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전세계인이 즐기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군대에서는 어떤모습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낼까요.. 미 해군에서는 매년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야간조명 경연대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많은 해군 병사들이 자신의 함선에 아름답게 조명을 설치하는데 정말 이색적이면서 멋진 모습입니다. 해군 크리스마스 모습과 함께 육군의 크리스마스 모습도 같이 한번 보도록 할게요^^

 

Navy ChristMas

황혼의 배경과 잘 어울리는 함정이네요

 

샌디에고 야간조명 경연대회 꼴등 함선입니다.ㅎㅎㅎ

 

USS 하와이 (SSN-776) 잠수함도 참가하는 군요!

 

 

USS 하투산 (SSN-770) 귀여운 눈사람모양 조명이 너무 이쁘네요

 

미국 해군 크리스마스 !!!

 

2011년 1월 1일 일본의 미군 함대 항구에서 불꽃놀이 하는모습입니다.

 

미국 노퍽 해군기지에 루즈 벨트 항공모함

 

니미츠급 항공모함 칼 빈슨 (CVN-70)에서 저녁식사 풍경

 

미 제 7함대 블루리지급 지휘함 모습

 

크리스마스 이브에 항구에 정박해있는 미해군 제7함대 

 

하와이 미군기지에서도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365일 바다를 지키는 영국해군의 크리스마스!

 

엄청 신나보이는 영국해군들 ㅎㅎ

 

칠면조 파티를 눈밭위에서 하는군요!

 

팽귄이 지나가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Army ChristMas

추첨을 통해 특별한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미군 병사들을 격려하기위해 NATO 사령관 McConville 소장이 와서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입니다. (모든 상급자들은 부대방문을 병사들이 안좋아하는걸 모르나 봅니다^^)

 

크리스마스지만 경계근무는 서야죠! 발걸음이 무거워보입니다..ㅎㅎ

 

그래도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보입니다^^

 

 

축하주를 마시고 기분좋은 오스트리아군

 

생각보다 맛있는 식단이 아닌듯한 표정입니다 ㅎㅎ

 

전쟁터에서 읽는 크리스마스 카드.. 가슴이 찡하네요

 

병사들을 격려하러 산타로 변신한 사령관

 

산타를 호위하라! 설정샷

 

선물주러 가기 거참 힘들구만!

 

바비큐 파티를 준비하는 독일군

 

크리스마스에 트리가 빠질 수 없죠!

 

루돌프야 날아라~

 

벨로루시의 군인들인 민스크 군사 기지에서 크리스마스 예배 후 교회 십자가에 키스를 합니다.

 

 

우리나라 장병들도 크리스마스에는 과자파티보단 뜻깊은 행사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관련 추천글링크▼

영화같은 감동실화 '크리스마스 휴전'

감동적인 한국전쟁 크리스마스 스토리

항공모함에서 즐기는 바비큐 파티~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백골병단은 한국군이 적 후방침투와

 

 첩보수집을 위해 창설한 부대입니다.

 

적에게 부대 규모를 과장되게 속이기 위해

 

집단군급'병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50년대에도 유격대가 있었는데

 

왜 51년에 창설된 백골병단이 최총인지

 

의아해하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전에 창설된 유격대들은 군에서 만든

 

부대가 아니라 민간인들이 조직하거나

 

낙오된 군인들이 합류해 만들어진 유격대였습니다.

 

그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부대였습니다.

 

▲백골병단 임시군번과 계급

 

하지만 백골병단은 1951년 1월 체력,정신력

 

애국심이 투철한 647명을 선발하여

 

육군정보학교에서 교육을 더 받은뒤에

 

군번과 계급을 주었던 육군 본부직할

 

정식부대입니다.

 

 "백골병단"(陸軍本部直轄決死隊"白骨兵團")

 

 

하지만 너무 급하게 만든조직이라

 

대원들은 신병수준이었고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백골병단 편성과 교육을 위해

 

초빙되었던 채명신장군은 백골병단

 

수준을 보고 회고록에서

 

'이런 아마추어 부대들은 실전에 투입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며 직접 11연대장에

 

지원을 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들

 

오른쪽에서 2번째 채명신장군

 

하지만 채명신장군(당시중령)이 11연대장을

 

맡은거 외에 12,13연대는 선발인원에서

 

대학교나 의용경찰 출신자들로 지휘관을

 

뽑았다고 합니다.

 

모두가 백골이 되겟다는 의지를 나타댄

 

백골병단은 우여곡절끝에 교육이끝나자마자

 

▲북한군복을 입고 김백일 1군단장

 

사열을 받고있는 11연대

 

11연대가 1월 30일 실전투입을

 

시작으로

 

정일권 참모총장, 1군단장, 수도사단장

 

미 군사고문 등이 북한군복을 입은

 

12연대 출정식 사열을 받고있는모습

 

12연대 , 13연대가 차례대로 투입됐습니다.

