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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의 중순양함이엇던 인디애나폴리스는 1930년대에 취역한 후 몇 번의 개장을 받아 화력과 대공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오키나와 공격에도 참여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일본 자살공격대 카미카제 공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형 전투함은 자체 스크류 소음이 크기 때문에 대잠작전 관련 장비는 탑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구축함급 이하의 호위함과의 이동이 필수사항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였던 1945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인디애나폴리스는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의 지휘아래 1196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B-29가 출격대기중인 티니안 섬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를 뒤바꿀 물건인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재료. 고농축 우라늄을 싣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 해군은 이 임무를 극비임무로 취급했으며 일본 해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단독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맥베이 대령은 호위함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지휘부는 이를 묵살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것은 모든 비극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7월 28일 무사히 화물을 실어 날랐던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음 작전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미 비밀 준수가 필요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서 단독으로 항해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을 하기 보름 전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은 이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시켜 2발을 명중시키며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킵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에 걸린 시간은 약 12분이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 중순양함의  침몰 직후 함장은 즉시 구조신호를 보내고, 승무원들에게 퇴함명령을 내려서 폭발 직후 사망한 300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모두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9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 곳에서 빨리 구조가 이루어졌으면 모두가 생존했겠지만 무려 4일이나 지난 1945년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 항공기가 처음으로 바다위에 떠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구조를 시작하였고 그 후 약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모든 생존자를 건져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최종 생존자는 316명이었습니다. 식수와 의약품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약 5일간  생존자들은 바다 위에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다위에서 탈진한 수병들은 서서히 죽어가거나 환각증세까지 보였습니다. 문제는 수병들이 표류한 그 주변해역은 상어 떼의 출몰지였습니다. 상어들은 처음에는 미 해군 수병들의 시체를 노렸고 그 다음에는 주변의 부상자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해군 비행기가 구조하는 도중에 상어가 생존자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과거 임팔 전투 당시 일본군이 바다악어 집단 서식지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한 부대가 악어 떼들에게 통째로 잡아먹힌 이래 최악의 참사였습니다.

 

 

함장 맥베이 대령은 이 순간까지도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고, 조명탄과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습니다. 침몰 직후의 구조신호는 근처의 미 해군 수신소가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서 곯아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수신소에서는 당직사관이 놀고 있느라고 신호자체를 무시했으며 마지막 수신소까지 일본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 구조신호자체를 무시했습니다.

 

▲괌으로 이송된 인대아나폴리스의 생존 수병들 1945년 8월

 

사실 당시는 그 누구도 감히 미 해군의 함선을 가라앉힐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미 해군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언론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 함장 멕베이는 그야말로 대역죄인이 되었습니다. 멕베이는 애타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구조 요청을 보냈는데 왜 응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미 해군의 공식 답변은 '구조 요청 없었음'이었습니다. 미 해군으로서는 어떻게든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맥베이 대령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후 니미츠 사령관은 멕베이를 원상복귀시키고 제독으로 승진시키지만 1949년 소장을 끝으로 사실상 불명예 제대를 하였습니다그 뒤에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상어밥으로 만들었다는 대중들과 유족들의 비난을 뒤집어쓴 채 맥베이 대령은 1968년 70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수십 년 뒤 미국의 열 두 살 소년이 영화 죠스를 보게 되었는데 소년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퀸트의 경험담에 전율했고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인디애나폴리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소년은 그 배의 함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내막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무죄 탄원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년의 활약으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인디애나폴리스 사건의 대규모 조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경악할만한 사실이 여럿 밝혀졌는데 당시 멕베이 함장이 구조 요청을 했었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미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의원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도착하였는데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군 잠수함 I-58 함장 하시모토 모치츠라가 쓴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뢰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이으로서, 저는 멕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어떤 방비를 하고 있더라도 격침이 간으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멕베이 대령에게 내려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1999년 이 편지를 보낸 하시모토는 1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그 해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맥베이 함장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