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후 1976년 8월 18 이전까지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은 서로 군사분계선을 자유롭게 통행하였습니다. 명칭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군 제3초소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주의에 북한군 초소 3개가 둘러 쌓고 있어서 유엔군은 행여 있을지모를 북한의 도발과 제3초소의 근무자 안전을 관측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 관측초소(OP5)와 한국군 제3초소(CP3)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어 관측이 방해되자 유엔소속 미군은 이 미루나무 가지를 절단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에 미루나무 가지를 절단하기 시작하였스비다. 물론 당시 일직장교 회의에서 북한도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에 합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군 장교 '박철 소위'가 말도 되지않는 억지와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 작업을 중단하라고 경고를 하기 시작하였지만 미군측 '보니파스 대위'는 이건 당연한 일이라며 무시하고 작업을 지속하였고 이에 격분한 북한군 장교 박철 소위는 북한군 트럭에 몽둥이로 무장한 북한군 20여 명을 태우고 다시 돌아와서 미군과 한국군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인부들이 도끼를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피를 보고 흥분한 북한군 병사 한명이 도끼를 주워들어 미군장교 두명을 도끼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미군장교 두명은 후송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미군이 그것도 장교 2명이 북한군 도끼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주한 UN군 사령관겸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리챠드 스틸웰 대장은 일본에서 F-4 전투기 후방석에 탑승하여 한국으로 급하게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챠드 스틸웰 대장은 펜타곤에 무력사용을 허락받으면서 미국 본토에서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술폭격기 20여 대와 괌에서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 F-4 팬텀전투기 24대가 한반도로 집결하였습니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소속의 항공모함 미드웨이가 호위함들과 함께 동해 영해상으로 진입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목적은 무력시위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계획을 눈치챘던 북한은 잔뜩 겁을 먹었고 이에 미 백악관은 주한미군연합사에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찾으라고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한미군연합 사령관은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사건의 발달이었던 미루나무만을 절단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작전이 바로 작전명은 폴 버니언(Operation Paul Bunyan)이라 명명되었습니다. 폴 어니언은 덩치가 큰 나무꾼으로 하룻밤 사이에 천그루의 나무를 베었다는 미국 전설의 나무꾼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군과 입장이 달랐던 박정희 대통령은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말을 남기며 한국군에 따로 '응징보복작전'을 비밀지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한국군에서 미군에게 작전 관할권이 없고 국군 최정예였던 제1공수특전여단 64명은 작전명 독수리 작전 이름 아래 응징보복특공조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극비로 구성된 응징보복특공조 요원들이 육군 1사단 수색대대의 엄호하에 카투사 복장을 하고 미 육군 공병대를 보호하며 비무장지대로 진입하여 8월 21일 오전 7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에 걸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마친 미 육군 공병대가 철수하려던 그 순간 카투사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있었던 64명의 특전사들이 작업복을 벗기 시작하여 이동중 탑승했던 트럭 모래주머니에 분해하여 숨겨놓았던 M16 소총을 재빨리 조립하여 어깨에 둘러메고 권총과 수류탄을 꺼내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 초소를 향해 몽둥이를 들고서 야유와 욕설을 퍼부으며 보복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돌발사태에 미군측은 급하게 막아보려 했지만 응징보복특공조 특전사 64명은 돌아오지않는 다리를 넘어 돌격하였고 북한군은 초소를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특전사들은 북한군의 불법시설물이었던 바리게이트와 초소를 마구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북한군 초소 4개를 다 때려부수면서 계속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지만 북한군은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는 상부에 지시가 있었는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었던 박희도 장군은 만일 그 도발에 북한이 대응을 했으면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보다 더 끔찍한 일을 우리 특전사에게 당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당시 투입되었던 특전사들은 정말 북한군을 사살하기위해 작정하고 투입되었던 것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후 당시 미루나무 위치에 추모동판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동판에는 "2명의 유엔군 사령부 장교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바렛 중위 도끼 살해 사건의 초점이어던 황색 포풀러 나무가 이 지점에 있었는데 그들은 1978년 8월 18일 나무가지를 치는 작업단을 감독하다가 북한 경비병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1976.8.18"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전직 러시아 FSB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Alexander Litvinenko)는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 푸틴 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2권의 책도 집필하는 등 왕성한 반정부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2006년 11월 1일 그는 FSB 동료였던 안드레이 루고보이, 옛 KGB 요원 출신 드미트리 콥툰을 만났고 이 두 명을 만난 후 심한 복부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급속하게 상태가 악화되어 2주만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리트비넨코를 죽인 그 중독 물질의 정체였는데, 리트비넨코가 죽기 직전 의문의 방사성 물질이 소변에서 발견되었고 사건을 수사하던 런던 경찰청이 자택에서 그의 소변에서 검출된 것과 동일한 방사성 물질이 남아있는 찻잔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리트비넨코가 방사성 물질을 섭취했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발견된 방사능 물질은 폴로늄 210으로, 당연히 홍차에서 치사량의 폴로늄이 자연적으로 들어 있을 일은 절대 없고, 리트비넨코가 자기 홍차에 폴로늄을 설탕 타듯이 타서 먹었을 일도 절대 없으니, 누군가가 리트비넨코의 홍차에 폴로늄을 슬쩍 집어넣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방사능 물질 플로늄 210은 연간 생산량이 100g밖에 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물질로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추축은 그 귀한 폴로늄을 리트비넨코를 증오한 사람이 사주한 암살이며 그 증오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푸틴이라는 것이였습니다. 푸틴이 반체제 인사들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경고장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계적 강대국인 러시아를 꽉 쥐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도의 영향력과 입지가 아니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리트비넨코는 죽기 직전 자기를 죽이라고 한 것은 푸틴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폴로늄을 사용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단순한 암살을 넘은 공개처형이었습니다. 돈은 아주 많이 들지만 효과도 그만큼 확실하고 게다가 그 폴로늄으로 인해 사망한 시체마저도 방사능 때문에 곱게 땅에 묻히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으며, 방사능 물질이 최대한 분해될 때까지 밀폐시키고 그 다음에도 방사능 폐기물을 처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리트비넨코의 시신은 앞으로 수십년간 관을 열 수 없도록 단단히 밀봉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신을 관리담당하는 영국 측에서도 수십년간 시신을 관리하면서 이 사실을 계속 상기해야만 하니 영국측에도 수십년동안 씻기 어려운 메세지가 된 셈입니다.

