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대연합군 물자지원 계획을 세우게됩니다. 사실 유럽 연합군의 핵이었던 소련과 영국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고, 거기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군에게 크게 밀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습니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무기대여법(랜드리스)으로 연합군의 물량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기대여법으로 많은 득을 본 것은 연합군의 선봉이었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대전 초반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일에 비해 훨씬 높은 생산효율과 미국 물자의 보급을 통해 결국 독일을 이기고 베를린을 짓밟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미국 물자의 혜택을 받기 시작한 1942년 1월에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차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꺾고 패퇴시켰습니다.

 

 

무기대여법이 체결되고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산 엔진을 달고 미국이 지원해준 항공유로 사용하였고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게다가 직접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으며, 야포 및 박격포의 경우에도 96,000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기관총 131,600정, 포탄 325,784톤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를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미국이 준 409,526대의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로와 1,860량의 기관차, 11181량의 화차와 객차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이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에 대한 생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이 준 약 15,000,000켤레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습니다.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막장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 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합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식량 분야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나 콤바인을 지원해주고 비료까지 투입한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식량의 25%를 담당했습니다. 이 25%가 무시할수 없는게 전쟁중 군인은 평시보다 훨신 많은 열량을 소모 하니 군인에게 들어가는 식량을 줄일수 없으니 25%가 없었으면 민간인 아사자가 무시무시하게 나왔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완전히 짓밟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기는 것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더욱이 소련은 독소전쟁 초기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하여 식량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무기대여법 물자마저도 소련이 견디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덕분에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안다고 합니다.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퍼주면서 포장 박스, 사용설명 매뉴얼까지는 러시아어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받은 엄청난 물자를 뭔지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기대여법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소련이지만,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소련의 3배에 달하는 무기대여법 물품을 받았습니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109억 달러(21%) 가량이었습니다.


일단, 영국 육군의 경우 사실상 전차의 주력이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으며 영국 해군도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항공모함 및 호위구축함을 지원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미국 없었으면 개전 당시의 해군 규모를 유지하기도 곤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함선 지원의 대가로서 영국은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을, 곧 카리브 해 제해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추축국 중심인 독일 역시 미국의 무기대여법과 비슷하게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원유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지지 못한 얘기지만 독일은 동계장비를 절대적으로 핀란드에서 공급받았습니다. 독일은 전쟁 내내 핀란드에서 동계 장비를 공급받았으며, 이탈리아군에 대한 세간의 저평가와 달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준 덕분에 독일이 겨우 보급을 유지하는게 가능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들에게 보급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무상 지원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부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됐습니다. 미국은 이것들은 10분의 1 가격으로 연합국에 넘겼는데, 엄연히 대가가 달린 만큼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 끝나고 나서 덜 받더라도 다 받아냈습니다. 보통 이자율 2%에 50년 상환 기환을 주었기 때문에, 미국에게도 상당한 이익이 되는 일이였습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 선전포고 안 했으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기대여법은

미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뒤바뀔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독일은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미국이 말도 안되는 생산력을 갖춘것 뿐이었습니다.

 

미국처럼 전쟁을 많이 해본 나라도 없고, 좋아하는 나라도 없으며, 잘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고, 전쟁을 통해 세계 패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미국은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2017년 현재까지 240년 가운데 무려 219년 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는 8.7%인 21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5년 이상 연속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기간은 세계 대공황 직후인 1935년부터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0년까지가 유일합니다.

 

 

미국은 2017년 현재 세계 각지에 약 1000곳의 군사 기지를 운영하며, 150개 이상의 국가에 1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놓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일본에 5만2000명, 한국에 2만5000명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8만 명 이상, 그리고 독일에 3만7000명, 이탈리아에 1만2000명 등 유럽에 6만 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건 천조국이라는 엄청난 군방비를 자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미국 국방정보센터(CDI)가 미 의회조사국(CRS) 자료 등을 토대로 현재의 통화 가치를 기준으로 미국이 치룬 수많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전쟁비용이 들어간 전쟁 TOP10을 소개해보겠습니다.


