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싶다 ! 남성미의 대명사 "머슬카"
안녕하세요
남자들이라면 끌릴수밖에 없는
남성미의 대명사 "머슬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머슬카는 1964년에서 1971년사이에 미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모델을 가르키는 용어입니다.
많은분들이 알고있는 유럽쪽에서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등이 고성능 슈퍼카를 만들자
미국에서는 이에 대항하기위해 고성능의
자동차인 아메리칸 머슬카를 만들었습니다.
머슬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힘을 중시하는
자동차입니다.
슈퍼카와 다른점은 머슬카는 고회전보다는
저회전에서의 가속력과 토크를 중시합니다.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짐을 싣고 달릴때나
언덕을 올라갈때 등등의 상황에서 힘이 딸린다는
느낌을 굉장히 싫어하기 떄문에 크고
아름다운 대배기량 엔진을 채택했습니다.
특히 그 당시 미국은 경제상황이 넉넉한
편이었고 기름값도 매우 저렴했었기 때문에
잘 팔릴수밖에 없었습니다.
▲쉐보레572엔진
일반적으로 머슬카들은 V8의 대형엔진을
달았습니다.
위에 쉐보레 572엔진은 OHV머슬엔진의
대명사입니다.
720마력에 9979cc의 엄청난 스펙입니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머슬카를 알아볼게요
▲ 1968 폰티액 GTO
폰티액 GTO는 포드 머슨탱에 대항하기
위해 GM이 출시한 420마력 머슬카입니다.
출시된 해인 1968년 자동차 전문지 <모터 트랜드>가
선정한 올해의 차에 뽑혔으며 87,684대가 팔렸습니다.
GTO의 이름은 페라리250GTO에서따왔다고합니다.
▲ 1967 쉐보레 카마로
쉐보레도 머슨탱에 시장을 빼앗기면서
개발한 차입니다.
GM사의 F바디 프랫폼을 사용하여 개발된
차로 엔진은 I6과 V8을 사용했습니다.
배기량은 4093~6473cc이고 마력은
157~300hp로 출시되었습니다.
트랜스포머에서 범블비가 변신한 차량 2종류 중
1종류가 이 차량이라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출시된 6세대 카마로
디자인이 너무 멋있어서 2015 모터트랜드가
뽑는 올해의 차에 선정되었습니다.
275마력 2.0터보, 335마력 V63.6
455마력 V8 62세가지종류의 엔진이
탑재되었습니다.
▲ 1968 닷지 차저
1968년에 클라이슬러가 출시한 닷치차저입니다.
196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머슬카로 손꼽힙니다.
레이서 리차드 패티가 이 차로 나스카경주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425마력 배기량 6,982cc 모델은 제로백이
13.48초 최고속도는 175.4km입니다 그당시에는
엄청난 기술력이였습니다.
배기량을 7,211cc까지 키운 모델도 출시되엇습니다.
배기량을 세제곱인치로 환산하면 440이 되는데
이 수치를 따서 440매그넘이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대 말 닷지 차저는 미국 텔레비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던 차로 꼽혔습니다.
연속극 더 듀크스 오브 해저드라는 그때 당시
유명했던 TV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각종
영화에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 1969 올즈모빌 커트라스 442
폰티액 GTO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올즈모빌이 1969년 출시한 머슬카입니다.
그리고 1970년에 455 V8이 추가로 등장했습니다.
455 V8은 442의 엔진을 이용했고
최대 출력 365마력이었다고 합니다.
1970년 인디애나폴리스 500 경기 선도차로
쓰였고 1971년 들어 출력은 270마력으로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하드톱 쿠페의 판매가 가장 많았는데
1972년까지 총 3만3천대가 팔렸습니다.
▲ 1964 포드 머스탱
▲ 출시 당시 머스탱의 광고
머슨탱은 오랜 기간동안 진화해 왔는데
첫번째 머스탱은 빨간색의 실내 장식을 한
흰색 컨버터블로 1964년 3월 9일 데이본 시에서
생산되었고 포드는 이를 같은 해 4월 17일
뉴욕 세계 박람회에 공개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당시 영화배우 신성일이 직수입하여 타고
다니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출시 당시 2.8리터 6기통 엔진에 101마력
최고속도 175km이었습니다.
이후 4.2리터 164마력과 4.7리터 270마력 등
다양한 사양이 추가되었습니다.
▲ 2015 포드 머스탱
가장 최근에 출시된 머스탱입니다.
최고 옵션인 V8 5.0은 4951cc에 420마력입니다.
▲ 1970 플리머스 바라쿠다
플리머스의 바라쿠다가 처음 선보여진 것은
1964년입니다.
경쟁 모델인 포드의 모스탱보다 몇 주 먼저
출시되었으나 비싼 가격 떄문에 판매에서는
한참 뒤였다고 합니다.
1970년에 기능을 보강해 등장한 2세대
바라쿠다는 미국의 머슬카 전성시대를 이끈
차 중 하나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크라이슬러에서 제작한 고성능 엔진 헤미를
장착한 헤미 쿠다가 성공작으로 꼽히는데
헤미는 426 세제곱인치의 대형 엔진으로
개조를 통해 성능을 향상시키는것도 쉬웠습니다.
1971년형 헤미 쿠다는 지금도 소장품으로 가장
인기있는 차 중 하나입니다.
▲ 1967 폰티액 파이어버드
폰티액 파이어버드는 1967년부터 2002년까지
GM에서 제작한 차입니다.
같은 해에 발표한 쉐보레 카마로와 F플랫폼을
공유하며 탄생하였습니다.
엔진은 생산기간동안 제너럴 모터스의 다른 여러
사업부로부터 다양한 8기통 엔진이
채택되었다고합니다.
산진에서 보시면 굉장히 특이한 디자인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차였습니다.
그떄 당시의 상상력으로 미래 자동차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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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무기 TOP10
안녕하세요
남자분들이라면 많은 분들이 알고계실
전설의 무기들이있습니다.
이 무기들은 소설.게임,영화,만화 등에서
많이들 보고 사용도 해보셨을거라 생각됩니다.