 

 

물론 푸틴이 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또 다른 힘있는 누군가의 음모라는 음모론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일단 폴로늄의 비용과 이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가 한정되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겨우 의심을 사게 만드는 용도로 이런 말도 안되는 암살 수법을 택했을 가능성은 너무 희박합니다. 또한 러시아에서 푸틴의 허가 없이 이런 일을 단독으로 실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런던 경찰청은 사건을 수사하여 폴로늄 210을 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용의자 몇몇을 추려내긴 하였으나 전부 다 러시아에 체류중인 러시아인들이었습니다. 이에 런던 경찰청은 러시아측에 해당 용의자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 측에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신병 인도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블라디미르 푸틴을 기소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건은 범인을 찾지 못해 수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료의 특수성이나 리트비넨코와 러시아 정부 간의 불편한 관계 등을 보면 심적으로는 누가 어떻게 아무리 봐도 100% 러시아 정부가 벌인 일로 보여집니다.

 

 

결국 영국 고등법원에서 이 암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2015년 1월 공청회를 개최하였고 공청회에서 암살 용의자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는데, 리트비넨코가 죽기 직전 만난 FSB 동료 루고보이와 콥툰이 묵었던 호텔에서 폴로늄 210이 발견되었으며 이 두 명이 이동했던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두 명을 포함해 리트비넨코 일행이 앉았던 테이블에서는 치사량의 두 배가 넘는 방사능이 측정되었습니다. 차 주전자, 식기세척기, 다른 식기들은 물론 사용했던 공중 화장실과 그들이 이용한 대중교통 수단, 그리고 그 날 카페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심지어 접촉한 모든 사람들까지 전부 피폭되었습니다.

 

 

또한 영국 정보 당국은 두 사람이 앉았던 비행기 좌석까지 수색하여 폴로늄의 흔적을 발견했고, 익명을 요구한 콥툰의 지인은 "콥툰이 매우 비싼 독극물을 갖고 있고, 그걸 음식물에 탈 요리사를 구하고 있다"고 증언까지 하였습니다. 영국 측의 보고서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독살 사건에 승인했을 것이라 나와있습니다. 물론 러시아 측에서는 영국이 결론을 정해놓고 짜맞추기식으로 조사를 했다고 반박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전 대통령인 빅토르 유셴코는 대선후보 시절인 2004년, 러시아나 친러시아 세력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다이옥신 수프 테러를 겪었으며 2009년, 2012년 사망한 러시아 망명객들도 유사 사례로 의심되고 있습니다. 2012년 영국에서 숨진 러시아인 페레필리치니는 러시아의 수백만 달러 돈세탁 혐의를 폭로했었습니다.

