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현행 법령에는 군인들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보건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많은 군필자들은 우리나라 군 의료체계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군의관이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환경부터가 열악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진률이 민간의원보다 높으며 장비가 부족하다 보니 정밀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부사관급 이상의 간부들은 웬만하면 군병원에 안가게 되고 장병들도 민간병원에 가고 싶어 하지만 그러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휴가를 내고 민간병원에 가서 진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여 복무하고 있는 군의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군의관들은 병계급과 마찬가지로 징병되어 온 인력들인데 이 특수 전문직인 군의관이 징병되어 들어온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됩니다. 사회적으로 의료사고에대한 비판적인식이 팽배해지고 있으며 빈약한 군의료체계로 군의료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현 상황에서 직업군인들은 의료사고를 군의관 책임으로만 치부하고 본인들의 지휘책임은 회피하는 추태가 군내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의관들이 고생하는 용사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현재 군 의무시설은 기본적인 진료 요건도 갖추지 못한곳이 태반입니다.

 

 

의료의 발전은 곧 장비의 발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정확한 감별진단에 있어 장비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하지만 군대에는 이런 장비가 구비된 곳이 거의 없어, 군병원에조차 일정 이상의 장비가 없는 수준입니다. 한창 건강한 청년들이 모인 군대라는 특수성상 대부분의 병들은 사실상 운이 좋게도 약 몇 봉 처방해 주거나 약을 발라주는 걸로 나아지기에 장비 개선이 더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에서 보급되는 약품의 종류가 제한적이라서 그 약들로 치료를 해야하며 민간병원에서는 잘 쓰이지 않게 된 구식 약도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국군병원 약제과에는 약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며 만약 희귀한 약이라 구하지 못할 경우 국군의무사령부 민원게시판에 올리면 여러 방향을 통해 구해줍니다.

 

 

국군대전병원, 국군수도병원급의 대형 군병원에선 주말 공휴일 제외 매일 3~4건 이상의 수술을 자주하고 있지만 문제가 많습니다. 원래 군대 이야기라는 게 과장이 심하게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군의관에게 수술받았다는 얘길 들어보면 치질 수술 도중에 괄약근을 잘못 베어내 평생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든가, 어딜 잘못 건드려 식물인간이 되었다든가, 맹장수술 받으려고 전신마취 받았다가 마취사고로 사망하게 되거나, 손가락 한개 수술하다가 한팔 전체가 마비되거나, 손가락 3개를 완전히 썩혀버리거나, 아킬레스건 치료때 소독을 제대로 안 해줘서 발을 못 쓰게 되었다는 등등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실제로 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사례들입니다.

 

 

2012년 제25보병사단에서 GOP 총기오발사건이 발생했는데, 총상을 치료할 수 있는 군의관이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었습니다. 피해자 김 이병은 총상치료병원 찾느라 무려 4시간이 지체됐고, 과다 출혈로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군의관의 첫번째 존재 이유가 바로 총상 환자 치료인데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군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 중 가장 큰 하나가 바로 일반 장병들이 진료를 받기까지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군 의료관리체계에 대한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진료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관련한 질문에 훈련병의 28.4%, 일반병의 31.6%, 입원병의 46%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군 내부에선 아플 때 아프다고 표현하면 선임병·간부 등 상급자의 눈치를 받는 경우도 많으며 아프면 꾀병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선입견이 깔려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꾸준히 제기 되었음에도 2017년 현재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군 의료체계가 민간과 벌어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예산투자가 한 번쯤은 이뤄져야 하며 진료경험이 풍부한 민간의사가 장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민군협진제 구축이 필요해보입니다. 민간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후방은 군 병원을 모두 폐지하고 부대와 가장 가까운 민간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하고 후방병원에 근무하는 군의관을 모두 전방부대에 배치한다면 지금보다 세심한 진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NLL은 서해뿐만 아니라 동해에도 그어져 있는데, NLL 그을 때야 군사적, 정치적 판단으로 그은 거지만 동해 어민들 입장에선 NLL 북쪽 해역에서 명태가 더 잘 잡혔습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인지라, 어민들은 자주 NLL 북측수역에서 어로작업을 했고, 이를 말려야 했던 우리나라 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같이 넘어가서 보호작전 및 철수요구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1월 19일 언제나 그렇듯 우리나라 어선들은 명태 잡으러 NLL을 넘었고, 이에 당포함도 덩달아 넘어가서 어선들에게 북한 수역에서 내려오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PCE-56 당포함은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650톤급 초계함이었습니다

