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미국은 프레데터 무인정찰기를 공격기로 사용한 이후 중동 지역 전쟁에서 정말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런 무인공격기의 성능에 매우 만족해서 프레데터 B 무인공격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지금 현재도 자주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레데터 무인기 판매에 만족한 미국의 군수업체 제너럴 아토믹스는 미래에 쓰일 신형 무인기 개발에 나섰는데 그게 바로 프레데터 C 어벤저(Avenger)입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는 다른 무인기 형제들보다 훨씬 진보한 무인공격기로 스텔스기로 개발되었습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 기존 무인기들은 단가 절감을 위해 터보 프롭 엔진을 사용하는데 프레데터 C 어벤저는 스텔스를 추구하다보니 제트엔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제트엔진을 사용하다보니 추력이 매우 좋아져서 프레데터 B 리퍼 무인기보다  최대이륙중량이 8.255kg으로 MQ-9 리퍼의 최대이륙중량인 4,760kg에 거의 2배 정도 증가하였으며 MQ-9리퍼보다 약 50% 더 빠른 속도를 낼수 있습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의 최고속도는 시속 740km 수준이며 넓은 날개 때문에 작전시간이 20시간이나 가능합니다. 상승고도 역시 기존 MQ 시리즈보다 높은 6만피트 상공까지 상승이 가능하여 전반적인 비행특성면에서 이전 무인공격기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텔스특성을 활용하여 차세대 전장에서 방공망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라도 공격가능합니다. 그리고  전자 광학 센서 시스템 역시 진보하여 F35 전투기에 탑재된 광학타켓팅 시스템인 EOTS 소형버전인 ALERT (Advanced Low-observable Embedded Reconnaissance Targeting)가 탑재되어 지상 공격목표물을 광학적으로 타겟팅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Lynx 합성개구레이더를 탑재해서 탐지능력이 굉장히 좋아졌으며 정찰기에 쓰이는 MS-177 다중 분광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어서 정찰기 용도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데 10km 상공 위에서도 고해상도 촬영이 가능합니다.

 

 

 

특히 프레데터 C 어벤저에는 내부 무장창이 달려 있어서 최대 1600kg의 폭탄과 미사일을 내부에 장착할 수 있고 무인공격기지만 2천 파운드 폭탄을 발사할 수 있습니다. 무장 능력은 전투기 수준으로 엄청납니다. 외부 무장은 최대 6곳으로 기존 무인기보다 2곳 정도 많습니다. 이는 전투기 수준의 무장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어벤저 무인기는 내부 무장창에 레이저 무기 시스템을 탑재할 수 있어서 레이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를 개발한 제너럴 아토믹스는 드론 제작업체로 유명하지만 지난 15년간 레이저포 연구를 해왔으며 미 국방부에 150kW 액체 레이저 포를 납품하는 등 레이저포 분야에서도 미국의 다른 방산업체보다 앞서고 있습니다. 출력 150kW는 미 해군이 페르시아만에 배치한 해군함정 폰스함에 설치된 30kW급 레이저포 출력의 다섯 배로 매우 강력합니다. 30kW의 출력도 드론을 파괴하거나 조그만 선박에 구멍을 낼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리고 현재 알려진 바로는 프레데터 C 어벤저의 레이저포는 한번 충전으로 5~6회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미국이 운용중이 프레데터나 MQ-9 리퍼는 탑재된 헬파이어 미사일을 모두 발사하면 재무장을 위해 기지로 돌아와야 하는데 프레데터 C 어벤저는 기지 복귀 없이 장시간 체공하면서 공격이 가능합니다.

 

 

또한 프레데터 C 어벤저는 기존 MQ-9 리퍼를 위한 지상 관제 시스템과 호환이 가능하며 2명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지상 표적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당 가격이 약 1,500만 달러 수준으로 높은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에는 정말 많이 쓰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F-35A 양산가격으로 추정되는 1억 1천만 달러의 거의 1/10 수준인데 F-35A 1대의 도입비용으로 약 9~10대가량의 프레데터C 어벤저(Avenger)운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장거리탄도탄을 발사 단계에서부터 탐지, 추적해 상승 단계에서 요격하기 위해 프레데터 C 어벤저까지 가세한다면 북한의 탄도탄에 대한 미사일 방어망이 한층 두터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1969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국가인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친소련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미국과 중국과 교섭을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덕분에 미국도 소말리아를 지지했습니다. 그리초 최초 5년 동안은 사회 개혁도 하고, 부족주의 타파도 한다고 하고, 공공사업도 벌였으며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급격한 부족주의 해체를 포함한 개혁조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부족의 권한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와 암살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집권 22년중에서 괜찮았던 초반 5년이 끝나고, 17년간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1990년에는 마침내 소말리아 최대 부족인 하비야부족의 통일 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가 결성되었고  1990년 3월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1991년 1월 26일 결국 소말리아 최대 부족 출신이었던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가 이끄는 USC가 모가디슈를 공격해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 알리 마흐디 무하메드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미 정책을 펼치던 시아드 바레가 반란군에 의해 축출을 당해 나이지리아 망명길에 오르자 미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소말리아 북쪽에 위치한 아덴 만을 건너면 예멘이고 동시에 중동으로 산유국과 가까우며, 그 산유국 중에 하나가 이라크였습니다. 1년 전 걸프전처럼 중동에서 유사시 즉각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주둔지로는 소말리아가 최적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힘든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전쟁 중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국 내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즉 중동 내부에서의 전쟁 불씨가 미군에게까지 번질 우려가 있어서 소말리아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습니다. 또한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으며, 인도양으로도 바로 진출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뿔이었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 파병을 실시간 생중계한 CNN 영상

