

 후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6. 이노우에 대좌

 

사무라이의 후손으로 검술의 고수인

 

 이노우에 대좌는 떠들썩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자주 부하들과 어울려 말술을 마시며

 

자신의 무용담이나 여자 이야기등을

 

떠들어 대곤 했고, 많은 부하들이 남자다운

 

 그의 모습을 좋아하고 존경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방공호에 앉아 부하들이

 

 포위되고 전멸당할 때까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는데다,

 

거기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 이후

 

매달 8일은 일본인들에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이 되어 있었는데,


이노우에 대좌는 3월 8일을 자신의 제삿날로

 

 정하고 모두가 기억할만한 화려한 방식으로

 

 최후를 장식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3월 8일 밤 10시 대좌는 약 1,000명 정도

 

 되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전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무장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고 몇몇은

 

 죽창을 들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소총,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

 

몇몇 병사들은 자폭할 마음을 품고

 

가슴에 지뢰를 묶기도 하고, 의무병으로 위장해

 

 해병대원에게 접급하기 위해 들것을

 

가지고 온 병사도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대좌는 수리바치 산 탈환을

 

 최종 목표로 잡고, 도중에 비행장에 침입하여

 

 최대한 많은 항공기를 파괴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3월 8일 오후 11시에는 제2/23 대대와

 

 제3/24 대대의 방어선에 전례가 없는

 

엄청난 일본군이 방어선을 침투하려고 시도합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을 주고받고 정신이 없던 도중

 

 오후 11시 30분에 이노우에 대좌가 전형의

 

 선두에서 군도(군인용 칼, 일본도)를 뽑아 높이

 

치켜들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최전방에서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였고

 

 부하들 또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일본군이 미군의 방어선에 접근하자

 

조명탄이 터지며 일본군의 모습을 환하게 비췄고

 

 이어서 미군의 기관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이노우에 대좌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뛰어난 검술을 미군에게 보여주겠노라고

 

 장담했지만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이누우에 대좌는 벌집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일본군은 계속 돌격해

 

 방어선에 도달한 후 일본군은 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은 어두운 밤중에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소총과 총검, 개머리판 등 온갖 무기로

 

백병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들것을 가져온 일본군들은 들것병으로 위장해

 

 부상한 미군이 의무병을 부르면 달려가서

 

 부상병과 뒤늦게 달려온 의무병을 사살하였습니다


이날의 전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서

 

다음날 해가 뜬 이후에도 소탕전이

 

계속되어 정오가 되어서야 끝났다고합니다.

 

▲이오지마의 포탄 구덩이에서 죽어 가는

 일본군 병사의 입에 손으로 담배를

물려주는 미 해병 대원


이떄의 반자이 돌격은 평소의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학살당한 전과는 다르게

 

 일부 병력이 소란을 피우기는 했어도


해병대의 방어선에 접근할 떄까지

 

 최대한 조용히 지형지물에 엄폐를 하면서 이동했고

 

 공격에 참가한 병사들도 잘 무장되어 있었고

 

 사전 정찰에 화력 지원도 충실했었다고합니다.


 

7. 니시 대좌

 

▲ 니시 다케이치

 

이오지마 전투의 막바지 무렵

 

니시 다케이치 대좌는 450여명의 부하들과

 

 커쉬맨 고립지대의 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중 300명은 누워서 꼼짝도 못할 중상자들이었고

 

나머지 150명중 90명 정도는 겨우 기어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니시 대좌가 이 고립지대 내부에 있다는걸 안

 

 해병대의 고위 지휘관들은 일본인

 

최초의 올림픽  승마부문 금메달리스트인

 

그를 구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합니다.


항복 권유 방송에서 남작인 니시 대좌에게

 

 깍듯이 작위를 붙여 불렀으며

 

 전쟁 이전 그와 친했던 육군의 버틀렛 대령을

 

 괌에서 항공편으로 급히 데려와


항복권유 방송에 투입하는 성의를 보였으나

 

 니시 대좌는 이런 항복 권유를 무시했습니다.


그가 어디서,언제 죽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결국 그가 어디서 최후를

 

 맞았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8. 쿠리바야시 장군의 최후

 

 

쿠리바야시 장군이 마지막으로 방어하던

 

 지역만을 남긴 채 이오지마 전역이

 

 미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어스킨 소장은 일본군 고위지휘관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로 하고. 자원한 일본군

 

 포로 2명에게 어스킨 소장의 친서를

 

 이케다 대좌에게 전달해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 일본군 전령들은 해병대 구역을 떠나

 

일본군 전선으로 들어가 이케다 대좌에게

 

어스킨 소장의 친서를 무사히 건넸으나

 

 

 

마침 회의 중이던 쿠리바야시 장군 또한

 

같이 친서를 읽었고, 쿠리바야시 장군은

 

항복하지 않기로 한 듯 하였습니다.

 

 

18일 저녁, 쿠리바야시 장군은 도쿄에

 

 "일곱번 다시 태어나도 무기를

 

 잡고 적과 싸우겠다"

 

자신의 절명시를 타전하고,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최후는 자결했다던지,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했다던지 여러가지 말이 많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이사람 또한

 

 니시 대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른다고합니다.

 

 


9. 마지막 전투

 

3월 25일 일본군의 마지막 계곡지역을

 

장악한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가 끝났다고 믿었으나


300여명의 다수가 장교로 이루어진 일본군이

 

 25일 밤에 지하통로를 통해 은밀히 해병대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다음날 새벽에 북부 비행장과

 

미군 야영지를 기습하였습니다.

 

 

 

이 공격은 반자이 돌격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군 능력의 한도 내에서 제일 가치있는

 

 목표인 제7전투기사령부의 조종사들을

 

 제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2개의 미끼부대가

 

 미군의 주의를 돌리며 증원을 방해하는 동안

 

 주력이 조종사들이 사용하는

 

 천막들을 기습하였습니다.


공격에 참가한 일본군들은 이례적으로

 

 미군의 콜트 45구경 권총, M1 개런드, BAR 등의

 

 미제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심지어

 

바주카포 1문까지 있었습니다.

 


 

이 기습에서 일본군은 262구의 시체를 남겼고

 

 18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들 특공대는 미군 53명을 사살하고

 

119명에게 부상을 입혔는데

 

사상자들은 대부분 조종사들이었습니다.

 


 

10. 항복? 자살?

 

이오지마 전투가 거진 끝난 줄 알았던

 

4월 16일 제147연대의 병사가 지하 30m의

 

동굴속에 있던 일본군의 야전병원을 발견합니다.

 

 

 

이곳에서는 3명의 군의관이

 

 약 7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는데

 

 항복권유방송을 하자 군의관

 

이노아카 마사루 소좌는 동굴 내의 생존자들과

 

 함께 항복여부에 대해 토론을 가지고

 

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결과는 항복에 찬성69명, 반대 3명이었다고합니다.


반대자 3명중 고지마 규타로 상등병은

 

투표 결과가 항복으로 결론이 나자

 

 그자리에서 자살해 버렸습니다.

