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해외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분들이 많이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여행의 즐거움도 잠깐, 해외에서 우리나라와 다른 교통체계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종종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해외여행 시 국가 혹은 지역별로 교통신호체계, 도로교통관련법규 등 교통 환경이 달라, 낯선 여행지로 자동차 여행을 다닐 때에 해당 국가의 도로교통법을 숙지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일본, 중국 등 가까운 여행지부터 유럽, 미주 등 주요 여행지까지 각 지역에서 조심해야 할 세계도로교통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럽 주요국가 교통법

 

포르투갈은 도로망이 전반적으로 잘 되어 있으나, 각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교통표지판이 잘 안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내 주행시 제한속도는 시속 50km로 제한되어 있고, 면허 취득 1년 미만 운전자의 경우 고속도로에서 90km/h 이상 속도로 달릴 수 없습니다. 동유럽에 위치한 러시아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난폭운전자가 많습니다. 또한 날씨 영향으로 러시아를 포함 노르웨이, 북유럽은 밤, 낮 없이 전조등을 항상 켜고 다녀야 합니다.

 

 

유럽중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중앙선이 흰색이며 점선인 경우도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바닥에 역삼각형 표지 및 도로표시는 우선권이 없다는 뜻으로 우선 정차 후 확인하고 진행해야 합니다. 산이 많은 도로의 특성상 산 쪽을 향하는 도로에서 우선순위는 무거운 차에 있습니다.

 

 

독일 고속도로는 속도제한이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자유와 속도를 느끼게 해주는 도로로 시속 200km를 넘나드는 고속주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모든 구간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므로 주의해야합니다. 영국의 차량은 좌측통행이며 운전석이 우편에 위치하여, 한국의 교통 체계와 반대입니다. 간혹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한 여행자들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례가 있어, 도로 양쪽의 교통 흐름을 체크한 후 길을 건너야 합니다. 차량에 따라선 헤드라이트 위치도 바꿔야 합니다.


 

● 아시아 주요국가 교통법

 

일본의 도로교통은 한국과 반대인 좌측 주행이므로 운전할 때 충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도로망은 시내·외를 막론하고 잘 정비되어 있으며, 교통질서 의식도 높아 운전하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고속도로요금은 비싼 편이나, 최근 일부 고속도로를 무료로 개방하거나 주말, 공휴일에는 노선별로 1,000엔씩 이용료를 받고 있어 저렴하게 이용 가능합니다.

 

 

중국 베이징 도로는 인도, 자전거도로, 자동차도로로 구분되며, 출퇴근시간대에는 보행자, 자전거, 차량이 얽혀 차량 운전 시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과 같이 우측통행을 하는 필리핀은 운전자들이 차선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또한, 갑작스런 정지 및 차선 변경 등 난폭운전으로 인한 사고 위험성이 높고 시내 중심가는 일방 통행이 많습니다. 필리핀은 국제운전면허증과 함께 한국운전면허증 영문번역 공증을 받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북아메리카 주요국가 교통법

 

미국의 경우 주별로 다양한 교통체계가 있다. 미네소타 주는 트럭이나 다른 차의 휠, 타이어에서 흙, 먼지, 끈끈한 물질 등이 떨어지면 공공 범죄로 간주됩니다. 뉴욕 주는 차 안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불법입니다. 공공장소에서는 목욕 가운이라도 반드시 입어야 되고 도로, 차,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어서는 안됩니다.  오리건 주는 차 문에서 오래 머물면 불법입니다. 사람을 태우거나 내려줄 때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차 문을 열어두면 안됩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힐튼 헤드에는 차에 쓰레기를 두는 것이 불법입니다. 조례에 모든 건물, 자동차, 그 주변 지역에 쓰레기를 쌓아서 쥐에게 음식이나 은신처로 쓰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앰뷸런스, 소방차,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릴 때 모든 차는 도로변으로 차를 정차시키고 지나갈 때까지 정차시켜야 합니다.

 

 

캐나다는 교차하는 주요 도로마다 고속도로 진입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부 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속도로 이용료가 없습니다. 또한, 통행인이 행단보도의 버튼을 누를 경우 기둥 또는 줄에 달린 노란색 등이 반짝입니다. 이 경우 운행 중인 자동차는 반드시 정지해야 합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긴급차량이 출동하는 경우 차량을 우측 길로 멈춰 세워 길을 비켜야 합니다. 소방차나 앰뷸런스를 150m 이내에서 뒤따라가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좋은정보를 빠르게 받아 보세요! 클릭

"김씨네" 스토리 채널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부탁합니다!

디씨 슈즈(DC Shoes)의 공동 창업자이자 프로페셔널 랠리 레이서인 켄 블럭(Ken Block)이 프랑스 남부의 한 경기장에서 경사가 51도가 넘는 짐카나(Gymkana) 코스를 드리프트하는 동영상입니다.

