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6․25 전쟁 지원을 결정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16개국이 유엔의 기치아래 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북한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한 나라가 16개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투병력은 아니지만 의료진을 보내 국군과 유엔군을 도운 나라들도 있습니다. 인도와 유럽 4개 나라가 있는데 덴마크도 그 중 하나입니다. 덴마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병원선을 보내 부상병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치료해주며 인도주의를 실현했습니다.

 

 

덴마크는 가장 먼저 인도적인 의료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덴마크의 동아시아 선박회사는 자사가 소유하고 있는 8,500톤 크기의 유트란디아(Jutlandia) 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 배는 1934년 덴마크의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화물과 여객 겸용으로 건조되었습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3차례에 걸쳐 임무를 수행했는데, 당시 전투병력 대신 높은 수준의 의료진들을 한국에 보내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습니다. 그 시기에 유틀란디아 호는 최첨단 병원선이었고 한국군 병원에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군인들을 치료하여 완치시켜주며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였습니다. 실제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물 관리번호 AA0000430인 1951년 12월 19일 대통령비서실에서 생산한 것으로, 국방부 장관을 경유하여 육군총참모장, 해군총참모장, 공군총참모장에게 보낸 "외국병원선 한인 상이군인 수용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덴마크는 1951년 초 의료진과 의료장비를 갖추고 부상병 치료와 한국인 구호를 목적으로 '유틀란디아'적십자 병원선을 파견하였다. 병원선은 부산항에서 부상자와 환자를 치료하고 본국으로 돌아 갔으나, UN군사령관의 요청에 의해 다시 환자 300명을 치료할 준비를 갖추고 부산항에 돌아왔다. 이 중 100명은 외국인 장병환자, 200명은 한국인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준다고 하니 우리 군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한 중환자나 재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을 선별해서 병원선으로 후송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배는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3개월만에 356침대를 갖춘 네 개의 큰 병실과 수술실, 엑스선 촬영 실과 치과 시설을 갖춘 아주 현대적인 해상 종합병원선으로 탈바꿈하며 선체는 하얀 색이 칠해지고 선명한 적십자가 양현에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유틀란디아 병원선에 탑승했던 승무원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최정예요원들이었습니다. 42명의 간호사를 선발하는데 무려 4천명이나 지원하여 간호실력은 물론이고 환자에게 언제든 수혈할 수 있도록 혈액형까지 고려해 선발되었다고합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 1월 23일 한국으로 출항해 45일째 되던 날 부산에 도착하여 의료 지원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연합군 부상자의 본국 귀환과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한국과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에 걸쳐 의료지원 파견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산항에서 수시로 전방을 이동하며 환자진료를 하였지만 1952년 가을부터는 인천항으로 옮겨 의료지원 활동을 하였는데 999일 동안의 참전기간 동안에 한국에 3회에 거쳐 파견되었으며 연인원 630명이 근무하면서 24개국 4,981명의 외국인과 한국 민간인 등 15,000명을 치료했습니다.이는 공식기록에 불과하며 실제 ‘유틀란디아’호에서 치료를 받은 한국 민간인 수는 이에 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유틀란디아 호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보유 중이던 의약품과 의료기재들을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을 통해 각 민간병원에 기증하고 8월 16일 인천항을 통해 본국으로 다시 출항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틀란디아호는 덴마크로 돌아간 후에 여객선으로 개조되어 운항되다가 1964년에 그 수명을 다해 해체되었습니다. 유틀란디아 호가 정박해 있던 덴마크 코펜하겐 랑에리니에(Langeliniekaj) 부두에는 1990년 6월 15일 한국 참전용사회가 제작해 기증한 기념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에 전투병력이 아닌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나라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국이였습니다. 이들 의료지원단은 의료시설과 기술이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우리 군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한 중환자나 재수술이 필요한 환자 등을 선별해서 치료함으로서, 이들의 활동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유수의 의료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전투병력 참전국 못지않게 높이 평가되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유리한 상황일때 만약 전진을 멈추면 적에게 병력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은 군사상식에서도 가장 기초입니다. 한번 승리하면 적에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물론 병참상의 부담이나 아군의 피로 또한 고려해야 하지만 여기에 매달려 유리한 시기를 놓치면 더 큰 손실을 감내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북아프리카에서의 롬멜이고 국공내전에서의 마오쩌둥입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승리한 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하합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는 한계에 직면하고 병참선도 늘어질대로 늘어집니다. 장제스가 충분한 예비병력이 있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공산군의 전진을 손쉽게 막아내고 다시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여 내전 3년만에 광대한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단숨에 남하하지 않았을까요

 

 

첫째 김일성은 대규모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일천한 아마추어 전략가였으며 충분한 준비 없이 당장의 군사적 우세함만 생각하고 전쟁을 졸속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개인적으로 "서울이나 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해서는 안되며 적 주력을 신속하게 섬멸하여 단숨에 남하해야 한다"라고 조언까지 했습니다.

 

북한의 서울 점령 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 행사모습

그러나 수도 점령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에 목적을 둔 김일성은 이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점령한 다음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고 남한정권에 가담한 정치가, 재야 인사 등을 체포하고 학살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둘째 한강교를 폭파되자 북한군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충분한 도하장비를 준비하지 않은데다 이미 미공군의 전략폭격으로 병력의 주간 이동과 병참선에 큰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습니다. 6월 28일부터 시작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은 오폭으로 남한군이나 민간인에게도 극심한 피해를 주었지만 북한군 역시 큰 타격을 입었으며 김일성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여 스탈린에게 소련공군의 개입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됩니다.

 

 

애초에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전쟁을 시작한 대가였습니다. 만약 서울을 점령하지 않고 우회했다면 북한군은 훨씬 용이하게 속전속결로 한반도 전역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셋째 서부전선의 승리와는 달리,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국군 6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 점령이 일시적으로 지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 주력에 대한 포위 섬멸에 차질이 발생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차질은 결코 전체적인 전쟁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사실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조금의 차질조차도 향후 작전에 큰 지장을 준 이유는 북한군의 예하 사단장들이 창의성이 부족하고 수동적이며 지휘 계통의 경직성으로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 없을 경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이 북한군과 국공내전기 인민해방군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은 옌안의 토굴에 앉아서 간섭을 남발하는 대신, 기본 방침만 정하고 실무 차원에서는 예하 부대에 최대한의 행동상 재량권을 부여하여 지휘관들이 진퇴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오쩌둥 자신은 현대적인 군사 교육을 단 한번도 받은 적도 없고 몇권의 책을 읽었을 뿐 기초적인 군사 상식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 덕분에 린뱌오, 펑더화이, 천이, 류보청 등 지휘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신속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히틀러마냥 모든 지휘권을 자신이 틀어쥐고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책임만 주고 권한은 주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은 2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사단은 군단 지휘부의 지휘를 받아야 함에도 실제로는 김일성의 직접 지휘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부대의 효율적 지휘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습니다.

 

 

통신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각각의 부대는 전황의 전체 흐름이나 타 부대, 심지어 자신의 개별부대조차 어떤 상황에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김일성 또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잠망경 없는 잠수함이었던 장제스와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금도 김씨왕조는 다른 건 몰라도 권력 유지를 위해 군권만큼은 반드시 자기가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시간을 지연하게 된 이유는 우리 ​김홍일 장군이 패잔병들을 모은다음 한강 이남의 지연전을 맡아 훌륭한 지연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지연전은 북한군의 도하를 잠시나마 지연시키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벌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국 부산까지 순식간에 밀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안녕하세요 ~

 

 

한국전쟁중  중공군이 참전하고나서

 

중공군의 1차공세부터

 

7차공세까지 영토변화와 어떤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볼게요

 

 

6.25전쟁은 사실 3년 내내

 

 전투만 벌어진게 아니고

 

한반도 지형상 거의 대부분의 기간은 특정 고지

 

 장악하기 위한 고지전투였습니다.

 


큰 전투는 1951년 1월~6월

 

 단 6개월 내에 다 몰려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대규모 전투는

 

 휴전 바로 직전에

 

 아주 좁은곳에서 거의 100 만명이

 

붙은 금성전투입니다.

 

<금성전투>


자 그럼 오늘 쓰려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1950년 9월 15일

 

이후의 전투양상입니다.

 

 

중공군 1차 공세

 

 

1950년 10월 25일의 공세

 

1950년 10월 하순에 이르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머지않아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국군과

 

 유엔군은 추수감사절( 11월 23일)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추수감사절 공세’를 계획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과 두만강선까지 진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었습니다.

 

브레이크없이 질주하는 UN군의 북진을

 

적유령산맥에 숨어있던 중공군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공격을 시도합니다.

 

북진하던 UN군은 잠깐 움찔했으나

 

중공이 시위용으로 보낸 1~2개

 

 사단뿐일 거라 오판하게됩니다.

 


접전이 전개될 무렵 국군의

 

선봉부대인 제6사단 제7연대는

 

 그 진출로가 중공군의 공격 경로와 엇갈렸던

 

관계로 26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했습니다.

 

대부분 공격하던 부대들이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쳐 붕괴되거나

 

 그들의 포위망에 고립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었고,

 

 미 제1군단의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이게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였습니다. 

 
 
 
 
중공군 2차 공세

 

 

중공군의 제1차 공세

 

 의해 철수한 미 제8군이

 

 청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11월 7일 경,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중공군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됩니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가 조성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인정한 맥아더 원수는

 

그들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공세를 계획하게됩니다.

 

 그는“이번 작전이 전쟁의 최종공세가 될 것이며,

 

 10일 이내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4일‘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하게됩니다

 

 

그때 중공군은 제13병단이

 

 적유령산맥 남쪽 일대에서,

 

제9병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대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국군 및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이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바로 그 다음날인 25일,

 

그들의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1차공세후 딱 한달후에 날이였습니다.

 

중공군의 제2차공세도 제1차 공세와 같이

 

유엔군에게 기습적이었습니다.