 


전후 일본에 돌아간 군의관들 중

 

노구치 대위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곳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스스로의 회환과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을 떠나

 

 브라질로 이민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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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지옥도가 펼쳐졌던 이오지마 전투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TOP10

 

일본의 진주만공습 실수 1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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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각나라에는 정보기관들이 있는데

 

그 정보기관들은 첩보수집,간첩활동,정보작성

 

방첩,보안, 기타 정보활동을 합니다.

 

이번에는 전세계에서 최고의 정보수집능력을

 

가지고있는 정보기관 TOP5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TOP5 DGSE

 

 

프랑스의 해외 정보기관

 

 

DGSE의 전신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시

 

 자유 프랑스군에 창설된

 

중앙정보행동국(BCRA)입니다.

 


 BCRA는 1943년 11월부터

 

알제리 영토에서 활동하면서

 

특수전력총국(DGSS)으로 개칭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1월 6일 레지스탕스 운동의

 

 첩보망이 DGSS에 속하게 되면서

 

연구조사국(DGER)으로 통합합니다. 


전후 1946년에는 총리 직속의

 

방첩외국정보국(SDECE)이 편성됐습니다.

 

 이 기관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인도차이나

 

 라오스 및 베트남 영내에서의 특수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1962년 샤를 드 골은 SDECE를

 

 국방부 산하에 두어 그 임무를 군사 문제로 한정했고

 

 이후 1982년 4월 4일 사회당 정권에 의한

 

 개혁으로 SDECE를 현재의

 

 대외정보총국(DGSE)으로

 

개칭하였습니다.


 

DGSE는 좋은 정보수집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쪽에선 미 CIA와 영 MI6에 비해

 

 아주 조금 밀리는 정보력을 지녔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나은 아프리카도 CIA와 MI6에

 

 밀리는 지경이니 사실상 모든 부분에서

 

 라이벌 영국의 해외정보기관 MI6에 밀립니다.


그러나 그건 DGSE가 덜 떨어졌기보다는

 

 그만큼 MI6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TOP4 MOSSAD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놀라운 대중동 정보수집능력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공작 능력으로 구소련의

 

 KGB와 함께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1948년 6월 초대 책임자를 레우벤 실로아흐로하여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하고

 

 이후 1949년 12월 13일에 정치국을

 

확대개편하여 정보조정연구소로

 

 재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식명칭은 '중앙공안정보기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1949년 다비드 벤 구리온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의장은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 


이후 1951년에는 총리 직속기구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모사드의 창설연도를

 

195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휘하에 현장투입 및 암살팀인 '키돈'과,

 

통신감청 전문기술팀 '야호로민', 해당 공작 지역에서

 

모사드를 도와주는 유대인들인

 

'캇차'와 '사얀'/'사야님'

 

그리고 도처에서 운용하고 있는 각국 국적의

 

모사드 정보원들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중동 정보수집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막강하나 특유의 잔혹성 때문에

 

 생긴 거품이기도 합니다.


대중동 정보수집 능력이 압도적 원탑까진 아니고


 MI6와 CIA에 버금가는 대중동 정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동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관한

 

정보수집 능력은 상당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은 DGSE보다도 정보수집능력이 떨어지나


중동에서 만큼은 엄청난 정보수집 능력을 보여주며


이러한 대중동 정보수집 능력이 모사드의 조국

 

이스라엘에 꼭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에


DGSE보다는 더 나은 정보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암살을 한

 

정보기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뒤돌아볼 시간이 없는

 

이스라엘의 상황 때문이기도합니다


 정보전에서 암살은 절때 희긔한 일이 아니며


애초에 뛰어난 정보기관이라면

 

국제적인 시선 때문에 암살을 성공해도 


자신들이 암살했단 걸 들키면 안됩니다.

 


급박한 이스라엘 상황 때문에 모사드는 자신들의

 

암살을 은폐할 시간도 아까워 해서


많은 암살을 노출시켰습니다.


공식적으론 암살 1위이나 비공식적으론 


KGB,CIA ,SVR ,MI6보다 암살 수가 적을 것이라고 


평가받고있습니다.


 

 

TOP3 M16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통칭 '서비스' 또는 '서커스'


세간에는 국내보안을 담당하는

 

 'MI-5'와 함께 'MI-6'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대외 정보기관입니다.

 


 

1909년 비밀정보국(Secret Service Bureau)으로

 

 처음 발족한, 정보기관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긴 편에 속하는 기관입니다. 


영국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데에

 

 음지 양지에서 많은 기여를 했고

 

 그 가운데 착실하게 성장, 발전하여

 

지금도 CIA, BND, DGSE와 같은 서방 정보기관들의

 

좌장 같은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불리는 'MI-6'란 명칭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청(War Office)' 산하에 영국의 정보기관들이

 

 통합되어 있을 때 사용된 명칭으로

 

 군정보부6호(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

 

 줄인 것입니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외무부 소속이나 실제로는

 

 총리 직속이며 총리 부재 시 보고를 받는 사람도

 

 외무부 장관이 아니라 국방부 장관입니다.


 

사실 서방 정보기관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전후 60년대에는 킴 필비를

 

 위시한 악명높은'캠브리지 5인조'

 

사건이나 '크리스틴 킬러 사건' 등

 

 KGB에게 실신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냉전시기 정보전에서 KGB에 실신 당한건

 

 CIA 역시 마찬가지며 서방 모든 정보기관이

 

 힘을 합쳐도 KGB에 밀린 것을 생각하면

 

 MI6가 KGB에 실신 당한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또한 항상 KGB에 실신 당한 CIA와는 다르게

 

 오히려 MI6 는 80년대에 KGB가

 

산하 런던 첩보 조직을 철수시킬 정도로

 

 성공적인 대간첩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대러시아, 구 동구권

 

정보 능력에 있어서는 CIA를 능가하며

 

 지금도 서방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재 규모는 2,500명의 요원에 약3억 파운드

 

 정도로 추정되는 예산을 배정받고 있습니다.


냉전시기 까지만해도 CIA보다 더 위라는

 

 평가를 받는 저비용 고효율의 환상적인


정보기관이였지만 냉전이 끝나고나선

 

 요즘은 CIA에 살짝 밀리는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래도 서방 최고의 정보기관 중 하나입니다.


애초에 미국과 영국이 체급 차이가 심한데 


그 둘의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능력이 비슷한건

 

 MI6가 얼마나 대단한 기관인지를 보여줍니다.


 

 

TOP2 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미국 중앙정보부 미국의 정보기관중 하나로

 

 약칭인 CIA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KGB 그리고 MI6 와 더불어 냉전을

 

상징하는 집단중 하나입니다 

 


본부는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냉전시절에 KGB가 '루뱐카'라고

 

불리는 것처럼 '랭글리'라고도 불립니다. 


 

 

 

할리우드 영화로 인해 상당히

 

 거품이낀 정보기관입니다


 

전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럭주물럭대는 조직으로

 

알려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세계의 지배자인 양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와는 다르게 현실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냉전시기 정보전에선 거의 대부분 라이벌

 

 소련의 KGB에 패배했으며


그나마 KGB에 조금씩 골탕을 먹인

 

 MI6와는 다르게 KGB한테서 당하기만했습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MI6보다도 늦게 알았으며 냉전 시기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등의 정보기관은 CIA 정보보단

 

 MI6의 정보를 더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중 하나이며


이제는 MI6를 능가한다고 평가받으며


명실 상부한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입니다.