 

공동TOP9 미국-멕시코 전쟁 (1946~1847)

전쟁비용 : 24억 달러 (약 2조 7천억원)

 

이 전쟁은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텍사스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멕시코는 이 땅을 자국의 영토로 여겨 1845년 텍사스 합병으로 텍사스가 미국의 주가 되자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겨우 1,825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로부터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주 등을 할양 받아 한반도 넓이의 15배에 달하는 3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공동TOP9 독립혁명 (1775~1783)

전쟁비용 : 24억 달러 (약 2조 7천억원)

 

미국 독립 혁명은 18세기 중엽에 13개 식민지가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부터 미국 독립 전쟁을 벌였습니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는데 이것이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TOP8 미국-스페인 전쟁 (1898)

전쟁비용 : 90억 달러 (약 10조 1천억원)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스페인 간에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쿠바의 독립 운동이 스페인에 의해서 거부되자 이를 해결할 것을 미국이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결국 필리핀과 쿠바에서 미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 리코, 괌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TOP7 남북전쟁 (1861~1865)

전쟁비용 : 800억 달러 (약 90조원)

 

남북전쟁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입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입니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TOP6 걸프전 (1991)

전쟁비용 : 1020억 달러 (약 114조 7천억원)

 

걸프 전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 연합군 병력에 의해 수행된 전쟁으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및 병합에 반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1월 17일까지의 기간을 사막 보호 작전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고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하였고, 1991년 1월 17일부터 종전까지를 사막의 폭풍 작전이라 부르는데 이 기간이 다국적 연합군의 전투 기간입니다. 결과적으로 쿠웨이트는 해방이 되었으며 걸프 전쟁은 최첨단 무기 앞에서는 100만 대군이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TOP5 제1차세계대전 (1941~1918)

전쟁비용 : 3340억 달러 (약 375조 6천억원)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의 숫자만으로도 35개국이 관련됨으로서 이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로 전장이 확대된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미국은 의외로 친독, 반영 세력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먼로 독트린 때문에 유럽의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 유럽 국가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와는 상관없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U-Boat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어 미국인들이 휘말려서 죽게 되자 대독감정이 악화되었으며, 테러가 벌어지면서 미국 국내의 여론이 대폭발하게 되었고 마침내 연합국으로서 참전하였습니다.


 

 

TOP4 한국전쟁 (1950~1953)

전쟁비용 : 3410억 달러 (약 383조 5천억원)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유엔 역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으며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TOP3 베트남전쟁 (1964~1975)

전쟁비용 : 7380억 달러 (약 829조 9천억원)

 

베트남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은 현재 가치로 약 829조 9천억원을 전비로 사용하였고 이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었습니다.


 

TOP2 테러와의 전쟁 (2001~2010)

전쟁비용 : 1조 6000억 달러 (약 1884조 7천억원)

 

소련의 붕괴 이후 적이 없어진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의 위치에 올라 군사, 정치적으로 도전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11 테러를 통해서 테러리스트가 미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적으로 떠오르게 되자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전쟁에 나서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등 자유세계에 위험을 끼치지 못하도록 찾아내 제거하기위해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 9월 20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호기롭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 대통령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성공적인 성과로 시작은 좋게 한 듯 보였으나 자제력이 부족한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국제적인 공조는 커녕 아랍권은 물론 전통적 동맹이었던 유럽까지도 미국에 등을 돌렸으며 결국 오바마 행정부부터 테러와의 전쟁은 폐기되고 해외 비상작전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말그대로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처참했습니다.


 

TOP1 제2차세계대전 (1939~1945)

전쟁비용 : 약 4조 달러 (약 4498조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추축국이 일으킨, 연합국추축국 사이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시작된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기지를 공격하면서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함대를 침몰시켰으며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습니다.

 

세계 군사력에 관심이 없는분들은 현재 일본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은 국방비에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한 만큼 각종 무기와 장비도 최신식이며 군사력도 강력합니다. 특히 해상 전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입니다. 우리나라는 2020년 실전배치를 목표로 개발중인 3,000톤급 잠수함을 일본은 현재 무려 23척을 운용 중인데, 이는 전통의 해군 강국인 영국보다 많은 수준입니다.

 


일본의 해군력은 사실 20세기 이후 언제나 세계적 수준이었으며 이런 강력함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힘에 굴복하여 강제로 개항 당하였던 경험으로 일본은 근대화이후 서구식으로 군대를 재편할 때 해군력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세를 막아내거나 반대로 밖으로 팽창할 때 해군이 가장 먼저 앞장서게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연이어 승리하면서 어느덧 제2차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세계 3위의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거대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패배의 쓴맛을 보기는 했지만 진주만 급습처럼 해군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작전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억울하고 치욕스럽지만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여 수탈당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은 스스로 무기를 제작하여 세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 해군은 해상자위대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부활하였는데 일본을 공격하는 적을 바다에서 차단하는 것이 임무라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담당합니다. 총 4만 5천의 해상자위대는 원양을 담당하는 1개 자위함대와 근해를 초계하는 5개 지방대로 구성되는데, 당연히 최고의 전력으로 구성된 자위함대의 비중이 큽니다.