유엔군측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취할 때까지도

 

중공군의 병력은 의용군으로

 

구성된 단지 몇 개 사단에 불과하며,

 

 중국이 주력을 투입해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직적 지휘체제를 갖춘

 

중공군 3 0개 사단 30만여 명이

 

 투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숫자에중공군>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도처에서

 

출현한 중공군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은 미 제8군의 우측방으로 주공을 지향시켜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하게됩니다.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힘으로 밀어닥쳤습니다..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괴멸 되었으며,

 

장진호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포위되어 버리고맙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유엔군사령부는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마치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공세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중공군의 전술은

 

영원을 거쳐 순천 평양까지 우회하여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섬멸하여

 

전쟁을 바로 끝낼 참이었으나

 

이제 막 참전한 터키군이 

 

덕천에서 중공군을 3일동안 막아냅니다.

 

이때가 사실 6.25 전쟁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전쟁당시 터키군>

 

이 3일을 못버텼으면 연합군 대부분이

 

전멸할 수도있는 위기였습니다.

 

어쨋든 이 전투로 터키군은 참전하자마자

 

절반을 잃었으나
연합군이 후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후퇴는 성공했으나 평양에서 방어선을

 

계획한 연합군은 
항공촬영 결과

 

남하하는 모든 신작로, 대로, 산길, 농로 등에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내려오는걸 확인하고

 

심지어 평양 동측으로 또다시

 

우회하는 중공군 확인하고

 

"38선으로의 후퇴" 말고는 답이 없다며

 

전면 철수를 명령하게됩니다.

 

 

 

 

중공군 3차 공세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는 강력했고,

 

아군의 피해가 누적돼 있었습니다.

 

38선까지 후퇴한 아군은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부대를 배치합니다.

 

 미 1군단, 25사단과 국군 1사단은 임진강에 배치됐고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은 각기

 

 동두천과 포천에 배치하게됩니다.

 

 

 

 

 

 

춘천일대에는 새로 창설된

 

국군 3군단, 2, 5, 8사단이 배치됐고

 

9사단이 동해안에 배치됐습니다.

큰 피해를 입었던 부대는 후방에 배치됩니다.

 

 미 1 해병사단은 마산에, 2사단은 원주에,

 

 기병사단은 의정부에,

 

 3사단은 평택에, 7사단은 대구에 배치됐습니다.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국군 7사단은 원주에 배치됩니다.

 



문제는... 개전 초기 38선과 같았습니다.

 

 

그냥 일자로 쭉 그은 선이니만큼 각 부대가 맡아야

 

 할 공간이 너무 넓었습니다.


그 때 아군이 바란 것은 북진 때

 

김일성이 바란 것과 같았습니다.

 

중공군이 38선은 넘지 않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북진 때 그랬듯 산산조각 납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예정된 건

 

방어가 아닌 후퇴였습니다.

UN군이 38선을 점령하고 재정비를 하는 동안

 

 중공군도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차기 공세를 언제 할 것이냐였습니다.

 

팽덕회는 12월 중후반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38선 이북에 UN군이 남아 있을 때였고,

 

38선을 넘는 공세는 2~3월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기에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 후,

1~2개월 정도의 휴식시간을 부여한다."

모택동은 이를 거부합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UN군에

 

유리해질 뿐이라는 거였죠.


3차 공세, 혹은 정월 공세의 시작은

12월 31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공작이 시작됩니다.

 

북한군 2군단이었죠.

 

길원팔 유격대와 10사단을 중부전선의

 

 후방으로 침투시킨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빨치산과 함께 이들의 침투는 성공리에 끝났고,

 

인제-현리는 물론 홍천까지 침투에 성공합니다.

미 공식 전사에서는 이를

 

 "군사적 묘기이며, 북한군 2군단은 걸어다니느 공수군단"

 

이라고 평했습니다.

목표는 개전 때와 비슷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전선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배후로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1차 공세부터 계획한 그대로였습니다.

 

약한 국군을 뚫고 아군 전체를 쌈싸먹는 것이었죠.

"저녁 무렵이 되자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특유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난 뒤에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이 시작됐고,

 이어 적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들이닥치면서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뚫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물밀 듯이 전진하는,

전형적인 중공군식 인해전술이었다.

우리 1사단과 인접 국군 6사단 사이의

경계인 전투지경선이 먼저 밀렸다.

 우리 쪽에서는 12연대가 나가 있던 곳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

 전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앞에 나가 있던

 부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11연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12연대와 15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선전과 평양 1호 입성 등

 1사단이 쌓았던 전공이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역전의 1사단도 무너지다니…."

 

백선엽장군에 회고록입니다.



이 상황은 6사단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예 공격받지 않은 1사단 옆의 미 25사단과 달리

 

 6사단과 같이 있던 미 24사단은 같이 공격받았죠.

 

중공군은 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언제나 최소 3배의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겨울이라서 땅이 굳었고, 강도 얼어서 방어선을

 

제대로 짤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공세 3일째인 1월 2일,

 

리지웨이는 직접 의정부로 달려가

 

국군 6사단과 같이 공격받은

 

미 24사단의 후퇴를 목격합니다.

 

 이어 바로 철수명령을 내리죠.

 

서울을 포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딱히 서울의 정치적인 의미를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군의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1월 4일 오후 1시에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하고
오후 3시에 중앙청에

 

4개월만에 또다시 인공기가 걸리게됩니다.

 

 

 

이렇게 1.4 후퇴가 시작됩니다.

 

 그래도 개전 때에 비해서 미리 서울을 포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갈 수 있었고,

 

한강이 얼면서 피난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 혹독했던 추위만 빼면요...

 

이 때 남쪽으로 피난간 게

 

서울시민과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포함해

 

22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중공군 4차 공세  

 

 

 

중공군 4차공세는 1950년 2월 11일부터

 

일주일 간의 전투입니다.

 

중서부 전선의 연합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수십만 중공군 대군이 또 다시 남하합니다.

 

이 때 중공군의 남하 돌파구는

 

양평의 "지평리"였습니다.

 

여기서 지평리전투가 벌어지게됩니다.

 

 

  

이 지평리만 접수하면 중공군으로써는

 

4차공세마저 성공시키게 되는거였죠

 

그리하여 중공군은 지평리의 후방인

 

 

곡수리까지 차단하여

 

후방지원을 막은 후 약 4개 사단으로 포위한 다음

 

야간에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

(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

 

 3일간 벌인 격전이었습니다.

 

중국4개사단을 불과 1개연대와 1개대대로

 

전부 다 막아내게됩니다.

 

보급은 이제 막 발명된 "헬리콥터"가

 

그 위력을 떨치게되고

 

 보급품 수송과 부상자 후송 등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헬리콥터의 역사는 지평리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무려 3일 밤낮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급기야 미군 특공대가 후방의 곡수리를 돌파하여

 

연합군과 지평리가 다시 연결됩니다.

 

이 때 참여한 중공군은 그 피해가 너무도 막대하여

 

이후 전투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할 정도 였으며

 

지금까지 1~4차 공세 중 유일하게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가 됩니다.

이후 서울까지 탈환하게됩니다.

 

 

 

 

 

중공군 5차 공세   

 

 

4월 22일, 공사군의 5차 공세, 춘계 공세,

혹은 4월 공세가 시작됩니다.

 


 UN군 대 공산군의 힘과 힘의 대결이었습니다.

 

개전 이후 최고 규모의 충돌이었고,

 

이것이 전쟁의 향방을 가를 것이었습니다.

 

 


"서울을 빼앗아 모 주석께 노동절 선물로 바치겠다."

중공군 33개 사단과 북한군 12개 사단이

 

 참가한 4차 공세가 시작됩니다.

 

"공격간에 적들은 남쪽으로 10-50 km 격퇴되었고,

중공군 및 북한군의 평균 공격속도는

 서부전선에서 1일 6-7 km였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및 북한군은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다.

 공중 우세권과 큰 기동성을 이용,

적은 격멸되는 것을 피해 38선 남쪽의

사전 준비된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상호 협동조직과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부대의

부분적인 정지는 큰 승리를 쟁취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

 

서울 북방의 사창리에서는 국군 6사단이

 

붕괴직전까지 가는 대참사를 겪었지만

 

설마리에서는 영국군이 최대의 혈투를 벌이는 등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과 보급능력이

 

서서히 제능력을 발휘하여

 

최종적으로 공세를 전부 다 막아내게됩니다.

 

중공군은 참전이후 최악의 피해를 입게됩니다.


4월 26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공세의 실패를

 

보고하고 29일까지 조기 종결합니다.

진격은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의 후퇴는 패배가

 

 아닌 계획된 철수였고,

 

이런 상황에서 너무 큰 피해가 나버린 것이죠.


하지만 그가 공세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기 공세를 빨리 하기 위해

 

이번 공세를 미리 끝낸 것이었죠.

 

이렇게 5차공세도 연합군 승리고 끝납니다.

 

 

 

 

 

 

 

중공군 6차 공세   

 

 

 

중공군5차 공세(1차 춘계공세)

 

좌절되었음에도 마오쩌둥은

 

6차공세(2차 춘계공세) 이미 명령합니다.

 

"5월 첫 주, 미군 정찰기는 중공군 후방에서

 

4,000대 이상의 차량 이동을 관측하였고,

 

그 가운데 반 이상이 남으로

 

향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5월 10일, 밴 플리트의 정보 참모 타켄트는 중공군의

 

"서울에 대한 전면 공격이 임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밴 플리트는 8군의 공격작전을 취소하였어요

 

그리고 리지웨이에게 9개 중공군 사단과 3~4개

 

 북한군 사단이 72시간 내지 96시간 안에

 

공격해 올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10개 중공 및 북한군 사단이 주공을

 

도와서 견제 공격을 할 것임도 예상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서울이 아닌

 

적부대 격멸로 목표를 바꿉니다.

 

UN군의 화력을 잘 쓸 수 없었던 중동부 산악 지대로

 

 전장을 바꾸고 거기 몰려 있는

 

국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목표가 됐던 것은

 

국군 3군단, 3, 7, 9사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3중 포위망을 준비합니다.