 

▲당시 당포함에 승선한 장병들 모습

 

하지만 그 순간 북한 경비정 2척이 출현했습니다. 당포함은 이들이 어선을 납북해 가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즉각 대응에 들어가 북쪽으로 전진했고, 북한 경비정들은 퇴각했습니다. 사실 변변한 함정이 없었던 북한 해군은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은 우리나라 해군에 대항할 수단이 별로 없었습니다.

 

▲침몰하기 전까지 명태잡이 어선들을 끝까지 보호한 당포함

 

그러나 북한 경비정들이 얌전히 퇴각한 것은 북한의 노림수였습니다. 13시 55분, 북한 해안가 포진지에서 기습적으로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에서 들고 온 강력한 122㎜ 해안포 10여 문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당포함 주위에 물기둥을 만들었고, 기관실을 시작으로, 스크류, 기관포탑 등이 계속 피탄당하며 당포함은 순식간에 전투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당시 당포함에 침몰 기사

 

바로 당포함도 급히 응사했으나 당포함의 무장은 3인치(76.2㎜) 포 1문, 40㎜ 6문, 20㎜ 4문에 불과했으므로 화력면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고, 40㎜와 20㎜ 기관포는 아예 북한군 포대에 도달하지도 못 했으며 3인치 함포는 북한군의 포탄을 맞고 조기에 제압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북한군 포들은 해안의 진지에 잘 은폐되어 있었으므로 20발을 발사한 3인치 함포탄도 별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뒤이어, 작전 중인 다른 해군 함정들이 달려오자 북한군의 포격은 멎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포함은 만신창이가 되어 기동 불능 상태에 놓였고, 결국
함장은 퇴함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공격으로 당포함은 결국 침몰했고, 승조원 39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중 28명은 시신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어로작업에 참가했던 어민 중 몇 명이 해군에 미안하다며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태가 북한 수역에서 더 잘 잡히는건 여전한 사실이었고, 어선들은 계속 NLL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로자원을 따라 남북한 어선이 NLL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90년대 들어서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작년 중국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이어 동해 NLL 인근 조업권도 판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포함 사건은 북한측의 치밀하게 준비된 도발로서 비록 우리 측이 NLL을 먼저 넘었긴 했지만 경고 없이 바로 조준사격을 한다는 것은 국제적 관례를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짓이라 북한측의 책임이 컷습니다. 1999년 이후 제 1, 2차 연평해전이나 대청해전 모두 북한측이 넘어왔어도 우리나라 해군은 처음부터 조준사격을 가하지 않고 사전 경고를 먼저 보냈지만 북한 해군은 포탄으로 대답했습니다.

 

 

1970년 1월 19일,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렇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해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전사하신 분들을 추모하며, 매년 1월 19일,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당포함 전몰장병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천안함 46용사 뿐 아니라, 당포함 39명의 순국 장병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101공수사단은 (101st Airborne Division)미국 중남부 캔터키주 캠프 캠벌(Capm Cambell)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중무장헬기에 의한 공중강습이 주임무입니다. 이 부대는 지난 1942년8월 남부 루이지애나주 캠프 클레어본에서 공수사단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세계 최강 미군 육군의 역사상 가장 명성과 공적이 높은 정예사단입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출격 전에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훈시를 듣고있는 101공수사단 부대원들

 

그리고 이 부대의 명성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s)」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101공수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D-day에만 40%의 병력을 잃었지만 후방을 교란시키고 교두보를 미리 확보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적인 작전을 이끌면서 그들의 용맹함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투입하기 전 101공수사단 부대원 모습

 

그리고 이들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대규모의 공수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마켓가든 작전이었습니다. 사실 마켓가든 작전은 연합국 최대실수 중 하나로 뽑히는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101 공수사단은 아이트호벤의 다리를 점거하는데 성공하면서 선전하였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101 공수사단은 지리상의 이점과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지만 사실 무모했던 마켓가든 작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마켓가든 작전 종류 이후 제101 공수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프랑스 인근 지역에 배치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알려진 발지전투가 개시되면서 제101 공수사단은 최전방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101 공수사단은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항복하라는 독일군의 전문까지 받았지만 N U T S (엿 이나 먹어라) 라는 짧고 굵은 답신을 보냈습니다.