 

 

그 중 자위함대의 핵심인 호위함대는 4개의 호위대군으로 조직되는데 1개 호위대군은 8척의 1척의 헬기모함(DDH), 2척의 이지스구축함(DDG), 이하 호위함 5척(DD)과 8기의 함재헬기로 구성된 이른바 88함대(Eight-Eight Fleet)입니다. 이를 쉽게 비교하자면 현재 우리나라 해군 전체 구축함 전력과 맞먹는 규모일 만큼 어마어마한 전력입니다. 그런데 88함대라는 편성체계는 각론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 예전 일본 해군에서 내려온 오래 된 전통입니다.

 

 

제1차대전 후 일본은 대양 작전의 중핵으로 드레그노트급 전함 8척과 이를 보조하는 장갑순양함 8척으로 구성된 88함대를 조직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개전시의 전력으로 2~3개의 88함대 전력을 보유 하였다고 추정 할 수 있는데, 태평양만 놓고 본다면 미국, 영국 해군보다 강력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1921년 워싱턴 군축조약에 따라 해군의 의도와 달리 강제적으로 88함대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전 일본 해군과 현재 일본 해상자위대의 88함대는 구성이 다르지만 해상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88함대라는 이름에는 유리한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팽창의 수단으로 해군력을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시절이 바뀌어도 일본의 야욕은 그대로인듯 보입니다.

 

 

사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은 10년 전만 해도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으나 충무공 이순신급, 세종대왕급같은 대형 구축함 및 장보고급, 손원일급 등 잠수함의 확보와 현무 순항미사일의 보유를 계기로 전력이 급 상승하면서 일본과의 해군력 격차가 많이 줄은건 사실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해군은 막강한 제7기동전단잠수함사령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독도로 대표되는 해상분쟁으로 인한 충돌 가능성은 남아있는 상태인 만큼 우리나라도 일본에 맞춰 더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진짜 주적인 북한 해군에게 두번 다시 천안함이 폭침 당하는 상황도 없어야 합니다.

 

걸프전에서 패배한 이라크쿠웨이트에서 물러나게 되고, 패전의 혼란을 틈타 이라크내의 반시아파가 후세인의 암살을 전제로 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쿠데타를 제압한 후세인은 자신의 명령을 우선시하며, 자신을 지켜줄 독자적 독립 부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대통령궁을 경호할 부대를 창립한다는 명목으로, 친위대를 특수 공화국 수비대(Special Republican Guard)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으며 황금사단(Golden Division)이라 불리게 됩니다. 황금사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후세인이 황금으로 도색하는 것으로 좋아하기 때문이였고 이 부대는 서방측에서 '후세인황금방패'라고 불르기도 합니다.

 

창설 당시 이라크 내 주요 부족 관계도를 확인해보면, 라마디와 팔루자의 핵심 부족들은 반 알카에다 성향을 띄고 있었고 주요 상대가 알카에다였으며 알카에다와 IS에 대한 적개심이 생각보다도 강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황금사단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소수의 주력만이 진짜 정예부대이고, 대부분은 민병대와 다름없다는 주장도 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기동성과 전과들을 고려 할 때, 이들 부대원 대부분이 정예부대임은 틀림없어 보이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라크 최정예 특수부대 황금사단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황금사단의 또 다른 별명

이슬람 무장단체 IS에서 부르는 황금사단의 별명은 '더러운 사단' 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황금사단이 IS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워낙에 잘 싸우는지라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IS 사냥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라크 총리의 친위대

황금사단은 정규군의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습니다. 황금사단은 이라크 총리가 지휘하는 직속 부대이며, 일종의 '친위대' 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2003년 이후 미군의 특수전부대를 모델로 하여 창설된 부대였으며 초기에는 소규모 전력으로 대테러, EOD 등의 주요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알 말리키 총리의 집권 이후 이들의 목적은 총리의 정적 견제 및 제거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 이라크 정규군 최고의 인적 자원과 장비들이 이곳으로 몰리면서 규모 및 장비, 훈련도에 있어서 이라크 최강의 편제로 거듭났으며 현재도 이들은 이라크 총리의 직속부대이며, 총리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이기도 합니다.