이번에 신화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무기
TOP10에 대해서 알아보도록할게요!
TOP10 후츠노미타마
일본 신화에 나오는 영험한 검으로써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이 일본열도를 평정할
당시에 사용하였고 신도 물러치는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874년에 발굴된 이 검은 역날검 형태로써
손잡이에 고리형태가 있는것이 특징이며
약 85cm의 길이며 현재는 신사에
봉인되어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수백년동안 땅속에 묻혀있었던
이 검이 어떻게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TOP9 청룡 언월도
청룡언월도는 삼국지에 관우가 사용하였던
무기로써 언월도는 무게가 82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기준으로 약 18kg정도의
무기였다고 합니다.
보통 실전용 검이 2~3kg이라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청룡언월도는 절대로
사람이 쓸만한 무기는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청룡언월도는 아마도 과장되어 표현했을거라는
추측이 들고 아마 일반 기병과 동일한 창을
사용했을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사실 언월도라는 형태의 무기는 관우가 있었을
때보다 후대의 무기였으며 언월도는 무기로써
사용되기보다는 보여주기식의 관례용
무기였다고 합니다.
후대 중국인들은 관우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관우가 진짜 청룡을 때려잡은 후 그 피로
만들어냈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등
중국특유의 살을 붙여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TOP8 클라우 솔라스
클라우 솔라스는 켈트족의 왕이었던
누아다 왕이 사용했다고 알려져있는 무기로
켈트왕국의 네가지 비보중에서 하나에
속하는 검이라고 합니다.
이 4가지 비보는 대관석 이러 팔, 루의 창
누아다의 검이였고 누아다의 검은 일명
불의검 혹은 빛의 검이라고 불리기도합니다.
이 누아다의 검은 불패도신의 검으로 불리우며
도신 즉 칼의 몸체에 신성한 주문이 새겨져
있기때문에 칼을 뽑으면 절대 지지않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마치 이 검은 섬광탄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칼을 뽑으면 칼의 빛으로 인하여 상대의
눈을 가려서 상대를 무방비로 만들어버리는
무기라고 합니다.
TOP7 여의봉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사용했다는 무기인
여의봉은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원하는대로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등
아주 신비로운 무기입니다.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여의봉을 살펴보자면
그 무게가 자그마치 1만3천500근인데
이 수치를 현대적으로 환산해서보면
8.1톤이라는 무게라고 합니다.
이러한 무게를 가진 여의봉을 자유자제로
휘둘렀던 손오공은 서유기에서 귀신이나
옥황상제나 스치기만하면 사라진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제천대성은 하늘을 다스린 손오공을 부르는
별칭으로 왜 제천대성이 신들과 맞붙어
싸울수 있었는지 아주 잘 묘사되어있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TOP6 아스트라
아스트라는 인도에 존재한다고 알려져있는
전설속의 활로써 신들의 힘을 빌려서
소환시킬수있는 판타지영화에서 나올듯한
무기라고 합니다.
바법의 활과 마법의 화살을 의미하고 있는
이 활은 힘을 빌린 신에 따라서 활의 형태와
기능들이 계속적으로 뒤바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신이 소환한 신의 힘이
담기는 활로 소환한 신에 따라서 아스트라의
성능이 달라지며 인도신화에서 최강의 무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아스트라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아스트라에 힘을 빌려준 신의 이름을 읊조려야하며
인도 전설속 영웅인 아르쥬나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TOP5 뮬니르
뮬니르는 북유럽 신화에서 묘사되는
투척용무기로써 천둥의 신인 토르의 무기로
유명하며 바이킹의 언어로 해석하면
파괴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뮬니르는 원래 손잡이를 길게 만들려고
하였으나 로키의 방해로 인하여 손잡이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해 짧게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토르의 망치는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고
있으며 토르 외에는 함부로 사용할수가 없고
신화속에서 그 어떠한 신들의 무기보다
가장 강하게 표현이 됩니다.
토르는 주로 신화속에서 이러한 묠니르를 이용하여
거인족들과의 전투를 벌이며 최후에 토르가
거대뱀인 요르문간드라는 요괴와 싸우게됩니다.
토르는 이 전투에서 싸워서 이기기는 하지만
독에 중독되는 바람에 결국 사망하여 결국
묠니르는 토르의 아들인 마그니가 이어받게됩니다.
TOP4 사인검
사인검은 일명 사인참파검이라고도 불리며
이름그대로 죽은사람을 벨수있는 즉 귀신을
베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있는
전설속의 검입니다.
사인검은 조선시대당시 제조되었던 주술적의미를
지닌 도검으로 왕실에서 충성스런 신하에게만
하사했던 일종의 성검으로 여겨진 검입니다.
사인검은 장인이 평생에 걸쳐서 단 한자루밖에
만들지 않았으며 또한 저 검은 인시에만
만들어져 12년에 2~3일 정도밖에 검을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칼에는 28수의 별이름이 검에 새겨져 있으며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서 만들어 졌다고하고
또한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예술적가치가
높은 검입니다.
TOP3 궁니르
북유럽 신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신
오딘의 무기로써 던지면 적에게 무조건
명중하면서 자동적으로 자신의 손에
돌아온다고 알려진 사기적인 무기입니다.
창날에는 신비로운 룬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져있으며 또한 자루가 물푸레나무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고합니다.
사실 오딘은 신화속에서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약간 치사하고 불길한 이미지를 가지고있습니다.
TOP2 엑스칼리버
이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는 모르는분이
없을만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무기로
바위에 꽂힌 검을 뽑으면 왕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 검입니다.
이러한 엑스칼리버는 빛을 뿜어 거인의 눈을
멀게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이용하여 거인을 베어버렸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아서왕은 엑스칼리버를 이용하여 영국을
통치하였다고 하며 아서 왕본 본인보다
더 유명한 그야말로 전설의 검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습니다.
사실 엑스칼리버는 모루에서 뽑아냈다는
전설에서 기초되어있으며 후세에 전설이
약간 변형되어서 바위에서 뽑아가는 검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TOP1 쌍용검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순신 장군께서 실전에 사용하였다는
한쌍의 환도라고 알려져있는 검으로써
한국역사의 전설적인 검입니다.