 

그들은 북한군 무기와 장비를 들고

 

전장으로 향하였고 그곳은 바로

 

김일성 최측근이자 최룡해에 아버지인

 

최현 중장이 이끈는 군단과 105전차여단과

 

김일성이 총애해 현재 북한 사단이름으로

 

남아있는 류경수가 지휘하는 군단까지

 

2개의 군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 북방산악지대와

 

혹독한 추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던

 

백골병단은 게릴라를 통해서 분산된

 

적 소부대들을 전멸시키고 검문소를 설치해

 

지나가는 북한군관들을 처치하고 정보를

 

캐냈다고 합니다.

 

▲백골병단 침투경로

 

획득한 정보는 곧장 아군에게 전달됐고

 

그 정보로 수도사단이 적들을 크게 격파하는

 

전과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만든 남파유격대를 조기에

 

식별해 수뇌부 전원 생포하였습니다.

 

생포된 인원들 중에는 빨치산 총사령관

 

김원팔 중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전과를 올린 유격대는 기뻐할

 

틈도 없이 생포했던 포로가 도망치면서 상황이

 

뒤바뀌게 됩니다.

 

백골병단은 적의 추격이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은 전부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얼마 후 북한군은

 

추격해왔고 백골병단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60일동안 북한군과 혈투를 벌입니다.

 

11연대 2대대장이었던 윤창규 대위는

 

부상을 집자 전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적들에게 다가가

 

"야이 새끼들아! 내가 대대장이다!" 외치며

 

생포하려고 온 적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강원북부 산악지대에서 2주치

 

미숫가루 식량만 들고 60일동안 320km를

 

이동하였습니다.

 

3월 30일 전선이 북상하며 더이상의 추격은

 

없어졌고 북진하던 국군 7사단과 조우하며

 

이들의 춥고 길었던 전투는 끝났습니다.

 

적 고위간부 13명과 480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적 통신교란과 첩보수집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살아서 귀환한 11연대원들

 

하지만 647명의 용사들중에 364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포상이 아닌 군번과 계급이 인정받지

 

못한채 백골병단 해체라는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전역한 사람들은 군번도 계급도 인정 못받은

 

미필상태로 남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고

 

그 뜻은 다시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는

 

미친 상황이 벌어집니다.

 

채명신 장군은 육분에 항의를 하였지만

 

육본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당연히 유가족들 또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을 위해 지옥을 갔다온 용사들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만 흘렀습니다.

 

1980년대 말 생존자들과 유가족을은

 

힘을 모아 겨우겨우 백골병단 전적비 승인을

 

받았고 그리고 2004년 53년만에 국회에서

 

적 후방지역 작전수행 공로자에 대한

 

군복무인정 및 보상등에 관한 별률안이

 

 통과되면서 아주 늦었지만......

 

생존자는 계급과 군번을 인정 받을 수 있었고

 

유가족들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6월 25일 육본 대연병장에서

 

 

59년만의 전역식이 열렸습니다.

 

 

이미 수많은 전우들은 먼저 떠나갔고

 

 

26명만이 남아 먼저 간 전우들과

 

함께라는생각으로

 

 

기쁜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슬픈마음으로

 

전역을 하게되었습니다.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은

 

"백골병단 선배들께 오늘에야 전역증을 드리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늦었지만 최고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칩니다"

 

라며 사죄하였지만 조국을 위해 사지로

 

향하였던 그들에 대한 예우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백골병단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늘이 누볐던 곳은

 

 

그들의 후예들이 굳건히

 

지키고있습니다(703특공연대)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가면 백골유격대에

 

전적비가 있으니 혹시라도 지나가는 길이면

 

한번쯤 들려보는것도 좋습니다.

 

 

"백골병단 전적비"(白骨兵團 戰蹟碑)

 

 1990년에 건립되어 해마다 백골병단 전적비

 

 앞에서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립니다

 

▲전적비에 새겨진 백골병단 전투요도

 

대한민국 많은사람들이 백골병단은 물론이고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산화한 용사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대한이여, 그 날의 우리를 잊지 말아다오

 

 

 

너무늦어서 죄송합니다 백골병단 용사들이여...

 

 

 

▼관련 추천글링크▼ 

6.25한국전쟁 미스테리 10가지

한국전쟁당시 활약했던 각나라 주요인물

6.25전쟁떄 가장 잘싸운 부대 TOP5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1931년 2월 20일 북경, 오금손(吳錦孫) 대위는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로 중국베이징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이 되기도 전에 부모를 잃고 중국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5세가 되던 1943년에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일찍부터 항일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토록 꿈꾸던 광복 이후 오금손 대위는 조국으로 돌아와 개성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여 개성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순간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오금손 대위는 다시 한 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진 입대를 선택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초,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오금손 대위가 부상자들을 돌보던 중 북한군이 병원을 기습했습니다. 오금손 대위는 북한군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2계급 특진, 대위로 진급하게 됩니다. 오금손 대위는 광복군 시절 사격과 전투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결과라고 회고했습니다.