 


3.  실력으로만 선발

황금사단의 구성원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원래 본인은 이라크에서 꽤 힘 좀 있다는 3개 대형부족 출신 병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와는 반대로 매우 다양한 출신의 장병들이 많다고 합니다. 시아파 출신, 수니파 출신, 쿠르드족,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전부 소속되어 있으며 오로지 실력만보고 뽑혀온 병력들입니다. 물론 내부에서는 종교의 차이로 인해 싸우는 일은 커녕 돈독한 전우애를 발휘한다고 전해집니다.

 


4.  소수정예 작전운용

황금사단은 절대로 2개 대대 이상의 대규모 부대 운용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내전 초기부터 확립된 그들만의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이들은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지 않고, 각 대대별이나 중대별로 흩어져서 다에시들을 타격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전선 곳곳에 흩어져 소방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규모로 운용한 때는 라마디 철수 작전과 팔루자 탈환작전이었으며 예외적으로 이때에만 1개 대대 이상의 전력을 운용했습니다.

 

5.  IS에게 저승사자

이들은 언제, 어느 전선에서든지 출몰합니다. 이들의 역할은 정규군이나 민병대에게 있어서 중요한데, IS의 맹렬한 저항에 직면해 사기가 꺾일 무렵, 멀리서 흑복을 입고 모든 차량을 검게 물들인 황금사단 병력이 나타나면 IS들이 알아서 도망가거나 항복해온다고 합니다. 작은 제대별로 나뉘어서 운용되는데 이들은 현재 팔루자, 모술, 유프라테스 전선, 안바르, 히트 등에서 여전히 작전하고 있습니다. 이 덕분에 '유령사단' 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6.  황금사단의 전력 유지

황금사단의 전력은 1만 명에서 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들은 항상 일정한 수의 전력을 유지하며 손실된 병력을 가능한 한, 바로 충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2년 6개월 간의 전쟁과 황금사단 특유의 임무 및 정예화된 병력 보충의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손실이 있었고, 충원에 애로사항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7.  최고의 휴식과 급여 제공

황금사단은 보통 2주를 근무하고 1주일을 쉽니다. 1주일은 적과 싸우고, 1주일은 훈련을 받으며 남은 1주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부대에 잔류해 휴식을 취합니다. 원한다면 1~2일을 더 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스템이 전장에서도 잘 운영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쉬는 날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지급되며 급여도 제일 많이 받습니다. 물론, 전장 상황에 의해서 쉬지 못한다면 추가 급여를 지급해주고 차후에 휴가 기간을 더욱 보장해주는 식으로 운영되어서 이라크 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나 높다고 합니다.  

 

8.  미국이 믿는 유일한 부대

미국 측 관계자들은 이라크 정부군 가운데 가장 신뢰할만한 유일한 부대가 이 사단밖에 없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부정부패와 관리 미숙으로 표현되는 다른 부대들과는 아예 비교되지 않을 정도라는 얘기입니다. IS가 파죽지세로 점령지를 확대하는 상황에서도 황금 사단 소속 대원들은 잘 싸웠습니다. 특히 이라크 내 최대 정유소 방어 임무를 맡은 사단 병력은 IS가 동원한 수백 대의 차량폭탄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개월 간 이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라크 정부군에 대한 훈련을 담당했던 믹 베드네렉 미 육군 중장은 "황금 사단 소속 부대원들은 '슬레드 도그'(썰매를 끄는 개)와 같다"며 이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선전포고도 없이 전격적으로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이었던 포클랜드는 갑자기 온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포클랜드 제도가 아르헨티나에서 동남쪽으로 480km떨어졌지만 영국 본토에서는 무려 1만5000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영국 입장에서는 포클랜드 제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 요소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게 빼앗긴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 작전으로 다시 탈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1982년 4월 5일 포클랜드 제도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떠난 영국의 기동함대에는 해리어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 해리어 전투기는 전세계에 엄청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됩니다. 사실 포클랜드 제도에는 온전한 활주로가 없어 영국은 물론 아르헨티나조차 전투기를 배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리어 전투기는 활주로가 없어도 테니스 코트 정도의 공간만 있다면 운용이 가능한 V/STOL기였습니다.  