 

1944년 6월 8일 독일군을 물리친 후의 기념사진

 

이에 분노한 독일군 지휘관은 101공수사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지속했지만 101공수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바스토뉴를 사수하였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방면으로 몰아붙이고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겠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말도 안되는 독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제 101공수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은 대대적인 감군을 실시하였는데 101공수사단 역시 1045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창설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이 월남전, 중동문제 등 각종 평화유지군 임무, 카리브해의 각종 사태, 걸프전, 테러와의 전쟁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특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펼쳐진 테러와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미 육군의 귀중한 전력으로 활약했고, 이라크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들을 교전끝에 사살한 것도 101공수사단이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대규모 공수작전에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정예보병사단에서 공수부대의 효용성이 떨어지는 현대전의 상황을 감안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강습을 주로 하는데 사단 내에 있는 헬기만 해도 400대 가까이 됩니다. 공격헬기만 AH-64 아파치 시리즈가 72대나 있으며 기타 정찰헬기 40여 대, 수송헬기 2000여 대를 보유하고 있어 기동성도 미 육군 내에서 최고로 꼽힙니다.

 

 

덕분에 3개여단과 지원부대 등 1만여명 규모를 자랑하는 101 공수사단은 다양한 헬기를 운용하면서 주 공략목표에 정예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이 101공수사단의 헬기부대 전력이면 우리 대한민국 육군 항공대 총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사단의 공중화력은 웬만한 중소국가의 육군력과 공군력을 합친 것 정도로 위력적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군은 이미 과거 400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군인들 보다 월등하다는 견해로 지금도 지속적으로 세계의 많은 군대에서 여군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 숫자도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SNS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이스라엘 여군의 모습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여러나라 군대에는 미인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기에 손색이 없는 정말 아름다운 여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적군도 홀딱 반할만한 미모의 여군을 자랑하는 국가 TOP15을 소개합니다.

 

 15위 중국

 

중국의 열병식을 보셧다면 중국 여군들도 정말 이쁘다는 생각을 하실겁니다. 하지만 중국 열병식에는 평균 키 178cm, 나이 20세에 미녀들로만 뽑아서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여군들은 특전사 부대가 생기는 등 남자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놀라운 전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14위 일본

 

1952년 자위대는 간호직으로 여성 장교를 선발했으며 현재는 육상자위대는 전 직종에 개방, 해상자위대는 잠수함, 항공자위대는 전투기조종사를 빼고는 여군(자위대가 군대가 아니라 여군은 아니지만)이 복무하고 있습니다. 일본 여군의 외모가 중국 여군보다는 괜찮은거 같습니다.


 

 13위 영국

 

영국 여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숨은 주역들로 2차 대전 당시 레이더 기지의 오퍼레이터와 방공포병 임무를 맡아서 맹활약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왕녀(공주) 시절에 여군으로 입대해 보급장교 참전 경력이 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증손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도, 성인이 되면 영국군 여군 장교로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12위 미국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여군들도 전차를 조종하고, 박격포를 쏘고, 전투현장에서 보병 부대를 지휘하며 레인저와 그린베레(육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해군 특전부대), 해병대, 공군 낙하산부대를 비롯해 이전까지 남성들에게만 열려 있던 모든 병과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11위 폴란드

 

1938년 폴란드 정부는 여성의 자원봉사자를 원하면서 여성들은 의료, 대공포, 통신과 같은 제한된 군사 역할을 하였으며 2004년부터 여군들이 군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시작하면서 현재는 많은 수의 여군들이 복무하고 있습니다.


 

 10위 스웨덴

 

스웨덴은 징병제가 부활하면서 18세부터 매년 9~12개월간 여성들도 복무합니다. 물론 징병 대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웨덴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인 1902년 이미 종교적·윤리적 이유 등으로 병역의무를 거부할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습니다.


