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새 차를 구입하게 되면 네비게이션이나 블랙박스 등의 전자기기를 구입해 부착도 해야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는 물론 뜨거운 태양의 자외선까지 차단해주는 썬팅에 대해 고민을 하게됩니다. 썬팅필름은 안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외관을 멋있게 하기 위해 너무 어두운 필름을 택하게 되면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 썬팅이 필요한 이유와 잘 고르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자동차 썬팅 필름의 기능

1. 자외선 차단효과 99%

 

자외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기미, 잡티, 피부 트러블을 유발하며 심할경우에는 피부암까지 유발하는 안좋은 광선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분들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썬팅은 이렇듯 자외선으로 부터 운저자와 동승자의 피부를 보호함은 물론이며 차량 내부의 내장재 시트등의 탈변색을 막아줍니다.


 

2. 사생활보호 기능

 

자동차 썬팅이 되어 있지 않다면 차량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아무래도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썬팅은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던가 식사를 할 일이 생겼을 때 등 개인적인 행동을 할 경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어 사생활 보호의 기능이 있습니다.


3. 뛰어난 열차단 효과

 

모든 썬팅필름이 뛰어난 열차단 효과를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기아 차의 쿠폰썬팅을 관할하는 쿠폰필름의 경우 기본적으로 8%~25% 정도의 열차단율이 나오며 정말 뛰어난 제품들은 99%의 열차단율을 자랑합니다. 자동차의 썬팅필름은 열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역할을 하기때문에 여름철에는 보냉효과를 누릴 수 있으며 겨울철에는 보온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4. 사고 발생시 비산방지 기능

 

자동차 유리에 밀착되어 있는 썬팅 필름은 유리의 강도를 2배 이상 강하게 해줍니다. 또한 사고 발생시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도 연성인 필름은 산산조각난 유리파편을 꽉 붙잡아주기 때문에 산산조각난 파편이 튀는 현상을 방지해주는 비산방지의 기능을 해줍니다. 유리파편에 의한 2차 사고를 어느정도 예방이 가능합니다.


자동차 썬팅 필름의 종류와 특징

 

1. 염색 필름

 

양질의 염색필름은 가격에 비해 효과가 높은 편이나 일반적으로 투과율을 떨어뜨린 나쁜 염색 필름은 과다한 색상이 첨가돼 운전자의 시야확보를 어렵게 하며, 눈부심 차단 효과는 있지만 태양열(적외선) 등은 그대로 투과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2. 금속코팅 필름

 

금속코팅 필름은 폴리에스테르 원단 사이에 금속막을 입혀서 제작하는 썬팅 필름입니다. 내구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비게이션이나 하이패스 단말기 등의 전파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측후면은 상관이 없으나 전면필름은 금속코팅을 피하는게 좋습니다.


3. 나노테크 필름

 

나노테크 필름은 썬팅 필름 중 최고급 썬팅 필름으로 손꼽히는 제품으로 높은 단열 효과를 내며 적외선 차단 능력이 우수하며 자외선을 99%이상 차단합니다. 또한 전파 차단율이 전혀 없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액이 높다는 단점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전면용 필름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자동차 썬팅 도로교통법

 

제49조 제1항 제3호에 따라 운전이 금지되는 자동차 창유리 가시광선 투과율의 기준은 다음 각 호와 같이 구분한다.

앞면 창유리 : 70% 미만 운전석 좌우 옆면 창유리 : 40% 미만 * 후면 유리는 규제 없음

제49조 제2항 경찰공무원은 썬팅 금지 규정을 위반한 자동차를 발견한 경우에는 그 현장에서 운전자에게 위반사항을 제거하게 하거나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으며, 운전자가 이에 따르지 않으면 직접 이를 제거하거나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강력한 대북 압박 노선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를 향해 북한은 '최후통첩' 격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의 모든 도발적인 선택을 우리 식의 초강경 대응으로 무자비하게 짓부셔버릴 것"이라며 트럼프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정면으로 맞대응할 것임을 공식 천명했습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윌트리트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런 나라가 핵무기를 갖게 해서는 안된다. 김정은은 아직 핵무기 운반 시스템을 가지 못했지만 가질 것이다. 그것은 아주 쉬운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현재 미국은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기지와 알래스카 포트 그릴리에 모두 33기의 GBI를 운용하고 있으며, 올해까지 14기를 추가로 배치할 계획입니다. 또한 북한지역에서 ICBM이 발사되면 20여 분 만에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해 고출력 레이저와 공중 요격기, 레일건 등 첨단기술 개발에 막대한 자금과 기술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지난 5차례 핵실험과 다르게 미국이 북한 6차 핵실험을 강력하게 막는 이유가 있습니다. 핵무기는 크게 핵물질,운반체계,기폭장치 등 3대 요소로 구성되는데 북한은 이런 3대 요소를 거의 갖춘 것으로 평가됩니다. 북한은 2010년 말 이후 연간 최대 40㎏의 고농축우라늄 생산 능력을 갖췄으며 스커드와 노동, 무수단,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운반체계도 갖췄습니다. 이번 북한이 하려는 6차 핵실험에서 핵탄두 소형화까지 성공을 거둔다면 마지막 남은 퍼즐까지 완성됩니다.