 

 

해리어 전투기로 인해서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이 포클랜드 탈환 작전에 투입한 해리어 전투기들은 절대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해군과 공군 전투기를 상대로 단 한대의 기체 손실도 없이 22대를 요격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영국은 해리어 전투기를 이용해여 포클랜드 제도 주변의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르헨티나는 활주로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전쟁은 끝나버렸습니다. 그렇게 포클랜드 전쟁에서 해리어 전투기는 영국이라는 국가의 독특한 전투기에서 가장 혁신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수직 이착륙 전투기라는 찬사를 받게되었습니다.

 

 

이 해리어 전투기의 무서움점은 추진력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수직 이착륙은 물론 날아가고 있을 때에도 갑자기 아래로 쑥 내려간다든지, 올라간다든지, 급브레이크를 건다든지, 급선회한다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리어를 추적하는 적기 쪽에서 볼 때는 갑자기 시야에서도 레이더에서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리어 전투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제 엔진은 롤스로이스사에서 전담하여 생산하고 있는 페가수스 엔진입니다. 2축의 터보 팬 엔진으로 추진력은 9750㎏이며 보통의 엔진과 다른 것은 거북의 네 다리처럼 생긴 4개의 가변 노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즐의 방향을 위아래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방향도 순간적으로 변환시킬 수가 있습니다. 수평 비행하다가 느닷없이 아래로 곤두박질하는가 하면, 급격하게 상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해리어 전투기는 공중에서 뜬 채로 꼼짝 않고 정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호버링'이라 부릅니다. 수직으로 착륙할 때에는 이 자세에서 서서히 내려앉습니다. 다만 해리어의 완전 장비의 반 이하로 중량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수직 이륙은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도 이륙할 수 있지만, 20m 사방에 알루미늄 매트를 깔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해리어 전투기는 V/STOL 기능에 중점을 두다 보니 기체 구조에 상당히 제한이 많았습니다. 중무장이 불가능하고 작전 반경도 크지 않으며 목표로 했던 초음속까지는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은 해리어가 장소의 구애됨 없이 최전선 가까이에서 운용이 가능한 플랫폼이 될 것으로 판단했었습니다.

 

지금도 V/STOL기의 효용성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있지만 포클랜드 전쟁 이후 코소보 내전이나 걸프전 등에서 해리어 전투기가 보여준 전과는 우려를 불식시켰을 만큼 대단하였습니다. 해리어 전투기는 스핏화이어(Spitfire)와 더불어 영국의 자부심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 나타나 멋지게 활약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기가 이 만큼 시기를 맞추어 적절하게 사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해리어 전투기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서는 공중전이 자주 벌어져 각 전투기들의 성능을 비교할 기회가 많았지만, 현대전에서는 공중전이 아주 드물기 때문에 어떤 전투기가 확실히 더 강력하다고 말하기 힘든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전투기를 콕 찍어낼 순 없어도, 더 강력한 전투기를 만들기 위한 기준은 존재합니다. 그 기준을 통해 어느 전투기가 공중전에서 더 강력한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군의 주력 전투기인 F-15K는 F-16에 비해 훨씬 크고 무겁습니다. 먼 거리에서 레이더로 상대방을 찾아내고 장거리 레이더 미사일로 적기를 격추하는 가시거리외 전투(BVR)를 벌일 경우엔 F-15가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기체가 큰 만큼 더 성능이 좋은 레이더를 붙일 수 있고, 미사일도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로 꼬리를 물며 기관포와 단거리 미사일로 적기를 격추하는, 흔히 도그파이트(Dog Fight)라 부르는 근접전투에서는 F-16이나 유로파이터 같은 가벼운 전투기가 유리합니다. 최근에는 경전투기보다는 중전투기가 더 유리할 때가 많습니다. 공중전 양상이 전자전 형태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전투기가 미처 달려들기도 전부터 미사일이 날아드는 셈입니다.

 

 

하지만 여러 대의 전투기가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상대편이 러시아라면 역시 F-15와 비슷한 급의 SU(수호이)-27 등의 중대형 전투기로 상공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F-15와 SU-27이 먼 거리의 공중전이 벌어지면서 여러 대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사이에 양 진영은 거리를 결국 좁혀가다가 대규모 근접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상황이 되면 경전투기가 확실히 더 유리할 것입니다. 특히 땅이 좁고 산악이 많아 비행기의 은밀기동에 유리한 우리나라에선 근접전 성능이 더 중요합니다.