 

 9위 북한

 

전 국민이 모두 군인인 나라답게 여군 역시 그 숫자가 많습니다. 여군의 수는 세계 1위입니다. 그리고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북한 여군 역시 미모가 뛰어납니다. 하지만 인권이란게 존재하지 않는 북한군답게 여군에 대한 성적착취는 심각한 수준으로 기쁨조 취급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8위 호주

 

호주 여군은 1899년부터 생기기 시작하였고 간호병의 임무만 맡았었지만 현재는 호주의 주방위군 역할까지 다양해졌으며 호주군은  현재 12.7% 수준인 군의 여성 비율을 25%까지 높이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전투 보직을 포함해 많은 부문에서 남성의 신병 모집이 12개월간 금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주는 여성이 보병 혹은 포병에 지원해 복무하게 되면 최소 2년을 근무해야하지만 남성의 경우 최소 6년을 복무해야 합니다.


 

 7위 그리스

 

그리스는 유럽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군처럼 그리스 여군들의 미모도 유명하며 전투력 또한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여군을 보면 선발 기준에 미모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6위 대한민국

 

현재 한국군의 여군 수는 장교 4,700여명, 부사관 5,400여명으로 10,200여명입니다. 간부로만 따질 때 약 5.5%가 여군입니다. 입대하기 위한 신체 조건은 키는 152cm ~ 183cm 체중은 44~87㎏ 이내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원 경쟁률이 남자보다 훨씬 높습니다.


 

 5위 루마니아

 

유럽 동남부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전 국민의 52%가 여성이며 미녀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인지 동유럽에서 루마니아 여군의 미모는 거의 독보적인 차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루마니어 여성들은 18세가 넘으면 자진 지원해서 입대할 수 있으며 여군이 되면 5년 계약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여 36세까지 3년씩 계약연장이 가능합니다.


 

 4위 러시아

 

러시아군에서 여군이 복무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해군에서는 여군이 통신부대, 의료부대, 해안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으며 차별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에는 이미 3만 5천 명 이상의 여군이 복무하고 있으며, 그 중 2,600명은 장교이며 72명은 간부직에 있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러시아 랴잔 공수부대군사전문학교는 이미 여자 생도를 모집하고 있으며, 이들은 장교가 되어 공수부대를 지휘하고 전투장비와 공수부대원 투하 임무를 지원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3위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201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중 처음으로 징병 대상을 여성을 확대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44세의 건강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신체검사를 통해 군대에 복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선출된 신병 중 3분의 1이 젊은 여성이었으며 군사대학인 노르웨이 방위 공과대학은 올해 지원자 중 여성이 24.5%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군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점은 노르웨이의 남녀 병사는 같은 내무반을 씁니다. 여성 2명에 남성 4명이 의무적으로 한 숙소에 배치되며 아침 저녁 점호도 함께 받습니다.


 

 2위 우크라이나

 

미모로 전쟁을 한다면 우크라이나가 세계 최강일지도 모릅니다. 우크라이나 군대에는 현재 18,000명의 미녀 여군이 복무중이며 이들 중에서 7%는 장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위해 미모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자원 입대를하고 최전선으로 향하기 위해 힘든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1위 이스라엘

 

이스라엘 군 발표에 따르면 현역 군인 17만6500명 가운데 여군이 33%인 5만8천여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에는 총 850종의 보직이 있는데 이 중 여성들은 약 280여종의 보직에 배치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투보직으로 배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년 이스라엘 여군 약 2000여명의 사진을 담은 인스타그램 계정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6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은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는데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습니다. 

 

 

그래도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에 당황한 연합국은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돌격대 대장이었던 괴벨스

 

그렇게 베를린 주위에는 소련군 3개 전선군이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련군의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화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준비하는 소련군

 

4월 21일 소련군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자 독일군 상층부는 물론이고 최하위 말단 병사까지 눈앞에 다가온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인리히 힘러는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독일에게는 사실상 항복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습니다. 항복을 택하기엔 나치가 전쟁 내내 동유럽에서 자행한 범죄와 잔학 행위가 너무 심했습니다. 소련에게 항복해서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던 독일군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지만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 진행중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리고 4월 24일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습니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습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습니다. 이들은 몇 안되는 티거 2,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습니다.