 

 

아군의 북진 시기에도 늘 전장을 지키며 전투장교의 어려운 역활까지 묵묵히 감당했던 그녀는 금화와 철원 중간지점에 있는 케이(K)고지 전투 중에서는 전우들과 함께 북한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끝이 없는 고문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오금손 대위는 절대 굴하지 않은 채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다 북한군이 교전에 빠진 순간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중공군 시체더미에서 10일간 버티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탈출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 허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게 되어 후유증이 심해져 안타깝게도  1953년 군을 떠나게 됩니다. 

 

1961년 길가에서 싸움을 하던 군인들을 말리던 모습을 본 한 소대장의 요청으로 안보강연에 나서기 시작해 2004년 8월 백골부대에서 5000회 기념 강연을 하는 등  5천 13회에 걸쳐 전쟁의 참상을 장병들에게 알리는 안보 전보사 역활을 해왔습니다.

 

"말고개라는 곳에 새까만 나무 조각이 있어서 깔고 앉았는데 양쪽에서 고름이 쫙 나오더군요. 알고보니 불에 탄 사람 시체였습니다. 정말 전쟁의 잔혹한 참상이었지요"-백골부대강의중-

 

 

특히 손수 마련한 음식을 들고 틈틈이 강원도 철원 백골부대를 찾아와 장병들 사이에서는 '백골 할머니'로 통하며 '영광의 가시밭길','파로호','60만 대군이 보는 파로호' 등 국가관 확립을 위한 3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74세로 타계할 때까지 ‘백골할머니라는 별명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과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알리는 안보 전도사로서 활동하다 지난 2004년 11일4일 새벽 대전 중구 산성동 자택에서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그 후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었습니다.

 

 

육골백골부대는 조의금을 모금하고 장례식장에 조문단을 파견해 오금손 대위에 나라사랑 정신을 기렸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리라! 아버님, 이 딸이 당신의 유지를 받듭니다."

 

아버지 오수암 선생에 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전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국가 안보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오금손대위는 진정한 영웅입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온몸으로 수류탄을 막아낸 잊혀진 두 영웅

 

한국전쟁 숨겨진 영웅이야기 강길영 해병중위

 

북한전차를 맨손으로 막아낸 이명수 일등상사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한군의 진격에 밀려버린 국군은 UN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낙동강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력이 부족했던 국군은 포항 지역 방어에 학도병들을 투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16~18세의 푸르른 청춘들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위해 펜대신 총을 들었습니다.

 

 

8월 10일 오전 7시

 

포항역에 도착한 71명의 수도사단학도의용대 출신 학도병들은 임시 숙소로 지정된 포항국민학교로 이동했습니다.

 

 

이 곳에서 한국군 제 3사단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대위와 만났으며 이후 제 3사단 후방사령부가 위치한 포항여중학교로 숙소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녁 10시 학도병들은 M1소총과 개인당 실탄 250발을 지급받았고 투표를 통해 중대를 편성한 이후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군번도 없었습니다..

 

 

8월 11일 새벽 3시..

 

영화'포화속으로'中 포항여중전투 학도병

 

포항시내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한국군 제 3사단 후방사령부 지휘책임자인 사단인사참모 김재규 소령은 사령부 잔여병력을 이끌고 시내 쪽으로 들어갔고 학도병에게 사령부 방어를,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대위에게 행정요원 60여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지휘하게 하여 학교 뒷산에 배치하는 한편, 일부병력으로 사단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게 하였습니다.

 

 

학도병들은 학교 울타리를 따라 제1소대는 학교 정문 우측으로 부터 강당 측면까지, 제 2소대는 정문 좌측으로 부터 본관 측면까지 경계를 하였습니다.

 

 

8월 11일 새벽 4시..

 

 

소티재 방향에서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었고 학교 정문 100m 전방에 소속 불명의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은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암구호 질문을 고민하였으나 이내 시야로 들어온 병력이 북한군으로 판단하고 2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으로 북한군 첨병대를 제압하였습니다.

 

 

8월 11일 새벽 6시..