다만 아직도 러시아 정보기관한테는

 

조금 밀리는 경향을 보이긴합니다.

 


 

냉전 시기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위해

 

미국 정부는 CIA에 많은 법적 권리를 줬고


CIA는 국제법도 그냥 무시하며 여러 작전을

 

 펼쳤지만 CIA가 일으킨 수 많은 문제때문에


공산주의를 막긴 커녕 오히려 공산주의가

 

더 퍼지게 됩니다.


KGB 그리고 모사드와 함께 아주 잔혹한

 

 고문을 하는 정보기관이기도 합니다.


 

 

 

TOP1 SVR

 

 

 


Foreign Intelligence Service 

Слу́жба вне́шней разве́дки

 

러시아의 정보기관

 

 

KGB의 후손입니다.

 


 

쿠데타에 가담한 KGB가 옐친 대통령에 의해

 

 홀랑 망하면서 국내 업무를 담당하던

 

 KGB 제2총국은 FSB가 되고, 해외 업무를

 

담당하던 제1총국의 업무를 SVR이 맡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비유하면 CIA가 SVR

 

FBI가 FSB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1991년 12월 18일에 탄생되었고, SVR의 주업무는

 

 대량파괴 핵무기 제조 감시,

 

 대테러 활동, 마약거래 단속,

 

 국제범죄단 감시, 불법무기 거래 감시와 러시아인

 

 보호활동 중이며, 96년 옐친 대통령이 SVR의

 

정보수집이 기대 이하라며 상업정보의 중요성을

 

역설한 뒤 우주기술 유출방지와 플루토늄 등

 

 원자재 유출 감시활동 업무가 추가되었습니다. 

 


산하에 특별행동부대(살해부대) 자슬론(Заслон)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2010년, 미국에서 부동산 거래업자로 위장하여

 

 간첩 활동을 벌어다가 추방당한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이 바로 이곳 소속입니다.

 

 

현재 CIA와 치열한 정보수집전을 벌이고 있으나

 

조지아 전쟁, 리비아 사태,시리아 내전,

 

유로마이단 사태 , 크림 반도의 합병

 

 소식 등의 정보전에서 CIA가

 

 SVR에게 패배,정보전에서 러시아에 패배한 사실을

 

알게된 미국 의회한테 CIA는 엄청 추궁받았습니다.


즉  아직도 CIA와의 정보수집전에서 한 단계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전문가 평이 대세입니다. 


사실 냉전 시절에도 KGB와 정보수집전에서

 

CIA가 밀렸던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KGB가 반백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정보라인을 그대로 물려받은게 SVR이니


아직도 세계 최고의 정보수집 능력을 보유한게

 

 당연하기도 합니다.

 


 

미녀 스파이 안나채프먼이 미국에서 잡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러시아 스파이들이 미국과

 

유럽에 잠입해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미국은

 

 유럽 각국에게 이를 알리고정보를 나눠주는데 

 

그 정보로 인해 독일에 30년간 살던

 

러시아 부부 스파이가 잡히게 됩니다.


독일인으로 평생 살아온 이 스파이 부부의

 

 20대 딸은 부모님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독일에서 잡힌 스파이 부부는

 

 '꼬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0년전 KGB가 독일에 심어둔 이 스파이 부부는

 

 사실상 정보원이 EU 본부에서 빼내온 정보를

 

 러시아로 보내는연락책에 가까운 간첩이였고 


실제로 누가 어떻게 언제 EU 본부의 정보를

 

빼낸건지는 아무리 조사를해도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KGB 시절에 미국과 유럽에 잠입시킨

 

 러시아 스파이들을 SVR이 인수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밝혀졌으며


얼마나 많은 수의 러시아 스파이가 미국과 유럽에

 

잠입해 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 이 후 CIA에 러시아 스파이가

 

 잠입해 있다는 썰이 우스게 소리로

 

미 의회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러시아 스파이가 CIA 잠입해 있는게 아니면

 

 계속해서 CIA가 KGB와 SVR에 밀리는게

 

가능하냐는 의심이겠죠


암튼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건 스파이 부부가

 

 갖고 있던 장비들이 상당히 최첨단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우주/군사 기술의 정점이 들어간

 

각 종 장비들을 얻게 된 독일은 이 장비들을

 

분석하고 있으며 미국 CIA는 독일 BND에게

 

 돈 얼마든지 줄테니 저 장비들 좀 구경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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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대표 첩보기관 모사드

 

사실로밝혀진 미국의 충격적인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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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북한의 밤거리는 거의 불이 없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시면 북한 전력사정의 실상이

 

와닿을꺼라 생각해서 알아보도록할게요!

 

 

북한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평양

 

시내에는 최우선적으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진을 보면 전기가 그래도 좀 들어오네?

 

라고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아니에요

 

 

 

북한의 발전량은 235억 Kwh정도인데

 

우리나라가 4336억 Kwh정도이니까 고작

 

11분의 1수준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나마 계속해서 돌렸을때가 235억 Kwh가

 

나오는것이고 실제로는 연료부족으로 제대로

 

돌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북한의 발전량은 1990년에 정점을 찍은 뒤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수준으로 다시 올라가

 

본적이 없어요

 

오히려 중국에서 김정은이 인정받지 못하고

 

대중국 외교가 특기였던 장성택에 처형 이후

 

에너지 공급책인 중국이 생각대로 에너지를

 

공급해주지 않아서 점점더 떨어지는중입니다.

 

▲평양역 내의 모습

 

사람이 있을때나 없을때나 가리지 않고

 

일단 밤에는 불을끄는게 기본입니다.

 

 

필요한 최소한의 전기만 남기고 다 끄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위에 올렸던 평양역이 전기사정이 안좋을때

 

사진이였는데 다른조명은 다 끄지만

 

김부자의 사진에 비추는 조명은 꺼져서는

 

안되는 북한입니다.

 

 

워낙 송전 불량이 많아서 전체 정전이

 

일어나는 일도 제법 있는 일인데 이런 상황이

 

되어도 절대 김일성 동산의 조명은

 

꺼지지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더욱 김부자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때는 그저 사람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미친곳으로 보일 뿐이겠죠.

 

▲평양내 러시아 대사관

 

여기에 전기 안들어오면 러시아한테 항의가

 

들어오기때문에 여기도 최우선 전기공급대상 중

 

하나라고 합니다.

 

▲평양 내의 학생소년궁전의 야경

 

전력사정이 좋을때는 최대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조명을 켜두는 편입니다.

 

▲평양의 개선문

 

역시나 항일,조국해방전쟁승전(북한입장)의

 

위대한 기념물이라 생각하고 웬만해서는

 

이곳도 조명을 안끈다고 합니다.

 

▲평양 제 1 백화점

 

가끔 당 고위간부가 이용하고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우선 순위를 높게 두고

 

있다고합니다.