이 검은 충무공이었던 이순신장군님의
칼이며 실전에서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100년째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고 합니다.
아마도 일제시대 시절 초창기에 일본에
의해서 검을 약탈당한것으로 추정되고있으며
아직까지도 검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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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젊은 IT 억만장자 TOP6
안녕하세요
젋은 나이에 IT 업계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젊은 억만장자들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들 TOP6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게요
TOP6 라이언 그레이비스
국적 미국 만 33세
재산 $1.5 Billion
(한화 약 1조 6,590억 원)
전체 순위 1361위
우버 설립자 트레비스 칼라닉이 첫번째로
고용한 직원으로 지금은 운영부분
부회장이며 우버는 차량예약을 해주는
업체입니다.
TOP5 네이단 블레차르지크
국적 미국 만 32세
재산 $3.3 Billion
(한화 약 3조 6,498억 원)
전체 순위 591위
에어비앤비의 공동 창업자이며
숙박 공유 사이트로 기업가치가 높아져
현재 세명의 공동창업자들이 모두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TOP4 더스틴 모스코비츠
국적 미국 만 32세
재산 $10.3 Billion
(한화 약 11조 6,000억 원)
전체 순위 124위
페이스북 공동 설립자였으며 2008년까지
페이스북에서 최고 책임자로 근무하다가
아사나(소셜네트워크)회사를 설립했습니다.
TOP3 마크 주커버그
국적 미국 만 32세
재산 $54.7 Billion
(한화 약 59조 7,240억 원)
전체 순위 5위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CEO이며 최근
페이스북 주가가 상승하면서 전체 억만장자
순위 TOP10에도 진입했습니다.
TOP2 바비 머피
국적 미국 만 27세
재산 $1.8 Billion
(한화 약 1조 9,908억 원)
전체 순위 1011위
스냅챗의 공동 창업자 중 한명이며
스탠퍼드 대학의 '카파 시그마' 사교클럽에서
만나 스냅챗을 창업했다고 합니다.
TOP1 에반 스피겔
국적 미국 만 26세
재산 $2.1 Billion
(한화 약 2조 3,226억 원)
전체 순위 854위
스냅챗의 창업자이며 스냅챗은 사진을
전송하는 사람이 수신자의 사진확인시간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 메신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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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수도를 지키는 육군 서부군관구 전력
안녕하세요
서부 군관구(За́падный вое́нный о́круг)는
러시아 대통령의 법령 제1444호에 따라
모스크바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가
통합되어 2010년 10월 20일에 창설된
러시아 연방군의 군관구이자
작전 전략 사령부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광장 북쪽
끝자락에 있는 총참모부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 서부군관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게요
미국과 냉전 자존심 싸움하다가 구소련이
망한뒤 보리스옐친이 집권 했지만
허튼짓을 많이해서 매우 가난했었습니다
그래도 세계2위인 러시아 군사력을 찍었지만
돈이 없기때문에 군현대화에 실패하고
사골끓여먹듯이 갤갤대면서 살고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후로 러시아경제는 올라가기시작했습니
지금은 서방경제부터 오일폭락부터
루블화가많이떨어졌지만 오일유가가
회복되면서 루블화도 제자리로찾고있고
푸틴이 집권한뒤로 러시아 경제가 올라가면서
러시아 연방군의 군사예산이 자연스럽게
올라가게되었습니다.
▲제4 근위 기갑사단 마크
서부군관구는 러시아의 기갑전력중에
최첨단으로만 무장하는곳입니다
수도인 모스크바를 지켜야하니
서부군관부는 일선의 1급전차들로만
배치되어있습니다
▲T-90A
신형전차인 T-14 아르마타를 제외한
러시아 육군의 1급전차라고 보면됩니다
▲T-72B3
냉전시대의 노인네 T-72
서부군관구에 배치된 T-72는
일반 T-72가아닙니다
전자장비가 개량된 T-72B3로써 T-90A보다
전자장비가 좋게 개량되어서
서부군관구에 배치되어있습니다
▲BMP-2
요놈도 냉전시대의 산물인
불타는관짝이라고불리는 BMP-2입니다
아직 군현대화가 한창진행중이라
T-15 , BMP-3M 개량형으로 대체될놈입니다.
▲BTR-82A
엔진과 주포를개량하고 방호력을
높인전차입니다 나온지는 오래된전차인데
BTR-90 이원래 대체할녀석이였는데
예산문제로 소량만도입되고
개량형으로 대체되었습니어
▲2S19M1
1989년도에 나오신 러시아 육군
최신예 자주포입니다
2s35 Koalitsiya-SV가 배치된다면
일선에서 물러날 장비기도합니다.
2S19M1 , M2 로 개량되어 배치되있으며
M2 개량형은 발사속도가 1분당 10발
정도로로 올라가게되었습니다.
▲T-14 Armata
배치 예정인 러시아 차세대 전차입니다
T-72 ,80 ,90 시리즈의 개발한것을 버리고
새롭게 개발한 차세대전차입니다
무인포탑에 2018년도정도에 현역배치됩니다.
장갑질을올려 장갑제 성능을올리고
주포를 2A82-1M 업그레이드시키고
포구압력을올려 관통력을 뛰어나게하고
스비녜츠-2 아니면 152mm 주포를
사용할수도있다고합니다
러시아 국회의원이 152mm 탄은 그리펠인데
최소 관통자 성능이 1000mm를 넘는다했습니다
그리고 사통장비와 엔진을 업그레이드시켰어습니다
▲2s35 Koalitsiya-SV
발사속도가 1분당 16발을 쏜다는
어마어마한놈입니다
2A88 152mm 포신을사용해
자주포 사거리가 70km에 육박합니다
차체는 T-90A 꺼를 사용하지만
아르마타가 정상적으로 배치된다면
2차분생산에서 아르마타 차체로 바뀌어서나옵니다.