 

 

사실 일개 건물에 불과한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습니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소련군은 결국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습니다. 실제로 저런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부술 수 있었으며 당시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야포나 자주포로는 파괴하는게 불가능했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서 의사당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은 결국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때가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습니다. 물론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습니다.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들(제일 왼쪽이 헬무트 바이틀린 대장)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습니다.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의 완전 소탕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이 소련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불법 카피해서 033급을 만들었으며 이 중 7대를 1980년대에 북한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라이센스로 16척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북한 현지에서 건조하였습니다. 033급은 중국이 만든 재래식 잠수함 중 가장 큰 모델로 중국 해군도 아직 033급을 훈련용으로 아직 운용 중입니다. 이 잠수함의 배수량은 1800t이며 두 개의 축에 달린 두 개의 스크루가 추진력을 내는 방식입니다.

 

1997년 강릉으로 침투했다가 나포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정동진에 전시돼 있습니다.

 

북한이 로미오급 잠수함을 모두 370t 상어급으로 대체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2014년 6월 김정은이 직접 탑승하여 훈련을 지휘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아직 현역으로 사용중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실 북한이 로미오급 잠수함을 전부 퇴역시키면 북한에게 남는 잠수함은 500톤도 안되는 소형 잠수정들 뿐입니다.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30년 앞선 1963년부터 소련에서 1700t 위스키급 잠수함을 도입했었습니다. 이 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독일의 단치히 조선소에서 노획할 당시 최고 성능의 잠수함 Type 21을 발전시킨 모델입니다. 그 후 약 10년이 지난 1973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이와 성능이 유사한 1800t 로미오급 잠수함 7척을 매년 한두 척씩 지속적으로 도입했습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도입한 잠수함을 이용해 잠수함 운용 노하우를 습득했을 뿐만 아니라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 파악한 후 전체 설계 능력을 습득하는 역설계 과정을 학습했습니다.

 

 

여기서 축적된 기술을 토대로 1976년부터는 해외 도입 13년 만에 신포와 마양도 조선소에서 독자적으로 로미오급 3척을 건조했으며 그 후 1995년까지 14개월마다 한 척씩 건조하는 등 잠수함 척수를 늘려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로미오급 잠수함 총 23척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1995년부터는 완전 독자 모델인 300t 상어급 잠수함을 설계해 신포 조선소에서 건조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 이후 매년 1∼2척씩 건조해 현재는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로 정찰국 공작원 침투용으로 운용해 왔던 100t 유고급 잠수정은 1960년대부터 육대서리 조선소에서 건조한 이래, 현재 총 23척을 보유하고 있어 북한 보유 잠수함·정을 종합해 보면 84척이 되며 숫자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북한이 잠수함 개발에 힘을 쏟는 가장 큰 이유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로 미국을 위협하기 위해서이며 잠수함을 많이 보유하는 이유는 로미오급과 상어급 잠수함을 이용해 최우선적으로 우리나라의 해상교통로를 차단, 전시 군수지원체제를 마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북한 잠수함은 로미오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크기가 작아 다양한 탐지장비와 무장을 탑재하기 곤란하고 인원 이송 능력과 작전 반경도 짧습니다. 하지만, 크기가 작아 우리 해군 전투함의 음파탐지기에 탐지될 수 있는 거리도 짧고 잡힐 확률도 낮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주변해역은 선박교통량이 많아 시끄럽고 허위표적도 많으며, 음파 전달도 매우 불규칙해 잠수함 천국이라 불립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주변해역이 잠수함에 유리한 환경에다 북한 잠수함은 크기도 작아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탐지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2015년에는 북한 잠수함 전력의 70%. 약 50여 척이 우리나라 감시망에서 사라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포클랜드 전쟁 때 아르헨티나의 산 루이스 디젤잠수함 한 척을 격침하기 위해 영국의 막강한 항모 기동전단이 34일 동안 전력을 다하고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잠수함일 것이라고 가정한 허위표적에 대해 200발 이상의 폭뢰와 경어뢰를 퍼붓고 말았는데 이처럼 실전에서 잠수함 잡기가 굉장히 힘든일입니다.

 

 

북한 잠수함이 아무리 장비 성능이 낙후된 잠수함이라도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찾기 힘든 게릴라 세력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 평시를 막론하고 게릴라로 변하기 전인 출항 전부터 감시할 필요가 있고, 출항 후에는 예상 항로에 대한 집중 탐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북한 잠수함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위성·항공기 등 감시자산도 늘여야 하며 유사시 적 잠수함 기지를 봉쇄하고 출항 시 추적·격파할 수 있는 우리의 대응 잠수함 수도 늘려야 합니다.