 

그래봐야 김정은 사치 자금줄일텐데요..

 

▲평양 제1 백화점 내부모습

 

정말 필요한 최소한의 전기만 켜놓고

 

영업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딱 필요한 조명만 켜놓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영업을 한다는것이

 

신기해서인지 제법 관광객들이 오는편이라고합니다.

 

▲평양 산원

 

명색이 변원이라 응급환자를 받기 위한

 

대비는 되어있고 3분의 2이상전기는

 

꺼져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주체 사상탑

 

당연할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주체사상탑도

 

최우선 전기공급의 대상입니다.

 

인민의 안전이나 관광객의 편의보다 주체사상과

 

김부자 신격화가 더 중요한게 북한입니다.

 

▲평양술집

 

평양에 사는 사람들이 자주 가는 술집인데

 

그나마 2층은 아예 전기를 끄고 영업중입니다.

 

 

그래도 광복거리나 청광거리등은 외국인 대상의

 

음식점등이 있어서 우선순위가 높은편입니다.

 

손님이 거의없는 은하수식당 승리식당모습

 

▲양각도 호텔앞

 

호텍밖과 안이 정말 낮과 밤같습니다.

 

 

▲ 여성 교통보안원들

 

더우나 추우나 낮이나 밤이나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는 여성교통보안원들은

 

평양의 명물입니다.

 

우리나라군대와 같은 맥락이기도 하지만

 

교통정리를 전자체계화하는 유지비나 시설구축에

 

드는 비용보다 인력이 더 싸기때문이죠

 

 

차도에도 그다지 빛이 많지 않아서

 

교통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사실 다니는 차가 얼마 없는게 함정입니다.

 

 

슬슬 평양 외곽으로 가면 빛이 줄어드는데

 

어차피 북한은 발전소가 부족한게 아니라

 

시설의 노후화,연료부족등이 제일 큰 문제이기때문에

 

자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길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것입니다.

 

만경대 방향에서 거의 유일하게 볼수있는

 

마지막 불켜진 노점

 

▲평양을 나가는순간 끊기는 가로등

 

 

그나마 발전소가 있는 남포등지로 가면

 

약간씩 전기를 볼수가 있습니다.

 

 

원산에도 약간의 관광객용 시설이 있어서

 

전기가 들어오는 편입니다.

 

▲남포의 밤하늘

 

평양에서 밤하늘의 별을 볼수 없는 건

 

도시가 너무 밝아서가 아니라 막대한 매연

 

때문인데 태울 수 있는건 다 태워서 화력발전을

 

하다보니 프랑스 등지에서 쓰레기 등을

 

청부받아서 태우고하기때문에 공기가 오염되어

 

별빛을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남포 지나 용강온천 입구

 

북한에서 가로등이 없는곳에 불빛이 보이면

 

반가움과 동시에 두렴움이 앞서게됩니다.

 

"무엇을하는곳이길래 전기가 공급되지?"

 

라는 생각이 들기마련이죠

 

 

실제로 북한 주민들의 밤은 전기 공급이 부족해서

 

양초하나놓고 공부를하거나 일찍자는게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당원 자녀들도 컴퓨터는 꿈도 못꾼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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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머리를 말릴때 사용하는 헤어드라이기

 

많은 분들이 이 헤어드라이기를 머리를

 

말리거나 머리를 만지실때만 사용하시는데

 

이 헤어드라이기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활용법 5가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NO.1 양초자국 제거

 

많은분들이 양초자국이 바닥에 눌러붙으신

 

것을 보신적이 있으실텐데요

 

헤어드라이기 하나만 있으면 이러한

 

양초자국을 손쉽게 제거할수가 있습니다.

 

헤어드라이기의 열기로 눌러 붙어있는

 

양초자국을 녹인다음에 그냥 휴지로 쓰윽

 

닦아내기만 하면 깔끔하게 지울수가

 

있다고 합니다.

 

 

 

NO.2 스티커 제거

 

 

스티커를 제거하는데 수많은 방법이

 

존재하고 있지만 헤어드라이기를 이용하여

 

잘 떼지지 않는 스티커자국을 손쉽게

 

제거할수가 있습니다.

 

스티커가 잘 제거되는 이유는 헤어드라이기의

 

열기가 스티커접착제의 접착력을 낮춰주어

 

보다 손쉽게 떼어낼수있는 상태로

 

바뀐다고 합니다.

 

 

NO.3 크레파스 지우기

 

 

부모님들의 수많은 고민중 하나인

 

아이들의 낙서!

 

이러한 낙서를 지우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하지만 깔끔하게 지우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크레파스 자국역시 헤어드라이기

 

하나면 아주 손쉽게 지울수가 있고

 

충분한 열기를 가한뒤에 휴지로 쓱 닦아내면

 

쉽게 지워진다고 합니다.

 

 

NO.2 음식 해동

 

 

만에 하나 전자레인지가 없거나 또는

 

고장이 났다던지 아니면 전자레인지에서

 

해동을 하기힘든 그런 음식들은

 

헤어드라이기로 빠르게 해동이 가능합니다.

 

또한 원하는 부분에 직접적으로 해동을

 

가하는 방법이기때문에 빠른해동이

 

가능하며 급할때 이러한 방법을 쓰시면

 

좋을듯 합니다.

 

 

NO.1 신발이 작을때

 

 

신발이 작아서 발에 꽉끼는 경우에

 

드라이기로 아주 손쉽게 해결할수가 있습니다.

 

신발은 신은채로 열기를 가하면 신발이

 

팽창하여서 자신의 발 사이즈에 맞게 자연적으로

 

변형이 일어나 발에 꼭맞는 편한신발로

 

바뀐다고 합니다.

 

헤어드라이기 열기는 정말

 

만능으로 사용가능한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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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치를 떨었던 수많은 피를 흘리게한

 

역사상 최악의 인물 TOP10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TOP10 김일성

 

▲6.25 남침 직전의 김일성 모습.

 

북한의 1대 독재자입니다.

 

한국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은 일으킨

 

전쟁범죄자죠..

 

이놈때문에 지금에 북한이 있고

 

같은 한민족끼리 수많은 피를 흘리고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무덤을 파내어 찢어버려도 속이

 

안시원한 김일성!!!

 

 

 

 

 

TOP9 이디 아민

 

 

우간다의 독재입니다.

 

이디 아민 집권중 저지른 엽기적이고

 

추악한 행각은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하기가

 

힘들정도입니다.

 

 

직접 고안한 고문들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남자의 경우 성기를 쇠꼬챙이로 찍거나

 

잘랐고 여자는 처형후 성기를 도려내

 

먹기까지 했다고합니다.

 

별명은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

 

 

TOP8 폴 프트

 

 

캄보디아의 독재자입니다.

 

비현실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지식인,자본가들을 숙청하여 암매장했습니다.

 

 

집권 기간동안 캄보디아 인구는 750만명에서

 

672만명까지 줄어들었으며 당시 평균

 

수명은 16세까지 떨어졌습니다

 

 

 

TOP7 칭기즈칸

 

 

유럽 및 아시아를 정복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남자들은 일단 모두 죽이고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하거나

 

여자들의 머리채를 잡아서 성벽에

 

찧어죽였습니다.