 

여기에 좌측의 국군 5사단과

 

우측의 국군 1군단 소속 수도,

 

 11사단까지 섬멸하는 계획이 준비됩니다.

이를 위해 팽덕회는 38개사단 중 18개를 동원합니다.

 

남은 20개 사단 중 12개 사단은

 

서부지역에서 UN군을 견제,

 

나머지 8개 사단은 다시 가평-춘천 방향으로 기동해

 

서부와 동부를 다시 가를 예정이었습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국군 6사단이

 

여기에 다시 맞서야 했죠.

 

<사진출처 :6사단>

 

 

5월 12일, 중공군 사단들이 공격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5월 16일, "9개 중공군 사단과 4개

 

포병 연대는 (미군 정찰기에)

 

 탐지되지 않고 화천 저수지 동쪽 인제 가까이에 전개하여

 

한국군 5, 7, 9사단에 대한 주공 준비를 마칩니다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6차 공세 하루 만인 5월 17일 밤

 

강원도 인제군 현리 일대의 3군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패퇴하였습니다.

 

현리전투라고 칭해지는 약 9일간의 전투는

 

사실상 일방적 패주에 가까웠습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양측의

 

피해가 막심한 상태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내심 휴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후방지원을 해주던 소련 역시 전쟁을 중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51년 6월 24일,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밀라크가 휴전을 제안합니다


드디어 휴전협상이 시작됩니다.

 

 

 이제 전쟁의 끝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사실 그것은 더욱 더 처참한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협상은 2년을 넘게 질질 끌었고

 

그 사이 양측은 서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1년 간보다 더 참혹하고 무의미한 전투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조인되었던 때의 전선은

 

1951년 6월 북한군이 침략을 개시했을

 

 때의 전선과 대동소이했다)

 

 

 

 

중공군 7차 공세    

 

 

 

이건 6차공세에서 무려 2년이

 

지난 1953년 5~7월의 전투입니다.

 

그 2년동안은 처음에 얘기했듯 고지전이

 

주류였고 전면 영토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7차공세는 사실 휴전협정이 이미

 

거의 완료된 상태에서의 기 싸움이었죠

위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의 휴전선과 비슷하긴 하지만

 

중부전선에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어요

 

 

 

그곳이 바로 북한의 금성지역인데

 

사실 6차공세가 끝났을 당시만 해도

 

저렇게 금성지역은 우리 땅이었어요.

 

그런데 7차공세에서 무려

 

5개 군단급의 수십만 대군이

 

금성지역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금성천 북방 지역의 땅을

 

북한군에 내주고 말았어요...

 

만약 끝까지 버텼으면 국군 6사단 8사단은

 

후방 차단되어 전멸했을거에요

 

 

 
사실 이 7차공세에서 중공군은 금성돌출부를

 

공격하여 자기네들 땅으로 만들고

 

금성천까지 건너 내려와 백석산

 

적성산 초입까지 공격했습니다.

 

놀란 국군이 백석산 적성산에 방

 

어선을 쳐 겨우 막아냈고

 

다시 금성천 남단까지 공격하여

 

중공군을 쫓아내버립니다.

연합군은 금성천을 건너 다시

 

돌출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휴전협정 파기를 우려한

 

연합군 지휘부의 명령으로

 

거기서 반격을 멈추는 바람에

 

결국 그대로 휴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석산 적성상 북쪽에 있는 금성천이

 

바로 DMZ 한가운데 있어요)

 

 

 

 

 다가오는 6월25일...

 

모두 잊지않으셧으면 좋겠습니다..

 

6시간동안쓰느라 힘드네요;

 

공감한번씩부탁드려요^^필승!

 

 

 

 

출처 및 참고자료: 나무위키.나무위키.구글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한국전쟁 중 정말 믿기힘들

 

정도로 대단했던

 

김만술 상사가 이끄는 36명의 국군이

 

중공군 800명을 궤멸시킨

 

6.25전쟁중 가장

 

신화적인 전투로 칭송받은

 

투입니다. 

 

자그럼 지금부터 기적의

 

배티고지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할게요

 

 

 

 

중공군은 휴전 성립을 목전에 두고

 

주요지형을 확보하기 위하여

 

결사적인 국지공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국군은 대대는 연대의 우 일선으로서

 

제5, 6, 7중대를 FEBA에 배치하고

 

 제6중대 2소대(김만술대위)를

 

전초진지인 '베티 고지'에

 

배치하여 방어를 실시했습니다.

 

김만술대위

 

그러나 급작스러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이에 국군은 김봉건 대령의

 

 제2대대는  김만술 대위가 임관하기

 

 전까지 2일에 걸쳐

 

 중공군을 겨우 격퇴하였으나

 

각 소대는 병력을 절반 이상 잃게됩니다.

 

이 고지를 중공군이 점령한다면

 

국군 1사단을 몰아낼뿐만 아니라

 

국군 제 2군단의 돌출되어 있는

 

방어선을 제거하여 2군단을

 

위협할수도 있었습니다.

 

베티고지 지도

 

 전투가 시작될때 마다

 

다시 군을 재편성 해야했습니다.

 

당시에는 병력이 많았던 중공군이

 

 사실상 유리했었고 국군은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그 피해가 매우 커서 1사단에게는

 

 죽음의 고지였다고 합니다.

 

장마철이라서 탱크 기동에도

 

큰 방해가 되었고 화력운용에도

 

 차질이 있었어습니다.

 

 

 

수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였습니다. .

 

15일, 제6중대 2소대장 김만술 상사는

 

 13일∼14일간의 적 공격으로

 

 전투력이 상실된 제7중대 1소대와 교대하여

 

 '베티 고지' 방어임무를 인수했습니다.

 

김만술 대위의 소대가 베티고지에 투입되었을

 

 당시에 3개의 봉우리중 중앙과

 

동쪽은 제 1 보병사단이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서봉은 중공군에게 빼았겼던

 

상황이였습니다. 

 

여기서 사실상 1개 소대로

 

그 수많은 중공군을 공격하는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나

 

김만술 대위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흥에빠진 중공군

 

기습공격을 감행햇습니다.

 

항상 공격에 급급했던 중공군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당황하여

 

중공군 5명이 사살당하고

 

8부 능선을 돌파하여 서봉을 탈환하게됩니다.

 

 

 베티고지 상황도

 

서봉을 탈환 후에 김만술 대위는

 

 바로 소대원들에게 방어선 구축을 명령하고

 

19시 30분 중공군은 서봉 재탈환을

 

 위하여 2개 중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

 

전설적인 베티고지 전투

 

 시작되었던겁니다.

 

중공군 중대는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만술 대위는 상부에 포격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마저도 포격으로 인해

 

 통신두절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

 

소총과 수류탄으로 대항하던

 

김만술 대위의 소대는 중공군이 다가오자

 

백병전을 시작하게됩니다.

 

 

 

그 날 19:00경, 약 1개소대 규모의 적이

 

각종 포의 지원 하에 공격을 개시,

 

아군포화를 뚫고

 

교통호까지 접근하여 백병전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교통호로 뛰어든 적을 소대장이 선두에서

 

총검으로 격살하자, 공포감에 질렸던

 

 병사들이 일시에 용기를 얻어

 

용전분투한 결과 적은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패주했습니다.

 

22시, 적은 다시 동 고지 중앙봉을 중심으로

 

 좌, 우측으로 1개 중대 및 2개

 

중대 병력으로 각각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아마 그떄 국군 소대원 수보다

 

 몇배는 많았습니다 .

 

 

 

소대장은 지원포격과 사

 

격으로 이를 저지하였으나,

 

일부 적이 교통호로 침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여 그중 1발이

 

동굴 내에서 폭발하여

 

소대의 무전기를 파괴했습니다.

 

소대장은 재빨리 총검과 수류탄으로

 

적 4명을 폭사시키고 소대원들도

 

 계속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을 후퇴시켰습니다.

 

 통신이 두절된 소대장은 24:00경,

 

 연락병을 중대본부로 보내,

 

전황보고와 통신망 복구를 요청하였고

 

대대장은 즉시 대대통신병 4명을

 

파견해 줌으로써 16일 02:30경,

 

통신이 개통되어 중대와 연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04:00경, 적은 베티 고지와 그 좌측지점에서

 

 각각 1개 소대규모를 투입시켜 공격하였으나,

 

아군은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몰살시켰습니다.

 

이때 동굴에 접근하는 적 1명을

 

소대장이 총검으로 격살했습니다.

 

05:40, 적은 중앙봉 반사면에 1개

 

중대 규모이상의 병력을 투입시켜

 

공격을 계속하자 소대장은 수류탄전과

 

백병전(이때도 소대장이 3명의 적병을 사살)을

 

 전개하였으나 수적으로 불리함을 직감하고

 

 전소대원을 동굴 속으로 대피시키고

 

 후방의 포사격과 더불어 진내사격을 실시한

 

결과 적은 북방으로 철수했습니다.

 

 

 

06:00, 적은 안개 낀 틈을 이용,

 

중앙봉과 좌측봉으로부터 다시 공격을

 

 계속하여 약 2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적은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제2소대는 07:30까지

 

18시간 반 동안 무려 19회에 걸쳐

 

도합 3개 대대 병력의 적과 싸워

 

 동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중공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추정)450명

 

포로 3명 등 발생했고,

 

 아군 피해는 전사 24명이었습니다.

 

김만술 소대장을 비롯하여

 

 12명은 생환했습니다.

 

적의 매복사격으로 인한 부상을

 

무릅쓰고 본부로 뛰어가 전황보고와

 

통신시설복구를 감행한 이강로 하사에겐

 

충무무공훈장, 각분대의

 

 분대장인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김만술 상사는 이 전공으로 후일 한국과

 

미국의 최고무공훈금성태극훈장

 

 십자훈장을 수여 받게됩니다..