 

 

 

짝퉁으로 키운 실력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짝퉁 공화국' 중국이 현대 과학의 총아라 불리는 자동차 분야에서의 모방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예전에 몇 년 지나야 가능했던 것이 이젠 1년도 채 되지 않아 버젓이 같은 모양의 짝퉁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머지않은 시기에 '명차'를 생산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됩니다. 세계 자동차 업계가 중국에 대해 긴장하는 이유입니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중국의 도를 넘은 자동차 불법카피를 소개합니다.


 

체리(Chery)QQ$4,000

GM대우 마티즈$7,000

 

중국 체리자동차가 2003년 내놓은 QQ는 당시 GM대우 마티즈(현재 쉐보레 스파크)와 너무 똑같이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중국 짝퉁차의 원조격이며 대표 모델로 불리는 차가 바로 QQ입니다. 전체적인 디자인과 크기는 거의 마티즈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QQ는 모방과 표절 논란에 휩싸이며 법적 분쟁까지 갔지만 중국 정부는 체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중국 짝퉁차가 그 영역을 확대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셈이 되었습니다.  


 

리판(Lifan) 320 $6,000

미니쿠페 $18,000

 

리판 320은 1.3L 엔진을 장착한 초소형 자동차다. 2008년 베이징 모터쇼에서 처음 모습을 공개했고, 미니와 유사한 디자인으로 악평을 받았습니다. 2013년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미니와 비교해 다소 멀어진 모습이지만, 피아트 500과 많이 비슷한 디자인이 됐습니다. 


 

상환(Shuanghuan)노블$7,000

벤츠 Smart Fortwo$12,000

 

중국 베이징에서 개막된 ‘오토 차이나 2008’ 에 전시되기도 했던 솽환 자동차의 노블(Shuanghuan Noble) 역시 한눈에 벤츠의 스마트 포투(Mercedes Smart Fortwo)인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쌍환자동차가 스마트 포투의 짝퉁인 노블을 독일에 수출하기 시작했을때 독일 총리까지 나서서 '어떻게 독일차 짝퉁을 독일에 다시 팔 수가 있느냐'며 발끈했지만 결국 올해부터 독일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상환(Shuanghuan)CEO$19,000

BMW X5$53,000

 

앞모습은 렉서스의 1세대 RX와 비슷하지만, 제원과 후면을 놓고 보면 BMW X5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BMW 역시 이 점을 놓치지 않았고, 상환 SCEO 모델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결국 이 모델은 독일에서 판매가 정지됐습니다.


 

 

비야디(比亚迪汽车) F8$27,000

벤츠 CLK$62,000

 

중국 자동차 회사가 독일차의 디자인을 베낀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비야디(BYD) 자동차의 컨버터블카 ‘F8’(BYD F8 )의 앞모습은 벤츠의 CLK를 복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똑같습니다.


 

 

장성자동차 쿨베어$5,000

TOYOTA 싸이온$16,000

 

장성 자동차는 베이징 모터쇼에서 토요타의 싸이온(Toyota Scion xB)과 거의 비슷한 Coolbear를 선보여서 논란을 일으키더니 새로 디자인을 개선했다며 상하이 모터쇼에는 토요타의 싸이온과 더 비슷해진 Coolbear를 선보였습니다.


이 외에도 정말 중국의 불법카피 짝퉁 자동차는 셀 수 없이 많으며 그 카피 속도는 점점 더 빨리지고 있습니다.

▼좋은정보를 빠르게 받아 보세요! 클릭

"김씨네" 스토리 채널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부탁합니다!

 

해방된 지 겨우 5년도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은 단순히 이데올로기를 떠나 극도의 증오심을 보이며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프리카 부족국가도 아니고 단일민족으로서 남북이 딱히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가질 이유도 없음에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그 원인을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지만 38선은 일본의 항복을 코앞에 앞두고 미국과 소련이 급히 그은 임시 분계선일 뿐 우리 입장에서는 그 선은 어떤 역사적, 정치적 의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 선이 그어진 이유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1930년대 이래 루즈벨트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대소유화론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제국주의적인 야욕이 없으며 미소는 "약간"의 방법의 차이가 있을뿐 결국 추구하는 방향은 같다고 주장했습니. 1930년대말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동부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핀란드를 침공하고 발트 3국을 강제로 합병하자 루즈벨트를 비롯한 대소유화론자들은 많은 비난을 받자 루즈벨트는 여기에 대해 침묵했으며 어떤 외교적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가장 시급한 상대이라는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를 떠나 일관성과 형평성이 없었으며 단지 개인적인 소련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은 2차대전 내내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의 항복과 함께 적어도 2, 3개월안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참전을 약속했으나 막상 독일의 항복을 앞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입장을 바꾸어 극동에서 제정러시아가 누리던 모든 이권의 보장과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막대한 보급품과 차량의 지원을 요구하였고 루즈벨트는 신중한 고민도 없이 즉흥적으로 수락하였습니다. 여기서 만주와 일본에 대해서는 의논되었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세력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루즈벨트는 한국인들의 역량을 고려할 때 40년 정도의 신탁통치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사실 미국무부에서는 루즈벨트에게 한국을 포함한 극동문제에 대해 한바구니의 보고서를 상신했으나 루즈벨트는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참전은 결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소련은 미국의 친구이며 전후 세계 질서는 반드시 소련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기에 소련의 대일참전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 또한 실상 군사적인 이유보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죽자 부통령 트루먼은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으나 루즈벨트와 소련이 서로 어떤 약속을 했으며 극동의 상황이 어떠한지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럽 문제와 일본에 신경 쓰는 것도 벅찼습니다.