 

 

또 사람의 목을 베어서 진흙과 개어서

 

탑을 쌓아두기도 하였습니다.

 

 

 

TOP6 마오쩌둥

 

 

중국의 공산주의 독재자이자

 

중국 최악의 문화대혁명을 이끈인물입니다.

 

이 시기에 사망한 사람만 7,0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TOP5 도조 히데키

 

 

일본의 전범이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주범입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음

 

동남아를 침략해서 수많은 동남아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TOP4 레오폴드 2세

 

 

벨기에의 국왕으로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어 악랄하고 가혹하게 수탈하였습니다.

 

추정치에 근거하면 최대 몇천만명에 달하는

 

콩고인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식민지를 착취하던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그의 콩고통치를 가리켜 야만과 잔혹함의

 

극치라고 비난했던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인간이였는지 알수가 있습니다.

 

 

 

TOP3 하인리히 히믈러

 

 

나치 독일 슈츠슈타펠의 지도자이자

 

유태인 대학살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대인 특수작전집단

 

창설한 사람이자, 최종 지휘 책임자로서

 

600만에서 12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산업적 규모로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TOP2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의 독재자로 적백내전과

 

관련된 인사 1000만명 이상을 숙청했고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700만명이

 

굻어 죽었습니다.

 

이 외에도 스탈린 치하에서 '굴라그 수용소'에

 

있던 사람은 거의 수천만 단위입니다.

 

 

 

 

TOP1 아돌프 히틀러

 

독일의 독재자이자 나치당의 두령이자

 

2차세계대전의 주범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을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특히 독소전쟁당시

 

천만명이상의 소련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또한 홀로코스트(유태인,집시,장애인)학살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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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즘은 꼭 출근을 하지않아도

 

집안에서도 많은 돈을 버는 직업들이

 

있습니다. 궁금하신가요

 

그럼 빨리 알아보도록 할게요!

 

 

TOP6 작가&저자

 

평균연봉 약 6476만원 ~

 

 

자료준비,수집,모든일을 컴퓨터만 있으면

 

재택에서 할수가 있습니다.

 

 

TOP5 보조교사

 

평균연봉 약 6947만원 ~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으로 학생들을

 

가르칠수가 있으며 화상회의,전화등

 

재택에서 일을 할수가 있다고 합니다.

 

 

TOP4 공인간호사

 

평균연봉 약 7300만원 ~

 

 

의료 콜센터나 치료계획 및 평가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병원에서처럼 오랜시간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TOP3 컴퓨터 스프트웨어엔지니어

 

평균연봉 약 1억8천만원 ~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들은

 

각 팀을 나눠 그들의 집에서 프로젝트를

 

작업하며 재택근무시 1주 약 50시간정도

 

일을 한다고 합니다.

 

 

 

TOP2 재무관리사

 

평균연봉 약 1억1657만원 ~

 

 

주요업무는 회사나 기관의 재정을 감독하고

 

재무보고서를 제공하는 일을하는데

 

재택에서도 할수가 있다고 합니다.

 

 

TOP1 의사&방사선학자

 

평균연봉 약 2억1900만원 ~

 

 

피어리뷰작성,보고서 등을

 

재택에서도 작성할수가 있어서

 

굳이 출근을 안해도 되는직업이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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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상에서는 수없이 많은 종류와

 

생김새를 가진 아이스크림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아이스크림중 어떤 아이스크림이

 

맛있을까요라고하면 찾기가 힘들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스크림집이 맛있나요라고

 

물으시면 대답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맛집TOP10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TOP10 Florence

이탈리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939년에 처음

 

문을 연 페르케노는 젤라또 아이스크림

 

전문 가게입니다.

 

 

매장역시 오픈 한 그대로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매일 구매한 신선한 재료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고 합니다

 

 

국내에선 페르케노라는 이름으로 대형매장

 

안에 입점한걸로 알고있습니다.

 

10대아이스크림에서 역시 빠지지않는

 

젤라또아이스크림답게 정말 맛있겠죠

 

 

 

TOP9 Vaffelbageriet

덴마크

 

덴마크 코펜하겐 바펠바게리트!

 

1906년에 오픈하였으며 티볼리가든에

 

위치한 아이스크림가게입니다.

 

맛집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아이스크림 하우스라고 합니다.

 

 

큰 와플콘 안에 초콜렛 코팅을 하고

 

체리 잼, 휘핑크림 4가지 시럽토핑을 얹은

 

아이스크림이 인기라고 합니다.

 

40여개의 레스토랑과 콘서트장 놀이기구등이

 

몰려있는 티볼리가든은 5월부터 9월중순까지

 

열려 있다고 합니다.

 

 

TOP8 A'jia Hotel

터키

 

터키하면 대표적인 음식인 케밥과

 

익살스럽게 아이스크림을 퍼주는 모자쓴

 

아저씨를 먼저 떠오르게 합니다.

 

8위에 랭크된 터키 이스탄불 아지아호텔

 

야외 테라스에서 맛 볼수있는 다양한 메뉴로는

 

유명한 디저트 메뉴로 염소우유로 만든

 

튀김 바닐라 아이슼크림, 전통터키아이스크림

 

돈두르마를 꼽을 수 있는데요

 

 

돈두르마는 터키어로 '얼리다'의 돈두르만크에서

 

비롯되어 터키 마라슈 지방에서 유래되어

 

마라슈 아이스크림이라고도 합니다.

 

 

 

TOP7 Glace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글라세 매장에서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최신 아이스크림기계가

 

아름다운 디잔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들과

 

딸기 파스타치오, 바닐라 콩, 장미꽂잎

 

벨기에초콜릿등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다고합니다.

 

 

 

 

TOP6 Ice Cream City

일본

 

 

300가지가 넘는 아이스크림 제품을

 

맛 볼수있는 있는 일본인 특유의 엉뚱함이

 

묻어있는 아이스크림시티입니다.

 

 

도쿄 이케부쿠로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놀이공원테마파크의 일부인

 

아이스크림시티에는 특이한 맛 아이스크림이

 

많이 있습니다.

 

 

소금 아이스크림, 말사시미 맛, 장어맛,

 

간장조림 치킨맛,와사비맛 등 다소 이상할것

 

같은 아이스크림들과 이탈리아 전통

 

아이스크림 젤리또, 미국아이스크림들도

 

맛 볼수있는 아이스크림 천국이라고 합니다.

 

 

 

TOP5 Helados Scannapieco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아이스크림 샵 엘라도스 스카나피에코입니다.

 

아르헨티나에 위치한 아이스크림가게이지만

 

아이스크림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1938년에

 

오픈한 이후로 변함없이 작은가게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곳입니다.

 

 

초코와 바닐라 온갖 과일맛등 50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피치.시나몬,레몬 샴페인들과

 

카샤샤와 설탕,라임을 섞어만든

 

"카이피리나"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브라질

 

국민 칵테일도 맛볼수있는 유명한곳이라고합니다.