 

 

엇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잠수함 보유입니다.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무한 잠항이 가능한 원자력 잠수함을 북한 잠수함 기지 앞에 배치하고 북한 잠수함이 기동할 때 따라붙어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법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병력 규모면에서 전세계 해병대 중 미 해병대에 이어 두번째로 많습니다.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해군이 보유한 상륙수송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규모입니다. 그리고 해병대의 자부심 얼마나 강한지 말해주는 말이 있는데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입니다.

 

 

사실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명찰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특히 마지막 관문인 극기주는 정말 지옥과도 같다고 합니다. 극기주, 4시간 이하의 수면과 급격히 줄어든 식사량으로 극한의 전시상황을 극복하는 훈련입니다. 한덩이의 주먹밥과 몇조각의 깍두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버텨내야 합니다. 

 

 

아침에 사이렌을 울리며 비상소집을 해서 교관들이 극기주를 선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4일동안 잠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밥도 제한배식으로 줄어들고 각개전투훈련 같은 힘든 훈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첫날은 비상소집과 냉·온수 견디기 등 전장 스트레스 상황을 가정한 뒤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2일차에는 체력적 한계와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한 장거리 해상 패들링(Paddling)을 실시합니다.

 

 

3일차에는 상륙용 고무보트(IBS) 운용술을 숙달하고, 4일 차에는 80㎏이 넘는 IBS를 머리에 이고 이동하는 헤드캐링(Head Carrying)을 하게 됩니다. IBS는 소형고무보트의 약자이며 100kg가 넘는 IBS에 바람을 넣고 6~7명 대원이 각자 맡은바 임무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의 단결과 단합을 중점적으로 교육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목요일 오전에 진해 장복산맥 동쪽에 위치한 천자봉을 올라가는데 새벽에 출발해 오전에 복귀합니다. 완전무장에 병기 지참하고 오르는데다 체력이 한계치인 극기주에 하는 훈련이라 낙오자가 많을거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진 않습니다. 극기주 끝났다는 성취감과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명찰을 달것이라는 기대감에 대부분 낙오없이 완주한다고 합니다.

 

 

이 천자봉행군은 1949년 4월 15일 제1기 신병수료식을 기념하여 천자봉 정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5년 제2 해병훈련단이 진해에서 포항으로 이전함에 따라 천자봉의 혼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 운재산 정상 9부 능선에 잇는 대왕암을 제2의 천자봉으로 명명하여 해병대의 자긍심과 각오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천자봉 고지정복훈련까지 끝나고 교육단에 복귀하면 교육단 근무 장교, 부사관, 기간병 및 후배 기수 훈련병 등이 길 가에 도열하여 완주한 훈련병들을 맞아 박수쳐줍니다. 그리고 군악대도 와서 축하 연주를 해 주는데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 속으로 대단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명찰을 수여합니다. 빨간 명찰 수여식은 천자봉 등반과 마찬가지로 해병대에만 존재하는 전통 의식으로 훈련병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훈련을 함께한 훈련교관이 수여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빨간 명찰이 가슴에 부착되는 순간 훈련병들의 눈에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이 빨간명찰의 진홍색은 피와 정열, 용기, 신의 그리고 약동하는 젊은을 조국에 바친 해병대의 전통을 상징하며 황색은 해병대는 신성하며 해병은 언제나 예의 바르고 명랑하며 활기차고, 땀과 인내의 결정체임을 상징합니다. 전역 후에도 많은 해병대 예비역들은 이러한 붉은 명찰을 소중히 여기고 힘들때나 지칠때 붉은 명찰을 보고 다시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미국의 비밀 해제된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1950년 10월 중순,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많은 피를 흘린 한국전쟁에 마지막 승리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 무렵 압록강을 넘어 첫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 했던 UN군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한 끝에 38선 일대까지 밀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UN군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UN군과 국군은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당시 미국 본토에서는 위험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의도가 한번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진 이상,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게 될 경우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수립, 약 백만명의 한국인을 이주기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국군의 반발을 우려했던 미국은 한국정부나 일선 야전 부대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군은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37도선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던 우리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지난 여름에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할것이라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한 방어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건 금강 부근까지 밀릴경우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찾아오게 되는데 중공군은 우리 국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전열 재정비를 위해 서울에서 진격을 멈췄습니다. 이 시기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UN군과 국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승리할수 있는 소규모 국지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후퇴로 곤두박질 치고 있던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 했기 때문이였습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움직임이 둔화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는데 이를 작전명 울프하운드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울프하운드작전은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됩니다.