 

영화'포화속으로'中

 

북한군은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실패하였지만 학교 뒷산에 배치되었던 한국군 제 3사단 행정요원 2개소대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3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그렇게 북한군은 학교 뒷건물로부터 포위망을 좁혀 들어 왔고 이에 학도병들은 백병전을 벌여가며 11시간 동안 용전분투하여 네차례나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 5사단 12연대는 오전 9시에 이르러 대량의 포격과 함께 공격을 다시 재개하였고 오후 3시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전사자 37명과 부상자 17명이라는 비참한 결과로 점령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당시의 포항여중 전투는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을 지연시켰으며 그 결과 제 3사단의 보급품의 안전한 이송과 중요 행정문서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학도병의 유품(교복단추)

 

1950년 8월 포항 여중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병 이우근의 일기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일기는 어느 여군 정훈 장교에 의해 기록되어졌는데 수첩의 핏자국으로 인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순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당시 전투에 참전하였던 71명 학도병

 

▼관련 추천글링크▼

연필대신 총을 들고 싸운 학생유격대 태극단

나라를지킨 제6사단 청성부대

한국전쟁 가장 잘싸운 대한민국 부대 TOP5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공식 명칭은 ZH-05 戦略歩槍 (전략보총 = 자동소총)으로 20mm 유탄 발사기와 5.8mm 소총이 결합되어있습니다. 기존 OICW와 다른 우리나라 K-11만의 고유 장점인 볼트액션식 컨셉을 사용하고 20mm 공중폭발탄을 사용하는 완전히 동일한 무기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최초로 개발에 성공하였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유중인 복합소총 K-11이지만 중국군이 우리나라 K-11 복합소총을 불법으로 카피하여 ZH-05를 자체개발한 뒤 전력화하였습니다. 중국군의 불법카피 복합소총인 ZH-05의 성능은 도트사이트는 일반 자동소총에 달린 도트사이트와 성능이 비슷할 것으로 예상되며 상공에서 폭발해 파편으로 10m 이내 반경 적들을 사살하는 공중 폭발탄은 ZH-05에선 엄페물이나 지면에 착탄하여 폭발하는 일반 유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디지털화된 사통장치에 20mm유탄을 쓰는 특징은 K-11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우리나라 K-11은 2008년 국방과학연구소 주도로 화기는 S&T, 사통장치는 이오시스템, 탄환은 한화에서 각각 개발하여 2008년 완성하였습니다. 분대 40mm 유탄발사기 K201을 대체할 예정이었으나, 초기 양산품에서 폭발사고와 품질결함이 발생하여 전면 재설계중에 있습니.

 

 

다른국가에서는 지정사수를 별도로 두는 반면 K-11 사수는 혼자서 돌격소총 + 지정사수 + 유탄발사기를 합친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대 초/중반의 우리 한국군 신체사이즈를 기초로 조준기 조작패널과 개머리판 길이, 권총손잡이 등이 설계되었고 테스트와 피드백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군과 체형이 비슷한 중국군이 중량, 전장, 총열길이 등 모두 비슷하게 카피하여 K-11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ZH-05을 사용하는 중국군 병사의 헬멧에 소형의 eye-sight가 장착되어 있어 총 자체의 무게를 K-11보다 약 1kg가량 줄이고 운용의 편리성을 위해 소총의 sight와 에어버스트 탄의 사격 통제 장치를 분리하여 헬멧에 장착하면서 무선 연동을 추정합니다.

 

 

중국의 기술력으로 가능할까싶지만 최근은 민간 기술로도 충분히 구현이 가능하며 실제 중국이 이러한 헬멧 연동 시현 장치를 연구한 모습도 있습니다. 즉 K-11과 미국의 OICW가 열상과 복합 sight, 사격통제 등을 소총에 적용시켰다면 중국은 이를 분리함으로써 총 자체의 경량화를 시킨것입니다.

 

 

하지만 사통장비를 분리하는 것은 총기 무게를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만약 유탄 사수가 피격되면 다른 분대원이 이를 이어받기가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됩니다. ZH-05의 최신 버전은 열상 조준경까지 폐지해서 단순 광학 조준경과 레이저 거리측정기만 조합되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환경에서의 작전에는 제한이 따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 XM-8

 

미국 XM-29

 

OICW는 Objective Individual Combat Weapon의 줄임말로 여러 전자장비 등의 도움을 받아 주야에 상관없이 목표를 추적, 섬멸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무기를 뜻합니다. 미군은 XM-29와 XM-8 등 두기종 모두 OICW 프로그램에서 탈락시키고 2005년 OICW 프로그램을 종료하지만 중국은 제식명 ZH-05으로 미국의 OICW와 우리의 K-11를 모방하여 실전배치하고 있습니다.

 

 

속을 썪이고 있는 우리나라 K-11 복합소총은 2000년에 개발에 착수하여 2008년 전투적합판정 이후 2010년 첫 양산품 208정이 곧바로 실전배치되었지만 여러가지 결함들로 인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2015년 5월 격발충격시험결과를 조작하여 납품한 업체관려자 3명이 기소되고 2016년 8월에 생산이 중단되었던 K-11의 설계를 변경해 2차 생산부터 적용할 예정이며 3차 생산부터는 무게와 크기도 줄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탄을 제외한 K-11의 무게는 6.1kg으로 K1과 K2의 두배 수준으로 K3기관총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내구도를 보강하며, 사통장치크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전체소총 무게 10%를 줄이는 목표로 재설계한다고 합니다.