 

 

 

TOP4 Devon House 

자메이카

 

밥말리와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 킹스턴

 

중심부에 위치한 자메이카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하우스입니다.

 

19세기 건축물 양식이 마치 미국 화이트하우스를

 

연상시킬정도라고합니다

 

 

"Ice Cream"이아니라 "I-scream"이라고

 

메뉴에 써놓여져있다고 하네요

 

자메이카 전통 체리를 넣은 레큘러 아이스크림부터

 

망고,코코넛,그리고 이국적인 피스타치오를

 

넣은 아이스크림과 데본 흑맥주아이스크림

 

이라고하는 다소 엉뚱한 아이스크림도

 

있다고 합니다.

 

무려 27가지의 아이스크림을

 

 즐길수가 있다고 합니다

 

 

TOP3 Bombay Ice Cream 

미국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봄베이 아이스 크리머입니다.

 

바로 인도 봄베이의 그 봄베이가 맞이며

 

평소 쉽게 먹을수없는 인도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가게입니다.

 

 

인도의 여름에 볼 수 있는 전통 아이스크림

 

디저트인 쿨피(Kulfi)를 맛 볼수있고

 

고소하면서도 뒷맛이 상큼하게 마시는 요거트

 

랏시(Lassi)또한 인도를 가지 않아도

 

먹어 볼수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맛집이라고 합니다.

 

 

 

TOP2 Ted Drewes Frozen Custard

미국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테드 드루즈 프로즌 커스터즈입니다.

 

1929년 오픈이후로 세인트루이스의 명물로

 

손꼽히는 아이스크림가게입니다.

 

프렌차이즈 업체로부터 수많은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는 일화로

 

세인트루이스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고있다고 합니다.

 

 

일반 소프트아이스크림과는 다르게

 

유지방이 많아 부드럽고 진한맛이라고합니다.

 

신선한 크림과 달걀 그리고 설탕으로 만든

 

Flavours,Concretes,Sundaes로

 

구분 된 메뉴가 특이합니다.

 

프로즌 바닐라 커스타드가 대표아이스크림입니다.

 

 

 

TOP1 Capogiro Gelato

미국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여행에 꼭 들려봐야하는

 

명소라고합니다.

 

이탈리아식 젤라또를 맛보려는 관광객들로인해

 

이전부터 유명한 젤라또

 

아이스크림가게라고합니다.

 

 

Amish grass-fed 젖소의 신선한 우유를

 

원료로 다른지역어세는 맛볼수없는

 

수제 소르베와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매일

 

만들기때문에 그 맛으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추천 메뉴로는 마다가스카 버번 바닐라

 

헬로 그리노(석류), Nocciola Piemonte(헤이즐넛)

 

사이공 시나몬, 태국 코코넛 우유아이스크림이

 

있으며 필라델피아에 4곳이 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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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군대를 다녀와서 예비군이신 분들도

 

계시고 아직 입대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이번에는 군대다녀오신분들

 

이라면 공감할수있는 군대에서 가장

 

짜증나는 순간 TOP에 대해 알아볼게요

 

 

TOP10 VIP 방문

 

 

군대에서 귀빈이 방문한다는 소식은

 

일반 사병들에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입니다.

 

 높은신분이 올수록 부대 전체에 비상

 

걸려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추석이나 명절등에 방문을 한다고하면

 

힘을 내라고 응원차 방문을 하는거겠지만

 

정작 VIP들은 병사들이 어떤 고생을

 

하는지 잘모르는거같습니다 ㅎㅎ

 

VIP가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훈련을

 

중단하고 대청소에 들어가며 그때 계급이

 

일이병이라면 더욱 고생을 할것입니다

 

 

치약은 단언컨대 최고의 청소도구중 하나이며

 

모든 얼룩등을 벗겨낼수 있는 신비로운 물건

 

이라는것을 발견할수가 있는

 

 시간을 가지게됩니다.

 

 

 

TOP9 재설작업

 

 

군대에서는 잡초를 뽑는 작업과 함께

 

악마의 작업이라 불리는 제설작업

 

최전방으로간 군인들에게는 더욱더 정말

 

지옥같은 시간을 선사하는 작업입니다.

 

 

제초작업에 경우는 새벽에 할리가 없지만

 

이 제설작업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새벽에도

 

눈이 쌓이면 자다가 일어나서 작업을

 

 나가야만 합니다

 

특히 군대는 계급사회인 만큼 가을쯤이나

 

초겨울에 군입대를 한 군번은 그겨울을

 

차원이 다른강도에 재설작업을하게되어

 

재설작업 만렙을 달성할수가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건 불침번이나 초병근무가

 

끝나자마자 눈이 내리는거겠죠.ㅎㅎ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 군대에서는

 

부르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TOP8 겨울야간보초근무

 

 

살을 아려오는 추위를 견디며 서야만 하는

 

야간보초는 한 겨울에 할시 지옥같은 상황

 

맛볼수 있으며 운이 안좋으면 환각을

 

보실수도 있는 근무입니다.

 

야간보초근무시를 설때 남들 다 자는시간에

 

2인1조로 나와서 근무를 서야하는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경계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합니다.

 

 

부대 경비를 위해 서는 불침번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하며 언제 간부들이 올라올지몰라

 

항상 긴장한 상태로 아무것도없는 전방을

 

주시해야만 합니다.

 

 

특히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피곤함과

 

함께 엄청난 공포감이 몰려오며 이럴떄 수많은

 

군대괴담이 이 근무를 통해 탄생하기도

 

하였습니다.

 

 

 

TOP7 진지공사

 

 

군생활중 최고의 이벤트중 하나라 불리는

 

진지공사는 춘계와 추계 봄가을에 두번을

 

경험할수가 있으며 전시상황을 대비하기위해

 

방지하는 작업입니다.

 

 

벽돌을 가지고 산위까지 배달하는 즐거운

 

작업이며 어린시절 만들기시간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다시한번 일깨워주는 작업입니다.

 

삽질이나 곡괭이질 헤머질 틉질 담가들기

 

떼뜨기등 여러가지 기술들을 배울수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며 보통 산 고지등에

 

진지공사를 하게됩니다.

 

 

진지공사를 하고있다보면 피라미드는 확실하게

 

사람이 만든것이 맞다는 확신을 들게

 

해주기도 하며 높은분이 간섭하면 더욱더

 

피곤해지는 작업입니다.

 

 

 

TOP6 수해복구

 

 

장마나 홍수등 수해로 인하여 그 지역이

 

피해를 보았을경우 군인들은 이러한 수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총동원되는 광경을

 

목격하실수가 있습니다.

 

 

보다시피 질척이는 곳에서 중노동까지

 

하다보면 엄청난 작업강도를 경험할수가있으며

 

내가 왜 이걸하고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시키면 무조건 해야함으로

 

군말없이 작업에 임해야되며 주민들은

 

이런광경을 신기한듯 쳐다보며 지나갑니다.

 

수해복구를 하다보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짜증나게 느껴지게될것입니다.

 

 

 

TOP5 전술훈련

 

전술훈련은 실질적으로 군대가 전투를

 

수행할 때 종합적인 전투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미리 전시처럼 훈련을 하는

 

훈련법입니다.

