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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개 졸병이었던 히틀러는 철저한 반 유태인 사상과 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적 기질로 독일의 정권을 잡은 후 2차 대전에서 폐할 때까지 갖은 만행을 저질렀지만 기계와 자동차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의 자동차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열리는 모터쇼를 빠지지 않고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우토반의 건설을 진두 지휘했으며 1930년대 세계 자동차 경주에서 독일이 우승할 수 있도록 자동차 업계를 독려했습니다.

 

 

그런 히틀러는 수많은 자동차 가운데 메르세데스 벤츠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벤츠를 좋아하는 이유가 벤츠를 타고 가다 다른 차와 충돌했는데 벤츠만 멀쩡하고 다른 차는 완파되면서 벤츠를 가장 믿었으며 벤츠의 창업자인 칼 벤츠가 최초로 가솔린 자동차를 개발한 독일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특히 1933년부터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까지 벤츠에서 개발한 벤츠770 리무진을 애용했습니다. 벤츠770 길이는 6m, 너비는 2m나 되는 8인승 차이기 때문에 Grosser(독일어로 '거대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차를 움직이기 위해 슈퍼차져를 장착하여 230마력을 내는 7.7리터 8기통 엔진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승차감을 위해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4륜 독립 서스펜션이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벤츠는 키가 1m 68cm였던 히틀러를 위해 히틀러가 즐겨 앉는 앞자리 조수석은 높게 만들어졌고 오픈카 모델의 양 옆에 발판을 따로 설치해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하였으며 히틀러는 이 차를 27대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십만명의 나치당원과 군대가 벌이는 퍼레이드나 사열식때마다 770 오픈카를 타고 앞자리에 서서 특유의 포즈로 사열을 즐겼습니다. 그가 한번 행차하면 보통 5∼6대의 770리무진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도 벤츠 770 리무진을 6바퀴형으로 개조해 타고 다닐 정도로 히틀러는 벤츠의 매니아였습니다

 

또한 이 벤츠 770 리무진은 언제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방탄차로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히틀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방탄차를 이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탄 리무진은 철판의 두께가 4㎜, 유리 두께는 25㎜였습니다. 각각의 타이어는 20개의 독립된 공기실로 나눠져 있어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이 달릴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차의 무게는 5톤이나 되었지만 슈퍼차져를 장착한 엔진 덕분에 최고속도는 160km/h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히틀러는 방탄 타이어를 쿠션이 좋은 보통 타이어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장치가 하나 더 있었는데 자동차 뒷쪽에는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서치라이트는 뒤에서 불순한 차량이 추격해올 경우 그 운전자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히틀러의 차량은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되면서 히틀러는 자신이 즐겨타던 벤츠 770을 포기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독일 국민을 위해 개발한 소형차 폴크스바겐을 타고 다녀야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히틀러가 2차 대전 당시 유럽을 여행할 때 사용했던 차량들 가운데 벤츠 770 1대가 독일 빌레펠트에 사는 한 수집가의 차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9년 러시아의 한 억만장자에게 약 95억원이라는 가격에 팔렸습니다. 이 벤츠 770가 서류나 사진을 통해 진짜 히틀러의 자동차임을 확인했으며 등록번호표도 당시 넘버인 1A 148461이 그대로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세를 결정지을 대공방전이 도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얼마 앞두고 말도 안되는 신무기를 쏟아내던 히틀러에 맞서 영국도 신무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영국이 개발하는 신무기는 독일군이 지키고 있는 거대한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독일군 방어선에 방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높이10피트(3m), 두께7피트(2.1m)의 콘트리트 벽을 파괴할 수 있어야 하며 상륙정에서 발사가 가능하며 자가 추진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개발진들은 위에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최소 1톤 이상의 폭약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1톤 이상의 폭약을 방벽으로 운반하기위한 무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무기의 이름은 판잰드럼(Panjandrum)이었습니다. 참고로 판잰드럼은 1893년에 나온 판잰드럼이라는 뮤지컬의 주인공이 신고나오는 신발이름입니다. 

 

▲영국이 생각한 판잰드럼의 모습

 

판잰드럼은 1톤의 폭약을 장전한 드럼 양쪽에 직경10피트(3m)의 거대한 바퀴가 장착되어 있었고 전체중량 4000파운드(1800kg)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체 추진력은 바퀴의 림에 설치한 고체연료로켓이 회전력을 주어 전진하는 방식으로 시속97km/h속도까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야심차게 탄생한 영국의 신무기 판잰드럼의 최초 테스트가 엄청난 기대속에 1943년 9월7일에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무기 개발국의 보안 경고에도 불구하고 첫 테스트는 휴가를 얻은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는 해변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륙정에서 발진한 판잰드럼은 얼마 못 가 오른쪽 바퀴의 로켓이 떨어져나가면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넘어졌고 떨어져나간 추진로켓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판잰드럼은 기본적인 아이디어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켓의 추력이 판잰드럼을 전진시키는데 쓰이는게 아니라 바퀴에 회전력을 주는데 사용되는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런 방식은 로켓이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추력 불균형으로 인해 방향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회전하는 바퀴는 작은 돌 하나에도 순식간에 방향이 바뀌는 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참한 실패에도 영국은 3주후 중앙에 바퀴 하나를 추가하고 추진 로켓을 늘린 개량모델을 다시 테스트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켓이 떨어져나가고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바다로 돌진해 폭발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끈기를 지녔던 판잰드럼 개발진은 포기하지 않고 중앙의 바퀴를 다시 제거하고 두 바퀴를 케이블로 연결하고 양쪽에 보조막대를 달아 방향유지능력을 강화하고 로켓부착부분을 보강하는등 새로운 개량모델을 테스트하였는데 다행히 앞으로 전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번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개발진은 개발을 계속해 1944년 1월 해군관계자들과 과학자들은 물론 공식사진사들 앞에서 최종시험을 겸한 공개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최종시험에서 판잰드럼은 처음에 순조롭게 나아가는것 같았지만 로켓이 떨어져나가면서 비틀거리더니 작은 모래구덩이에 빠지면서 오른쪽으로 꺾여 관계자들을 향해 돌진했고 제독과 장군들은 혼비백산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는 소동끝에 다행히 바다쪽으로 방향이 틀어진 판잰드럼이 사방으로 로켓을 날리며 폭발하는 결과로 끝났고 , 결국 수십만 파운드가 날아간 뒤에야 프로젝트가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2009년에 판잰드럼을 최초 테스트하였던 해안에서 레플리카의 실증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속도는 느리지만 중간에 안 넘어지고 직진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래도 만약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 판잰드럼이 사용되었다면 상륙작전이 오히려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