 

 

자칭 G2라 부르며 세계인구 1위와 전세계 영토면적 4위에 나라에서 본품을 개발조차 하지 못하여 전세계 국가들의 국방무기를 불법카피하는 중국군이 무섭기도하고 한심한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K-11 복합소총을 부실무기로 만든 핵심장치 납품 방산비리도 정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한반도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입니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방산비리는 명백한 이적행위입니다. 베트남 전 당시 쓰이던 수통을 아직도 사용하는 우리나라 군대현실이 너무 가슴아픕니다. 군 내 비리에 대한 처벌의 강도를 더 높여 내부적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불패신화에 월남전 자랑스러운 한국군

자랑스러운 한국군 보병화기 발전사

강한국방 대한민국 포병전술무기 TOP10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NATO 코드명은 하인드(Hind)로 궁둥이, 혹은 암사슴을 뜻합니다. 러시아식 코드네임은 Крокодил(크로코다일)입니다. 별명은 '사탄의 마차'입니다. 1969년 9월 첫 비행에 성공하였으며 1972년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베일에 가려졌던 1973년 봄 Mi-24는 동독 지역의 구 소련군에 배치되면서 서방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처음부터 중무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하였는데 조포탑형 12.7mm 4연장 개틀링건을 장착해 공격헬기로서의 면보를 갖추었으며 후기형인 Mi-24P 하인드 F 공격의 동체 좌측에는 전차의 장갑도 관통시킬 수 있는 강력한 30mm GSH-30K 기관포 2문을 장착하였으며 엔진도 고출력이였습니다.

 

 

덕분에 소련 조종사들 사이의 별명은 летающий танк(날아다니는 전차)였습니. 무지막지한 크기로 인해 느리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공격 헬리콥터 중에서도 상당한 고속을 냅니다. 링스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80년대에 최고 360km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소련은 Mi-24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투입하였는데 초기 운용 결과 화력은 매우 만족스러웠던 반면 수송 능력은 문제가 많았습니. Mi-24에 병력을 태우면 무게가 무거워져서 기동성에 제약이 생겨 '공격 헬리콥터'로써의 능력 또한 떨어졌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고산지대에서는 공기밀도가 낮아져 헬리콥터의 출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Mi-24의 조종사들이 병력 탑승칸의 방탄판을 떼어서 무게를 줄이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Mi-24의 남는 수송 공간은 탄약을 싣는 식으로 운용되었습니다. 수송헬기를 호위하다 화력을 다 쏟아부으면, 안전한 곳에 착륙해서 재장전 후에 다시 화력 지원을 했습니다. 몇 십~몇 백km 떨어진 기지까지 돌아갈 필요없이 바로 돌아오니 지원받는 지상군 입장에선 매우 믿음직스러웠습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Mi-24의 로켓을 이용한 광역공격은 적 지상군을 실질적으로 제압하는 효과 이외에도, 사기를 크게 꺾는데 한몫했습니. 이 때문에 신나게 쏟아붓고 재보급받으러 기지로 가다 지상군의 지원요청을 받은 Mi-24가 아프간 저항군 머리 위에 등장하자 줄줄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초기에 아프가니스탄 저항군들은 별다른 대공화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도 900m 부근에서 저속으로 대기하다가 반군들이 나타나면 급강하하여 클러스터 폭탄, 57mm 로켓, 23mm 기관포 등 엄청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돌아가는 형식을 사용했습니.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였지만 적이 대공화기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불가능 했습니다.
CIA가 아프가니스탄에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소련군은 맨패즈 공격에 충격을 받고 바로 전술을 바꾸었습니다. 목표 획득을 위해 한 대가 고고도로 정찰하고 나머지는 저고도에서 고속으로 이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군과 7~8km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다가 정찰대가 적을 발견하면 100m 이하의 고도, 1500m 이상 거리에서 공격을 가하여 적을 섬멸했습니다. Mi-24는 상당한 중장갑을 바탕으로 스팅어에 한두 대쯤 맞아도 추락하지않고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반군을 우습게 본 소련군은 플레어나 적외선 교란기를 탑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반군이 스팅어를 보유하면서 상황이 변하자 Mi-24 꽁무니에 화염 방사기를 달아 교란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소련군은 총 800대의 헬리콥터를 상실했으며 이 중 반은 비전투 손실이었습니. 이 비율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과 비슷합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헬리콥터 운용사상 드물게도 Mi-24AH-1간의 공중전, 즉 헬리콥터끼리의 공중전이 전사상 최초로 벌어졌습니.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고 하지만 의견은 분분합니다. 일부는 육중한 장갑의 Mi-24AH-1을 압도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는 Mi-24에 공대공용 2연장 23mm포를 장착하고 공격 헬리콥터 사냥에 적합한 Ka-50을 설계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이란군의 헬리콥터 43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례로 미국과 러시아는 헬리콥터간 공중전술 연구나, 공대공 미사일을 다는 연구도 했습니다.
체첸 사태에도 러시아는 Mi-24를 사용했습니다. Mi-24는 지면밀착비행을 이용하여 건물 사이 사이를 이동하며 갑자기 튀어나와 반군들을 공격하여 체첸군이 골머리를 상당히 앓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체첸 반군은 러시아 공군기지로 몰래 접근하거나 이동 중인 Mi-24에게 맨패드, 대구경 저격총을 이용해 장거리 저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몇 대를 파괴하며 대응하였습니.