▲T-15 BMPT
메르카바처럼 약한 장갑은아니지만
전면에 엔진을배치하고 아르마타 차체를
사용해서 보병들이타고 시가지전투도
할수있는 전차입니다
개발진들의 말을 번역해보니
BMP 시리즈보다 속도가 빠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러시아군에 신형막사에 대해
사진으로 잠시 소개하고 마무리할게요
▼막사 외부모습
▼막사 내부모습
▼막사 내부의 히터와 에어컨
▼막사내 식당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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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일으킨 일본 전범 총리들 처분
안녕하세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총리
리스트들과 전후 처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32대 히로타 고키
(1936.3 ~ 1937.2)
A급 전범으로 사형
그런데 본인으로서는 군부의 세력을
억제하려고도 했고 더욱이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킨 건 1937년 7월이었으니
억울한 면도 있습니다.
일본전쟁준비에 대한 상징적인 책임 및
사형급 전범인 고노에 후미마로가 자살을 해버려
책임을 물을 희생양이 필요했던것입니다.
실제로 본인도 억울했는지 사형 당한 A급 전범들 중
유일하게 "덴노 헤이카 반자이"라고
외치지않고 묵묵히 교수형 당했습니다.
33대 하야시 센쥬로
(1937.2 ~ 1937.6)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37년
군부의 지시로 현안 문제를날치기 처리하기위해
총리로 부임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선거에서 대패하자 특단의 조치로
의회를 해산하려다가 내각 불신임 받고 122만에
사퇴하였습니다.
전쟁중이던 1943년에 사망하여 전범 책임을
묻지는 못하였습니다.
<중일전쟁발발 - 1937.7>
<난징 대학살 1937.12~1938.2>
3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1939.1 ~ 1939.8)
법관 출신으로 중일 전쟁을 일본인의 숙명이라고
주장한 극우 파시스트입니다.
국민 총동원급 징병을 가능하게 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독일과 협동하여 소련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하다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 충격먹고 사임하였습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으로 복역하다가
질병으로 가석방된 직후 사망하였습니다.
36대 아베 노부유키
(1939.8 ~ 1940.1)
총리로 부임하자 여야 세력의 연합을 시도하다가
군부 세력에게 불신임 받고 138일만에 쫒겨났습니다.
그 후 마지막 9대조선총독(1944-1945)으로부임하여
열심히 조선을 수탈하다가 미군이 서울로
북상하자 할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항복 조인식에
끌려나와 서명하게 됩니다.
연합군에게 A급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몇 년 뒤에 죽었습니다.
<독일 폴란드침공 1939.9~1939.10>
37대 요나이 미츠마사
(1940.1 ~ 1940.7)
태평양 전쟁론을 반대하며 미국과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한인물입니다.
또한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를 침공해야
한다는 육군의 '무력에 의한 남진론'을 거절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군수물자를 확보하려고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정책에 충격을 받은 육군부는 당연히
강력하게 반발을 하였고 요나이는 육군의 책모에
사달리다가 6개월만에 사임하였습니다.
종전무렵 해군상으로 재임명되어 외무상과 함께
포츠담 선언의 수용을 주장하며 일본의 항복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후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덴노를
변호하였고 해군상으로 유임하며 패전 난국을
수습하다가 1948년 병사하였습니다.
사방에 온통 전쟁광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한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에서
신선한 충격이였습니다.
<독일 프랑스침공 1940.5~1940.6>
34,38,39대 고노에 후미마로
(1940.7 ~ 1941.10)
1937년 대책없이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1940년 다시 권력을 자자 중일 전쟁을
확전시켰으며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다당제를 폐지하여 일단 독제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독일,이탈리아와 함꼐 삼국 동맹을 체결하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질서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수있다는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였습니다.
2차세계대전 막판 막장을 향해 시동을 건
장본인으로 후임자 도조 히데키때에 결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1945년 패전하자 A급 전범이 너무 확실했던 그는
히로히토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고 음독 자살하였습니다
<독일 바르바로사 작전 1941.6>
40대 도조 히데키
(1941.10 ~ 1944.7)
1941년 12월 미국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으로 미국에 잠시나마
승리를 하자 자신감을 얻은 그는 군부독재의
끝을 달리게 됩니다.
육군대신,내무대신,외무대신,문부대신,상공대신
군수대신 등 거의 모든 군사 행정요직에 스스로를
임명하는 최악의 짓까지 저지르게됩니다.
그러나 그 후 화가난 미국이 선박과 전투기를
공장에서 찍어내자 패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차리고 카미카제가 난국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전략이라 생각하고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전장을 환기시킨다며 영국령 버마까지 공격해
전선을 최악으로 늘려 놓게됩니다.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황이 기울자 1944년
도망치듯 사임을 하였지만 패 전후 붙들려
당연히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합니다.
권총 자살을 어설프게 하려다가 실패하고 전쟁의
책임을 덴노와 국민들에게 돌리는 발언을 하는등
마지막까지 추태를 부렸습니다.
정치가,행정관료,군인으로서 능력 모두 대책없는
무증함을 보여준 인물이면서도 혼자 다
가져서 독재하려고했던 인물입니다.
결과는 2차세계대전 일본의 패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인물입니다.
<일본 진주만 공습 1941.12>
<미국 미드웨이 해전 1942.6>
<미국 콰달카날 전투 1942.8>
<일본 임팔 작전 1943.3>
<미국 마리아나 칠면조 사냥 1944.6>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6>
41대 구이소 구니아키
(1944.7 ~ 1945.4)
8대 조선총독 (1942-1944)으로 재직당시
조선의 청소년들을 학도병과 위안부로
전쟁터로 끌고간 쓰레기입니다.
1944년 총리로 임명되어 도조 히데키가
저질러놓은 짓을 물려받아 자신의 색을 덧칠하여
못된짓을 더한뒤 종전 후 붙잡혀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형무소에서 식도암으로 죽었습니다.
<미국 이오지마 전투 1945.2>
42대 스즈키 간타로
(1945.4 ~ 1945.8.17)
사실상 전쟁을 포기한 일본이 종전협상을
위해서 임명한 인물입니다.