당시 소말리아 내부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심각한 내전이 발생하여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UN은 소말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병하였지만 소말리아 USC를 이끌던 아이디는 UN에 철군을 주장하였고 그러던 과정에서 UN군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UN은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1992년 12월 9일 소말리아 민간인 안전 확보, 상황발생시 교전 임무를 띠고 미 해병대 1800명이 선봉대로 소말리아 인근 해안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는 전투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걸프전 이후 미국의 두 번째 전투부대 투입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특종이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가 상륙하고 난 후 제3강습상륙대대, 제10산악사단 등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결국 1993년 3월까지 파병 미군은 25000명으로 증가되었으며 이것을 '희망회복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군은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가 배치돼 무장세력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고, 더 위험한 곳에는 전차와 공격 헬리콥터가 동시에 투입되는 등 안전확보에 대단히 공격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미군 덕택에 식량배급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내전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해병대 선봉이 상륙한지 3일만에 알리 마흐디와 파라 아이디드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UN은 1993년 5월 미군의 철수와 함께 다국적군 약 28,000명을 소말리아로 파명하게됩니다. 파병한 나라는 35개 나라였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상록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3년 6월 5일 파키스탄군이 주축이 된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군이 정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UN 평화유지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이디드군이 라디오 방송으로 UN평화유지군을 비난하였는데 이제 화가 난 UN군은 아이디드군이 점령하고 있던 선전기구로 활용되던 라디오 시설과 언론사, 무기 시장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군 경기갑 여단을 파견했는데, 거꾸로 아이디드 군의 매복에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로 파키스탄군 24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UN 평화유지군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죽은 파키스탄군의 일부가 시체훼손이 되면서 끌려다니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CNN에 보내고 UN 철수를 요구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6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안보리 837 결의안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발을 빼고 있던 클린턴에게 미군을 파견하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UN평화유지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 작전으로 변질됐으며 다국적군도 완전 전투부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유지 작전이 전투작전으로 변질될 것까지 예상을 못한 파키스탄은 핵심 전투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켰고, 짐바브웨와 루마니아, 스웨덴도 이러리라곤 예상을 못해 병력을 철수시키자 이어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세가 등등해진 파라 아이디드는 이걸 또 선전하면서 자칭 소말리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습니다.

 


뒤늦게 파견한 미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고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무장세력을 완전 해산시키기 위해 수시로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무장 세력, 동조자 등을 사살하는 과정에서 목표물을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대규모 민간인 오폭이 이어졌으며 이 사건으로 아이디드에 저항하던 소말리아 부족과 군벌들이 아이디드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소말리아의 전쟁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당시 실제 파병된 미 레인저 대원들 모습

그리고 그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 4명이 소말리아 군중에게 살해당했으며 이후 미군 헌병이 사망하고 부상당하는 일이 계속 되자  미합중국 육군 소장윌리엄 F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가 소말리아에 파병됩니다. 파병된 부대는 레인저 3대대 B중대, 델타포스 C분견대,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나이트 스토커"(The Night Stalkers) 예하 헬리콥터 16대(MH-60 블랙호크, MH/AH-6 리틀버드)와 조종사 및 정비병, DEVGRU, 제24 특수전술대대 소속 CCT항공구조사의 총인원 450여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가디슈 바로 앞 바다에 CVN-72 에이브라함 링컨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소속 제11 비행단도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무려 모든 작전을 3주만에 끝낸다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1주일 동안에 병력을 소말리아에 전개하고, 2주차에는 아이디드를 색출해서 검거하고, 3주차에 아이디드의 잔존 세력과 지휘체제를 붕괴시킨 다음에 깔금하게 소말리아를 떠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30일 새벽 2시에 첫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레인저와 델타 포스팀이 패스트로핑을 했고 전범 9명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이들이 전범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 요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개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4번이나 더 출격했으나 번번히 허탕을 쳤으며 그렇게 목표인 3주의 시간이 모두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투입 한 달 만인 9월 21일, 아이디드 지지 세력으로 합류한 오사만 알리 아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알리 아토를 체포하자 화가 난 파라 아이디드는 미군이 보이면 생포고 뭐고 다 필요없고 무조건 죽이고, 미군의 차량은 무조건 파괴하라고 지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9월 25일, 모가디슈 남쪽 공업지대(New Port Facility) 상공을 비행하던 제101공중강습사단 소속 블랙 호크를 무장세력이  총격을 가했고 이후 RPG-7에 한 방에 격추돼 3명의 승무원이 사망하게 됩니다. 아이디드는 이걸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본인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하기까지 해서 자기가 직접 격추시켰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는  9월 25일 발생한 블랙 호크 다운 사건으로 파라 아이디드 체포에 속도를 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주변인들을 차례대로 체포해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뒤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한다는 기존 계획에서 조금 더 나아가, 파라 아이디드의 참모인 오마르 살라드 엘미(Omar Salad Elmi)와 명목상 내무장관이자 정치고문인 모하메드 하산 아왈(Mohamed Hassan Awale)을 먼저 체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1993년 10월 3일 13시 50분, 소말리아 정보원에 의해 살라드 엘미가 목표 건물에 들어온 게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험비와 트럭 무리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미군에 대한 불신이 쌓인 소말리아 민병대 (무장한 민간인)가 무장 세력에게 빠르게 전파되하였고 또한 거리에 쓰레기 더미와 불타는 타이어 등을 쌓아 미군의 접근을 봉쇄해 방향을 돌렸습니다.