러시아는 Mi-24 하인드 공격헬기를 야간작전능력과 항공전자장비를 개량한 Mi-35 공격헬기를 개발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ATE사는 Mi-24 하인드 공격헬기를 기반으로 서방제 항공전자장비와 남아프카공화국이 자체 개발한 무장을 탑재한 Mi-24 Mk, V 슈퍼 하인드 공격헬기를 개발하여 알제리 공군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첨단 헬기들이 등장하면서 Mi-24 하인드 공격헬기는 과거와 같은 명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중동과 아프리카 등의 분쟁지역에서는 여전히 위협적인 화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헬기특수부대 밤의추격자

보잉이 제시한 치누크헬기에 장점 

엄격한 선발기준 러시아의 소녀군사학교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유보트(U-boot)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운용한 잠수함으로 유명해졌으며, 바다 밑의 보트라는 뜻의 Unterseeboot 운터지보트의 약자입니다. "함(schiffe)"이 아닌 "정(boot)"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 제국 해군이 개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소유하고 있던 유보트는 총 2,603척이었습니다. 이들은 연합국의 수많은 상선들과 175척의 군함들을 바닷속에 수장시켰습니다. 이 유보트를 이끈 함장들중 최고의 명장 10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위 권터 프린 소령

 

(히틀러 좌측이 퀀터 프린 소령)

격침 함선수:28척 격침 톤수:160,939함명:U47

전과 : 1939년 칼 되니츠 제독의 특명으로 영국 스캐퍼 플로우에 침입해서 전함 로열요크를 격침하였으며 리펄즈를 대파하는 무공을 세움으로써 단숨에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1941년 영국 구축함 울버린에 피격당하면서 승무원 전원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9위 하인리히 리베 중령

 

(좌측 두번째 하인리히 리베 중령)

격침 함선수:30척 격침 톤수:162,233함명:U38

전과 : 총 9회 출격하였습니다. 가능한 격침된 적국 승무원들을 구조하려했던 신사적인 함장이었습니다. 유보트의 크기와 당시의 전례에 비교해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8위 하인리히 레만 빌레브로크 중령

 

 

격침 함선수:22척 격침 톤수:166,596함명:U96

전과 : 총 8회 출격하였습니다. 통상적인 수상항주에서 어뢰를 사용하는것과 달리 잠항해서 은밀히 기습하는 독특한 전술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유보트 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습니다.


 

7위 헤르베르트 슐체 소령

 

 

격침 함선수:26척 격침 톤수:171,122함명:U160

전과 : 총 4회 출격 뿐이지만 아메리카까지의 장거리 향해로써 놀라운 전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6위 게오르그 라센 소령

 

 

격침 함선수:28척 격침 톤수:167,601함명:U48

전과 : 오직 U48함에서만 근무하며 총 8회 출격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해군훈련소에서 후진양성을 하였습니다.


 

5위 빅토르 쉬체 대령

 

 

격침 함선수:34척 격침 톤수:171,164함명:U103

전과 : 총 7회 출격하였으며 항상 모든 전술을 연구했던 학구파입니다. 1950년 종전을 맞은 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4위 칼 프리드리히 메르텐 대령

 

 

격침 함선수:29척 격침 톤수:186,064함명:U68

전과 : 총 5회 출격하였습니다. 유보트 함장으로 전출되기전에 경순 쾨니히스버그에서 병기장교를 지냈습니다. 종전 후 스위스로 이주해서 조용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3위 에리히 토프 중령

 

 

격침 함선수:34척 격침 톤수:193,684함명:U552

전과 : 총 13회 출격하였습니다. 1944년 유보트 훈련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종전후에 서독에서 장군으로 승진하였습니다.


 

2위 볼프강 뤼츠 대령

 

 

격침 함선수:43척 격침 톤수:255,712함명:U181

전과 : 총 17회의 출격을 하였으며 1944년 유보트 전대 지휘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독일 항복 직후 독일 초병에게 암호를 잘못말하였다가 아군에게 사망하였습니다.