 

 

안타깝게도 24명의 국군용사들이 산화한

 

 '베티 고지'는 휴전이 되면서

 

 남방한계선 너머 비무장지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김만술 상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끈질긴 결사항전(변변한 지원도 없이

 

 수류탄, 철모, 야전삽, 총검으로 또는

 

맨주먹으로 처절한 백병전을 감행함으로

 

중공군 3개 대대병력에게 큰 손실을 가해

 

 그들의 투혼이 오늘날에도

 

 신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7.13 중공군의 금성 전투

 

 맞물린 시기에 벌어진 한국전쟁

 

대미를 장식하는 격전이었습니다.

 

불가능하기때문에 가능한것이다

(Because it is impossible possible)

-맥아더장군-

 

 한국전쟁 최후의결전 금성전투

http://kimssine51.tistory.com/116

6.25한국전쟁 처참한고지전

http://kimssine51.tistory.com/147

한국전쟁 피의능선 백마고지전투

http://kimssine51.tistory.com/71

 

공감사랑니다↓↓

 

사진및참고자료출처:위키백과.나무위키.군사무기카페.구글

 

 

안녕하세요!

 

우리나라는 국토가 두개로 나누어져 적대적인 두개의

 

정부가 존재하고 있고...

 

같은민족인 그 둘이 모든것을 걸고 서로를 말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것이 불과 수십년전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바로 그 한개의 정부이고

 

다른하나는 북한이죠...

 

 

 

대한민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위해 무력으로

 

밀고내려왔었던 북한이 아직 건재하고 있는한

 

제2의한국전쟁,제2의 6.25전쟁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현재까지 수많은 도발을 하고 위협을하고

 

전쟁을 운운하고 있는게 바로 북한입니다.

 

모두가 알듯이 6.25전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질뻔한 전쟁이었죠..

 

3년동안 지속되었던 전쟁에서 그 어느것하나 중요하지않은

 

사건이나 예사롭지않은 전투가 없었겠지만

 

비교적 잘 알려지지않은 글허지만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준 전투를 알아보면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번글을 써볼게요

 

이번에 쓸 한국전쟁 전투는

 

마산지구전투. 다른말로는 마산방어전이라고 불려요.

 

전쟁 시작부터 낙동강 방어전까지의 북괴군 루트

 

38선 기준으로 맨 좌측에서

 

국군 1사단을 깨고 파주시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부대가 보이시나요

 

바로 북한군 제 6사단 입니다.

(네모 위에 XX 쳐진게 사단이라는 뜻이고 네모 왼쪽의 숫자가 사단 소속)

 

방호산 6사단장

 

팔로군 출신에 조선인들로 만들어진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훗날 북한군 6사단)의 사단장이자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다수의

 

 전투경험이 있던 엘리트 부대였습니다.

 

(역시 조선족은...적인듯하네요)

 

 

 

북한 6사단장인 방호산은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한국전쟁의 적극적인 찬성을 했었고

 

6.25전쟁당시 나이는 30대중후반으로

 

젊은 엘리트 지휘관이었습니다.

 

중국 만주사변이후에 흑룡강성 백산에서

 

공산당항일유격대에 참가한적도 있었고

 

1936년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동방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940년에 연안으로 들어와서

 

간부훈련반,중국중앙해외사업위등에서

 

교육을 받았다고하니 그 당시 남북을

 

통틀어서도 솝꼽히는 엘리트였다고합니다.

 

방호산의 이러한 경력은 당연하게도

 

김일성으로부터 감시와 질투의 대상이였고

 

당시는 전쟁으로 남한을 삼키려고 북한군이

 

급속도로 증강되던 시기였기 떄문에 김일성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고합니다.

 

김일성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팔로군을

 

이끌던 방호산은

 

북한정권 수립이후에 북한으로 들어와

 

그대로 북한군 제 6사단이 됩니다.

 

당시 서부전선 주공은 북한 1사단인데

 

북한 6사단은 조용히 시작하다가

 

그러다 어느새 튀어나옵니다.

 

6월 27일

 

한강을 도하한 첫 북한군입니다.

 

 

 

한강하구는 조류가 쌔서 도하하기 어려운 곳인데

 

저런 쪽배를 타고 도하해서 점령합니다.

 

저런 쪽배가 건널때까지

 

저지할 국군 병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김포반도를 점령해버리고

 

단숨에 충청도 천안시를 점령하며

 

충청도를 점령해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부터가 정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시기입니다.

 

북한군들이 그다음으로 진출한 곳이

 

전라도입니다.

 

 

사진을 봐도 모든 북한군은

 

 포항-대구 쪽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당연히 유엔군 입장에서도 거의 모든 부대를

 

대구-포항 라인에 집중 시켰고

 

그러다 보니

 

북한군 6사단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광주 목포 순천 등등 전라도를

 

 차근차근 점령을 합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진주시였습니다.

 

진주는 옛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 거점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큰 도시중 하나였고

 

고려시대때도 왜적을 막는 중요 요충지였습니다.

 

임진왜란때 김시민 장군의 진주혈전은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좀더 자유로이

 

활동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던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유엔군은 당장 눈앞의 적 때문에

 

북한군6사단 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천을 먹고

 

 

6사단은 모터싸이클 부대까지

증원 받으며 신나게 기동했다

 

진주를 점령하게 됩니다.

 

 

8군사령관 워커 트루먼

 

진주를 점령했단 소리에

 

유엔군사령부는 강력한 뒷통수를 맞았죠

 

정말 큰일이 난겁니다.


 

위 지도는 마산 방어전 이후 상황도여서 그렇지

 

6사단이 진주까지 진출할때까지

 

방어선 서쪽에는 그 어떤 병력도

 

없었습니다.. 조금도..

 

미 8군사령관 워커는 급하게

 

 

상주에 있었던 미 25사단을 긴급이동 시키게됩니다.

 

 

진주에서 마산까지는 40km 마산이 넘어가면

 

 코앞이 부산이라 무조건 막아야했습니다.

 

 

미군25사단

 

25사단은 상주에서 마산까지 130km 거리를

 

 하루만에 도착하게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알수 있겠죠..


 

 

미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마산 방어를 맡은 25사단장  킨소장은

 

 

 Task Force "Kean" 이라는

 

특수임무부대를 만들게됩니다.

 

 

 

초반부터 북한군 6사단은 진동리

 

일대를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많은 사상자 나오는 접전이 되었습니다.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

 

-북한6사단 방호산 소장-

 

 

 

그야 말로 혈전이었고

 

이걸 빼앗으면 부산이 코앞이고

 

이걸 뺐기면 부산이 위험해진다

 

서로에게 중요했고 그래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습니다.

 

국군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 부대가 바로

 

 

 

김성은 장군이 이끌었던

 

한국 해병대였습니다.

 

 

이들은 진동리 일대에 진출하던

 

북괴군을 만나 109명을 죽이고

 

6명만 전사하는 전과를 올리게됩니다.

 

 

 

이어서 야반산(342고지)이라는 곳을 공격해서

 

북한군을 몰아냈고

 

마산과 진동리를 이어주는 도로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 전투로 북한군6사단은 마산으로

 

 진출이 실패하게 되고

 

유엔군이 반격할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김성은 부대는

 

 전장병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을 받게됩니다.

 

북한군은 포기하지 않고 비정규전 그러니깐

 

빨치산의 토대가 된 게릴라 부대까지 운용했습니다.

 

 

피난민인척 검문검색을 통과한후

 

몸속에서 총을 꺼내 유엔군을 죽이고 빠지고

 

국군 전투복을 입고 아군인척 다가와 쏘고 빠지고

 

미군들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였습니다.

 

같은 동양인이라 군복으로 피아 구별했는데

 

위장을 하고오니 피아식별이 안됬던거죠


 

 

 

거기다가 레이디퍼스트를 외치던 미군들에게

 

 아녀자인척 다가와 총 칼로 쏘고 찌르고 도망치고

 

정말 모든 방법을 다 썼습니다.

 

하지만 유엔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킨 특임대

 

먼저 킨 특임대는

 

제 1해병여단 예하 89전차대대와

 

25사 5연대 전차중대 해병 1전차대대의

 

전차전력들을 끌어모아

 

1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킨 특임대 소속 전차 대원

 

북한군 6사단은 전차25대가 고작이었습니다.

 

 

 

8월 6일 25사단은 전차들을

 

 앞세워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44도의 무더운 날씨 속에

 

열사병 환자들도 속출 했지만

 

미25사단과 김성은부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일동안의 혈전끝에 봉암리를 점령하고

 

진주가 코 앞인 진주고개까지

 

 진출하게 됐습니다.

 

이대로 가면 진주 탈환도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킨 특임대에

 

후퇴 명령이 떨어지게됩니다.

 

대구-포항 방어선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죠

 

북한군 4사단이 영산을 공격하고 

 

 

 

성주에 있던 3사단이 낙동강을 건너고 있었고

 

포항 방어를 하던 국군 제 3사단이 포위 되는 등

 

유엔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마땅한 예비군이 없던

 

유엔군은 25사를 마산으로 빼고

 

긴급하게 배속되었던 예하 부대들은

 

 대구 방어선으로 배속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 마산 전투로

 

북한군 6사단의 마산 진출은 좌절 됬고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국전쟁 역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

http://kimssine51.tistory.com/80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때까지

 

북한군 6사단은 아무것도 못했고

 

25사단의 맹공에 부대가 해체 되버립니다.

 

퇴로가 끊어지자 방호산 6사단장은

 

점령지를 통해 분산된 북한군을 모아

 

그 해 11월에 북으로 돌아갑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북한군들은

 

 지리산에 숨어들어 빨치산이 됬었고

 

6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인 9월까지

 

짧은 3개월동안

 

북한군 6사단은 한국전쟁사에

 

큰 획을 그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김포반도 점령과

 

빠른 호남지방 평정은

 

유엔군으로 하여금 심각한 위기감을 심어줬고

 

2개 사단만 준다면 이 전쟁을 끝내겠다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북한군을 우습게 본

 

 미군지휘부의 뒷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어줬죠.

 

(원래 유럽으로 파견시키려했던 미3사단까지

 방어선에 투입할 정도로 긴박했었다고합니다.)

 

어쩌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오히려 유엔군에게는 약이 된건지도 모르는거죠.