 

 

그리고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2004년 갑자기 통증을 호소한 후 사망했었는데 9년이 지난 2013년 유족과 자치정부가 유해를 꺼내 스위스 법의학센터로 보낸 결과 정상 수치보다 최소한 18배에 달하는 폴로늄 210이 검출되었다 합니다. 이 외에도 러시아에서 반푸틴 활동으로 푸틴에게 미움을 샀었던 사람들이 의문사를 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던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는 20016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 자신의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원인모를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으며

 

 

러시아 前부총리 보리스 넴초프는 푸틴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을 비판하면서 강력한 적으로 떠올랐었는데 2015년 2월 모스크바 근처에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이처럼 러시아 내에서도 반푸틴 활동을 하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이 모든 사건들이 우연일까요..

 

벤츠 BMW 폴크스바겐 포르쉐 지멘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스스로 나치 독일의 전범기업이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벤츠는 전차, 폴크스바겐은 장갑차, 포르쉐는 군용지프, BMW는 군사용 오토바이와 전투기, 지멘스는 쌍안경을 나치군에 납품했습니다. 이후 독일의 전범기업들은 과거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재단을 만드는 등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히틀러 나치독일을 도운 기업이 당시 유럽을 구했던 미국에도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미국 기업들은 히틀러에게 전차를 팔고 기름까지 지원했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 서유럽을 점령하자 미국 대기업들은 뉴욕에서 나치 승전 축하연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를 지원했던 미국의 전범기업들은 어느곳이였을까요

 

  IBM

IBM의 독일 자회사 데호막(Dehomag)은 컴퓨터의 전신인 홀러리스 카드천공기 기술을 제공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이 정보처리 기술로 열차 운행 시간표 작성에서 유태인 색출 및 재산 압수, 처형 등의 자료 처리에 이용했습니다. 1933년 데호막은 100만 달러의 이윤을 남겼고 자산 가치는 1934년 770만 마르크에서 1938년 1400만 마르크로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IBM과 홀로코스트>라는 책을 쓴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토마스 왓슨 IBM 회장이 히틀러를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히틀러와 한 거래가 엄청난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GM 

GM 오펠 공장의 독일 시장 점유율은 1933년 35퍼센트에서 1935년 50퍼센트로 늘어났습니다. GM의 독일 자회사는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적자였으나 히틀러의 재무장 정책에 따른 경기 호황으로 1938년에는 3500만 마르크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나치 독일에서 전개한 기업 활동으로 매우 큰 이윤을 남겼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GM은 독일의 2차 대전 수행에 필요한 거의 모든 수송 장비를 공급했습니다. 트럭과 같은 단순 수송 장비뿐만 아니라 탱크, 장갑차와 같은 전쟁 무기도 공급했습니다.


 

  FORD

포드는 수많은 트럭과 함께 독일군이 사용한 엔진과 각종 부품을 생산했습니다. 쾰른에 있는 포드 자회사는 물론이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피점령 국가, 그리고 핀란드,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과 동맹 관계인 국가의 자회사에서 생산됐습니다. 쾰른의 포드 자회사는 런던 공습으로 악명을 떨쳤던 V-2 로켓의 터빈을 극비리에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Standard Oil

스탠다드 오일이 제공한 디젤유, 윤활유, 고무 등 전략물자가 없었다면 나치의 전격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은 영국의 수색이나 압수를 피하기 위해 모든 배의 등록지를 파나마로 변경하면서까지 나치에게 끝임없는 지원을 하였습니다.


 

  ITT

미국의 거대 통신업체인 ITT는 1930년대 독일 비행기 제작업체 포케-불프(Focke-Wulf)의 지분 25퍼센트를 확보해 전쟁 기간 동안에도 갖고 있었으며 연합국 비행기를 수백 대 격추시킨 독일군 전투기 제작에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나치는 ITT가 제공한 기술로 최첨단 통신시스템을 갖추었으며, 이 기술을 이용해 미국 외교 전문의 암호를 해독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대기업들은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에서 매우 수지맞는 기업 활동을 벌였으며, 한때 미국 대기업은 독일군 탱크의 절반을 생산하고, 수입 석유의 90퍼센트 이상을 공급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전쟁 물자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 기업들이 공급함으로써 미국은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의 3배에 달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강의 경제력과 핵무기 등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패권 국가가 됐습니다.