 

 

1951년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원 부근에서 맞닥뜨린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대동아제국 건설 야망에 불탔던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일본은 국가 주권을 상실한채 연합국의 점령지로 전락했습니다. 전쟁일 일삼던 군국주의 국가 일본에게 그것은 파산이었습니다. 그리고 항복과 동시에 군대는 해산하였고 군인들은 무장해제되었으며 일본의 모든 군수공장들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거리에는 일자리와 먹을 것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특히 6백만에 이르던 일본 군인들의 생계는 더욱 절박했습니다. 일본은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위한 헌법을 정하는 일보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문을 닫았던 군수공장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한국전쟁을 위한 기지로 이용하면서 일본은 거대한 보급섬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쿄 시내에 처음 슈퍼마켓이 생길 만큼 경기가 호전되었고 미군에 고용된 일본인들이 30만명, 조달한 물자가 16억 달러, 무기와 군수품 24억 달러, 무려 62억 달러의 특수를 노렸습니다. 그렇게 한국전쟁 특수 덕분에 일본에는 벼락부자가 많이 생겼으며 당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 덕분에 지금 일본 대기업의 기초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10월 일본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유엔 회의에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영국, 호주, 프랑스 등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연합국들 조차 일본의 참전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본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에게 다시 무기를 쥐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참전했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본군의 참전설이 제기된 것은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북한군에 의해서였습니다. 1950년 10월 소련의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의 문제에 관하여 항의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가브릴 크르트코프씨는 자신이 직접 일본 포로를 심문하였으며 그 일본군은 5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있는 장교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일본인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구일본 해군 260명이 해상보안청장의 명령으로 긴급 소집되어 일본 특별 소해대라는 이름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모노세키항에서 동 트기전부터 출항을 준비하였으며 300톤급의 전선과 소해정을 타고 일본 근해를 지나자 미 제7함대와 합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한창 교전 중인 적진의 한복판 원산이었습니다.

 

▲원산 상륙 작전을 위해 동원된 미 해병 수송선들이 원산항이 있는 영흥만에 정박해있는 모습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진격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가장 큰 문제는 유엔군 부대에 대한 원활한 보급이었습니다. 집중포화로 초토화 된 북한 지역은 대부분의 도로가 끊겨져서 육로로 보급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보급이 원활했던 부산항은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신속한 보급을 위해 원산상륙작전이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원산의 상륙을 막는 기뢰였습니다.

 

▲1950년과 1951년에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소해장비를 견인하고 작업하는 모습

 

당시 원산 앞바다에는 무려 3천 개의 기뢰가 집중 부설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미 해군사령관은 일본 정부에 소해정 참전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기뢰 제거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소해대를 한국전쟁에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뢰는 육지의 지뢰와 비슷한 것으로 바다 속을 떠다니다가 부딪히면 폭발하는데 일본 소해대는 이 기뢰를 그물로 건져올려서 처리했습니다.

 

 

 

사실 일본의 소해대 파병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패망 이후 전세계와 국민들에게 전쟁포기 서약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특별 소해대는 비밀로 승인되어 조직적으로 파병되었으며 모든 것은 극비에 부쳐졌습니다. 그리고 10월 25일 미군은 원산상륙에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미군의 상륙이 있을 때마다 일본 특별 소해대가 먼저 출동해서 기뢰를 제거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53척의 소해정이 동원되었고 1,250여 명의 소해대원이 참전했습니다.