 

▲블랙호크 헬키 슈퍼64 실제 추락 사진

결국 지상군이 목표건물에 늦게 도착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RPG-7에 블랙호크 헬기(슈퍼 61)이 맞으면서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추락한 블랙호크 헬기에 민병대가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추가 지상지원을 위해 추락지로 날아가던 또 다른 블랙호크 헬기(슈퍼 64)마저 RPG-7 로켓에 피격됩니다. 그렇게 임무 종료 무전과 함께 임무를는 실패하였고 지상군과 나머지 병력들은 모가디슈 공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약 99명의 병력이 슈퍼 64 추락지에 묶여 있었습니다.이에 JSOC 소속 지상군은 고립된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해 차량에 주무장을하여 투입되었으며 이 뒤를 말레이시아, 독일 다국적군 소유의 100여 대가 넘는 장갑차와 파키스탄 다국적군 소유의 M48 전차가 따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국적군 소유의 장갑차가 격파되고 다국적군에도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미군은 18명이 죽고 7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군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파키스탄군 역시 1명의 사망자, 2명의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소말리아의 경우 아이디드 쪽의 발표에 따르면 315명이 죽고 81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UN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약 1500에서 3000여명 정도가 사망 혹은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사망자 18명 + 부상자 73명은 월남전 이후 벌어진 마야게즈 호 승무원 구출작전의 실패 다음으로 미군에게 큰 피해 규모였고, 전면전인 걸프전에서조차 50만 명의 미군 중 294명이 전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뼈아픈 피해였습니다. 또한 그 18명이라는 사망자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미 육군 최정예 보병인 레인저, 그리고 야간 침투가 전문인 정예 강습 조종사인 것을 감안하면 '20명에 근접하는 사망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국은 두 번 다시 약소국의 내전에 끼어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북한 대공망 설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만'입니다. 대략 1만문이 넘는 밀집된 방공망이라는 뜻 입니다. 그리고 이 1만 방공망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부품은 각종 고정, 견인식 AA GUN입니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방공포는 대략 15종으로 알려져 있고, 이 중 대부분이 1985년 이전 장비품들입니다. 여기서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는 14.5mm체계 4종을 제외하면 11종이 남게 됩니다.

 

 

대략 1995년까지 북한의 방공포 세력은 14.5mm체계까지 더해 8000여문으로, 97년 무렵이 되면 대략 7500문까지 그 숫자가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85mm체계를 중심으로 축소되고 있었는데 85mm체계는 노후화로 인한 자연 도태중이었고, 붕괴된 경제로 인해 더 이상 숫적 충원이 불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방공포 세력이 2000년 무렵이 되면 11,000문으로 대거 강화되게 됩니다. 숫적으론 3,000여문이 증원된 셈입니다. 북한은 이 무렵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무기를 구매하였습니다.

 

 

이런 급작스런 숫적 충원은 Zu-23계열과 23mm계열 방공포로 대표되는데, 대략 이 계열모델로만 2,500여문이 충원되었습니다. 이러한 숫적충원은 이 무렵 동구권 국가의 붕괴 및 동유럽 상당국가가 서방제 무기체계로 무장하면서 재고를 국제시장에 방출하였는데 이를 북한이 구매하였습니다. 그 외에 M-1939로 대표되는 중국제 37mm대공포를 석탄, 마그네사이트 등의 현물거래를 통해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23mm/37mm체계는 사실 큰 위협이라 볼 수가 없고, 북한이 달러를 취득하기 시작한 2000년을 전후해 도입한 가장 위협적인 방공무기라 하면 KS-19, KS-12로 대표되는 대구경 방공포. 그리고 ZSU-57-2 57mm 쌍열 자주방공포입니다. KS-12/19는 도합 900여문이 도입, ZSU-57-2는 250량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북한은 대규모 관제 레이더를 늘리는 방식보단 소형 이동식 레이더를 다수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 산악지형 특성상 다수의 음영지역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음영지대를 커버할 수 있는 다수의 레이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 공군의 주야간 저고도 고속침투능력은 1980년대 북한이 가장 부담스러워 한 전력이었습니다.

 

▲북한의 촘촘한 '1만' 방공망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선 한/미 연합공군이 가진 막강한 SEAD/DEAD전력 때문에 소형 이동식 레이더를 다수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리아등지에 이동식 레이더를 수출한 것에도 보여지는데 당연히 성능과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저고도 방공무기를 통제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런 소형레이더 역시 이동형이기에 그 성격은 게릴라 운용이란 뜻입니다. 지속적인 이동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레이더를 가동하고 그 때마다 최소한의 정보를 방공포대에 전파하는 식의 운용을 해야 됩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레이더를 살려놓느냐가 북한 방공망 기능보존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약점은 저고도 밀집 방공망을 자랑으로 삼는 북한 방공망에게 심각한 과부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북한은 필요할 경우에만 레이더를 가동해 특정 공역에 화망을 덮는 방식을 선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1만여문에 달하는 막대한 방공포들 중에서 뛰어난 탐지장비를 장착한 대한민국 공군 전술기의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고사화기는 그 중에서도 소수 장비한 85mm/100mm대공포 뿐이며 그나마도 임시 가동한 레이더를 사실상 포기하고 나서야 가능한 대응입니다. 레이더를 하나 버리는 대신 1회의 응전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희생을 치룬다고 해도, 현대적인 서방 전술기들은 좀처럼 저고도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보통 랜턴의 표적지시가 25,000피트(7,600미터)에서 이뤄지며 JDAM은 그보다 더해서 45,000피트(13,700m)고도에서 운용되는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공포는 북한에 전무합니다. 즉, 전쟁초기 JDAM을 통해 미리 점지해둔 고가치 목표를 모두 파괴할 때까지 한미 연합공군은 북한이 원하는대로 저고도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공군 주력 전술기는 주야간 가리지 않고, 방공화망의 위협없이 안전하게 정밀타격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이러한 북한의 구식방공체계는 무인기에겐 위협이 될 수 있겠으나 애초 유인기 대신 버리는 패로 운용하게 될 무인기입니다.

