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여군은 이미 과거 400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군인들 보다 월등하다는 견해로 지금도 지속적으로 세계의 많은 군대에서 여군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 숫자도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SNS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이스라엘 여군의 모습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여러나라 군대에는 미인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기에 손색이 없는 정말 아름다운 여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적군도 홀딱 반할만한 미모의 여군을 자랑하는 국가 TOP15을 소개합니다.

 

 15위 중국

 

중국의 열병식을 보셧다면 중국 여군들도 정말 이쁘다는 생각을 하실겁니다. 하지만 중국 열병식에는 평균 키 178cm, 나이 20세에 미녀들로만 뽑아서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여군들은 특전사 부대가 생기는 등 남자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놀라운 전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14위 일본

 

1952년 자위대는 간호직으로 여성 장교를 선발했으며 현재는 육상자위대는 전 직종에 개방, 해상자위대는 잠수함, 항공자위대는 전투기조종사를 빼고는 여군(자위대가 군대가 아니라 여군은 아니지만)이 복무하고 있습니다. 일본 여군의 외모가 중국 여군보다는 괜찮은거 같습니다.


 

 13위 영국

 

영국 여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숨은 주역들로 2차 대전 당시 레이더 기지의 오퍼레이터와 방공포병 임무를 맡아서 맹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왕녀(공주) 시절에 여군으로 입대해 보급장교 참전 경력이 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증손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도, 성인이 되면 영국군 여군 장교로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12위 미국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여군들도 전차를 조종하고, 박격포를 쏘고, 전투현장에서 보병 부대를 지휘하며 레인저와 그린베레(육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해군 특전부대), 해병대, 공군 낙하산부대를 비롯해 이전까지 남성들에게만 열려 있던 모든 병과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11위 폴란드

 

1938년 폴란드 정부는 여성의 자원봉사자를 원하면서 여성들은 의료, 대공포, 통신과 같은 제한된 군사 역할을 하였으며 2004년부터 여군들이 군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시작하면서 현재는 많은 수의 여군들이 복무하고 있습니다.


 

 10위 스웨덴

 

스웨덴은 징병제가 부활하면서 18세부터 매년 9~12개월간 여성들도 복무합니다. 물론 징병 대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웨덴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인 1902년 이미 종교적·윤리적 이유 등으로 병역의무를 거부할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습니다.


 

 9위 북한

 

전 국민이 모두 군인인 나라답게 여군 역시 그 숫자가 많습니다. 여군의 수는 세계 1위입니다. 그리고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북한 여군 역시 미모가 뛰어납니다. 하지만 인권이란게 존재하지 않는 북한군답게 여군에 대한 성적착취는 심각한 수준으로 기쁨조 취급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8위 호주

 

호주 여군은 1899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고 간호병의 임무만 맡았었지만 현재는 호주의 주방위군 역할까지 다양해졌으며 호주군은  현재 12.7% 수준인 군의 여성 비율을 25%까지 높이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전투 보직을 포함해 많은 부문에서 남성의 신병 모집이 12개월간 금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주는 여성이 보병 혹은 포병에 지원해 복무하게 되면 최소 2년을 근무해야하지만 남성의 경우 최소 6년을 복무해야 합니다.


 

 7위 그리스

 

그리스는 유럽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군처럼 그리스 여군들의 미모도 유명하며 전투력 또한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여군을 보면 선발 기준에 미모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6위 대한민국

 

현재 한국군의 여군 수는 장교 4,700여명, 부사관 5,400여명으로 10,200여명입니다. 간부로만 따질 때 약 5.5%가 여군입니다. 입대하기 위한 신체 조건은 키는 152cm ~ 183cm 체중은 44~87㎏ 이내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원 경쟁률이 남자보다 훨씬 높습니다.


 

 5위 루마니아

 

유럽 동남부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전 국민의 52%가 여성이며 미녀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인지 동유럽에서 루마니아 여군의 미모는 거의 독보적인 차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루마니어 여성들은 18세가 넘으면 자진 지원해서 입대할 수 있으며 여군이 되면 5년 계약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여 36세까지 3년씩 계약연장이 가능합니다.


 

 4위 러시아

 

러시아군에서 여군이 복무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해군에서는 여군이 통신부대, 의료부대, 해안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으며 차별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이미 3만 5천 명 이상의 여군이 복무하고 있으며, 그 중 2,600명은 장교이며 72명은 간부직에 있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러시아 랴잔 공수부대군사전문학교는 이미 여자 생도를 모집하고 있으며, 이들은 장교가 되어 공수부대를 지휘하고 전투장비와 공수부대원 투하 임무를 지원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3위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201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중 처음으로 징병 대상을 여성을 확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44세의 건강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신체검사를 통해 군대에 복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선출된 신병 중 3분의 1이 젊은 여성이었으며 군사대학인 노르웨이 방위 공과대학은 올해 지원자 중 여성이 24.5%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군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점은 노르웨이의 남녀 병사는 같은 내무반을 씁니다. 여성 2명에 남성 4명이 의무적으로 한 숙소에 배치되며 아침 저녁 점호도 함께 받습니다.


 

 2위 우크라이나

 

미모로 전쟁을 한다면 우크라이나가 세계 최강일지도 모릅니다. 우크라이나 군대에는 현재 18,000명의 미녀 여군이 복무중이며 이들 중에서 7%는 장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위해 미모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자원 입대를하고 최전선으로 향하기 위해 힘든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1위 이스라엘

 

이스라엘 군 발표에 따르면 현역 군인 17만6500명 가운데 여군이 33%인 5만8천여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에는 총 850종의 보직이 있는데 이 중 여성들은 약 280여종의 보직에 배치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투보직으로 배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년 이스라엘 여군 약 2000여명의 사진을 담은 인스타그램 계정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6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은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는데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습니다. 

 

 

그래도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에 당황한 연합국은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돌격대 대장이었던 괴벨스

 

그렇게 베를린 주위에는 소련군 3개 전선군이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련군의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화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준비하는 소련군

 

4월 21일 소련군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자 독일군 상층부는 물론이고 최하위 말단 병사까지 눈앞에 다가온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인리히 힘러는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독일에게는 사실상 항복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습니다. 항복을 택하기엔 나치가 전쟁 내내 동유럽에서 자행한 범죄와 잔학 행위가 너무 심했습니다. 소련에게 항복해서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던 독일군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지만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 진행중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리고 4월 24일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습니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습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습니다. 이들은 몇 안되는 티거 2,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습니다.

 

 

사실 일개 건물에 불과한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습니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소련군은 결국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습니다. 실제로 저런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부술 수 있었으며 당시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야포나 자주포로는 파괴하는게 불가능했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서 의사당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은 결국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때가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습니다. 물론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습니다.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들(제일 왼쪽이 헬무트 바이틀린 대장)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습니다.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의 완전 소탕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