 

 

▲패전 후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일본왕 히로히토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이유로 희생하며 미군 작전에 참전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은 패전 이후 아직 미국에게 점령당한 채 강화조약도 맺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최고 통치자는 천황이 아닌 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어떻게든 맥아더에게 협력하여 강화조약을 맺고 독립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그리고 일본은 전쟁협력이라는 실적을 통해서 한국전쟁에 일본이 기여했다는걸 발판삼아 한국문제를 둘러싼 정치회담에서 발언권을 획득하겠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9월 8일 일본은 마침대 미국 등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패전 5년 만에 주권을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 패망과 함께 전범국가로 전락한 일본은 1억 국민의 총참회와 함께 전쟁을 포기하기하고 탈바꿈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일본은 육해공 자위대 인원 30만 명, 군사예산규모 세계 3위. 하지만 군대가 아닌 자위대로 불리는 일본은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재무장은 없었을 겁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경제가 급속도로 살아났고 자위대 전당기라 할 수 있는 경찰예비대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 자위대란 이름으로 바뀌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군대 재무장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자위대는 1998년에 사상 최초로 육해공 자위대 통합훈련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가상작전 시나리오는 모 국가에 탈환된 동해의 섬을 탈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독도가 아니였을까요? 

 

치열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도 벌써 72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지난 72년간 많은 국제전쟁이 있었지만 세계대전이라고 부를 규모의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전문가들은 언제가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UN과 같은 다국적 기구를 통해 엄청난 재앙을 막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결국 제3차 세계대전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금 현 시점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확률은 낮습니다. 바로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초강대국의 존재 때문입니다. 지난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생각해보면 제1차대전 경우 제국주의의 충돌이라고 하여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가 중심이 도니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불가리아로 구성된 추축국이 격돌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잔재를 말끔하게 털어버리지 못한 또 한번의 세계대전입니다. 미국,영국,소련이 중심이 된 연합국과 독일,일본,이탈리아가 중심이 된 추축국이 격돌했었습니다. 이 두 세계대전의 공통점은 바로 연합국과 추축국의 전력이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초반과 중반에는 독일이 중심이 된 추축국이 압도하지만 막판에는 연합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결국 세계대전은 두 세력의 전력이 비슷해야 벌어집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미국이 참전하는 쪽이 무조건 승리하게 됩니다. 덕분에 현 상황에 세계대전이 일어날 확률이 낮은 이유입니다. 그래도 조그마한 불씨가 나중에는 대형 화재로 번지듯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지역 3군데가 있습니다.

 

1. 동중국해 (중국 vs 일본)

 

동중국해를 두고 아시아의 두 거인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만약 두 나라가 정면 대결을 펼친다면 중국이 우위지만 일본 뒤에는 미국이 버티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어 일본의 영토, 영해가 침범받는다면 미국은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일본 단독으로도 중국의 해군력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도쿄로 미사일을 날라지 않는 이상은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일본의 해군이 중국을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결론은 역사적으로나 현시점으로도 앙숙이자 라이벌로 있는 두 나라가 전면전을 치른다면 불똥은 삽시간에 동중국해를 넘어 한반도와 동남아시아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중동 (이스라엘 vs 아랍국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가장 활발하게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 바로 중동입니다. 중동은 석유뿐만 아니라 인종, 그리고 종교까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실타래와 같은 곳입니다. 중동에 전쟁을 몰고 온 나라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도 중동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시 수많은 전쟁을 통해 강력한 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폭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장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이란 핵시설을 폭격하고 이란이 핵 또는 이에 상응하는 생화학무기로 이에 보복한다면 중국 vs 일본 전쟁 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면전을 하기 위해서는 지상군을 투입해야 하는데 두 나라 사이에는 아랍국가들이 막고 있습니다.

 

 

3. 한반도 (대한민국 vs 북한)

 

한반도에서 전면전의 확률은 위에 소개한 두 지역보다 높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전력차이가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북한과 전면전을 펼쳤을 때 무서운 것은 수도권을 노리고 있는 장사정포입니다. 나머지 전력에서는 모두 압도합니다. 미국의 경제전문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북한은 1만여개의 무기를 보유한 세계 최대의 포병대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이 시작되면 서울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초반에 강세를 보일 수 있으나 결국 대한민국이 승리한다고 예측하였습니다.

 

 

물론 재래식 전투가 끝난 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지의 여부가 관건인데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핵 무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미국은 이를 요격하고 핵 보복을 시작할 것입니다. 미국의 펜타곤은 북한이 100개의 핵 보유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미국이 해당 무기를 요격·확보하는데에는 46일이 걸릴고 9만명의 병력이 필요한 것으로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