 

북한군6사단은 3개월 동안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었는데

 

바로

 

인민재판입니다.

 


 

가는 곳마다 인민재판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가장 잔인하고 악마같은 부대였습니다.

 

한편 도망친 방호산은 영웅칭호를

 

 받으며 인민영웅으로 추앙받습니다.

 

휴전 후에도 승승장구하며 북한 동화책에도

 

 나오고 여기저기 선전물이 막 나오게됩니다.

 

하지만 59년 김일성이

 

권력 다지기를 하면서 연안파 숙청때

 

방호산도 같이 숙청당해버립니다.

 

그렇게 한국전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부대는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우리 모두는

 

마산전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북한군 6사단이 광주, 목포를 점령하지 않고 

 

 바로 순천 -진주로 진격했다면

 

한국전쟁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꺼라 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나라를지킨 6사단청성부대

http://kimssine51.tistory.com/121

 

한국전쟁 중공군의 1차~7차공세

http://kimssine51.tistory.com/114

 

한국전쟁 가장 치열했던 용문산전투

http://kimssine51.tistory.com/84

안녕하세요

 

제가 6사단 출신이라 그런지

 

6사단에대해서 글을 자주 쓰는거같네요^^;;

 

 

 

이번엔 한국전쟁당시 청성부대 6사단

 

활약에대해 빠르고 쉽게 써보도록할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북괴 김일성(金日成)의 명령으로

 

완전무장한 20만의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시작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북괴군은 국군보다

 

약 2배 병력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북괴군의 병력 중 3만여 정도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었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 온 김일성의 노력으로

북괴군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

 

 부담을 느낀 미국은 국군에게 군수물품 및

 

 

무기를 지원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도,

 

장비 면에서도 열세인 상황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군은 동시다발적인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즉 북한군의 연속적인 승리와

 

대한민국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등장하니,


그것은 바로 김종오(
金鍾五)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의 활약이었습니다

 

 

 

 

신화의 시작, 춘천대첩


 

 

북괴군의 초기 남침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괴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공략하고,


 

북괴군 제2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공략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 주력의 후미를 차단,

 

제1군단과 협력하여 격멸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의 주력은 북괴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6월 30일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전세가 유리했던

 

 그들은 왜 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던걸까요

 

 

그 이유는 김종오(金鍾五) 장군 예하

 

6사단 장병들이


춘천에서 북한군 제2군단 병력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성공,


북괴군의 전쟁 전략에 대한 막대한 차질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 24일.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외출 및 외박,

 

휴가를 가지 못했던 장병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군을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개전 초기 국군은 인원 편제가 부족한 상태에서

 

 적을 맞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개전 발발 2주 전,

 

 6사단장에 부임하였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판단 하에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


전쟁에 대비한 진지공사와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혼란없이 적군에 대한

 

전투를 차질없이 시행할 수 있었던겁니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은

 

춘천에 주둔한 6사단 7연대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방어준비가 되어있는

 

7연대 병력들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심일(沈鎰) 소위가 이끄는 특공대에 의해

 

 자주포(SU-76) 2대가 파괴당하고 맙니다.

 

 

(가운데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당시 북괴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은

 

강원도 인제로 진격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북괴군 제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제2사단이

 

춘천 제압에 실패하자


제7사단을 춘천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제7사단은 인제에 최소의 병력만 남기게 됩니다.

 

 

 

제2사단의 공격은 잘 막아내었으나,

 

제7사단이 원군으로 합세하여


춘천을 공격하자 신성모(
申性模) 국방부장관은

 

 6사단에 대한 철수 명령을 하달합니다.


 

 

 

이미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었고,

 

아군의 주력이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만이 춘천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적에 의해 6사단이 포위되어

 

 

격멸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6사단은 6월 29일 춘천을 포기,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6사단 19연대 소속 조달진(趙達珍) 일병은

 

 

자신을 포함한11명의 특공대를 구성,

 

6월 28일 10시경 홍천 말고개를 지나던


북괴군 전차대열에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하는

 

 성과를 이루게됩니다.

-그를 비롯한 육탄 11용사

 

현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춘천에서의 승리는 적군의 발을

 

 멈추게 하였으며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남침에 대한 논의와


 

 패퇴한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는 등의

 

소중한 시간을 벌인 전투였으며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춘천에서의 패배를 겪은 북괴군 지휘관들은

 

 일제히 교체되게 됩니다.

 

 


 (김무정 - 훗날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한다.)

춘천에서 패배한
김광협(金光俠) 대신

 

 김무정(金武亭)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제2사단장 이청송 대신 최현(崔賢)이 임명되었고


제7사단장 전우 대신
최춘국(崔春國)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제7사단은 제12사단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대통령 부대표창 1호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전투

 

 


 

 

임부택(林富澤) 장군은

 

 당시 6사단 7연대장이었습니다.


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충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쉴 틈도 없이 7연대에

 

 김종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
"우리를 따라 내려온

 

북괴군 제15사단을 격퇴하라."

7연대 병력들에게는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644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6사단 7연대 2대대 병력 앞으로


 

웬 여성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재옥(金在玉)
이었으며

 

 동락국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녀는 2대대장
김종수(金鍾洙) 소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북한군 15연대 병력들이

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김종수 소령을 비롯한 2대대의

 

각 중대장들은 김재옥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하였더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북한군이 경계병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들은 동락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적15사단

 

48연대 병력에 대한 기습을 실시하였고

 

 

 

북괴군 천여 명을 사살하고

 

중장비를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데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국군은

 

 북한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무기를 획득하였고


정부는 이 무기를 UN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내

 

 

 

소련이 북한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게됩니다.

 

국군이 반격한 전투 중 최초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 대한 1계급 특진과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김재옥 여교사는 이때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득주(李得周) 소위와 결혼하게 됩니다.

 

 

 

 

 

 

 

 

 

 

가자, 압록강으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으며…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합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北進)

 

 시작하게됩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쳤고


국군은 통일을 위하여 북한군을 추격하며

 

 

압록강을 바라고 진격했습니다.


 

1950년 10월 22일

6사단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장군이

 

지휘하는 수색대대원들이


평안북도 묘향산 부근에서

 

 김일성의 캐딜락을

 

 노획하는데에 성공합니다.


 

 

1950년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1대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게 됩니다.


국군과 UN군 중 이들을 제외하고는

 

압록강에 도달한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얼마 안 있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날 비극은 시작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뼈저린 6사단의 패배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수락한 택동(毛泽东)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키게됩니다.

 

이에 압록강까지 홀로 진격했던 7연대는

 

 순식간에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으며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불행히도 그 당시 김종오 장군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자신의 6사단을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김종오 장군은 6사단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장도영(張都暎) 장군이 6사단장에 임명됩니다.


 

 

 

국군과 UN군은 어렵게 점령했던

 

38선 이북의 영토를 포기하고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중공군은 이를 계속하여 추격했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제6사단은 강원도 화천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벌였으나


화천리 전투에서 패배
하게 되고

 

또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의 패전으로 6사단은

 

 미군들의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決死의 다짐, 용문산 전투

 

 

 

6사단은 화천리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개전 초기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아내고,

 

 충북 음성에서 최초의 승전을 거두고


국군과 UN군 중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압록강 진격을 이뤄냈던 부대였건만,

 

하루 아침에 패배하여 미군의 조롱을

 

받는 부대가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6사단은 얼마 안 있어

 

중공군에게 설욕을 함과 동시에

 


6.25전쟁에서 발생했었던 전투 중

 

 

 최고의 전과를 이뤄낸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1951년 5월 17일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

(187, 188, 189)이

 

아군 제6사단 2연대 병력들이 사수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게됩니다.

중공군은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였는데,


2연대 병력들이 도망치지 않고

 

용문산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는


용문산이 국군의 주 방어선이라고 착각,

 

'저 곳을 뚫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6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게 설욕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문산을 지키기 위해


방탄에
'결사(決死)'
라는 글자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용문산 전투 후 포로가 된 중공군들)

당시 중공군은 2연대가 지키고 있던

 

용문산을 계속하여 공격하였는데,


용문산 양 옆으로는 아군 제7연대,

 

제19연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고

 

2연대만 뚫으면 된다고 판단하여


용문산만 하염없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군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일제히 양 옆에서 튀어나와


용문산을 집중공격하고 있던

 

중공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중공군은 때 아닌 아군의 기습에 놀라

 

5월 21일, 퇴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용문산을 지키고 있던

 

 2연대 병력도 산에서 내려와


6사단은 2연대, 7연대, 19연대 병력들이

 

모두 합류한 상태로


퇴각하는 중공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화천 저수지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17,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2,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국군의 피해는 아군 전사(戰死) 107명,

 

부상 494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서는 화천 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라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중공군)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이였습니다.

 

 

 

이 전투로 6사단은 중공군에

 

 설욕함과 동시에

 

 

 

한국전쟁 역사상 최고의 성과

 

얻는 등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6사단은 강원도 홍천, 경기도 포천 등에

 

 주둔하다가 1966년, 철원으로 이동하여

 

 

 지금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켰던

 

 

 북한군 정예 제4사단이

 

 

 

바로 6사단 바로 전방에 주둔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3년 11월 20일

GOP 초병 경계를 서고 있던 상병 이기태,

 

 일병 김효섭미상 폭음을 청취하여

 

 상부에 보고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미상 폭음 청취

 

보고가 들어오자


군에서는 7연대 GOP 지역에

 

북한군의 땅굴을 의심하여

 

 시추 작업을 실시하였고


1975년 3월 19일,
제2땅굴
을 발견하였습니다.


 

 

제2땅굴 시추 작업동안 꽃다운 생명들이

 

 전사(戰死)하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1966년 철원 축선을 담당한 이후로

적의 침투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이 순간.


6사단은 철원 축선의 철책선을 담당하며

 

365일 24시간 완전경계작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맞서 용문산을 지켜내고,


중공군을 격파한 그들의 전공

 

 


 

투광등 불빛 아래 고생하는 GOP 대대원들….

