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8일 오전 11시 30분께 울릉도 동방 39해리(독도)에 국적불명 비행기 몇대가 출현하여 폭탄을 투하한 뒤 기관총까지 쏘아대고 사라졌다. 고기잡이와 미역을 따고 있던 울릉도와 강원도의 20여척 어선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 10명이 중상을 입었다. 급보를 받은 울릉도 당국은 구조선 2척을 현장에 급파했다.” 

 


1948년 6월 11일자 일간신문에 실린 이 기사는 사흘 전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생존자의 증언이 속속 나오면서 폭격기가 미공군 소속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6월 17일 일본 도쿄의 미국 극동공군사령부는 B-29 폭격기가 폭격훈련을 실시했음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고공에서 날았기 때문에 어선을 보지 못했으며, 폭격 30분 뒤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을 분석한 결과 현장에 작은 선박 여러 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미군 당국의 발표였습니다. 이후 생존자들은 약간의 보상을 받았고, 이 사건은 금방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비밀해제된 미 공군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 문제의 폭격훈련을 한 부대는 미공군 93폭격대대였다는 사실을 밝혀졌습니다. 328, 329, 330폭격대로 구성돼 있던 93폭격대대는 원래 캘리포니아주 캐슬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1948년 4월 15일 3개월간의 임시배치명령을 받고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로 이동했습니다. 93폭격대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에 주둔한 유일한 B-29 운용 부대였습니다.

 

 

1948년 5월말 배치가 끝난 93폭격대대의 임무는 21개의 훈련을 완수하는 것이었는데 독도 폭격훈련은 그중 3번째 과정이었습니다. 독도에 폭격기당 1000파운드 폭탄 4개를 투하하고, 다른 두 곳은 카메라로 촬영하라는 훈련명령이 떨어진 것은 6월 7일이였으며 정찰기를 포함해 총 24대가 훈련에 참가하게 돼 있었습니다.

 

 

1948년 6월 8일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 미공군 B-29폭격기 20대가 활주로를 차고오르면서 비극적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날 미공군 93폭격대대 소속 3개 폭격대가 폭격기 한 대당 1000파운드짜리 폭탄 4개씩을 독도에 쏟아부었습니다. 76개의 폭탄이 목표물 반경 90m 안으로 떨어졌고, 그 와중에 인근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우리 어민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독도 수중에 발견된 폭탄

 

당시 미군과 우리 경찰은 어민 14명이 숨지고 어선 11척이 침몰했다고 밝혔는데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봤을 때 많게는 3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어로작업 중 갑작스런 폭격에 놀라 위를 향해 태극기와 손을 흔들며 멈춰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제헌의회의 주요 의제가 되었고, 민중들도 분노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했지만 성명서 하나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군은 독도를 포격했을까?

 

독도폭격 당시 329폭격대 폭격수로 근무하던 미국의 한 장교는 목표물의 명칭은 물론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폭격목표였던 섬에 작은 선박들이 있었으며, 그 선박이 마약 밀수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어선이 마약 밀수선으로 둔갑하게 된 사연은 독도 탐욕에 눈먼 일본의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맥아더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각서에 따라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규정됐고, 일본은 독도 근방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946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들어서면서 독도를 빼앗기 위한 계략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1947년 일본 외무성은 ‘일본의 부속도서’라는 이름의 비밀 홍보문서를 제작하였고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섬이라고 소개한 황당한 문서에는 독도에 대한 왜곡된 정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해왔던 연합군 사령부와 미 국무부에 비밀리에 전달되면서 미국 내부에 엄청난 혼선을 가져오고 맙니다.

 

 

일본은 미군 폭격기가 한국 측 어선을 보고 폭격을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무고한 어민들을 마약 밀수 조직원이라는 뜬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 공군이 당시 폭격 훈련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 공군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계획대로 1948년 독도가 일본영토 안에 미 공군폭격지로 지정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였습니다.

 

 

1948년 6월8일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어민들의 넋을 기리고자 1950년 6월8일 조재천 경북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6ㆍ25동란을 틈타 일본인들이 파괴했다는 설도 있고 태풍 등 자연재해로 파손됐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사라졌었습니다. 그래서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2005년 8월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를 다시 복원했습니다.

 

 

 

그런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도 수중 생태를 조사하던 독도탐사팀이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 조난 어민 위령비)'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기적적으로 발견하였고 인양작업을 벌여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독도 포격사건의 진실은 미국은 이용당했고 한국의 주권은 침해당했으며 한국인들의 생명은 존중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의 거짓말은 반세기만에 드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