 

1위 오토 크레치머 중령

 

 

격침 함선수:44척 격침 톤수:266,629함명:U99

전과 : 총 16회의 출격으로 놀라운 전과를 세웠습니다. 1941년 영국의 도널드 매킨타이어 대령에게 피괵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았습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히틀러에게 경례대신 팔짱을 끼고 비웃고있는 남자

세계를 뒤흔든 히틀러 나치의 22가지 비밀

인류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의 비밀8가지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연말이 되면 빠질 수 없는것이 바로 술자리입니다. 한해를 추억하는 송년회 자리가 반복되다 보면 피로와 숙취는 쌓이게 됩니다. 자! 숙취로 인해 힘든 당신에게 꼭 필요한 12가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1. 샐러리

 

샐러리에는 비타민A와 B가 풍부하게 들어있어 피로회복에 좋으며 특히 줄기부분에는 간 기능을 높여주는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숙취로 인한 두통에 아주 효과적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강장제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있을 만큼 피로회복 및 숙취에 좋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2. 초코우유

 

술 마시면 초코우유가 생각이 날 떄가 있습니다. 초코우유에는 카테란, 흑당, 타우린이 들어있어 숙취해소를 돕습니다.

 

3. 연근

 

뿌리채소, 연근은 영양분이 풍부합니다. 특히 위와 장에 좋아 위가 약한 분들에게는 연근을 갈아 꾸준히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빠른 숙취해소에도 탁월합니다.

 

4. 토마토

 

토마토는 칼륨이 풍부한 채소입니다. 또한 이 칼륨은 아콜이 손상시킨 혈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혈관을 지키게 되면 혈압도 안정되며 숙취 해소에도 좋습니다.

 

5. 콩나물

 

콩나물을 숙취음식에 대표적입니다. 알콜을 분해해주는 조효소의 생성을 도와주는 아스파트산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숙취해소에 아주 좋습니다. 이러한 성분은 주로 콩나물 뿌리 쪽에 함유되어있습니다.

 

6. 댤걀

 

달걀의 단백질에는 알코올 독소 해소에 도움이 되는 시스테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날댤걀로 먹어도 아주 좋습니다^^

 

7. 군밤

 

겨울 연말에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군밤도 숙취해소에 좋습니다.

 

8. 북어

 

북어에는 아미노산이 풍부해서 독소를 뺴는 효능이 있습니다.

 

9. 조개탕

 

조개탕은 술안주로도 좋으며 해장에도 아주 좋습니다. 타우린이라는 피로와 간 회복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가 있으며 비만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10. 추어탕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은 대표적인 보양식입니다. 단백질과 칼슘, 무기질이 풍부합니다. 또한 중국 명나라 연구서 '본초강목'에 따르면 미꾸라지는 기운을 북돋아주고 숙취와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커피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 성분이 알코올을 분해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몸 속의 아코올 성분과 독소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이 작용을 활성화 시켜준다고 합니다.

 

12. 바나나

 

바나나에는 칼슘과 마그네슘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천연제산제 역할을 해주어 숙취를 가라앉혀 줍니다.

 

 

아무리 봐도 전장 전설 같지만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3국에 분명히 기록이 남아 있고, 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은 기적같은 감동실화가 있습니다.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최악의 사건 중 하나였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주요 참전 국가들은 전쟁이 길어봐야 2~3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고 군부와 사회, 그리고 말단 병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전쟁과 참호전의 일상에 병사들과 장교들은 자연스레 지쳐만 갔고, 어느덧 1914년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날도 눈이 내렸습니다. 일명 NO man1s land 오직 죽음만이 있는 땅...참호 속은 여전히 춥고 축축할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전쟁 중이더라도 부대 내에서 자그마한 행사 정도는 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참호속에서 들리는 노래소리 '고요한밤 ~ 거룩한밤~' 그리고는 독일군들은 "그래! 오늘 크리스마스잖아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 소리를 쳤고 갑자기 독일군들이 참호 위에 촛불과 전등으로 장식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참호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런 엄폐물도 없는 전선에서 맨몸으로 나타나는 건 "나 죽여줍쇼~"하는 행위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발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측의 수많은 병사들이 너도나도 참호 위로 올라왔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도 나눠피었으며 이발도 해주며 서로의 가족사진을 돌려보았습니다. 

 

 

최일선의 소부대 지휘관들도 이런 분위기에 동참하여 상대방 지휘관과 만나 신사 조약을 맺고 당일 교전을 하지 않고,

 

 

참호 사이의 죽음의 땅에 버려져 있던 양군 시신들을 수습해주었습니다.

▲정전기념으로 영국군과 독일군의 축구경기


뒤이어 양군 병사들은 시신들이 정리된 땅에서 축구장을 급조해서 팀을 나눠서 같이
축구를 하면서 나뒹굴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3:2로 영국이 독일에게 역전패했는데, 영국 측은 이를 명백한 오프사이드였다고 하나, 독일측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 일축했다는 양자의 기록이 있습니다. 밤이 되자 이들은 같이 캐롤송을 부르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한 다음에 각자의 참호로 돌아갔습니다.