 

신차를 구입하게 되면 추가적으로 필요한 자동차 용품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신차를 구입한것이 아니라 친한 지인이 신차를 구입하였면 꼭 필요한 자동차 용품을 지인에게 선물한다면 어떤 선물보다 더 기뻐할수도 있겠죠. 그래서 오늘은 신차 구입과 함께 꼭 필요한 자동차 용품 8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기분을 UP 시켜주는 방향제

오직 신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차 냄새입니다. 하지만 신차에서는 가죽냄새를 비롯하여 갖가지 냄새들이 실내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기때문에 자주 창문을 열어 환기시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방향제를 이용한다면 새차에서 느낄 수 있는 불쾌한 냄새들을 조금은 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동차와 스타일에 맞는 향긋한 방향제가 실내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한 차량용 블랙박스

단순한 접촉사고에 얽힌 실랑이부터 내가 주차했던 소중한 자동차에 누군가 흠집을 내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몰래 도망을 쳤을 때 등등, 단서를 찾기 힘든 사건에 있어 블랙박스 만한 해결사는 없습니다. 차량용 블랙박스 가격이 부담스러울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자동차 용품입니다. 블랙박스를 고를 때는 채널과 해상도, 블랙박스 시야를 고려해서 구매하셔야 합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품 차량용 소화기

우리나라에선 아직 차량용 소화기 비치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 돼 있어 화재 시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량화재 발생 주된 요인은 각종 차량의 기름 등이 새면서 스파크 등에 의해 불이 붙어 발생하거나 내부전선의 피복이 벗겨지며 합선으로 인한 기계적, 전기적 요인이 대다수입니다. 만약 주행 중에 화재가 발생하면 당황하지 말고 도로변 등 안전한 곳으로 정차 한 후 엔진을 정지시킨 후 차량용 소화기로 신속히 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화기는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차량용 소화기인지 꼭 확인하고 구입해야 합니다.


 

 

  주차 매너를 위해 필요한 주차번호판

복잡한 도심 속에는 주차 공간이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돌발상황이 생겨 주차장이 아닌 곳에 주차를 해야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차된 자동차에 운전자와 주차번호판이 없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차번호판은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명함이나 종이 쪽지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놓을 수도 있지만 귀엽고 멋진 주차번호판을 사용한다면 더욱 좋겠죠^^


 

  편리한 실내청소를 위한 차량용 미니 청소기

실내청소를 자주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히 여행이나 출장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차량 안의 먼지와 이물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실내청소를 더욱 신경써주셔야 합니다. 만약 아이들이 있으시다면 먹다 흘린 과자부스러기들은 차안 곳곳에 끼어 장시간 방치될 경우 공팜이가 생기거나 부패하여 차량 공기를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이럴때 차량용 미니 청소기가 있다면 말끔하게 정리가 가능하며 실내청소를 좀 더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안전한 세차를 위한 세차용품

아껴주고 싶은 내 신차를 위해 셀프세차는 필수입니다. 하지만 세제와 세차용품들은 종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선택에 어려움이 따를수밖에 없습니다. 세차용품을 선택할 때에는 차량의 표면에 자극을 주지 않는 것으로 선택을 하는 것이 좋고, 그밖에도 차량의 외관을 보호할 수 있는 용품들을 사용하여 꾸준히 관리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실내오염을 막아주는 자동차 전용 실내 클리너

차량 내부는 외관에 비해 잘 보이지 않아서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실내는 외부에서부터 들어오는 미세먼지와 운전자 손의 세균 등에 의해 시트나. 바닥 등이 오염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물티슈를 이용해서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물티슈를 사용하면 대시보드나 시트에 오히려 먼지가 더 달라붙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자동차 전용 실내 클리너를 사용하시는 것이 광택에도 더 좋습니다.


 

  안전운전을 위한 스마트폰 거치대

전화와 문자교환은 물론 카메라, 쇼핑, 게임 등 쉴 틈 없이 사용되는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스마트폰 사용 횟수는 점점 늘어가기만 하고  때론 운전 중 사고로 이어져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특히 운전중에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를 확인하거나 네비게이션을 사용하기 위해 한손으로 운전하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그래서 자동차에 스마트폰 거치대가 안전운전을 위해 필요합니다.  스마트폰 거치대를 선택할 때에는 차량에 충분히 밀착되어 충격에 의해 분리 혹은 파손될 위험이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 북쪽에 있는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 많은분들이 우리 한국군이 멋지게 승리하였던 춘천지구방어전투, 용문산전투, 서울수복전투 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었던 만큼 우리군도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패배한 전투가 많았습니다. 비록 전투는 패배하였지만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그분들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한국군의 7대 패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쟁초기

6월25일 개전부터 한강교가 폭파될때까지 한강이북지역에 투입된 한국군 부대는 1사단,2사단,7사단,3사단22연대 수도경비사령부등 총 4개사단의 병력이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된후 퇴로가 막힌 이들은 모든 중장비와 차량, 개인화기들을 버리고 분산철수를 했는데 전쟁전 98.000명이던 한국군 총병력이 개전후 4일만에 22,000명수준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초산,온정리전투