스즈키는 마지막 희망을 소련에게 걸어보았지만
소련은 무시하고 오히려 8월부터 만주를
차지하기위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스즈키가 외무쪽에서는 항복을 주장하고
육군쪽에서는 1억 옥쇄로 자폭하자고
주장하며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난장판속에서 어찌할바를 몰라하다가 결국
원자폭탄 두방을 맞고 보다못한 덴노까지
나서서 항복하라고 권유를 하자
비로소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습니다.
분노한 육군 강경파가 항복선언을 저지하기위해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영원한 라이벌 해군에 의해
진압이 됩니다.
그 후 스즈키는 패전책임을 지고 항복 선언
이틀 후 사임하였습니다
취임당시 77세의 고령인데다가 딱히 한 짓도
없었기 떄문에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48년 자연사했습니다.
<미국 오키나와 전투 1945.4>
<독일 항복 1945.5>
<소련 8월의 폭풍작전 1945.8.9>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 1945.8>
<일본 무조건 항복 194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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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끝없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안녕하세요
6.25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인해전술을 사용하였는데요.
이번에 중공군이 어떤방식으로 인해전술을
사용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 중공군 개입 초기 상황 지도
중공군 편제는 병단-군-사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병단은 우리나라의 야전군 편제
군은 우리나라의 군단편제 사는 우리나라의
사단편제에 해당됩니다.
유엔군이 북진할 때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미 8군은 8개 사단,2개 여단 규모
미 10군단은 5개 사단 규모였습니다.
즉, 유엔군은 13개 사단 2개 여단 규모였는데
중공군은 2개병단(야전군)에 중공군 9개 군단
33개 사단 + 북한군 3개 군단 이였습니다.
즉 미군은 13개 사단인데 중공군+북한군 동맹군은
총 12개 군단(33개사단 +북한군)이였습니다.
▲당시 전체적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전체적으로 지도 퀄리티가 좀 떨어지긴해도
중공군의 공세가 어떤지는 알수가 있습니다.
중공군은 유엔군에 3배이상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미 8군의 동쪽에서 유엔군 중앙을 담당한 당시
질적으로 많이 부실했던
국군2군단(군단장 유재흥 국군6.7.8사단)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그 후 국군 2군단의 궤멸로 미 8군과 미 10군단의
중앙 연결고리를 끊고 미 8군의 동쪽을 돌아
남쪽을 포위하는 전형적인 포위전술을 구사합니다.
즉 중공군에게 후방이 포위될 위험해 처하자
미 8군은 남하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38선 근처까지 계속 됩니다.
동쪽에 미 10군단 중 미 1해병사단과 7사단
일부 병력 앞에 중공군 1개 병단 12개사단이
나타나서 산악을 포위하여
총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위 지도를 보시면 미 해병 1개사단을
중공군 12개 사단이 둘러서 공격하는걸
알수가 있습니다.
미 7사단 일부병력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하였습니다.
이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규군 사단이
전멸하는 불명예를 기록할 뻔 했는데 그런일이
발생할게 뻔해보였던 탓에 미국 언론조차도
충격에 빠져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 기세등등한 중공군 장갑차부대
하지만 당시 미 10군단장 알몬드의 허술한 지휘에
불만이 많아 사이가 안좋았던 스미스 해병사단장은
진격당시 비행장을 확보하고 중간 물자집적지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뒀던 탓에
중공군의 야음을 틈타 뱀의 입모양으로
입을 딱 벌리고 포진한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그나마 보급을 유지하며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의 최대 약점일수있는게 바로
차량을 타고다니는걸 너무 좋아했다는 점이였는데
결국 차량을 타고 평지의 도로로만 이동하는 미군은
산악을 통해 침투하여 은밀하게 포진한
중공군을 발견할수가 없었습니다.
항공정찰로도 당시엔 육안으로 확인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무 속에 숨은 중공군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전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미스 소장은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의 진격"이라는
큰소릴 쳤고 실제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흥남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미 1해병사단에 집중된 중공군의 공세는
당시 두만강쪽으로 진격했던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의 후퇴에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미 해병대가 중공군을 단독으로 저지하고 돌파함에
따라 미 10군단은 안전한 철수가 가능했었습니다.
다른쪽 전투상황을 살펴보면 덕천전투에서
한국군이 붕괴되고 그 옆의 군우리전투에서
미 2사단이 공격당하는 상황인데
압록강에서부터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해
정신이없는 한국군때문에 미군도 지옥을 같이
겪어야 했습니다.
현재 한국에 주둔중인 미 2사단도 이 당시
중공군의 압도적인 숫자와 후방 포위에
값비싼 희생을 치루며 간신히 후퇴하였습니다.
1개 사단 앞으로 2개 군단이 튀어나와 압박하고
후방에 중공군 1개 사단이 도로양쪽 산악지형에
매복해 공격하는 작전이였습니다.
▲프랑스 대대와 미 23연대의 분투가
빛났던 지평리 전투
고작 1개 연대와 1개 대대규모앞에 중공군 2개군단이
나타나는걸 볼수가 있습니다.
동쪽의 한국군 3 , 5사단앞에도 무려 3개 군단병력이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그나마 전선이 안전도이 전쟁중후반
경기도-강원도 라인에서 싸우던 시기였는데
유엔군 1개사단앞에 사단도 아닌 중공군-북한군
군단급이 배치되어 밀고 내려왔습니다.
▲사실 국군 최악의 대참패인
3군단의 궤멸도
무려 중공군,북한군 도합 6개군단이
한국군 5개사단을 공격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외 지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옆의
미 2사단도 중공군 군단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중공군이 XXXX 야전군급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XXX 군단급이였습니다.
위에 지도에 나온 중공군+북한군 군단급이 도합
17개 였습니다.
즉 대략 41개에 사단이라는소리입니다.
그걸 유엔군, 국군 8개 사단정도가
막고있는 모습입니다.
즉, 1개 사단을 약 1만2천명으로 생각하면
거의 9만명 정도되는 인원인데
동구권 소련식 편제라도 41개 사단이면
40만명정도 되는 규모입니다.
게다가 중공군도 거의 300만명 정도
참전했다고 하는데 사망수치가 너무 적습니다.