그대들이 있어 이 나라가 존재합니다

 

 

雖死不敗 靑星鬪魂

압록강 물을 다시 마시자!


 

 

사진및자료출처: 육군블로그 아미누리. 구글. 위키백과

안녕하세요!

 

6월25일이 다가오면서

 

포스팅 초점이 한국전쟁으로 계속

 

맞춰지는거같네요...

 

한국전쟁하면 많은분들이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투.용문산전투.춘천전투등을 많이

 

떠올리실꺼라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때 금성지역 북방에 위치하여있던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대전투가 금성전투입니다.

 

7.13 공세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럼 금성전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0일까지 벌어졌어요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임부택 제11사단장 .

 

김용배 제7사단장이였구요

 

중공군 지휘관은 현리전투에도

 

나왔던 펑더화이였습니다.

 

대한민국 병력은 11사단.8사단.6사단.5사단.3사단.

 

수도사단.L-20경비행기30대였구요.

 

중공군은 제24군.54군.60군.67군.68군.

 

산하 12개 사단이나 됬습니다.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며 전황을

 

지지부진 끌게 만들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53년 4월 즈음 휴전은

 

 미국중국 내부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만이

 

 휴전은 불가하다면서

 

단독 북진을 외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6월, 휴전협상은

 

종반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중국은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내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전쟁 중 항상 미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렸고,

 

이런 결정에 따라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금성 돌출부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 때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공격하는데

 

6개 사단을 동원했으며, 다시 후방에서 4개 사단을 증원시켰고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와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도

 

 동원하는 등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병력을 투입하였습니다.

 

 

<중공군 출정식>



물론 한국군도 이에 맞서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포격과함께 돌진하는 중공군>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비록 전선 전체의 돌파에는

 

실패했으나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지키던

 

국군의 방어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중국이 휴전 직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듯이 한국 또한 마지막 전투를 패배로 기록해두고

 

싶지 않았기에 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3년 7월 중공군 5개 군(약 24만명)이

 

금성 돌출부로 모이기 시작하자 긴장한 한국군 또한

 

 6개 사단을 동원해 방어에 나섰으며, 휴전을 직전에 둔

 

 시점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은

 

그 규모가 개전 이래 최대급이었습니다.

 

 

<중공군 전차부대>



7월 13일부터 중공군은 한국군이 방어하는 전선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하여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 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저지했습니다.

 

더욱이 홍수로 인해 보급이 곤란해진 중공군에 비해

 

 한국군은 미군의 막대한 보급물자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으며,

 

새로 도착한 증원군들에 힘입어 병력을 보충하고

 

화력을 충원하여 반격을 시작하게됩니다.

폭우로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의 활약과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 선

 

(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중국군이 전선 전체를 돌파당할 경우 증원군을 투입하여

 

 반격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휴전을 눈앞에 두고

 

 대규모 전투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은

 

 UN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의 공방전만 이어가다가

 

종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습니다.

 

중공군은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지만

 

 점령지의 절반을 다시 내어준것과 화천댐 공략 실패로

 

 인해 국군보다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국군에 비해 3~4배 발생하였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전과가 이긴합니다...

 

 1주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전사 및 실종자 수천 명을

 

 포함하여 14,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중공군은 66,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됩니다.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 것은 양측

 

모두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군이 중국군에 비해 자질 및 장비 면에서

 

 그다지 나은 점이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한국군의 자질을 강화하고

 

무기 및 장비를 새로 지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전 협정의 조인

 

휴전 2주만 남겨둔 상태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연기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소규모 전투만을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는 휴전 상태로 이어지고 있으며

 

 언제 전쟁이 재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가오는 6월25일 우리는 항상 잊지말고

 

준비하고있어야 합니다.

 

 

사진 및 참고자료 : 구글.나무위키.위키백과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전쟁중

 

가장 참담한 패전 현리전투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날짜는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동안 펼쳐졌구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일대에서

 

펼쳐진 전투입니다.

 

현리 전투는 아마 한국군 전쟁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vs 북한군.중공군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3군단장 유재흥.7사단장 김형일,

9사단장 최석,3사단장 김종오

 

중공군 지휘관은 펑더화이 였습니다.

 

우리나라 국군 제 3군단과

 

종궁군 제9병단 12군,20군,27군과

 

북한군 제2,3,5군단이 치룬 전투입니다.

 

 

 

이제부터 좀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1951년 4월, 신규병력을 충원해 전력을

 

확충한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전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4월 공세,

 

혹은 춘계 1차 공세로 불리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그야말로 이영호의 반땅 가르기

 

싸움과도 같은 무제한 화력과

 

우주방어로 저지에 성공하게됩니다.

결국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

 

 전력을 온존, 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특히 약한 국군을 제대로 박살내기로 결정합니다.

2차 춘계공세, 혹은 5월 공세라 불리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9사단을 앞세운 한국 육군 제3군단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 육군 5사단, 7사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9병단 예하

 

지상군 12, 20, 27군단이 미 10군단

 

 휘하 5사단과 7사단을 돌파해 깊숙이 파고들고

 

동해안 쪽에선 인민군 육군 2군단, 5군단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싸먹어 완전히 결딴을 내고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3군단의 왼쪽을 맡은 중공군 9병단은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뚫어제껴 버렸으나, 옆 미 2사단이 한국군의 패주로

 

 동쪽이 휑하니 비어버린 상황에서도 벙커고지에서

 

화력과 우주방어로 돌파가 확대되는 걸 저지하면서

 

 애초 의도대로 돌파구를 열지 못했고,

 

이 덕에 5사단과 7사단은 막 밀려나고 연대가 통째로

 

 날아가고 하면서도 완전 붕괴까진 안 되고

 

 물러서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3군단의 오른쪽을 파고들었어야 했을

 

인민군 2군단, 5군단마저도 돌파조차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들의 계획은 엉켜버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려 오마치 고개에 도달하게됩니다.

당시 한국 육군 3군단은 오마치라는

 

 단 하나의 고개후방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고개가 미 10군단 휘하 한국 육군 7사단의

 

 관할구역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군단에서

 

오마치 고개에 수비 병력을 두려고 했는데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무슨 생각으로 구역 침범 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오마치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중공군 역시 오마치 고개를 잡으면

 

국군 3군단의 목줄을 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공세 개시 후 5월 16일 국군 7사단을 뚫어버리자마자

 

 60사 178연대 2대대 병력들을 고개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었고,

 

 이 와중에도 선두 5중대는 한밤중에 산을 타고

 

 30km를 돌파한 끝에 5월 17일 새벽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국군 7사단은 두들겨 맞으며 밀려나는 와중에

 

 오마치가 점령당한 걸 알았지만 한국 육군 3사단이나

 

 9사단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전하지도 않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결국 3군단 쪽에서 오마치가 점령당했단 사실을 안 건

 

17일 새벽에 부대 차량들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철수시키다 오마치에서

 

총알 세례를 받고 나서였습니다.

 

 

<참호를판뒤 공격하는 중공군>


한편 옆 동네 7사단의 방어선이 뻥 뚫리고

 

오마치 고개도 차단당한 사실을 안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에 대한 전면 공격은 없었지만 포위를 우려해

 

 휘하 부대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렸고,

 

9사단도 후퇴하자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후퇴 지시를 내리게됩니다.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3군단 병력은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현리의 남쪽 방대산을 오르며

 

 남쪽으로 도망쳐 갔고,

 

방대산은 수만 명의 인파에 뒤덮일 지경이었습니다.

 

 작전도 없고 지휘도 없는 발걸음이었으며,

 

그러니 보급도 없고 식량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수가 결집해 도망갈 경우에는

 

 적의 추격을 막거나 차단막을 강행돌파하는 게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리고 운 나쁘게 산을 헤메다가 체력이

 

바닥난 뒤 숨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중국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에게 포로간된 한국군>


산속에서 헤매는 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할

 

병력도 계획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군단 본부에

 

 있던 인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산속 곳곳에

 

쌓아 두는 게 그나마 가능했고,

 

이런 주먹밥을 얻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걸 막고자 미 공군은 현리 일대에서

 

 3군단 장비를 폭격하는

 

어이 없는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3군단 본부에선 어떻게 창촌에서 병력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패주 행렬이 창촌에 왔을 때는

 

 소수 중공군 부대가 이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창촌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사기가

 

떨어진 한국군 병력은 다시 후퇴했고,

 

결국 산을 넘고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하진부리에서야 겨우 수습되었습니다.

 

이렇게 3군단이 나흘만에 70km를 도망치면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대위기 상황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육군대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예비대를

 

 빼내 전선을 틀어막고,

 

포위된 사단을 구출하여 겨우겨우

 

전선유지에 성공했으며

 

 

 국군 1군단 병력이 대관령 방어에 성공한 덕분에

 

그나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8군에서는 3군단에 더 이상

 

 밀려나지 말고 현 방어선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3군단은 하진부리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또 다시 밀려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1일이 되자 3군단 병력은

 

또 다시 패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상황은 현리 때처럼 군단 지휘부가 병력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현리 때보다

 

 이 때가 유 장군이 제대로

 

움직였어야 했었습니다.

 

 장비는 없고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라지만

 

부대 수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이시기에 유재흥 장군은 수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 합니다.


결국 이 상황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 해체를 명령하게 됩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닙니다.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 해체를 결심하게 한 것이죠

이 당시 유재흥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의 대화는

 

지금도 전설로 회자될 정도입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벤 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 ,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5월 23일부터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그때까지도 쫄쫄 굶어가며 산속을 헤메고 있던

 

 한국군 낙오병들이 대규모로 수습되었고,

 

그 결과 27일까지는 병력의 약 70%와

 

장비의 30%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전사 혹은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수습은 했으나 전투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편제에서 빠진 병력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70퍼센트나 되는 병력이 전투 이후에도 건재했던 건

 

중공군의 포위 작전이 계획대로 제대로 되지 않은 덕으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와 창촌을

 

차단하면서 3군단의 철수 경로를 어느 정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래 의도했던 촘촘한 포위망을

 

짜는 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소수 병력만이 차단과 추격에

 

 나설 수 있었으며 게다가 한국군이 그냥 퇴각한 게 아니라

 

 나름 무리를 지어 도망쳤기 때문에 어설프게

 

 차단했다가 다수의 한국군 패잔병들에게 깔려

 

역으로 전멸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패잔병이 산을 타고 후방으로 오는데

 

성공한 건 그 때문입니다.