 

 

이 마지막 퍼즐인 핵탄두 소형화는 핵무기 기술의 마지막 단계로 일컬어집니다. 미사일 탄두부에 탑재하려면 폭발력은 높게, 무게는 500~600kg으로 소형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동안 한국 군 당국은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에 대해 "그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해 왔지만 북한의 5차 핵실험까지 지켜본 결과 이제 북한 핵탄두 소형화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북한이 이전보다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된 보다 타격력이 높은 각종 핵탄두들을 마음먹은 대로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동안 북한이 무수하게 바다로 쏘아대던 미사일은 핵탄두를 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스커드 미사일(한국), 노동 미사일(일본), 무수단 미사일(미군 괌기지)로 미사일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이미 10,000KM 이상을 날아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한다면 북한이 보유한 탄도미사일에(탄두 중량 스커드 770∼1천㎏, 노동 700㎏, 무수단 650㎏ 등) 핵탄두 장착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김정은은 계획대로 6차 핵실험을 어떻게든 강행하고 싶어하지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전과 달리 최고 수준의 군사적 압박을 통해 "도발하면 때린다"고 경고를 하고 있으며 중국도 이례적으로 '대북독자 제재'카드로 핵실험 저지 의지를 보이고 있어 속으로 상당히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탄도미사일(SLBM) 탑재가 가능한 '신포급' 잠수함의 해상 기동훈련에 나서고 있으며 또 신포급보다 더 큰 잠수함 제작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건설작업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신포급 신형 잠수함은 구 소련제 SSN-6 잠수함(2000톤급)으로 러시아로부터 들여온 잠수함의 짧은 길이(67m)를 SLBM 장착 부분이 함교까지 이어지도록 북한이 역설계하면서 탄도미사일발사가 가능해졌으며 탄도미사일은 2발 탑재 가능합니다.

 

 

경량급 잠수함에 탄도미사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신포급 잠수함은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수직으로 설치하였습니다. 그 발사관 안에 탄도미사일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핵강국들이 운용하는 중량급 전략잠수함들은 함교가 아닌 함체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10문 이상 수직으로 설치하였지만 북한의 잠수함은 그처럼 많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말하는 최후일격은 한 방으로 끝내버리는 핵타격이기 때문입니다.

 

 

신포급 잠수함 함교부분을 확대한 사진을 보면 붉은 원으로 표시된 부분은 잠수함으로 드나드는 2개의 출입문입니다.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였으므로, 출입문을은 함교 바깥쪽에 냈습니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미확인 물체가 함교 꼭대기에 설치되었습니다. 북한 신포급 잠수함은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잠망경, 레이더장대, 전자교란장대, 통신장대를 함교에 일렬로 길게 늘어놓지 않고 그 물체 안에 모두 집어넣었습니다.

 

 

작년 북한이 신포급 잠수함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후 근접 촬영 사진을 공개했었는데 수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함정으로 치면 함교와 같은 잠수함의 코닝 타워(conning tower), 즉 사령탑에 다른 잠수함에는 흔치 않은 작은 창 32개가 새로 생겼습니다.

 


작은 창은 위치로 봤을 때 탄도미사일 수중 사출시 발생하는 압력과 소음, 가스를 발산하는 용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심 몇십 미터의 바다 속에서 잠수함 수직 발사관이 엄청난 압력으로 탄도미사일을 물 밖으로 튕겨 내보낼 때 생기는 압력과 소음, 가스를 없애기 위한 것 입니다.

 

미국의 해군전문 웹싸이트 <커벗 쇼어즈(Covert Shores)>에 현시된 ‘분석-신포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이라는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신포급 잠수함의 함체길이는 수중배수량 2,500~3,000t, 함체길이는 67m, 함체폭은 6.6m로 추산됩니다.

 