 

한만디로 대한민국 공군은 지속적인 전술기 도입과 현대화로 북한 방공망 정도는 쉽게 무력화할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북한 방공망은 조밀하지만, 분명 노후화되어 있고 소수의 핵심 체계를 제거하면 사실상 걸프전에서의 바그다드 상공처럼 무의미한 폭죽놀이만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북한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대칭 체계에 자꾸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지금 현대까지 전쟁에서 전투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배트남전을 제외하고 모두 공군전력이 우세를 보인 국가가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1차,2차 세계대전 공중전의 규모가 엄청나게 컷는데 그 공중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에이스는 통상 기종에 관계없이 적기 5대를 격추한 조종사에게 부여되는 칭호입니다. 그들중 상위 1%를 슈퍼에이스 또는 격추왕이라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공중전의 천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장을 누볏던 기체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전설적인 기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원히 기억되는 전설적인 네임드 기체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의 갤베 14

 

한스-요아힘 마르세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입니다. 공인 격추수는 158대로 독일 공군 중 서방 전투기를 가장 많이 격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철십자 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이 따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별한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바로 자신의 기체에 개인 도색을 하는 권한이었는데 마르세유는 자신이 탑승하는 Bf109F/Trop에 자신의 번호를 황색으로 써넣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색 14번으로 영국 사막 공군에게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붉은 기체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일 육군 항공대의 에이스로 1918년 4월 21일 격추당할 때까지의 총 격추수 80기로 1차대전 에이스중 1위였습니다. 타고다닌 전투기를 항상 빨갛게 칠하고 다녀서 붉은 남작(Der Rote Baron)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리히트호펜의 인지도는 그냥 유명한 에이스 수준이 아니라 전국적인 아이돌 수준이었는데 금발의 미남이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며, 육군 병사들조차 리히트호펜의 사인을 받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게임에서도 이 붉은 기체가 자주 등장하며 수많은 영화에도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 코르키란 챔피언의 스킨으로도 나왔습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의 검은 튤립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슈퍼 에이스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격추왕이었던 에리히 하르트만은 검은 악마로 불렸는데 위에 설명한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더불어 전 세계 공군 역사에서 에이스를 논하는데엔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 공식 격추 기록은 무려 352기로 격추 전과 300기를 넘긴 사람이 에리히 하르트만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Gerhard Barkhorn)단 두 사람이고, 바르크호른이 301기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전투기를 검은색 계통으로 도색하였으며, 기수에 '검은 튤립'이라 불리게 되는 독특한 도색을 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딘 헤스 소령의 신념의 조인

 

이 신념의 조인은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적인 기체이자 거의 유일한 네임드 기체입니다. 탑승자는 미 공군딘 헤스 소령이지만 소속은 엄연히 대한민국 공군의 기체입니다. 이후 딘 헤스 소령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김두만 대위가 이 기체를 몰았습니다. 기종은 North American F-51D 머스탱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AT-6 건국기나 L-4같은 훈련기만 보유하고 있던 공군의 전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급히 지원하여 만들어진 BOUT-1 대대 소속이었습니다.

 

딘 헤스 소령은 우리나라 공군 조종사들의 애국심에 감명받아 한국공군 소속 기체에 탑승하여 작전을 나갔고, 이후로 딘 헤스 소령은 모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기체를 타고 250여회나 출격했습니다.  그리고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이름은 딘 헤스 소령의 좌우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그려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항공모함 1척을 격침시키는 데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력의 40%가 희생될 것이라는 말은 많이 들으셨을겁니다. 실제로 중국이 인공위성·공격기·레이더망을 총동원하더라도 계속 이동 중인 항모의 위치를 정확히 추적해 타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 항모는 순양함·구축함·잠수함은 물론 정찰기·대잠헬기 등의 호위를 받습니다. 또 가장 발전된 함대 방공망이라는 이지스 시스템을 통해 날아드는 적 미사일을 거의 정확히 요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항공모함에는 약점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국이 유일하게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할 수 있는 방법 3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엄청난 수의 저렴한 무인기 공격 

 

항공모함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 것은 항상 팀을 이뤄 작전하는 순양함과 구축함, 잠수함입니다. 항공모함은 항상 순양함 1척과 팀을 이루는 것이 기본입니다. 통상 항모는 이지스 순양함, 구축함 등 수상함의 지원과 함꼐 수중의 공격 원자력잠수함까지 함께 작전을 펼칩니다. 이는 항모 혼자서는 자체 함재기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대공 방어능력이나 대잠 능력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모를 호위하는 이지스함의 전투체계는 동시에 1000여개의 표적 탐지/추적이 가능하고 그중 20개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항공모함과 호위함들의 이지스전투체계가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미국의 항모전단 방공체계를 무력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100대 이상의 저가 무인기를 한번에 띄우거나 값싼 크루즈 미사일을 무더기로 쏟아 부어 이지스전투체계의 방공능력을 초과시키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이 저 방법으로 공격한다면 항공모함을 지키는 호위 함정들의 대항력이 떨어지면서 항공모함의 대공능력도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미 항공모함의 대함유도탄 방어가 음속을 넘지 못하는 아음속 유도탄 공격에 맞춰진 체제라는 것도 부담입니다. 최근에 중국과 러시아는 초음속 유도탄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소형 디젤 잠수함의 어뢰 공격

 

2006년 10월 26일 오키나와 인근 해상에서 미 해군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10여 척의 호위함에 둘러싸여있던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의 9km 앞에서 중국의 신형 디젤 추진 방식의 쑹급 잠수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디젤 잠수함이 미국 항공모함 전단의 촘촘한 잠수함 경계망을 쉽게 뚫은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림팩 훈련에서는 미 항공모함과 순양함, 구축함들이 우리나라 해군 209급 잠수함 장보고함에게 어뢰를 맞기도 했습니다.

 

 

당초 미국의 항모전단은 수중의 위협 세력으로 주로 러시아의 대형 원자력 잠수함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력 잠수함에 비해 소음이 적은 디젤 잠수함이 더 쉽게 항모에 접근할 수 있고 어뢰를 맞출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중국이나 북한의 소형 디젤 잠수함에 대해 완벽한 방어를 자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항공모함이 어뢰 1~2발 정도로 침몰하지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미국에게는 충격적일 것입니다.