1950년 10월 23일 초산에 진격한 한국군 6사단 7연대와 온정리로 진출한 2연대는 처음으로 치룬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각각 분산철수하였습니다. 2개연대 병력중 총 75%의 병력손실을 입었고,7연대장교중 부연대장(최영수 중령),2대대장(김종수 중령),3대대장(조한섭 소령)이 포로가 돼고,12명의 중대장 중 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덕천,영원전투

1950년 11월26일 중국군의 공세에 한국군 2군단소속인 덕천의 7사단과 영원의 8사단이 분산철수하였습니다. 이때 3명의 연대장 (박승일,고근흥대령,김영로중령)이 포로가 되고, 한연대장(박광혁 중령)은 전사하였습니다. 이때 사단의 거의 모든 중화기와 차량을 손실당하고 미 8군의 동측방이 노출됨으로써 모든 작전이 망쳐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횡성전투

전투라기 보단 학살에 가까웠던 비극입니다.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8사단이 중공군 3차 공세에서 중공군 13병단에게 포위되어 분산철수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105미리곡사포 14문, 차량 68대, 통신장비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문, 기관총 164정, 칼빈소총 2,389정, M-1소총 4,096정의 장비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장교 323명중 10연대장(권순태 중령)과 참모전원, 16연대 부연대장,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단전체의 인명손실 7,142명으로 피해로 거의 궤멸당했습니다.

 

   사창리 전투

19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공세시 가평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이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3일 동안 방어전투를 펼쳤지만 역부족이였습니다. 이후 분산철수 중 소총 2,263정,자동화기 168정,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고, 6사단을 화력지원하던 미 지원포병도 105미리 곡사포 15문,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 손실을 입었습니다.

 

   현리 전투

현리전투는 한국전쟁 최악의 대참사라고도 불립니다. 1951년 5월 16일 중국군의 5월공세시 현리지역에서 포위된 한국군 3군단소속 3사단과 9사단은 하진부리 방면으로 분산철수하였으며 두 사단이 보유한 모든 중화기와 차량,보급품을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피해가 군단 자체가 해체될 정도였기때문에 6.25 전쟁기 가장 참담한 패전 중 하나로 뽑히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비류수 전투, 임진왜란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 병자호란 쌍령 전투와 더불어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꼽기도 합니다.

 

   

   금성전투

한국군중공군금성 돌출부를 놓고 격전을 벌인 6.25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입니다. 1953년 7월 13일 중국군의 마지막 대공세에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한국군 수도사단,6사단,3사단,8사단,5사단 장병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병력손실은 모두 합쳐 20,000명이상의 전사자/포로가 발생했으며, 특히 수도사단 1연대는 연대 지휘소가 피습 작전지도차 나온 부사단장(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지원나온 기갑연대장(육근수 대령)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습니다. 결국 당시 전투로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김정은과 측근들은 지하 벙커에서 숨어서 전쟁을 지휘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김정은은 부인 리설주와 최측근만 데리고 중국 국경 지역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김정은은 예전부터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지하통로까지 마련해놓았습니다.

 

 

2015년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과 인접한 자강도 산악지역에 많은 땅굴을 건설해놓았는데 전시에 김정은이 중국으로 도망가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자강도 산악지역에는 지하 수백 미터 지점에 여러갈래의 지하도가 있으며 이 통로는 오직 김정은의 가족과 측근들만 이용할 수 있으며 김정은의 친위대인 호위총국요원을 제외하고는 지하도의 구체적인 위치를 아는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묘향산에서 창성까지 총 길이 120km의 민간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고속도로를 닦았는데 이것도 탈출로입니다. 전쟁이 나면 김정일은 평양에서 순천까지 지하통로로 도망친 뒤 여기서 대동강을 넘어 묘향산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전용고속도로로 창성 특각 압록강 밑 지하통로로 중국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정은의 탈출로는 이 지하통로 뿐만 아닙니다. 최근 영국 매체 익스프레스는 미국이 북한을 향해 군사공격을 실행할 경우 김정은은 미국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중국 국경 인근에 부인 리설주와 2명의 로켓 전문가(김락겸 北전략군 사령관, 노동당 군수공업부 부부장 김정식) 등 소수의 최측근만 데리고 땅굴이 아닌 전용기를 이용하여 중국 국경 인근에 숨을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김락겸 사령관은 "트럼프가 망령 들었다. 우리 병사들의 비위를 극도로 건드리고 있다. 화성-12형 4발로 괌 포위 사격을 가해 주변 30∼40㎞ 수역에 탄착시킬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미국을 위협하는 ‘괌 포위사격’ 방안을 발표한 인물이고, 김정식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김정은이 중국으로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김락겸 사령관과 같은 비행기에 타고 김정은의 부인인 리설주는 김정식과 함께 다른 비행기에 탑승해 북한을 빠져나간다는 계획이라고 합니다.