 

 

 

일본은 7월에 이미 항복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었고 일본의 항복은 실상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전 단 며칠이라도 공격하는 시늉을 해야 극동에서 최대한 뜯어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8월 폭풍작전이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의 방어력은 대단히 취약했으며 국경지대에서 다소 강력한 저항이 있었을 뿐 소련의 기갑부대가 최일선을 돌파하자 파죽지세로 남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고 일부 선발대는 개성을 건너 춘천까지 진입합니다. 트루먼은 그제야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게 넘기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분계선을 정하기로 합니다. 38도선, 39도선, 40도선이 거론되었고 처음에는 39도선이 유력했으나 맥아더는 전략적으로 별 가치도 없는 한반도 따위를 점령하는데 일본 점령군을 분산시키는 것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반대하였고 결국 38선이 결정됩니다. 그 결정이 내려지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39도선이나 40도선을 제안했다해도 스탈린은 틀림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스탈린의 목적은 한반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차피 덤일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동유럽이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약간의 완충지역을 좀 더 얻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인지라 손바닥만한 땅 때문에 미국과 갈등까지 빚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소련은 마음만 먹었으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었음에도 미국이 38선을 제시하자 아무 고민없이 즉석에서 ok!라고 하고 38선 이남으로 진출한 병력을 도로 북쪽으로 옮깁니다. 반면 미군은 9월 6일에야 최초의 선발대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입성할만큼 준비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스탈린은 생각지도 못한 한반도 이북지역까지 획득했고(비록 그가 정말로 원했던 훗카이도는 얻지 못했지만)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북한정권을 수립할 것과 쓸만한 놈을 골라서 추천하라고 지시합니다. 그 결과가 김일성이었습니다.  1930년대부터 소련 극동군의 후원을 받아왔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다른 당파들을 억누르거나 제거하고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정권이 신속하게 안정되자 그는 남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켜 이를 통해 남한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창 국공 내전중이었고 북한의 군사력은 내부 치안에나 걸맞을 뿐 외침을 할 역량도 없었고 한국군보다 우세하지도 못했습니다.

 

 

1949년초만 해도 군사적으로 우리 국군이 우세했기에 38선에서의 대대적인 국지적 도발은 전술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김일성은 남한이 전쟁을 도발하고 있다고 침소봉대하여 스탈린에게 적극적인 개입과 무기 원조를 요구합니다. 특히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자 김일성은 팔로군 산하 조선인 군대를 북한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3개 사단 5만명에 차례로 입국합니다. 또한 1949년말부터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신형무기가 도착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순식간에 압도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이런 강력한 무력을 갖추게 되자 한반도에서 더이상의 유혈사태를 막는데 노력하는 대신 이를 이용해 한방에 남한을 장악하여 무력통일한다면 권위와 정통성이 취약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가 아시다시피 6월 25일 새벽 4시 "폭풍"작전입니다.

 

 

이승만의 대북강경론이나 북진통일이 남북의 긴장관계를 더욱 경색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마저 악화시켜 미국의 군사 원조에 역효과를 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한가지 요인일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미국이 우리 국군의 무장에 인색했던 이유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발언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국의 정치적,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들과 형평성 측면에서 비교해도 남한에게 제공한 무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차나 전투기를 제공해도 우리 국군은 이를 운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지나치게 많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이나 영국 등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물론 이는 소련과 중공이 북한을 얼마나 원조하는가, 기형적으로 증강되는 북한군의 전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는 일방적이고 막연한 생각일 뿐으로 미국의 정보력의 부재를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았다면 그렇게 태평하게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남북협상 기간 김일성(왼쪽)과 함께 걷고 있는 김구

 

어쨌든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지도자였다해도, 이승만이 링컨이나 넬슨 만델라였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는 전쟁은 어차피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쟁을 결정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일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은 물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처음부터 한반도는 미국의 세력권이라고 못 받았다면, 트루먼이 한반도의 가치를 보다 중요시하여 38선이 아닌 39선 또는 그 윗선을 제시했다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계획이 너무 성급하고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원조에 인색했다면, 국공내전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다면 또는 국공내전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장개석이 승리했다면, 미국이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다 빨리 판단하여 애치슨라인 따위의 쓸모없고 우유부단한 유화제스쳐를 취하는 대신 보다 강경하게 맞섰다면, 무엇보다 김일성같은 젊고 무모하면서 성급하고 야심만 넘치는 또라이가 바실레프스키의 눈에 들지만 않았다면 그런 참혹한 전쟁은 분명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쩌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보다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지만 역사에 우연은 없는 법입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우리는 6.25 한국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 253전 253승 불패신화 강뉴부대

한국전쟁 가장 잘싸운 대한민국 부대 TOP5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