 

특히 대대ATT라 불리는 타 대대와의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훈련은 지휘관에 따라

 

훈련강도가 달라지며 대대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또 전방이거나 후방이거나에 따라서 강도의

 

차이가 나뉘기도 하며 대대ATT는 4박5일동안

 

이루어지며 소대나 중대 ATT와는 차원이

 

다르게 고달픕니다.

 

대대ATT는 상황도 실시간으로 변화가 심해서

 

심심하면 기동하기 때문에 밤새 제대로 쉬기가

 

어렵고 통제관도 계속해서따라다녀

 

짜증이나기도 합니다.

 

 

 

TOP4 천리행군

 

 

보통부대는 일반적인 행군을 하지만

 

육군특전사,육군수색대,육군특공대,해병수색대의

 

경우는 400km를 걷는 천리행군을 합니다.

 

약 400km를 완전군장을 하고 걷는

 

대한민국 국군의 행군훈련으로 1970년

 

특전사에서 처음 실시한것을 시작으로

 

다른부대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6일 안에 걸어야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걷는

 

속도는 시간당 4km정도로 이 속도로 걸으면

 

6일안에 끝낼 수 없기 때문에 구보에 가깝게

 

뛰어서 행군합니다.

 

 

특히 특전사의 경우에는 천리행군으로

 

끝나지 않고 복귀행군도 실시함으로 약700km라는

 

엄청난 장거리를 행군을하며 걸어야합니다.

 

 

 

TOP3 휴가복귀

 

행복한 휴가 빛보다 빨랐던 첫휴가를 마치고

 

다시 군대로 복귀하는 순간은 정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시간이 절대 멈춰줄리가 없으며 훈련을

 

받는 1시간이 1년같았던 군대와는 다르게

 

휴가때는 빛보다 빠른속도로 시간

 

흘러가게됩니다.

 

 

행복했던 밖에서의 시간을 지내고나면 군대에

 

정말 돌아가기 싫고 탈영을 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며 엄청난우울감에 사로잡히게

 

될것입니다.

 

휴가를 끝내고 다시 군대로 복귀하는 군인들의

 

등에서 즐거움은 찾아볼수가 없으며

 

모든군인들이 가장 짜증나고 싫어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TOP2 휴가 취소

 

정말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휴가가 취소되거나

 

휴가를 보내는 도중에 강제로 복귀하게되는

 

불상사가 생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심해진 북한의 도발로 인하여 전국에

 

있는 모든 장병들의 휴가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전투력이 극한으로 상승되는

 

효과를 같이 가져옵니다.

 

 

많은 장병들이 북한이 도발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휴대폰을 꺼놓는 등의 수많은

 

꼼수를 부리기도하며 현실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TOP1 유격훈련

 

 

군대의 꽃이라불리기도하며 군대훈련의

 

하이라이트로 불리는 유격훈련은 정말

 

지옥같고 탈출하고싶은 훈련중 최고로

 

손꼽히는 훈련입니다.

 

 

기본 10시간 가까운 행군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주 훈련내용은 PT체조로 시작해서

 

PT체조로 끝난다고보면 되는 아주

 

격하고 힘든 훈련입니다.

 

 

그 외에도 각종 장매물 코스와 참호격투

 

그리고 악명이높은 막타워등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시간은 대부분

 

PT체조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유격훈련중에서도 유격훈련의꽃이라고

 

불리는 화생방훈련은 정말 표현하자면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낄수있는

 

훈련입니다

 

 

특히 참지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지옥이 펼쳐지게 되며 가스가

 

마치 몸속을 온통 뒤집어 놓는듯한

 

느낌이 들게됩니다.

 

 

TOP0 혹한기훈련

 

다 끝나신줄아셨죠..마지막 끝판왕

 

유격훈련이 아..죽고싶다라는 생각이 들게한

 

훈련이라면 혹한기훈련은 아...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아주 춥고 힘든훈련입니다.

 

 

대한민국 육군에게는 유격훈련과 함께

 

양대 필수훈련중 하나이며 강추위속에서도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시되는

 

겨울철 맞춤훈련입니다.

 

 

혹한기훈련의 꽃은 즐거운 입수라고

 

볼수있으며 얼음장같은 물에 입수를 하면서

 

전우애와 함께 꼭 살고싶다는 생존력을

 

길러주기도 합니다

 

 

군생활중 평균 1~2회정도 실시하게 되며

 

특별한 경우 이런 혹한기훈련을 하지않고

 

제대하는 기적적인 군생활을 맛볼수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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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한계를 뛰어넘는 특수부대훈련

 

미필들을 위한 유익한 각사단정보

 

6.25전쟁당시 가장 용맹했던 부대 TO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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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었던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 알아볼게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라는 영화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섬쟁탈전입니다.

 

이오지마(유황도)는 서울 여의도면적의 2배가

 

조금 넘는 유황으로 뒤덮인 정말 작은 화산섬입니다.

 

화산섬이다보니 물도 거의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였습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섬을 차지하려는 미국과

 

결사방어하려는 일본은 어떤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게요

 

▲이오지마의 위치

 

이 섬의 위치는 동경에서 정남향으로 1080k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 섬에서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비행장이 있었고

 

80대의 공격기가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 본토공략을 위해 중국의 내륙지역에서

 

 띄우는 폭격기로 본토공습을 하다가

 

1944년 마리아나제도를 탈환한 후는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곳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동경 등 일본본토 주요도시를

 

 폭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초기지격인 이오지마에서

 

 미군기의 이동을 사전에 본토로 연락하여

 

 방공포대와 요격전투기가 미리 준비하고

 

 있도록 해주는 조기경보를 보내

 

 미공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고, 폭격의 주요목표도

 

 사전에 폭격을 대비하는 준비를 하는 등


미군의 원했던 폭격의 결과를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

또 폭격기의 이동거리가 워낙 장거리다보니

 

 항속거리가 짧은 호위전투기가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군 요격기에 의해

 

 격추당하는 일이 많아, 중간기착지가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큰 희생을 치루고라도

 

 이오지마를 점령해야하는 이유였습니다.


 

일본의 방어 계획

 

▲일본 수비군 사령관 쿠리바야시 육군중장

 

쿠리바야시 중장, 1944년 5월에

 

제109사단 사단장이 되어 오가사와라지구

 

 집단군사령관으로 치치지마에 부임합니.

 

 당초 요새가 있는 치치지마에 사령부를

 

두게 되어 있었지만, 정세를 조사한

 

 쿠리바야시 중장과 대본영은 미군이 이오지마를

 

공략할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무방비상태인 이오지마에 즉시 사령부를

 

 옮기고 진지의 구축에 착수합니다.

 

계획에 의하면 갱도는 지하에서 섬 전체를

 

연결하게 되어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습도와

 

 고온의 지열 등으로 작업시간은 짧을 수 밖에 없었고

 

 또 미군의잠수함에 의한 방해로 물자가 생각대로

 

 공급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계획은 늦어져서

 

결국 전체 길이28 km의 계획중 18km 정도 밖에

 

 완성하지 않고,미군을 맞이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실제전투시 지하 갱도는 맡은바 역할을

 

 충분히 완수하게 됩니다.