 

  스텔스 전투기로 공중 장악

 

미국이 자랑하는 스텔스 기술은 이제는 항공모함의 큰 적이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완벽한 스텔스 전투기인 F-22 랩터와 F-35 전투기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도 스텔스 전투기 개발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 F/A-18E/F 슈퍼호넷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중국과 러시아가 스텔스 기능이 완벽한 5세대 전투기로 맞대응에 나설 경우 공대공 전력에서 밀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미 해군이 새로운 함재기로 사용하는 F-35C 라이트닝은 F-22 랩터처럼 완전한 스텔스 전투기는 아닙니다. 물론 항공모함의 치명적인 약점을 미국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 해군은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과연 미 항공모함이 지금처럼 막강한 위력을 미래에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는 단연코 미국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무기획득 예산 중 연구개발비가 71%에 달한다는 점은 미국이 단순히 현재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미래의 우월적 지위를 미리 확보하는 방향으로 착실히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뒤에는 미국이 현재까지 강력함을 지닌채 사용하고 있는 장수 무기들 덕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국이 40 년 이상 사용하고 있는 장수 무기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B-52 (1952~)

 

미군 최대의 폭격기이자 장수만세 폭격기로 B-47의 후속기종으로서 1952년에 첫 비행에 성공했고, 1955년 배치된 이래 미 전략공군사령부의 주력 폭격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도 북한의 도발시 미국이 B-52 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핵까지 투하할 수 있다는 대북경고입니다.


 

  2. C-130 (1954~)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현역으로 돌리는 최고의 장수 전술 수송기입니다. 1954년 첫 비행, 1957년 실전배치 이후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는데 정말 무서운 점은 1970년대 이후 신규제작이 없는 B-52와 달리 C-130은 아직도 신규모델이 개발/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군만 해도 노후화된 C-130H를 대체하기 위해 신형인 C-130J를 사들일 정도로 오래 운용하고 있습니다.


 

  3. KC-135 (1956~)

 

KC-135는 월남전부터 미군이 공군력을 동원하는 전쟁에는 모두 참가하여 공중급유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수 기종입니다. 2011년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실시했던 대한민국 사상최초의 공중급유훈련에 KC-135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2013년 6월 5일에는 3차 FX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보잉이 F-15SE의 구매시 3기를 공짜로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KC-135는 노후화가 너무 심한 기종이며 업그레이드 비용과 유지비가 높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4. U-2 (1957~)

 

U-2의 개발 및 생산 시작과 생산 종료는 거의 냉전 시기의 시작과 끝이 겹쳐서 냉전 초반인 1955년에 초도비행과 생산이 시작되어 1957년부터 인도되기 시작하였고 냉전 종료 시기인 1989년까지 총 104기가 생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IED를 탐지하는 전술정찰 임무를 담당하며 활약중입니다. 사실 U-2는 2012년에 퇴역할 예정이었지만 2025년까지 운용을 연장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5. M14 (1957~)

 

M14는 6.25 전쟁 이후인 1957년에 제식화된 총기입니다. 1959년부터 1964년 사이에만 약 137만정 가량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재활용 방안이 계속 제기되어 왔는데, 특히 2000년 초기부터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지정사수소총으로 개조되었으며 아직도 강습 임무와 특수 작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6. UH-1 (1958~)

 

전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생산된 헬리콥터로 약 16,000대 이상 생산되었습니다. 참고로 서방제 헬리콥터로는 생산량이 1위이며, 전세계 생산량 1위인 소련Mi-8 Hip보다는 대략 1,000대 적습니다.  최신 버전 UH-1N형은 우리나라 공군 VIP 수송용으로도 도입해었으며 UH-1H형은 우리나라 육군항공대에서 2020년까지 운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해외 국가에서도 운용중입니다.


 

  7. CH-47 (1961~)

 

1961년에 첫 비행을 하고 1962년부터 실전배치된 이 헬리콥터는 미 육군의 어느 헬리콥터보다도 생존성과 신뢰성이 우수하며, 오래되었지만 높은 신뢰성으로 애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간전에서 치누크 1대는 블랙 호크 5대의 역할을 하며 유용함을 증명했습니다. 게다가 워낙 잘 만든 헬리콥터라서 지금도 개량형이 계속 생산중입니다. 고정익기에 C-130이 있다면 회전익기에는 바로 CH-47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진정한 대를 이은 장수 군용기입니다. 현재도 미국 및 미국의 동맹국이 거의 운용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는 대한민국, 일본, 싱가폴이 운용중입니다.


 

  8. M72 LAW (1963~)

 

미 육군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8년에 신형 휴대용 대전차화기(LAW)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2년간의 성능 실험을 거친 다음 1963년에 M72 LAW의 제식명으로 미 육군은 물론, 미 해병대미 공군이 도입하였습니다. 2000년대 초에 개시된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비축 중이던 재고품의 소진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2010년에는 미 해병시스템사령부(MCSC)가 M72A6을 개량하여 M72A7의 제식명으로 7,750정을 새로 도입하면서 M72 LAW의 역사는 계속 될 전망입니다.


 

  9. AH-1 Cobra (1967~)

 

미국헬리콥터 제조회사 벨사에서 제작한 세계 최초의 완벽한 공격헬기입니다. 1967년 9월 첫 기체가 베트남에 도착, UH-1을 개조한 공격헬기들을 대체하기 시작하여 베트남전에서 지상근접지원임무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전쟁터를 누볏으며 걸프 전쟁에서도 다른 헬기들과 달리 먼지와 열 등에 강한 모습을 보이며 이라크군의 T-55, T-72 등을 다수 파괴하였습니다.