 

 

만약 계획대로 김정은이 중국으로 탈출을 성공한다면 그 이후 압롭강과 인접한 중국의 은신처에서 김정은은 북한군 작전을 지휘한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김정은의 계획은 자신은 중국으로 달아나 몸을 숨긴 채 인민군과 주민들을 원격 조종해 맞서 싸우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극비정보는 2016년 8월 귀순한 태영호 前영국 대사관 공사가 미 중앙정보국(CIA)과 미국의 비밀정보부 MI6을 통해 얻어냈다고 합니다.  김정은은 전용기 2대 가운데 1대는 언제든지 이륙할 수 있도록 연료를 가득 채워놓고 항상 김정은이 머무는 곳 주변에 대기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전용열차를 통해 도피하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용기 뿐만 아니라 북한제 단발 경비행기 2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경비행기에도 항상 연료를 가득 채워 놓고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4년에 경비행기를 만들라고 지시한 후 2015년에 직접 경비행기에 올라타 이착륙 시험비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계속해서 김정은 전용 활주로가 매년 2개씩 건설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사실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2009년에 결혼한 김정은과 리설주는 2010년과 2013년 첫째와 둘째를 낳았는데 둘째는 2013년 북한을 방문하였던 미 농구 NBA 스타 로드먼을 통해 김주애라는 이름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초 셋째를 출산하면서 3명의 자식을 두고 있는데 문제는 김정은 탈출 계획에 둘째딸 김주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3명의 자식들은 북한에 두고 떠난다는 계획입니다.

 

1940년 늦은 봄 당시 전격전을 앞세운 독일군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덴마크·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프랑스마저 꺽은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 나가 있던 영국 원정군은 6월 초 탱크와 야포는 물론 소총까지 버리고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애타게 끌어들이고 싶어한 미국은 굳건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히틀러의 다음 목표가 영국이라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했습니다. 독일군은 ‘바다사자 작전’으로 이름붙인 영국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도버 해협을 넘어 일단 상륙에 성공하면 중화기와 병력이 부족한 영국 육군에겐 승산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해군은 영국군이 훨씬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군이 하늘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 전투는 스페인 내전에서부터의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독일 공군의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날렵한 모습의 메사슈미트 Bf109E전투기는 상공을 지배했습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내려꽂히는 슈투카 Ju87 급강하폭격기는 연합군 탱크와 포병에게 악몽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의 도시 로테르담을 단 하루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전의를 상실케 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와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독일 공군이 영국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런던 세인트폴 성당 앞의 건물 옥상에서 독일 공습을 감시하는 영국 병사

 

<영국 침공 당시에 독일은 5개 항공군을 보유했는데 1개 항공군 전력이 어지간한 국가의 공군력을 능가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8월 12일 히틀러는 마침내 전면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영국 본토, 특히 런던을 포함한 잉글랜드 남서부가 독일군 쌍발폭격기로 뒤덮였습니다. 수십 대, 때론 100대 이상 무리를 지은 하인켈 He111, 도르니에 Do17 폭격기들이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 산업시설을 겨냥했습니다.

 

 

15일엔 1000대가 넘는 독일기들이 날아들면서 영국 항공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영국의 싸움(Battle of Britain)이 시작될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하지만 영국은 본토 항공전에 대비해 히든카드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스핏파이어 전투기였습니다. 스핏파이어 전투기는는 허리케인처럼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장착한 단발 전투기로 Bf109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였습니다.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영국 파일럿들의 놀라운 활약을 두고 윈스턴 처칠이 남긴 말-

 

 

그리고 암울했던 영국에 승리의 희망을 불어 넣은 건 2000명이 안되는 젊은 조종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영국 전투기 한대가 추락할 때 독일 폭격기나 전투기 세 대가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를 전투에 다시 투입할 수 있었지만 독일 조종사 대부분은 복귀가 불가능했습니다. 이 결과 승무원 손실비가 영국 1대 독일 12까지 벌어졌습니다.

 

▲1940년 10월 22일 독일 주간뉴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오래 대비해 온 독일이 유리했습니다. 영국으로선 전투기는 어떻게든 공급한다 해도 조종사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충되는 조종사가 전사나 부상당한 조종사의 3분의 1 밖에 안됐습니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야간 공습으로 생산 차질도 심각했습니다.