섬 방어를 위한 첫 조치로서 전민간인의 섬 외

 

 퇴거가 시작되어 7월 후반까지 완료하고

 

증원군도 서서히 섬에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약 5,000명의 제2 독립 혼성여단을

 

다른 섬에서 이오지마로 이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항공대 및 지상 정비원을 포함한 2,300명의 해군

 

 포병대 및 5개의 대전차대대와, 만주에서도


제 26 전차부대도 차출하여 배치가 됩니다.


최종적으로, 쿠리바야시중장은 육군과 해군을

 

합해 23,000명의 병력을 지휘하에 두게 됩니다.

 

이오지마 수비대장 쿠리바야시중장의

 

초기방어전략을 살펴보면

 


1. 포대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적의 상륙 준비포격시는 대응하지 않는다.
   (미국의 군함에 대한 포격은 실시하지 않는다) 


2. 상륙이 시작되면, 상륙하는 미군을

 공격하지 않는다. 

 
3. 상륙한 미군주력이 500m이상 해안

을 벗어나는 시점에집중포화를 가한다. 


4. 상륙 부대에 최대한의 손해를 입힌 후,

 포대는 즉시 북쪽으로 이동후 지하갱도에서

 

 전투준비를 한다

 

 

 

 

미군의 상륙

 

 

1945년2월19일,오전6시40분 이오지마앞바다를

 

 가득 메운 구축함과 순양함을 중심으로

 

 함포사격이 시작되고

 

 8시부터는 120대의 B-29를 주축으로

 

집중폭격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위에 설명한 일본군의 강력한 지하요새에

 

 병력과장비가 숨겨져 있어서 그 효과는

 

 거의 없었지만 미군측은 충분히 피해를

 

입혔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2월19일 오전 9시, 미해병 3,4,5사단의

 

 본격적으로 상륙을 개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의 쿠리바야시중장의 전략대로


미해병대의 상륙시에 포격 및 중/소화기사격은

 

 실시하지 않아서, 제1파로 30,000명의

 

 병력이 무사히 해안에 안착을 하게됩니다..

 

 


일본군의 아무런 저항이 없음에 미군은

 

 함포 및 공중폭격으로 이미 일본군은

 

 궤멸되었다고 생각하게되버립니다.

 

하지만 오전11시, 방심상태의 미해병대가

 

 해안을 벗어나려는 순간

 

 섬 내륙쪽과 스리바치산의 동굴포대가

 

일시에 집중포격을 개시하고

 

 미해병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상륙 제1파로 해안에 도착한 M4 셔먼전차

 

 56대 중 28대가 그 자리에서 완파.

 

또, 해병 24, 25연대병력의 25%이상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게되는 큰 피해를 받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일시의 집중공격은

 

 태평양전쟁사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추가로 4만명의 미해병대가 상륙하여

 

 미군은 코딱지 같이 작은 섬에 11만명의

 

 대군을 투입하게 됩니다.


 

위에 사진에 나오는 산이 스리바치산인데

 

이 산이 작은 섬의 유일한 고지대였습니다.

 

높이는 169m이였습니다 이 섬은 개미굴처럼

 

지하갱도로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 배치된

 

 일본군의 중화기 및 포대를 파괴하는 것은

 

 제공 제해권을 쥔 미국으로서는 공중폭격과

 

 바닷가의 함포에 의지해야 했지만, 

 

일본군의 철저한 준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토치카와 지하갱도 탓에, 공중과 해상의 맹폭은

 

 어떠한 효과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해병대원 스스로 산을 기어 올라가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준비된 일본군의 저항에 1m를

 

전진하는 데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해병대의 팔각모는 이오지마전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7번의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고 8번째에

 

 성공했다는 이오지마 승리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는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엄청난 희생을 내고 점령한

 

스리바치산에서 찍은 이사진은 

 

퓰리처 상을 받은 사진으로 

 

너무나 유명합니다.


숨겨진이야기를 소개한다면

 

 이 유명한 사진이 촬영된 다음날 아침

 

 다시 일장기가 펄럭였습니다.


거미줄같이 얽힌 일본군의 지하갱도를

 

완전히 제압하고 고지를 점령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아니었던 것이였죠

 

하지만 이 한장의 사진이 미국정부와 국민에게

 

 너무나도 큰 용기와 감동을 주었기에

 

 다음날 성조기가 일장기로 바뀌어 게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되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박물관에 보관된 성조기는

 

사실 두번째로 게양된 성조기입니다.

 

 

 

 

결 과

 

이 작은섬에서 2만3000명의 일본군과

 

11만의 미군이 한달하고도 1주일간

 

정말이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전투는


이미 제공제해권이 없고 수백척의 미군의

 

 작전함정으로 포위된 고립된 일본군은

 

 어떠한 지원과 증원없이 끝까지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저항을 하게됩니다.

 

남태평양의 작은섬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또 동남아 밀림에서 일본군이 최후에 쓰는

 

 전략은 반자이를 외치며 적진으로 달려들어

 

기관총 밥이 되는

 

"반자이토츠게키"(만세돌격)이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은 최후의 순간에도

 

반자이 돌격명령은 내리지 말 것을

 

각 부대의 소대장에 지시합니다.

 

 

3월17일 아침, 대본영에서는 쿠리바야시 중장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고 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전보를 보냅니다.


일본군 역사에 최연소 육군대장이

 

 탄생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날 오후, 쿠리바야시중장 아니 대장은

 

 이오지마 수비대는 마지막 작전을 감행한다고

 

 본국의 대본영에 타전합니다.

 

그리고 3월25일 산개된 각 예하 부대에

 

 이하의 명령을 내립니다.
(예하부대라고 적었지만 총병력은 400명)

 

전세는 최후의 순간에 직면하였다.


전병력은 오늘 밤,

 

총공격을 결행하여 적을 격멸한다.


각 부대는 금일 자정 각 방면의 적을 공격하며

 

 최후의 1명까지 결사감투함을 승인한다.


나는 항상 제군들의 선두에 선다.

 

 

이 마지막공격은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기관총 앞에 뛰어드는 반자이돌격이 아닌

 

 필사의 각오로 임하는 조직적인

 

야간기습이었습니다.

 

 

물론 전멸이라는 결과는 뻔했지만

 

 그날 밤의 야습으로 미군 53명이 전사하고

 

 119명 중상이라는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1945년 3월26일


일본군의 조직적 전투행위는 종료되고

 

 미국은 섬의 점령을 공식 발표됩니다.

 

일본군의 토치카를 파괴시키고 일장기를

 노획한 미 해병대원들

 

  일본군 전사 및 실종 약22,000명, 포로 약1,000명


  미군 전사 6,800명, 전상자 21,800명 

 

의무대 지원을 못받는 일본군의 상황에서

 

 전체전상자를 비교하면 미국은

 

일본의 22,000명보다 많은 28,000명의

 

 인명손실을 입는데 이 또한

 

 태평양전쟁사에서는 유래가 없는

 

전투결과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쿠리바야시중장의 전략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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