 

(중공군이 제대로 포위망을 구성했던

 횡성 전투 같은 경우에는 생환하여

추후 전투 투입이 가능한 병력이

고작 30퍼센트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더 참담한 일은 열받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을

 

 모조리 해체하여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폐쇄했고,

 

 한국 육군 제1군단을 미 제8군의

 

직접통제로 바꿔버린 일이었습니다.

 

 3군단의 해체로 인해 육군은 오직 단 하나의

 

 군단급 제대만을 가진 존재로 전락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육군본부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이후로는

 

후방지원업무만 담당하게 됩니다.

 

패전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직도 3군단 시설 몇개가 현리에 세워져 있으며,

 

육군 어느 부대든 정신교육 시간에 수시로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맙니다.

 

 

 

현리 전투 당시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한국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었지만,

 

현리 전투에선 계급장 뗀

 

낙오군인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명예를 회복을 합니다.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그랬지만,

 

특히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특히 9사단장 최석 장군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심지어 광인이라는 폭언까지 등장합니다.

 

유재흥 장군조차 애둘러서 최석의 무능력함에

 

 대해 비판을 합니다.

 

 

3사단 18연대는 백골연대란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지금은 진백골연대로 변경),

 

이들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제대로 시도도 못 하고 흩어져 패주행렬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패주행렬을 쫒거나 차단하는

 

적 병력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있던 백골부대원들이

 

 힘을 합쳐 적 병력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여줬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나무위키.구글



 

 

6.25 한국전쟁 중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잘 알려지지않은

 

용문산 전투에 대해 써보려고해요

 

 

 

 

6사단용문산 전투

 

1951.5.17~ 1951.5.21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

 

 

국군 6사단 VS 중공군 187.188.189 사단

 

군대에대해 잘모르시는분들을위해 하나 설명드릴게요

 

분대<소대<중대<대대<연대<사단<군단

 

예하부대 3~4개가 뭉치면 한개의

 

 상급부대가 생각하시면되요.

 

ex) 3개의 대대 = 1개연대 , 3개의 연대 = 1개의사단

 

 

<당시 6사단장 장도영 준장>

 

평은 그렇게 좋은 장군은 아니였어요.

 

용문산전투가 바로 장도영준장의

 

 최대업적일꺼라 생각되요.

 

 

51년 4월말 1차 춘계대공세를 실패한 중공군은


다가오는 5월에 2차 춘계대공세를 펼치게 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군사,교통의

 

 요충지였단 용문산 일대에요.

 

6사단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저지하면서 유명세를 떨친 사단이었어요


 

 

 

하지만 6사단은 이전에 사창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기에


 

장병 모두가 결사 (죽기를 각오) 라는 문구를


철모나 머리띠에 적고 나서 전투에 임합니다.


 

 

 

 

주 저항선에는 7연대19연대가 위치해 있고


그 위로 2연대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

 

3대대는 353고지에 진지를 구축했어요.

 


 

 

 

 

2연대 1대대중공군 187사단

 

공격을 해오자


적 한개 연대 급을 격파하고 나산까지 후퇴를 합니다.


대대가 연대급을 격파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거죠;

그 시각 중공군 188사단

 

공격으로 2연대 2대대


 

무려 하루라는 시간 동안 버티고 버티다

 

끝내 427 고지로 후퇴를 합니다

 

<중공군의 도하>

출처 : 6.25 60주년 사업단


 

역시나 한개 대대가 사단급을

 

 상대로 하루를 버틴것도

 

 역시나 엄청나고 말도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지형을끼고 싸웠다고해도

 

 한대대가 한사단급을 상대로

 

가능하다는게 신기할정도입니다.


그리고 원래 작전은 후퇴하게 될 경우

 

사단의 주 저항선 이남까지 후퇴해라

 
이거 였는데 2연대 독단적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바로 후방의 고지로 들어가서 항전을 하게 되는겁니다


 

 

역시나 중공군 187사단188사단

 

2연대 섹터를 공격했어요.


여기서 중공군은 상대가 방어가

 

너무 탄탄하다고 느꼈고


그러다 보니 2연대의 독자적 저항선을

 

6사단의 주 저항선이라

 

착각을 해서후방에 있던 예비사단인

 

189사단 까지 공격에 가세.

 

국군 2연대 VS 중공군 3개 사단이 싸우게 됩니다.

 

병력차이만 어마어마 함에도

 

불구하고 결사 정신과


후방의 화력지원 밑 공군 공습으로

 

끈질기게 방어를 합니다.

 

초반에 말했듯이 3개연대가

 

모여야 1개사단입니다..


 

<미 포병대의 지원 사격 >


 

 

 

그런데 중공군 3개 사단이 총력을

 

다해서 한개 연대를 치는걸알고

 

기회다 싶어 주 저항선을 지키던

 

 7연대19연대는 적의 후방을 쳤어요.

 

중공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이라고 착각을 하고는


스스로가 와해되서 대규모의 피해를 입고


21일이 되자 도망을 치게 됩니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 6사단

 

 70~80km 까지 추격하고


이 때부터 미군도 적극적으로 가세합니다.


결국 화천호에서 퇴로가 막힌 중공군 대부분을 섬멸해요


 

 

 

 

이렇게 해서 전투는 24일 까지 이어져요.


용문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용문산 전투


추격 끝에 섬멸하게 되는 것을

 

파로호 전투라고 불리는데


용문산 전투 안에 파로호 전투

 

포함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국군 피해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

 

중공군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

 

1명당 100명 이상 죽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전과라고 할 수 있죠.

 

<용문산 전투가 끝난 후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소대 장병들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미지 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단일 전투로서 이만한 전과는 한국전쟁 통틀어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대승이였습니다..


 

 

 <중공군 포로>

<중공군 포로>


 

<승전 소식 후 이곳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 (뒤에 타있는 사람이 당시 장도영 준장)>

 

 

중공군을 섬멸한 장소가 화천호이지만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오랑캐를 무찌른 호수) 라 명명해서


이 곳의 명칭이 지금까지도 파로호라고 불리고 있어요

 

 

 

 

<그 후에 세워진 기념비>

 

<용문산전투전적비>


 

좌.장도영 장군  우.박정희 장군

(이 때는 박정희보다 높은 자리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의장.  )

 

 

 

장도영 장군은 후에 국방부장관 까지 오르지만

 

박정희와 권력다툼하다 쫒겨나고

 

미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치매도 온다)

 

아무튼 비운의 인생을 살다가신 분이죠.

 

<푸른별 제6사단 청성부대>

 

지금까지 용문산전투에대해 알아보았는데요..

 

6사단출신으로써 정신교육때 많이들었전투였지만

 

많은사람들이 모르기에 한번 써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낙동강전투등처럼 기

 

억되야할 전투라고 생각됩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나무위키.구글


 

 

안녕하세요  6월 25일

 

 한국전쟁 66주년이네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같이 피흘리며 싸워준

 

고마운 한국전쟁 참전국에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사람들이 아는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국가들이 참전을 해주었어요..

 

 

 

천천히 하나하나 알아보고갈게요..

 

1.미국

 

 

참전인원 : 1,789,000 명

 

지상군 : 보병사단 8 , 해병사단 1 , 연대전투단 2 , 병력 302,483명

 

해군 : 극동해군 미 제7함대

 

공군 : 극동공군

 

전사/사망 : 36,940명 부상 : 92,134명 실종 : 3,737명 포로 : 4,439명 계 : 137,250명

 

올림피아 한국전 참전비 (Olym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워싱턴주 올림피아시 올림피아공원내에 위치해있습니다.

 

 1993년에 건립됬는데 여기는 2차대전, 베트남전쟁 참전비가

 

같이 모여있는 현충원 같은곳입니다.


 

 

 

 

 

2.영국

 

참전인원 : 56,000 명

 

지상군 : 보병여단 2 , 해병특공대 1  , 병력 14,198명

 

해군 : 함정 17척 (항공모함 1척포함)

 

전사/사망 : 1,078명 부상 : 2,674명 실종 : 179명 포로 : 977명 계 : 4,908명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비 (Memorial Garden at National Memorial)

 

영국 국립묘지 내 추모의 숲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시설은 2000년에

 

영국 한국전 참전용사회에 의해 건립됬습니다.

 

참전시설은 6개의 비석과 벤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석의 동판에는

 

각각 참전자 추모, 한국전 정보, 영국군대의 한국전에서의 활약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특히 눈에 띠는 조형물이 있는데 희생당한 병사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되면 조형물 뒤쪽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중앙의 브론즈 화환을 비춘다고 합니다.

 

 

 

3.오스트레일리아

 

 

 

 

참전인원 : 8,407 명

 

지상군 : 보병대대 2 , 병력 2,282명

 

해군 : 항공모함 1척 , 구축함 2척 , 피리킷함 1척

 

공군 : 전투비행대대 1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339명 부상 : 1,216명 실종 : 3명 포로 : 26명 계 : 1,584명

 

국립 전쟁기념관 한국전 참전비 (Australian National Korean War Memorial)

 

2000년에 호주 정부와 한국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고 캔버라에 있는 국립 전쟁기념관 내에 있어요. 

 

추모의 공간과 함께 12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벨리스크 벽면에는 6∙25전쟁 참전 전사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구요.

 

 한쪽에는 철제 봉이 꽂혀진 마당 위의 3명의 군인 형상물이 있는데,

 

 철제 봉은 빽빽한 숲의 험난한 지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운데 서 있는 군인 형상물은 실제 호주 참전군인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4.캐나다

 

 

 

참전인원 : 25,687 명

 

지상군 : 보병여단 1 , 병력 819명

 

해군 : 구축함 1척

 

공군 : 수송기대대 1

 

전사/사망 : 312명 부상 : 1,212명 실종 : 1명 포로 : 32명 계 : 1,557명

 

오타와 한국전 전사자 기념비(Monument to the Canadian Fallen)

 


오타와 정부청사 앞 광장에 위치한 캐나다의 이 기념비는 6∙25전쟁 참전자였던

 

Vince Courtenay가 디자인하고 한국인 유영문이 조각한 비입니다.

