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JRF-2(Joint Task Force-2)는 1993년 100여 명의 지원자로 창설된 캐나다군의 특수부대로 이들의 활동은 캐나다 정부에 의해 매우 비밀스럽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처음에 JTF-2의 존재조차 부정했었습니다. JTF-2라는 부대가 있다는게 알려진게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이었습니다.

 

 

40여명의 JTF-2 대원이 아프간 남부에 전개되어 탈레반 요인을 체포한 후에 미군에게 인도하는 사진이 찍혀 파병 한참 뒤인 몇 달 후에 알려졌습니다. 재밌는 건 캐나다 총리조차 JTF-2부대가 아프간에 파병 간 사실을 사진을 통해 알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JTF-2가 다국적 특수전 Task Force에 소속되어 항구적 자유작전중 탈레반 요인을 체포/사살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JTF-2는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등지에서 미군 특수부대와 다수의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으며 아프간내에서 외국 특수전 부대로는 유일하게 미군의 Tier 1 부대들과 합동작전을 펼친 부대입니다. 그리고 미군 특수부대들과 고위급들은 JTF-2의 능력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파병은 JTF-2라는 부대가 알려진 계기가 되었을 뿐 파병 자체는 1995년에 보스니아전에서 UN 평화유지군을 공격하는 세르비아 저격수들을 찾아 소탕하기 위한 2인 1조 팀들을 다수 파병하였습니다. 특히 캐나다 저격조는 전 세계에서 불과 몇 명만이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최고의 기술로 훈련돼 있습니다. 그만큼 캐나다는 뛰어난 저격수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2017년에는 JTF-2 소속의 한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IS 대원을 3,450m 밖에서 사살하여 8년만에 저격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저격에는 맥밀란 TAC-50 저격소총이 사용되었으며 총알이 목표에 맞기까지 10초를 비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전 영국군 저격수가 세운 기록과 비교해 거의 1km나 늘어난 것으로 앞으로 10년 동안은 깨지기 힘들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세계 저격수 기록 TOP5 중 3명이 JTF-2 소속)

 

 

JTF-2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년을 정규군(Regular Force)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원 자격이 갖춰지면 첫 평가로 푸쉬업 풀업 밴치프래스 싯업 달리기 등 체력을 평가하는데 총점수제로 적어도 70%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모든 평가를 통과하면 온타리오주에 있는 Dwyer Hill Training Centre에서의 7개월 가량 특수전 훈련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은 델타포스의 훈련 프로그램을 본떠 총 4단계로 나눈 것으로 매우 가혹한 강도를 자랑합니다. 높은 수준의 육체적 능력, 지구력, 정신력을 요구합니다.

 

 

현재 캐나다 미디어가 JTF-2에 대해 알아낸 또 다른 사실은 JTF-2는 200명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간 2억여달러의 예산을 쓰고 타격대 중에서도 공격전문 어썰터Assaulter가 되면 6단위 숫자의 봉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방수상의 해외순방이나 정부고위층의 해외 위험지구 방문 때도 이들을 보호하고 캐나다 시민들이 해외에서 납치됐을 때도 출동한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판도를 뒤엎고 대한민국을 구해낸 작전이자 세계의 유명 작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전입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천상륙작전 만큼 기억되길 바라는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51년 1월 4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을 등에 업고 수도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UN군이 한국-중국령 만주 국경을 향해 북진하던 중 중국에서 내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로 인해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인 평택-삼척선까지 밀렸습니다.

 

 

중공군의 예상못한 한국전쟁 참전은 눈앞에 다가웠던 통일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은 지뢰 등을 매설해 다시는 인천과 인천 바다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다시 인천을 탈환할 수 있는 소규모의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은 상륙작전이 아닌 월미도 포격이었습니다. 월미도를 포격하여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다시 떠올리고 병력을 인천으로 이동하게 된다면 UN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는데 수월할 것이며 인천까지 다시 탈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2월 3일 백두산함은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는 인천항 안으로 돌입하여 월미도 전방 1000m 지점에서 북한군의 포대와 초소에 포격을 했습니다. (참고로 백두산함은 해군 장교 부인들이 바자회를 운영하고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모으고 국민까지 모금운동하여 모인 돈으로 구입한 대한민국 해군 유일의 군함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 순양함, 구축함 등도 백두산함과 함께 북한군 진지를 포격했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상황도

그런데 포격으로 살펴보니 인천항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의 포대의 위치와 화력 규모가 그렇게 강력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고 작전은 상륙작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2월 10일을 D-DAY로 정하고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작전을 하달받는 수병들 모습

하지만 2월 10일 D-DAY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군 함대가 포격을 가하여 탄막을 만드는 동안 100여 명의 우리나라 해병대가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는데 해병대가 기상악화로 인천 외항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소식을 접한 백두산함의 노명호 함장과 김종기 소령은 만조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인천 외항에 집결한 각 함정의 수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총 70명의 특공대로 구성된 상륙 부대를 긴급 편성하였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1951년 2월 10일 18:00시>

그리고 오후5시 미국과 영국의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시간 뒤 함정승조원으로 편성된 특공대 70명은 만석동 해안으로 상륙을 감행하였습니다. 당시 특공대를 지휘한 김종기 소령은 지난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제2대대를 이끌었기에 만석동 해안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들. 왼쪽부터 노명호 소령, 스미스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김종기 소령, 최영섭 소위.

육상 전투 훈련도 받지 않았지만 틍공대 임무에 지원한 해군 수병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던 오후 7시 뒤늦게 도착한 100명의 해병대까지 만석동 해안에 상륙하였고 전의를 상실한 북한군은 방어를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고 오후9시에 목표했던 기상대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제1차 인천상륙작전 기상대 고지 점령모습

그것으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는 소규모 상륙부대로 작전을 수행하여 인천과 서울을 재탈환하고 38도선 진격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대한민국 해군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의 전공을 현양하기 위해 지난해 1월부터 전승비 건립계획을 추진하였고 2017년 11월 15일에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기리는 전승비 제막식이 인천 중구 월미공원 맥아더길 입구에서 거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