 

"이 광경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어요. 살인과 죽음 속에도 , 인간이란 존재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는 제게 잊지못할 크리스마스입니다." -바이에른제16보충병 연대 요제프 벤첼이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中

 

 

▲영국 언론 데일리 미러의 1면에실린 크리스마스휴전


크리스마스 정전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벨기에의 이프르 전역이지만, 서부전선 대다수의 곳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전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정전은 당일로 그치지 않고 2, 3일에서 길게는 1주일, 가장 긴 곳은 1915년 신년까지 이어져서 크리스마스-신년 정전이 된 곳도 있었습니다.

 

▲기념사진을찍는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및장교


"이 정전은 어느 누구의 제안도 강요도 없이 오직 일선 병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할 만 합니다. 크리스마스 정전은 1914년 단 한 해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915년에도 지역별로 병사들에 의해 크리스마스 정전이 재차 시도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양군 수뇌부는 상대방 진영에서 캐롤송이 들린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집중 포격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1918년까지도, 기나긴 참호전 가운데서 전쟁의 포화가 격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저렇게까지는 아니어도 기념일 같은 때에 암묵적으로 무기를 내린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BC 3,000년부터 1950년까지 약 1만 4,500건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인류는 5,000년 인류 역사 중 92%는 전쟁중이었고 단 8%만이 평화기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적이 일어난지 벌써 10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아비규환의 전쟁터는 존재하고있습니다. 부디 그날의 기적이 그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롯데쇼핑롯데마트가 운영하는 회원제 창고형 할인점입니지게차로 짐을 쌓아놓은 모습부터 푸드코트에서 취급하는 음식까지 꼭 코스트코를 보는 느낌입니다. 코스트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소포장으로 판매하는 상품들이 그나마 있다는 점인데 새우깡 한봉지를 팔기도 하고 잼 한통을 살수 있기도 합니다. 회원제 가입은 코스트코보다 조금 저렴한 개인 35,000원, 사업자 30,000원입니다. 코스트코는 1년, 빅마켓은 3년간의 회비로 연간 회비는 빅마켓이 더 저렴했으나, 2015년 5월 6일 이후 가입자부터 코스트코와 동일하게 1년단위로 변경되었습니다. 한국형 코스트코 빅마켓에서 꼭 사야할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데니쉬 버터쿠키

 

버터쿠키의 최강자답게 과자의 굳기정도가 딱딱하지 않고 버텨향이 너무 좋습니다.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하면 더 맛있을듯 합니다.

 

2. 샐러드

 

빅마켓에 가면 정말 꼭 사야할 샐러드입니다. 저렴한 가격에 여러종류에 풍부한 샐러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질 쉬림프 샐러드와 모짜렐라치즈 샐러드도 정말 맛있습니다.

 

3. 양념 소불고기

 

청정 호주산 척롤과 빅마켓 전용 양념이 들어간 양념 소불고기가 한팩에 대략 2kg으로 2만원으로 판매하는데 왠만한 할인마트나 정육점보다 맛이 좋으며 저렴합니다.

 

4. 연어

 

빅마켓 노르웨이 연어는 생으로 한번도 얼리지 않고 항공 직송 36시간 내에 한국으로 도착하다보니 해동할 때 생기는 육즙 손실이 없어 더욱 신선하고 탄력있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레베카밍코프 미니백

 

 

예쁜 컬러감성의 레베카밍코프 미니백을 해외직구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합니다. 여성분들에게 인기최고!

 

6. 불고기 베이크

 

밀가루 반죽 안에 고기와 야채와 치즈를 듬뿍 채워서 오븐에 구운 요리입니다. 지점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불고기 베이크 쪽이 더 속내용이 풍부하다 입 안에 꽉차는 고기와 육즙, 양념이 일품이며 3700원 가격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7. 핫도그

 

코스트코와 거의 비슷하지만 둘 다 먹어본 사람들에 의하면 이쪽이 덜 짠맛입니다.

 

8. 피자

 

큼직한 사이즈와 코스트코 피자에 밀리지 않는 맛입니다.

 

9. 생수

 

빅마켓 생수(大) 6개에 1,990원이며 아시아나 항공과 PIC 리조트에 공급중인 식양청 HACCP인증 업체가 만들어 더욱 위생적이고 안전한 고품질 생수입니다.

 

10. 초밥

 

빅마켓 초밥은 사시미 두께가 두툼하며 싱싱하여 코스트코 초밥보다 더 맛있는것 같습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코스트코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먹거리 20가지

치즈를 사랑한다면 꼭 먹어야 할 10가지

한솥도시락 실패확률 0% 인기절정 도시락 톱10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