 

 

항공역학이나 전투기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은 음속의 3배를 넘는 극초음속 전투기 블랙버드(SR-71)를 개발한 바 있지만 효율성 문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통 음속의 2배, 빨라도 2.5를 넘지 않습니다. 더 빠른 음속의 전투기는 연료 소비가 늘어날 뿐 실제 공중전에서 거의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최저 속도입니다. 최저속도가 낮으면 항공모함 등에서 뜨고 내리기 유리하고, 공중전을 벌일 때도 갑자기 제동을 걸어 상대편 비행기를 스쳐 지나가게 한 다음 뒤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F-22나 F-15, SU-27같은 고성능 중전투기들은 모두 아주 잘 설계된 비행기로, 크기에 비해 운동성능도 많이 떨어지지 않아 다방면으로 활약이 가능합니다. F-16도 본래 경전투기로 개발됐지만 여러 번의 개조과정을 거쳤습니다. 동급의 경전투기에 비해 BVR 성능이 뛰어나고, 지상공격용 무기도 여러 종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미 해군이 자랑하는 F/A-18은 처음부터 양쪽의 성능을 노리고 개발하였습니다. F-16과 비슷한 성능을 가졌지만 체구는 조금 더 크고, 기민함에서는 다소 떨어집니다. F-16보다 고성능 레이더를 가지고 있으며, 두 개의 엔진을 달고 있어 안정성도 높습니다. 전자장비가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전투기의 주 임무는 근접전이었으므로 대부분 작고 날렵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신 지상공격에 특화된 대형 공격기(Attacker)나 폭격기(Bomber)를 별도로 만드는 게 당연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경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레이더의 중요성이 높아진 만큼 스텔스 기능은 현대 전투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필요조건입니다. 미군이 2006년 알래스카 기지에서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22 랩터를 가지고 당시의 주력 전투기인 F-15, F-16, F-18을 상대로 모의 공중전을 벌여 144대 0의 놀라운 기록을 올린 사실은 스텔스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하지만 스텔스라고 반드시 무적은 아닙니다. 모든 기술은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시거리 200km에 달하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를 장착해도 스텔스 전투기엔 속수무책이듯, 스텔스 기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적 비행기보다 운동성능이 크게 떨어지면 서로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며 싸울 수 있는 근접전투에선 큰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최고의 운동성능을 갖춘 비행기라 해도 전자전 성능이 떨어지면 먼 곳에서 날아드는 유도 미사일 한 방에 격추될 수 있습니다. 특히 스텔스 기는 기체를 설계할 때 전파의 반사를 줄이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되므로 운동성능을 높이기 까다롭습니다.

 


현재 F-22 전투기는 완벽한 스텔스 기능으로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세계 최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첨단기술을 쏟아 부어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기존 전투기를 압도합니다. 우스갯소리로 계급장을 떼고 붙어도 F-22가 이긴다는 말입니다. 전 세계 전투기의 발전상황은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눌수 있습니다. 1세대 전투기는 제트엔진만 장착하면 됐고, 2세대부터는 초음속 비행능력을 갖추고 레이더를 탑재하기 시작했습니다. 3세대는 유도무기를 통해 전자전 능력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4세대부터는 고도의 전자전 능력을 갖추고, 음속의 2배에 가까운 초음속 성능도 갖춰야 했습니다. 미국의 F-14와 F-15, F-16, F/A-18, 구소련의 미그 29, SU-27, 프랑스의 미라지 2000 등이 4세대 전투기에 속합니다. 4세대를 넘어서는 성능의 전투기가 스텔스 기능을 갖고 있으면 5세대 전투기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한적인 스텔스 기능을 갖춘 F-15SE, 유로파이터 타이푼 등은 4.5세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6세대 전투기의 개념을 일부 내놓고 있는데, 더 강력한 스텔스 기능과 고성능 레이더, 신개념 무기(레이저 등)의 장착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래 전장에는 이런 네트워크전이 한층 더 강화될 걸로 보이며, 전투기 고유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아군 정보를 활용해 능숙한 전자전을 펼치는 비행기가 우위에 서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대부분의 임무를 무인 항공기가 처리하는 세상이 오겠지만, 중간 단계로 유인기 1대가 여러 대의 무인기 편대를 지휘하는 형태도 가능할 것으로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