 

6∙25전쟁 참전용사와 정전 후 평화 복구를 위해 한국에 주둔했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건립됬습니다 . 상징물은 캐나다 군인이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잎을 든 한국 소녀를 품에 안고, 무궁화를 든 한국 소년과 함께 서 있는 동상이고, 

 

이 동상의 기단에는 전사자 51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우리는 캐나다의 용감한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5.네덜란드

 

 

참전인원 : 5,322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819명

 

해군 : 국축함 1척

 

전사/사망 : 120명 부상 : 645명 실종 : 0명 포로 : 3명 계 : 768명


 

생제르망앙레 한국전 참전비(Saint-Germain en Laye Korean War Menorial )

 

로테르담 시내에 위치해있고 1970년 UN에 의해 세워졌구요.

 

태극문양 아래 네덜란드 한국전 전사자 명단과 유엔마크,

 

네덜란드 참전부대 (NVDA) 마크가 새겨져 있습니다.

 

 

 

 

 

6.뉴질랜드

 

 

 

참전인원 : 3,794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389명

 

해군 : 프리킷함 1척

 

전사/사망 : 23명 부상 : 79명 실종 : 1명 포로 : 0명 계 : 103명

 

웰링턴 아오테아 한국전 참전비(A Heritage Memorial, Aotea Quay)

 

 

웰링턴에 있는 이 참전비는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군인회에서 2000년에 건립했습니다.

 

1749명의 뉴질랜드 군인이 유엔연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아오테아 선창가에서

 

승선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건데, 콘크리트 위의 발자국은

 

 

군인들의 출발과 귀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비문내용 : 1749명의 뉴질랜드 군인은 유엔연합군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이 항구에서 승선했다


 

 

 

 

 

7.프랑스

 

 

참전인원 : 3,421 명

 

지상군 : 보병대대 1 , 병력 1,185명

 

해군 : 구축함 1척

 

전사/사망 : 262명 부상 : 1,008명 실종 : 7명 포로 : 12명 계 : 1,289명

 

파리 한국전 참전비 (Paris Korean War Memorial)

 

프랑스 파리  제4구에 위치해있고 유엔에 의해 1989년에 건립됬습니다.

 

 프랑스 대대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인데 

 

한반도 지도 모형으로 제작된게 특징이에요.

 

프랑스 대대는 625 당시 프랑스가 UN 결의에 따라 파견한 1개 대대 규모의 지상군입니다.

 

주로 미국 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어요.

 

뒷면에는 프랑스 대대 상징 마크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4개의 도로가 만나 이루어진 네모난 인도인데,

 

 도로명도 한국전 참전 프랑스 대대명 그대로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8.필리핀 

 

 

 

참전인원 : 7,420 명

 

지상군 : 보병대대 1 , 병력 1,496명

 

전사/사망 : 112명 부상 : 229명 실종 : 16명 포로 : 41명 계 : 398명


마닐라 리잘파크 한국전 참전 기념비

 

(Rizal Park Korean War Monument & Filipino-Korean Soldier Monument)

 

2010년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한국 필리핀 수교 60주년기념회 등에 의해 건립됬습니다.

 

마닐라시 리잘공원에 위치하고 있고 조형물은 1명의 군인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됬는데 한국과 필리핀의 우호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조형물과 곡선의 철제 조형물로 이루어져있어요

 

 

 

 

9.터키 

 


참전인원 : 7,420 명

 

지상군 : 보병여대 1 , 병력 5,455명

 

전사/사망 : 741명 부상 : 2,068명 실종 : 163명 포로 : 244명 계 : 3,216명

 

이스켄데룬 한국전 참전비(Iskenderun Korean War Memorial)


 

터키 정부에 의해 1953년 건립됬고 이스켄데룬시 공원에 위치하고 있어요

 

 터키 770명의 6∙25전쟁 전사자(건립당시)를 추모하고 있는 기념비에는 추모의 글과

 

 

전사자 명단이 적혀 있으며, 가족과 작별하는 군인의 모습 등 부조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문내용 : 신성한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의 영웅적인 군인들을 기리며


 

10.태국 


 

참전인원 : 6,326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2,274명

 

해군 : 프리킷함 7척 , 수송선 1척

 

공군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129명 부상 : 1,139명 실종 : 5명 포로 : 0명 계 : 1,273명

 

방콕 참전협회 한국전 참전비(Bangkok Korean War Memorial)


 

대한민국 정부가 1982년에 건립한 태국 방콕에 위치한 참전비에는

 

 

 추모의 글과 함께 유엔군과 태국 국기, 태극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비문 내용 : 태국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유엔 연합군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한

태국 군과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사하신 138명의 용감한

태국군인을 추모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한다


 

 

 

11.그리스

 

 

 

참전인원 : 4,992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263

 

공군 : 수송기편대 1

 

전사/사망 : 192명 부상 : 543명 실종 : 0명 포로 : 3명 계 : 738

 

파파고스 한국전 참전비 (Monument of Greek soldiers fallen in the Korean War)


그리스 파파고스에 위치한 이 참전비는 2003년 대한민국 정부와

 

그리스 국방부에 의해 건립됬었어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4개 기둥의 참전 기념물로

 

가운데 기념비의 동판에는 고대 그리스 역사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고,

 

양쪽의 기념비에는 186명의 그리스 전사자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12.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인원 : 826 명

 

공군 : 전투비행대대

 

전사/사망 : 34명 부상 : 0명 실종 : 0명 포로 : 9명 계 : 43

 

케이프타운 한국전 참전비(Cape Town War Memorial)

 

남아공의 6∙25전쟁, 1, 2차 세계대전 참전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시설로

 

 1924년 처음 건립됬는데, 1959년 625 참전비가 추가됬어요.

 

기념비 상층부에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고 기념비 중앙에는

 

전투 중인 군인의 모습이 담긴 동판 부조물이 있습니다.

 

기념비 하단에는 625전쟁 전사자에 대한 추모문이 새겨져 있어요.

 

 


 

 

13.벨기에

 

 

 

참전인원 : 3,498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900

 

전사/사망 : 99명 부상 : 336명 실종 : 4명 포로 : 1명 계 : 440명

 

 

국립대성심성당 한국전 참전 기념물(Campaign For Peace, Nationale Basiliek)

 

벨기에 국립대성심성당은 브뤼셀 시모니스에 있는 곳인데 1996년 벨기에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성당안에 건립했어요. 브뤼셀 국립 대성심성당 안에 설치된

 

625전쟁 참전 기념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9개의 유리창을 3개 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어있고,

 

 전쟁을 상징하는 야간 순찰대, 희망과 평화의 비둘기가 한반도 위를 나는 모습,

 

그리고 한국의 풍경이 각각 유리창 3개씩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4.에티오피아

 

 

 

참전인원 : 3,518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271명

 

전사/사망 : 121명 부상 : 536명 실종 : 0명 포로 : 0명 계 : 657

 

 한국전 참전 기념탑(Ethio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Monument)

 

에티오피아의 참전 기념시설은 에티오피아후원회, 춘천시와 함께

 

국가보훈처에 의해 2006년에 건립됬는데 625전쟁 참전 기념탑,

 

에티오피아 122명의 위패, 참전용사회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탑은 625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부상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춘천시 공지천에 세웠던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과 동일한

 

 모양과 규모로 춘천시가 아디스아바바 현지에 제작, 건립한거에요.

 

 


 

 

15.콜롬비아

 

 

 



참전인원 : 5,100 명

 

지상군 : 보병대대1 , 병력 1,068명

 

해군 : 프리킷함 1척

 

전사/사망 : 163명 부상 : 448 실종 : 0명 포로 : 28명 계 : 639

 

보고타 한국전 기념비(Bogotá Korean War Memorial)

 

보고타에 위치한 기념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73년에 건립됬습니다. 

 

보고타 군부대 내에 위치한 이 기념비는 석가탑과 같은 모양과 재질로 만들어졌는데

 

 625전쟁 참전 당시 콜롬비아군이 배속되었던 미 24사단 사단장의 콜롬비아 군인의 용맹성을

 

 찬양한 비문과 함께 전사자 213 명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어요.

 

주 콜롬비아 신임 한국 대사가 취임하거나 625전쟁 기념식을

 

가질 때 헌화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습니다.

 

 


 

16.룩셈부르크 

 

 

 


참전인원 : 83명

 

지상군 : 보병소대 1 , 병력 48명

 

 

전사/사망 : 2명 부상 : 13실종 : 0명 포로 : 0명 계 : 15명

 

헌법광장 한국전 참전비(The Monument of Remembrance, Constitution Square)

 

룩셈부르크 헌법광장 내에 위치해있는데 황금여신상으로 불려요.

 

기념비 아래 부분에는 두 명의 룩셈부르크 군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조국을 위해 전사한 동료를 애도하는 모습을 표현한거에요.


 

 

이밖에도 의료 지원해준 나라들도 있는데요

 

인도. 노르웨이 . 덴마크 . 스웨덴 .이탈리아와

 

물자지원을해준 과테말라.미얀마.이스라엘.우루과이.코스타리카.도미니카.

 

이란.베네수에라.온두라스.파나마.독일.이집트.엘살바도르.파라과이.라이베리아.

 

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자메이카.파키스탄.월남임시중앙정부.리히텐슈타인.

 

시리아.일본.대만.페루.레바논.스위스.아이티.칠레.헝가리.모나코.아르헨티나.에콰도르

 

쿠바.교황청.멕시코.아이슬란드.오스트리아.캄보디아 등 고마운나라가 많습니다..

 

<사진자료:보훈처>

 

 

모두가 잊지않고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처및참고자료:구글.위키백과.국방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