 

 

이렇게 불리하던 영국을 구원한 것은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월 25일 새벽,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가 우연히 런던 한복판 스퀘어마일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런던 폭격을 금지하고 있던 히틀러는 당황했고 처칠은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25일 밤부터 29일까지 영국군 폭격기들을 베를린으로 보냈습니다.

 

 

“베를린에 적기의 폭탄 한발 떨어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히틀러도 런던에 대한 보복 폭격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신창이가 돼가던 영국 공군의 숨통을 틔워준 결정이 됐습니다. 독일이 건드리지 않는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지휘소를 바탕으로 영국 공군이 더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졌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 진거야"

-독일 공군 장군 헤르만 괴링-

 

 

그렇게 10월 말까지 100여일간 이어진 영국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1887대의 전투기를 전투나 사고로 상실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1547대) 보유 전투기와 폭격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물량이었습니다. 탑승한 조종사와 승무원 손실은 더 뼈아팠습니다. 독일 공군은 남은 대전 기간 내내 이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전역은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히틀러가 런던 폭격 대신 비행장과 관제소에 대한 공습을 계속했다면 방공방은 무너지고 독일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영국이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한 이후에 영국이라는 교두보가 없다면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노르망디 상륙 같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가 난감했을 것입니다.

 

흔히 졸음 운전사고는 나른한 봄철에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신데요. 요즘처럼 히터를 키고 운전을 하는 겨울철에는 특히 더 위험합니다. 이처럼 봄철이 아닌 겨울철에도 졸음 운전사고가 잇따르는 이유는 오랜시간 창문을 닫은 상태에서 히터를 켜고 운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졸음운전은 소주 2병 정도를 마시고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는 것과 비슷해 겨울에 특히 조심해야합니다.

 

 

보통 추운날 차안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그 한기때문에 많은분들이 시동을 키고 히터부터 빵빵하게 트실겁니다. 그렇게 온도가 하나 둘 올라가다 보면 어느세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게 됩니다. 겨울철에 도서관이나 버스안 등 사람이 많이 몰리거나 밀폐되고 따뜻한 공간에서는 더 많이 졸립니다.

 

 

하지만 보통 많은분들이 이런 졸음의 이유를 부족한 휴식과 피로, 그리고 식곤증 등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 휴식도 충분히 취한 상태이고 특별히 몸이 피곤한 상태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져 운전이 무척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부 공기가 순환되지 않아서 공기중에 산소가 결핍되고 이산화탄소가 몰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겨울철에 도서관이나 버스안 등 사람이 많이 몰리거나 밀폐되고 따뜻한 공간에서는 더 많이 졸립니다. 이런 밀폐된 차안에 여러명이 탑승하고 운행을 할 경우 당연히 차내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빠른 속도로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2000ppm이면 피로감을 느끼는 수준이지만 5000ppm을 넘으면 일반적으로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참기 힘들 정도로 졸음이 밀려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5천 ppm인 환경에서 1시간가량 운전할 경우, 운전자의 집중력이 떨어져 차량 제동거리가 약 30%가량 길어지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내기순환모드를 외기순환모드로 전환한 후 차량 실내 이산화탄소 농도는 급격하게 내려갑니다. 최근 도심이나 고속도로에서 미세먼지나 기타 유해물질이 실내로 유입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많은분들이 내기순환모드에만 설정해두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외기순환모드를 사용하더라도 외부의 미세먼지는 케빈필터를 거치면서 대부분 걸러지기 때문에 30분에 2~3분씩은 외기순환모드로 바꿔주면서 운전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또한 차량 내 환기와 너무 높지않은 적절한 온도 유지가 중요합니다. 겨울철 너무 높지않고 쾌적하며 상쾌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적정온도는 21~23도 사이라고 합니다. 21~23도 사이가 실내 공기가 맑아지며 졸음이 달아날 수 있는 온도입니다. 사실 인채가 느끼는 쾌적온도는 23~24도 입니다.

 

 

쾌적 온도보다 1~2도 정도가 낮기 때문에 조금 쌀쌀 함을 느끼실 수 있지만, 이정도의 차이는 내복이나 옷입음으로 조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25도 이상 실내 온도가 올라갈 시에는 실내 공기가 답답해짐을 느끼실 수 있고, 옷을 입음으로써 올라간 체감 온도와 더불더 졸음 운전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정말 정말 추운날에 이정도 온도로는 너무 추워서 안되겠다. 하시는 분들은 꼭 온도를 올리시더라도 한시간에 한번 정도 창문을 열고 공기를 환기 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강조드리지만 공기 순환이 되질 않으면 졸음이 쏟아지게 됩니다.