 

  10. A-10 (1975~)

 

1972년 5월 첫 시제기인 YA-10기가 시험비행을 했으며, 실제 배치는 1975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비행속도는 느린데다가 값싸게 만드느라 레이더는 커녕 레이저 목표 지시기도 없는, 사실상 2차대전 당시 쓰던 공격기보다 덩치 좀 더 크고 무장탑재량 좀 더 많은 것 빼곤 나을 게 없다는 지적 때문에 퇴역할뻔 했지만 1990년에 걸프전이 발발하고, 막상 실전에 투입시켜보니 무장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체공 시간이 1시간 이상이나 되는 점과 막강한 무장 탑재 능력을 본 미 공군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이 개입한 각종 분쟁에서 미군의 주요 항공지원 수단으로서 참가하여 꾸준히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번이나 퇴역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2016년 1월 미 공군은 A-10의 퇴역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떠다니는 섬,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군사요새, 핵 추진으로 20년간 기름 한방울 없이 작전을 수행 하는 항공모함은 현대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전쟁의 성패를 결정 짓습니다. 그리고 구축함, 순양함, 전투기. 원자력 잠수함 등은 작전수행 및 항공모함을 호위를 위하여 항공모함전단을 구성합니다. 항모전단은 항공모함 1척을 중심으로 이지스 순양함 2~3척, 구축함 2~5척, 보급함, 공격형 원자력 잠수함, 50~80대에 이르는 전투기, 대잠수함기, 전자전 비행기, 정찰기, 공중조기경보기, 헬리콥터, 해병대 1개여단 등 육해공군의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구상에 항공모함을 보유한 국가는 10여개국에 이르나 위와 같이 막강한 항모전단을 구성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합니다. 대부분 항공모함 전단은 이름 뿐이거나 항공모함을 흉내 내다 말은 허접한 항모전단을 구성합니다. 현재 미국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10척을 보유하고 있지만 에이브럼햄 링컨호가 수리중이어서 제대로 된 항모전단을 9개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대로 된 항공모함 전단을 미국밖에 운용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엄청난 유지비입니다. 미국의 존스테니스 항공모함 전단의 하루 운영비는 650만 달러(78억 5300만원), 연간 운영비는 23억 7250만 달러(2조 8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항모전단을 호위하는 이지스구축함을 보유한 나라도 세계적으로 8~9개국에 불과하고 그나마 이지스함이라고 이름을 붙일 제대로 된 이지스함을 보유한 나라도 미국과 일본, 우리나라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지스함 한 대면 북한 해군의 모든 함선을 쉽게 절단을 낼 수 있는 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런 이지스함을 항모전단에 2~3대 정도를 붙여 놓았으니 항모전단의 화력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능합니다.

 

 

항모전단의 위력은 견딜 수 없는 막강한 화력이지만 그 보다 항모전단의 위용은 항모전단 하나로 독자적 전쟁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육, 해, 공에 이르는 모든 전력을 완비한 항모전단은 공중전 및 해상전, 해병대를 통한 상륙전을 동시에 할 수 있어 항모전단 하나로 북한 정도는 초토화 시키고 상륙이 가능합니다.

 

 

일본도 미국의 항모전단 3개로 공격하면 2일을 견디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북한 정도야 반나절이면 초토화 되고 모든 군사전력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항모전단의 공군력은 웬만한 군사강국 공군력과 맞먹고, 항모전단의 모든 전력은 웬만한 군사강국 군사력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말해도 반박하기 힘듭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핵잠수함에서 핵무기를 쏘아 한나라 정도는 지도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항모전단 9개를 운용하는 미국을 보면 경악 그자체입니다. 나름 군사 라이벌이라 불리는 러시아를 비롯한 10여개국 정도가 1대 정도씩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보유한 그 항공모함의 배수량이 미국이 통상적으로 운용하는 항공모함의 절반 밖에 되지 않거나 심하면 10분의 1밖에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군력은 배수량으로 판단하는데 전세계의 모든 해군력을 합쳐도 미국의 항모전단 몇 개에 불과 할 뿐입니다.

 

 

이에 중국은 2020년까지 6만~7만t급 항공모함을 최대 6척 건조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25년까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2위의 해군 전력으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 본국 해안선에서 수천km 떨어진 곳에서도 군사적 존재감을 보여줄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도 2025년에 총 1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전망입니다. 2012년 퇴역한 엔터프라이즈호를 대체해 추진됐던 제럴드 포드 항모가 지난 4월 9일 시범 운항에 들어갔고, 존 F 케네디호도 2025년 실전 배치를 목표로 건조 중입니다. 이처럼 현대전에서 항공모함은 그 자체가 단순한 무기체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앞으로 그 가치는 계속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특수부대란 엄격히 선별되고 고도로 훈련된 인원으로 구성돼 극도로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부대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입니다. 이런 특수부대들은 일반부대와 다른 특수작전을 펼치는데 특수작전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비상사태나 전략적 우발사태에 대처하려고 수행되는 작전입니다. 한마디로 정규전력으로는 불가능한 군사작전의 수행이 바로 특수작전입니다. 특수부대가 수행하는 특수작전은 대표적으로 9가지가 있습니다. 

 

 1.타격작전

특수작전부대(특작부대)가 사전에 지정된 목표물을 포획·파괴·회수하는 군사작전을 말하는데 보통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간 소수 인원이 적의 핵심 목표물을 파괴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됩니다. 근데 말이 좋아서 타격작전이지 정말 어렵습니다. 이런 타격작전은 소수의 특수부대 병력으로 타격합니다. 은밀히 접근하다보니 밤을 선호하고 침투하는 수단도 고공강하, 헬리콥터, 잠수함 등 다양합니다.