중국에서는 우기는게
한국군이 14만명전사 13만명실종 71만명부상인데
중공군이 13만명전사 2~3만명실종 21만명부상이라고
하니 이건 거짓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중공군이 북한군보다 조금 죽고 조금 다쳤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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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미국인이다 제100보병대대
안녕하세요
1941년 미국에는 약15만명의 일본계
시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세대 이민자 이세이, 2세대 이민자 니세이
3세대 이민자 산세이로 불리었고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소규모 음식점을 하거나
무술 도장을 열거나, 생선을 잡거나, 농사를 짓거나
세탁소를 하면서 미국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갔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이 아닌
미국의 시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진주만 공습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감행된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이들의 삶은 고달퍼 졌습니다.
1942년 2월 19일 미국내 일본인들이 폭동 혹은
폭탄 테러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미국 정부는
행정명령 9066을 실행했습니다.
▲행정명령9066 공고
미 연방수사국 FBI와 각주의 경찰, 주방위군이
동원되어 미국내의 모든 일본인들을 군부대와
수용소로 보냈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때까지
수용하였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추방되는 일본계와 악수하는 그의 이웃
▲전국에 배치된 수용소와 군부대
▲황량한 수용소
▲수용소에 살아가는 일본계 시민들 한편 하와이주 인구의 40%가 일본계였기에
미국 정부는 2,900명의 일본계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하와이 주방위군으로 편입시켰습니다.
훈련을 위해 수송선을 이용하여 위스콘신
주 캠프 맥코이와 미시시피 주 캠프 쉘비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체력훈련과 사격술,
전술훈련등이었습니다.
▲캠프 맥코이에서 훈련을 시작한 일본계 미국인들 장교와 교관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그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잽스(Japs)들의 충성심과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5개 중대로 나뉘어서 훈련을 끝낸 이들에게 부여된 부대 번호는 제5보병연대 제100보병대대 였고 일본계 병사들은 1-푸카-푸카(하와이어로 구멍)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을 담당하는 제85사단장 웨이드 헤이슬립 소장은 솔직히 일본계 병사들이 마음에 들지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배신을 때리고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훈련에 임하고, 높은 충성심을 보이자 생각이 달라졌고, 그들을 유럽 전선에 파견해야한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결국 1943년 7월 20일 일본계 미국인 부대는
제442보병연대 전투단 제100보병대대로
정식 출범하였고 1943년 9월 2일
미육군 제8군 제34보병사단 제133보병연대로
배속이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출범한 제100보병대대 가운데 글씨는 진주만을 기억하라 북아프리카 오랑항에 도착한 그들은 미군들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면 미군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잽스가 왔다라고 놀리거나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계 병사들은 개의치 않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충성을 증명할 전투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몇몇 병사들은 일본군이 항복했다고 생각하거나 중화민국군이 참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3년 9월 22일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제100보병대대는 9월 28일 몬테 코비노에서 나치 독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9월 29일 타카다 시에고 병장이 최초로 전사한 일본계 미국인이 되었습니다.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적의 기관총좌를 파괴한 그에게 퍼플 하트와 수훈 십자 훈장이 수여됩니다.
▲마크 클라쿠 제 5군 사령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한 제100보병대대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 철도 중심지 베네벤토 마을을 공격합니다. 성공적으로 마을을 점령한뒤 제34보병사단 사단장 라이더 소장은 사단 마크와 장식을 정식으로 수여했고, 제100보병대대는 제34보병사단의 정식 일원이 되었습니다.
▲마을을 함락시키고 들어가는 제100대대 1943년 10월 제100보병대대는 3번의
공격 끝에 볼투르노강 북쪽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1944년 1월 악명 높은
몬테 카시노를 공격하였습니다.
▲짧은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
해발 520m, 라피도 강과 릴리 강이 둘러쌓고 있는
천연의 요새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
독일 공수 부대 제1공수 사단이 버티고 있는
몬테 카시노, 그곳에서의 험난한 전투로
제100보병대대가 퍼플 하트 대대로 불리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의 험준한 산을 오르며 독일 공수 부대와
싸운 B중대는 187명 중 14명만이 살아남았으며,
C중대는 170명 중 23명이 살아남았습니다.
1944년 2월 8일 1개 소대가 몬테 카시노의 정상을
3일간 점령했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퇴각해야만 했고, 14명 중 3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막대한 손실에 3개 중대는 전투 불능이었지만
퇴각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대대장 터너 중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산 미첼로 퇴각했습니다.
▲격렬한 전투로 의무소는 가득찼습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가 끝나는 1944년 5월 23일까지
1,300명의 대대원 중 521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제100보병대대는 대통령
부대 표창과 우수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습니다.
막대한 인명 손실 덕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야할 제442연대의 병력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몬테 카시노를 점령하고 찍은 사진 한편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 대위가 이끄는
소규모의 정보 수집팀은 안지오 전투에 파견되어
독일군으로 부터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러한 공로로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은성무공 훈장을 받는 김영옥 대위 1944년 6월3일 북쪽으로 진격한 제100보병대대는 라누비오 근처 435고지의 독일군을 섬멸하고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로마를 10Km 앞두고 최초로 로마에 입성한 연합군 부대가 될 수 있었지만, 로마 북쪽에 있는 도시 치비타베키아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제100보병대대는 크게 실망합니다. 한 장교는 "일본계 미국인 부대라 로마를 점령하는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이거냐?" 라고 툴툴되었습니다. 하여간 제100보병대대는 6월 11일 치비타베키아를 점령하였고, 제442보병 전투단 제1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10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제1대대는 다시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나치깃발을 노획한 병사들 1944년 6월 22일 벨베데레를 점령하고, 7월 7일 카스텔리나 마르테마 지역의 140고지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전투를 리틀 카시노라고 부르게 됩니다. 제1대대는 140고지를 탈환하려는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1944년 9월 9일 미육군 제7군에 편입되어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에 성공한 오버로드작전으로 프랑스 북쪽의 교두보가 완성되자 프랑스 남쪽에 상륙하여 프랑스의 독일군을 섬멸하기 위한 연합군의 계획때문이었습니다. 1944년 10월 14일부터 10월 24일까지 제1대대는
부르에와 피퐁텐느에서 무장 SS 제9경찰연대,
제192기갑척탄병 연대, 제732척탄병연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집중 공격을 받은 D중대는
190명의 병사 중 15명만이 살아 남게됩니다.