 

슬슬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군인들은 걱정이 많아집니다. 바로 악명높은 혹한기 훈련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혹한기훈련은 유격훈련과 함께 군생활 양대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예전에는 유격훈련이 더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유격훈련의 난이도가 예전보다 낮아지면서 현재는 혹한기 훈련이 더 힘들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은 부대는 혹한기 훈련장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기도 합니다.

 

 

혹한기 훈련은 강추위 속에서도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으로 우리나라의 겨울이 매우 춥고, 산악 지대가 많아서 동계 전투의 비중이 꽤 높은 편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으로 진군하면 남한보다 훨씬 춥기때문에 혹한기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지난 한국전쟁에서 장진호 전투로 인해서 중공군과 주한미군도 혹한기 훈련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혹한기 훈련은 보통 일년에 한번 4박 5일의 기간으로 진행되며 장교, 부사관, 대한민국 군무원, 전투병과 병은 물론 그 외에 의무병, 조리병, PX병, 상근예비역, 헌병까지도 모두 참가하게 됩니다. 

 

 

일단 혹한기 훈련도 야외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텐트가 중요한데 A텐트의 단열 능력은 비참하기 짝이 없고, 군용 침낭은 솜이불만도 못한 수준이입니다. 또한 불을 피운다는건 적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행동이여서 오로지 핫팩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이 여름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인데 혹한기에서는 단순히 텐트 쳐놓고 잠만 잔다고 해도 엄청난 고통입니다.

 

 

문제는 텐트를 치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얼어붙은 땅을 파야 합니다. 그런데 땅을 곡괭이를 내려찍으면 보통은 곡괭이가 땅에 꽂히면서 땅이 들려야 땅이 파이는데 그냥 박히고 끝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곡괭이가 박히기는 커녕 맨땅에 불꽃이 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소속부대마다 다르지만 내한적응 및 극복을 위해 건포 및 냉수마찰, 뜀걸음, 급속행군, PT체조 등 다양한 종류의 체력단을 실시합니다.

 

▲그 춥다는 시베리아보다 추운 철원..

혹한기 훈련 날씨를 '뭐 그렇게까지 추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참고로 강원도에서 비교적 후방에 위치한 원주와 강릉 지방만 놓고 봐도 혹한기가 시작되는 11월에서 12월 즈음이면 야외 온도가 영하 16도, 체감 온도 영하 30~40도에 육박합니다.

 

 

양구랑 원통은 더 추워 물기있는 모든 것은 얼어붙는다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안면 마스크의 김이 얼어붙어 서리가 열리거나, 콧속에 얼음이 맺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히 국과 같은 뜨거운 음식도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조금만 지체하면 국에 살얼음이 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뽀글이 하나만 있어도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힘든하루가 지나가고 새벽이 되어 야간근무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 침낭을 열었을 때, 밖의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그 느낌은 그야말로 안 당해본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텐트 위에 허옇게 낀 서리까지 보면 내가 냉장고에서 잔 건지 텐트에서 잔 건지 구분이 안 됩니다. 냉장고는 오히려 영상이기 때문에 냉장고가 있다면 거기에서 자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추운 새벽에 경계근무를 위해 군장을 착용하고 전투화를 신고 후에 밖으로 나가야하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근무 교대자가 선임인 경우라도 서로 힘든걸 잘 알기에 이해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혹한기 훈련 중 가장 난감한 상황이 있는데 용변을 보려면 훈련장비 착용한 상태에 겹겹이 껴입은 옷 때문에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방한장갑 벗고, 속장갑 벗고, 소총 거치하고, 탄띠 풀고, 스키파카 바지 내리고, 전투복 내리고, 활동복 바지 내리고, 내복 내리고, 팬티까지 내려야 하는데 손가락까지 꽁꽁 얼어붙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든 혹한기 훈련이 끝나고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관문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바로 행군을 하게 되는데 혹한기 전 기간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이 순간만큼은 영하 20도에서도 전투복 한 벌만 입고 걸어도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됩니다. 더 힘든 건 행군 중 휴식을 취할 때 온 몸에서 흘러내린 땀이 급격하게 식으면서 체온을 빼앗아가는데 진짜 미치도록 춥습니다.

 

 

이처럼 혹한기 훈련은 한 해의 훈련 중 가장 넘기 힘든 고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비가 아닌 정복해야 할 고지라는 생각으로 대한민국에 모든 장병들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대한민국 국군 장병 여러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