 

 2.특수정찰

아무도 모르게 귀신처럼 적진 깊숙이 침투해 국가 단위에서 요구되는 첩보와 제원을 수집하는 군사작전을 말합니다. 몇 십 킬로미터 이내에서 작전하는 정찰부대와는 달리 특수정찰은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의 적진에 깊숙이 침투합니다. 이렇게 특수정찰을 하기위해서는 단지 행군만으로는 안되고 HALO(고고도 강하 저고도 산개)/HAHO(고고도 강하 고고도 산개)같은 특출난 기술을 연마해야 합니다. 걸프전에서 미군과 영국군 특수부대가 수행했던 스커드 미사일 정찰활동이 이런 특수정찰의 사례에 해당됩니다.

 

 3.비정규전

특수부대는 적진이나 적 점령지에서 현지 주민을 규합해 군사세력으로 만들어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활동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비정규전입니다. 미군 특수부대는 9·11 테러가 발생한 지 1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돼 반군을 조직화한 이후 겨우 한 달 만에 수도 카불을 탈환했습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비정규전의 사례입니다.

 

 4.대게릴라작전

비정규전과 반대로 아군 점령지에서 적군 게릴라를 색출해 섬멸하는 임무도 특수부대의 몫인데, 이것을 대게릴라작전이라고 합니다.

 

 5.대테러작전

테러범의 활동을 예방하고 대응하며, 나아가 사전에 섬멸하는 모든 공세적인 군사작전을 말합니다. 테러조직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테러조직이 보유한 대량살상무기를 회수하거나 인질 구출도 대테러작전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엔테베 인질구출작전이나 영국 특수부대의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이 역사상 유명한 대테러작전입니다.

 

 6.해외방어원조

특수작전은 군사외교에서도 폭넓은 활약을 합니다. 해외의 협력국가가 스스로 자국의 안보능력을 갖추도록 원조하는 임무도 특수부대가 수행합니다. 해외방어원조에 특수부대가 투입되는 이유는 이들이 수많은 군사적인 노하우가 있는 훌륭한 교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당 국가와의 군사적인 비선(back channel)을 확보하는데, 특수부대원의 어학 능력과 경력은 자국군에게 커다란 자산이 됩니다.

 

 7.정보작전

전쟁을 하려면 정보활동이 필수적이며, 여기서도 특수부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적군 수뇌부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려는 군사적인 기만행동이나 심리활동 등을 수행하는 정보작전도 특수작전의 중요한 분야입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소수의 미 해군 특수부대원이 쿠웨이트 상륙작전을 연출하면서 이라크군을 기만한 작전이 대표적인 정보작전 사례입니다.

 

 8.민사심리전

민사심리전이라는 고도의 전술 역시 특수부대의 몫입니다. 민사심리전이란 군사 목표를 달성하려고 아군에게 민간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고 나아가 적국 정부와 국민에게 아군이 원하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포괄적인 작전 형태입니다. 보통 작전지역에 전문화된 부대가 대민지원활동을 통해 현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합니다.

 

 9.특수부대만 가능한 임무

군 통수권자나 국방 장관이 요구하는 임무라면 무엇이든 수행해야 합니다. 특수부대는 정규 병력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특수부대를 막론하고 “불가능은 없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등과 같은 부대 신조가 있습니다.

 

 

최근 북한이 20만 명의 특수부대를 보유했으며, 그중 6만여 명이 우리 후방에서 테러 임무를 수행하려는 정예 병력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겨우 2만 명 남짓 되는 특수부대를 운용합니다.

 

그러나 특수부대는 그 숫자나 규모가 아니라 그 대원과 팀의 경험과 능력이 중요하기에 단정적으로 우리가 열세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의 특수부대는 세계 최정상급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이 완벽하게 패망하자 1945년 4월에 아돌프 히틀러는 자살하였고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후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베를린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4개국은 독일의 행정권, 통치권을 수행하였고 군대는 해산되었으며 숨어있던 나치 독일의 고위급들은 전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나치 독일이 일부 기술에서 미국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고 이 부분의 기술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뉴욕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발사 로켓, 대공 미사일, 가변익 제트 항공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일부 분야에서는 나치 독일이 수년을 더 앞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정말 나치 독일이 조금만 더 많은 자금과 시간이 있었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나치 독일은 반중력(Anti-Gravity)에너지와 같은 초과학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대전 당시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비행물체(UFO)에 대한 연구도 진행중이었습니다.

 

 

덕분에 이 나치 독일의 비밀무기 저장소와 각종 도면은 곧바로 미국 백악관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인계 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정리와 소련을 견제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중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재빠른 판단을 내렸고 당시 정보기관 임무를 수행했었던 전략사무국 OSS (CIA의 전신)에 임무 떨어졌습니다.

 

 

그 임무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을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최대한 많이 포섭하는 임무인 페이퍼 클립(Operation Paperclip)의 작전이였고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OSS 요원에게도 페이퍼 클립 작전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OSS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요원들을 소집, 브리핑 후에 급파 되었고 독일 현지에서 활동중인 OSS 요원들과 접촉하여 페이퍼 클립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OSS 요원들과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미국에 무사히 하면서 페이퍼 클립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이 나치 과학자들 중 2/3가 나치당이나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요원이었지만 미국 OSS 요원들이 이들의 전범기록을 삭제함으로서 무사히 미국 입국이 허가되었고 1955년 이후 총 760명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로 입국하여 미국 과학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강세를 보인 분야와 독일이 강세를 보인 분야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독일이 항복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기술과 과학 지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값어치는 현재 시가로 1000억 달러 수준이며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5조 6000억 원에 이르는 가격에 이르는 정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나치 독일의 Horten Ho229 전투기는 발견되자 노스롭 그루먼 사로 보내져서 시험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에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시설은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이들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 과학계로 진출하고 난 뒤인 1958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초기 직원 8,000명중 나치 독일에서 이주한 과학자들은 대략 500명 가량이 되었는데 이들은 텍사스의 블리스 요새, 뉴멕시코의 화이트샌즈 등에 분산시켜 유도 미사일과 탄도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았고 이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설립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개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페이퍼 클립 작전은 정말 신의 한수였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항공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파괴력과 최고의 기술을 가진 항공기를 뽑으라고 한다면 오직 미국 공군에서만 운용하고 있는 F-22 랩터 스텔스 전투기를 뽑을 것입니다. F-22 랩터 전투기는 우리나라 주력 항공기인 F-16이나 F-15 전투기 그리고 미 해군의 주력 전투기인 F-18과 벌인 가상 공중전에서 144대 격추라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랩터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부분이 바로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스텔스 성능 때문입니다. 이렇듯 스텔스 성능은 현재 전투기들의 최고의 기술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런 강력한 스텔스 기술을 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구소련이 미국에 넘겨준 기술로 미국은 강력한 스텔스 기술을 얻게 되었습니다.