▲구출작전을 펼치는 제1대대
▲프랑스에서 행군하는 제1대대
극심한 피해를 입은 제1대대는 휴식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죽어가는
제142연대 제1대대 구출작전을 벌입니다.
몰려오는 독일 전차와 독일군을 막아내고
제1대대를 구출하지만 1,400명 중
280명이 전사했습니다.
▲제1대대 구출작전 그후 프랑스 리베이라에서 병력을 증원하고 휴식을 취한 제1대대는 1945년 3월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합니다. 나치 독일의 이탈리아 최후의 방어선
고딕라인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제1대대는 험준한 조지아 힐과
플로리다 힐, 오하이오 힐등을 차례로
함락시켰고, 4월 17일 독일군은
아울라로 퇴각하게 됩니다.
▲고딕라인을 포격하는 제442연대 병사들
▲독일군 포로를 인솔하는 제1대대병사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공세를 재개하려는 찰나인 5월 2일 이탈리아 전선의 교전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5월 8일 나치 독일이 종말을 맞이하자 제1대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됩니다.
1946년 7월 15일 워싱턴 D.C의 전승 행사에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이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전승행사에 당당히 전진하는 대대원들 "고향으로 돌아온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적과의 전투뿐만이 아니라, 편견과 차별과도 싸워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으로써, 미합중국의 시민으로써 의무를 충실히 해낸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대를 방문한 해리S.트루먼 대통령 그후 제1대대는 제100독립보병대대로
전환되어 하와이 주방위군 소속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와이로 복귀하여 환영받는 병사들 전쟁 후 한 기자가 제100보병대대 참전 유공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미국 시민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움을 피하거나, 적게 죽었다면, 잽스들이 그럼그렇지라며 우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멈추지 않았겠죠. 우리가 가족들과 이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싸우다 죽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인이다를 외치며 싸워온
제100보병대대의 일본계 미군인들에게
찬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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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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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월 25일 새벽 남침에 앞장선 조선족들
안녕하세요
한국전쟁 6.25북한에 남침당시 주력부대로
앞장섰던 조선의용군에대해 알아볼게요
아래 글은,중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전쟁' 때
인민군 6사단에 복무했던 '김중생' 씨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며, 김씨는 현재 '한국국적'을
취득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김씨는,독립투사 '김동삼'선생의 손자로써
그는 6.25 남침 '주력부대'는 '조선의용군' 이
주축이된 '6만5000'명의 '조선족'이었다는 것은
밝힌바 있습니다.
조선 의용군의 정체
'조선의용군'의 뿌리는 '조선혁명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30년대 항일무장 투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 인사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뒤섞여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양세봉 장군' 이후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로 맥을 이었고, 그 중 공산계들이
이탈하여 '조선의용군'으로 '중국공산당'
아래로 들어간 것입니다.
'조선의용군'은 6.25 이전에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주력부대로 재편되어 남침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은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항일무장독립부대를
결성하게 되는데 중국국민당 지도부와 연계하여
'한중' 연합체 성격의 무장부대의 필요성에 의하여
탄생한 것으로 '조선혁명군'의 뒤를 잇는
'조선의용대'가 이것입니다.
'중국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하고 1942년 좌익계열 대원들이
의용대본부가 있던 '중경'을 떠나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공산당' 영향권으로 들어가버리면서
'김원봉' 계열은 광복군으로 참여하고,
화북지역으로 떠난 좌익계는
'중국공산당'의 지원 하에
'조선의용군'으로 편제를 갖추어 '중국공산당'의
지휘계통을 따르게 됩니다.
이들은 일본패망 뒤에도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았으며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만주로 이동시켜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켜
규모를 확장하여 후에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당군'과 싸우게 됩니다.
▲6.25전쟁일으킨공산당조선족패거리
이들은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되어 인민군의
최전방에서 남침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습니다.
'김일성'은 6.25 이전에 1950년에 두번에 걸쳐서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족 부대의
파병요청을 한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습니다
■ 김중생씨의, 증언입니다
'조선의용군'(조선족) 은 3년 동안 모두
10만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증언합니다
또한,김중생씨는,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의용군'출신 퇴역군인 100여명을 수소문해 만났고
중국과 국내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과 저술을
통독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패망 이후
만주로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이 85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져온
‘400명’의 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김중생씨 작업의 결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6·25 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가운데 200여명의 명단을
최초로 정리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들의 신상을
1. 1945년과 46년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두차례로 나눠 개별입북한 경우
2. 1949년부터 2년간 부대를 인솔하고
입북한 경우
3. 휴전후 중국으로 돌아온 경우
4. 입북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경우 등으로 구분해 정리
'김중생'씨는 참전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휘관들의
출생년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의용군 시절 및
북한 입국 전후의 행적 등도 상세히 밝혀냈으며,
이처럼 꼼꼼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김씨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가 만주에서 건너온
조선족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중생'씨는 6·25전쟁에 참여한 전체 조선족 규모를
10만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이 가운데 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경우가 '6만5,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북한은 전쟁중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인민군' 총참모본부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현지로 건너가 '조선족들'을 상대로
모병(募兵)하기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중생'씨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때 하얼빈·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 등에서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조선족이
1만명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고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중공군은 한꺼번에 수십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냈다가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부대로
교체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漢族)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배치될 때
반드시 조선족 통역요원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하면 '중공군'을 따라 참전한 통역요원만도
2만5,000명이나 됩니다.
때문에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중 북한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족의 규모는 10만명에
달하리라는 것이 김중생씨의 분석입니다.
관련자료와 퇴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해낸
이같은 자료를 종합하고 김중생씨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용군'이 밀입북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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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을 불태우는 악마의 숨결 '백리탄'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최초로 개발되어 국제법상으로
개방지역이 아닌곳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있는
전장을 불태우는 악마의 숨결 백리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국군이 현역으로 사용중인 백리탄
백리탄은 기폭하면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연기를 내뿜으며 연소되는
무기입니다.
인명살상용으로 쓰이거나 연막탄 용도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영국이 개발하였고 2차세계대전 내내
총 600만발이 생산이 되어서 대전차전
용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76번 특수 소이탄이라불린 최초의 백리탄
백리탄은 개발 당시에도 매우 악명이
높은 무기였습니다.
장병들이 회상하기를 포복으로 독일 전차에
다가가 해치를 까고 소이탄을 던져넣으면
그 안은 마치 잘 예열된 오븐처럼 변해서
불쌍한 독일군들은 산채로 튀겨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폭격할때 모습
백리탄은 인류가 만든 최강의 귀축묵기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걸 민간인을 상대로 사용한 이스라엘은
엄청난 국제사회의 비난을 들었고
우리나라,미국,이스라엘에게 백리탄을
폐기하라는 말도 간간히 들리고있습니다.
사실 핵무기는 실전에서 사용하게되면
지구최후의 날이 될수도 있지만
실전에서 쓰일수 있는 병기중에서는
이 백리탄이 가장 흉악하다고 볼수있습니다.
그럼 백리탄에 위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민간인 지구를 불태우는 백리탄의 비
우선 백리탄은 한번 연소하기 시작하면
인체를 녹이며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웬만한 방법으로는 절대 꺼지지가 않습니다.
착탄 부위에 물을 부으면 오히려 불에
데이는 범위만 늘어나 더 고통스러워지고
절대 꺼지지가 않습니다.
그 악명 높은 네이팜탄도 물속에 들어가면
꺼지는데 이 백리탄은 물속에 들어가도 불씨가
꺼지지않고 살아있어서 숨을 쉬려고
빠져나오는 순간 더욱 맹렬하게 타올릅니다.
심한 경우에는 물속에서도 불타는 경우도
있다고합니다.
백리탄으로 인한 불을 소화하려면 백리탄이
엉겨붙은 피부를 통째로 도려내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백리탄에 맞고 살아남은 시민
▲백리탄이 직격해 완전연소된 아기...
▲백리탄이 휩쓴 거리의 모습
노란건 타다남은 유골
▲실제 피복자들의 환부
▲백리탄에 직격해 완전히
녹아버린 시체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백리탄은
사람을 "살아있는 양초"로 만들어버리는
무기입니다.
▲백리타은 한발의 폭탄이 아닌
여러발의 자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0~600발 가량의 자탄이있습니다.
이 자탄들이 격발할때 한번에 다
작동되면 문제가 없지만 종종 불발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발된 자탄은 지면에 떨어져서 언제
누구를 해칠지 모르는 지뢰가
되버린다고 합니다.
이런 불확실성 또한 백리탄의 악명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전쟁할때는 군인한테 썻지만 수백년후에
민간인들이 멀쩡하게 지나다니다가도
백리탄을 맞을수가 있다는것입니다.
또한 백리탄이 타면서 내는 연기도 심각한
유독성 물질인 오산화이인을 만들어내서
접촉하는 사람의 피부에 산화반응을 일으켜
온몸이 불타는듯한 고통을 주게되고
호흡기를 내부에서부터 잔혹하게 찢어버립니다.
현재 이 백리탄을 정규군이 사용하는 국가는
러시아,미국,이스라엘 한국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이 국가들은 국제사회로부터
백리탄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고있지만
우리나라는 혹시 모를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해서
백리탄을 보유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있습니다.
거기에 1970년대 일어난 DMZ총격전에서 105mm
견인포로 백린탄을 북한 GP에 명중시켜
전원몰살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현재 3.7완전작전이라고 불리고있으며
제3군단은 북한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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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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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위협적인 북한의 첨단무기 7가지
안녕하세요
최근 북한에 계속되는 미사일 실험발사로
인해서 대한민국은 물론 일본까지도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북한의 위협적인 첨단무기7가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NO.1 번개 5호
북한의 전승 60주년으로 기념한 전승절
군사행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번개-5호 입니다.
최장 사거리 400km에 이르며 탄도 미사일도
요격이 가능하게 설계된 막강한
대공미사일입니다.
NO.2 가네프 대공미사일
가네프 대공미사일은 이라크전쟁부터
미국이 발사한 순항미사일이나
스텔스 폭격기에 대비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가네프미사일은 소형,대형으로 나뉘며
대형은 사거리가 더 길것으로 추정됩니다.
NO.3 300mm 방사포
북한의 300mm 신형 방사포(KN-09)는
탄도미사일보다 비행고도가 낮아
요격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시에 8발까지 발사되며 사거리는 200km로
오산,평택까지 사정권에 들어가 우리군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NO.4 핵배낭 부대
북한의 '전승절'열병식 당시 핵배당 부대입니다.
한반도 전쟁시 후방에 침투하여 소형 핵폭탄을
터트리는 자살특공대 입니다.
일명 더티밤(dirty bomb) 전담부대이며
더티밤은 기폭장치에 플루토늄과 세슘등
방사능 물질을 살포하는 폭탄을 말합니다.
NO.5 장사정포
북한군이 실전 배치한 장사정포는 총 4,800문으로
이중 350문정도가 서울과 수도권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장사정포는 현재 시간당 1만여발 이상을 포격
가능한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북한군이 전쟁시 장사정포에 화약탄을
넣어서 발사할 경우 그 피해는
상상할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NO.6 대륙간 탄도미사일
미국 본토까지 타격 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입니다.
북한은 ICBM에 필요한 단분리,유도조정기술등을
이미 확보한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건 6~7천도의 고열과 충격을
견뎌야 하는 대기권 재진입 기술만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NO.7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북한은 최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의
시험발사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북한의 SLBM의 명중시험도 성공적으로
끝난것으로 알고있고 실전배치가
이루어질것으로 예상됩니다.
잠수함에서 발사가 되기때문에 미사일 발사
시점을 예상하기가 어려워 우리나라뿐만아니라
일본에게도 큰 위협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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