 

 

1973년대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 중동 국가와 벌인 3차 중동전에서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구소련이 아랍군에 제공한 레이더망과 미사일 때문에 100여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군이 가지고 있던 최신예 전투기를 투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이스라엘의 피해는 미국 입장에서 소련의 방공망에 대한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직경이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레이다로서 수 백 킬로에서 접근하는 미군기를 탐지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15종이 넘는 각종 대공 유도탄과 대공 화기를 보유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새로 개발한 SA-6는 미군의 저공 침투 항공기와 크루즈 미사일을 격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강력한 추진체를 가진 SA-5는 미군이 가진 어떤 고공 정찰기도 격추 할 수 있는 125,000피트의 최고 상승 고도를 발휘했습니다.

 

 

소련은 무려 3,000억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 부어 이런 레이다와 대공무기로서 소련 전역을 감싸놓았으며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런 고성능 레이다나 SAM 미사일 같은 대공 무기들을 소련이 다른 호전적인 국가에 판매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저공 침투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것이 B-1 폭격기였습니다. 하지만 B-1 폭격기로는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에 미국은 소련의 강력한 레이더망과 미사일의 위협을 피해갈 수 있는 ‘레이더 저노출 항공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록히드항공사의 레이더 개발 담당 데니스 오버홀저는 1965년 구소련의 모스크바 무선 공과 대학 수석과학자인 표트르 우핌쳄프가 발표한 40페이지의 논문에서 스텔스 항공기를 개발할 기초 기술적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CIA를 통해 미국에 논문이 입수되긴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 논문의 제목은 ‘Method of edag waves in the physical theory of diffraction,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물리적 반사 이론에 의한 전자파 예각 파동 방법‘ 이라는 긴 이름의 논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핌쳄프의 논문에는 레이더에서 쏘아낸 전자파를 비행기의 형상에서 반사하는 값을 알아낼 수 있는 공식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레이더의 전자파 반사를 최소로 할 수 있는 항공기 형상을 개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값진 자료였습니다. 다른 항공사드에 비해 뒤늦게 참가 했지만 값진 자료를 발굴한 록히드사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기존 항공기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양의 레이더 전자파를 반사하는 항공기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 컴퓨터 성능이 3차원적인 항공기를 설계하고 이에 반사되는 레이더의 전자파를 계산할 만큼의 용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록히드사는 항공기의 겉면을 수천 개의 2차원적 평면으로 분해하여 반사하는 전자기파의 양을 측정하고 다시 이 자료를 모두 모아 합산하는 형태로 전체 항공기에서 반사되는 전자기파의 양을 측정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초기 제작된 항공기 모형은 기존 매끄럽게 설계된 항공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인 각진 다이아몬드 형태의 항공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설마 이렇게 생긴 비행기가 제대로 날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레이더 전자기파 반사율 테스트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모하비 사막에서 실시된 모형의 레이더 시험에서 록히드사가 만든 이 스텔스 비행기는 관제사로 하여금 아무리 레이더 전자기파를 쏘아 보내도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실험 결과 미국과 계약을 맺게 된 록히드사는 이제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을 날 수 있는 항공기 제작을 위해 온 힘을 쏟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F-117 스텔스기가 5대밖에 안 만들어졌을 때 1982년 이미 스텔스 부대인 제 37 전술 항공단이 편성되었습니다.이 전술 항공단은 세 개의 비행대대, 도합 59기의 F-117 나이트 호크로 명명된 스텔스 전투기로 구성하기로 하고 록히드사는 대당 4300백만 달러로 일 년에 8기씩 생산 공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텔스기 19기로 이루어진 최초의 대대는 주변에 아무런 인가도 없는 샌 디아고 국립 연구소의 활주로에 창설되었습니다. 그 곳은 가장 가까운 도시인 토노파가 30킬로나 떨어진 아주 외진 곳이었으며 스텔스 전투기는 야간에만 활동했고 그 존재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습니다. 그렇게 미군은 스텔스기의 존재를 비밀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소문이 난무했고 1988년 미 공군은 더 이상 스텔스기의 존재를 감추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 존재를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미 공군 스텔스기 F-117의 진가는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군대를 몰아내는 1990년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유감없이 발휘 되었습니다. F-117 37기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킹 카리드 공군 기지에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서 작전을 개시한 스텔스기들은 16,000여발의 미사일과 30,000문의 고사포가 배치되어 있는 바그다드의 심장부부터 흔적 없이 침투해서 외과 수술하듯이 주요 목표들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라크 전이 끝나고 미래의 전투기의 스텔스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국민이 제시한 기술을 눈도 거들 떠 보지도 않았던 러시아는 한 미국의 기업이 가져다가 F-117기라는 꿈같은 전투기를 만들어 낸지 30년이 지나고 단물을 다 빼먹은 그 전투기를 은퇴시키는 시점까지 별다른 스텔스기를 실전에 배치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