신포급 잠수함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현장에서 김정은은 "북한이 북극성-1호를 보유한 것은 적대세력들의 뒤잔등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탄을 매달아놓은 것이며 적대세력들의 수역에서 타격소멸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전략무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북극성-1호(탄도미사일)을 싣고 대서양에 가서 미국 본토 동부지역을 불시에 기습타격하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전시에 북한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대서양수중매복구역으로 가기 위해 북서항로를 지나려면 거대한 빙산들이 들어찬 북극해 바다속을 잠항해야 하는데, 디젤전동식 잠수함은 빙산바다 속을 잠항하지 못합니다. 핵추진 잠수함이라야 북극해 바다속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미국과의 최후결전을 대비하기 위해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1990년대 최대 간첩사건인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사건의 장본인은 거물 남파간첩 이선실(여·1916년생)이었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 첩보사에서도 그는 가장 완벽했고, 또 드라마틱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약 30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작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실수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선실은 1990년대 남파공작원 중 최고위급으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습니다. ‘남한 내 합법적인 북한 전위정당을 구축한다’는 목표로 일본에 건너간 뒤 1980년 재일교포 ‘신순녀’로 신분을 위장하고 남한에 침투했습니다. 이후 남한과 일본을 오가며 민중당 대표를 맡고 있던 간첩 김낙중,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등 400여명을 포섭해 북한을 지지하는 대중정당과 지하당 구축을 시도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92년 이 사건을 조사해 이선실과 협력한 김낙중, 손병선 등 124명을 검거했습니다. 하지만 이선실은 사건이 불거지기 전인 1990년10월 17일경 강화도 해안에 대기 중이던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귀환하면서 공작원으로서의 30년 활동을 화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북한에 복귀한 이선실은 영웅이었습니다. 이선실은 북에 북귀 직후 자신의 30년 공작원 세월을 뒤돌아 봤는지 평양 김일성 동상 앞에 서서 한동안 깊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영웅이 된 이선실은 김정일로부터 공화국 2중영웅, 국기훈장 1급,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고, 북 통일전선부 산하 대남연락소 남파간첩 교육을 담당하며 공작원 양성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당 경공업부로 배치됩니다. 경공업부 책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였습니다. 이선실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오랜 기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동했던 그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그녀가 경공업부에 배치됐을 때, 북한은 집단 아사사태를 야기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상부에 외자유치와 개혁개방을 주장했는데 김경희를 비롯한 지도부의 눈에는 곱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북한에 ‘심화조 사건’이 터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6~1999년 사이 발생한 사상 검증 대학살 사건입니다.  심화조 사건은 단순한 사상검증 사건이 아니고 김일성 사후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는 혼란기, 공포를 통해 권력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기획되었는데 해당 기간 동안 당의 본류에 벗어난다는 명목으로 당 인사 2만 5000명이 제거되었습니다. 

 

 

주동자는 공교롭게도 김정은 권력이양 시기 죽음을 당한 장성택 당시 당 부부장이었습니다. 장성택은 자신의 최측근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을 앞세워 이러한 광란의 살육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영웅이었던 이선실은 심화조 사건 말미였던 1999년 ‘간첩’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내부(북한)를 와해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침투된 자.’ 

 


일평생 북한을 위해 남한의 지하조직을 공고히 한 공으로 영웅이 된 그녀의 혐의는 간첩이었고 이선실은 당시 여든을 훌쩍 넘긴 노파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처형이 아닌 고문 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점검하는 방법은 엔진오일, 베터리 점검 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좋은 방법은 정비사를 통해 점검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쁜시간에 주기적으로 점검을 받기 힘드시다면 간단하게 머플러와 배기가스를 통해 자동차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머플러와 배기가스를 통해 내 차를 점검하는 방법을 소개드립니다.


 

눈에 안보이는 무색인 경우

 

배기가스가 정상적으로 연소되고 있다면 무색 또는 옅은 청색입니다. 나의 차량 배기통에서 이런 색깔이 나오고 있다면 엔진쪽에는 이상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푸른 회색을 띄는 경우

 

배기가스의 색깔이 흰색인 경우에는 엔진의 실린더 헤드의 가스킷이 훼손되었거나 피스톤 오일링이 마모되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왼쪽이 가스킷 오른쪽이 오일링

 

가스킷이 훼손되거나 피스톤 오일링이 마모되면 엔진 오일이 실린더 위로 유입되어 연소되게 되는데 이때 흰색의 배기가스가 배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겨울철에는 엔진 상태가 정상이더라도 흰색 연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배기가스라기 보다는 배기가스와 외부에 온도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검은색을 띄는 경우

 

검은색 배기가스가 나온다면 엔진 상태 관리가 말이 아닌 자동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량의 특징은 차량 등록증에 적혀있는 공인연비. 예를 들면 10km라고 적혀있는 경우 실제 주행시 연비가 6~7km 정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같은 경우 교체를 고려해야 할 부품으로는 엔진오일, 점화 케이블, 점화 플러그, 비후다캡, 점화코일 등이 있는데 정비소를 들리는게 가장 확실합니다.


 

무색인데 냄새가 심한 경우

 

가솔린 차량의 경우 배기가스 색은 무색이거나 엷은 자주 색을 뛰며 냄새는 없습니다. 배기가스의 냄새는 무취지만 역한 냄새 또는 타는 냄새가 난다면 자동차에 이상이 생겼다는 적신호입니다. 냄새는 심하게 날수록 자동차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고, 타는 냄새는 엔진오일이 타고 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디젤 차량도 마찬가지로 무취지만 배출가스 규제로 인해 차량 내부에 유해가스를 정화하는 필터장치가 장착되어 있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자동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흰색 배기가스에서 냄새가 나는 경우

 

냄새를 동반한 흰색 배기가스는 엔진오일이 연소실로 잘못 유입되어 타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운전자분들은 수증기라 착각하지만 수증기는 공기 중에 쉽게 사라지는 반면에 흰색 배기가스는 사라지지않고 냄새도 발생합니다. 엔진 내부의 기계적인 요소들이 손상됐거나 오일이 빨리 달고, 엔진의 힘이 부족해 출력이 낮아지는 등 기능을 떨어트리니 꼭 정비소에 들러 점검받아보셔야 합니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부터 핵과 미사일을 꾸준히 개발하여 왔고 2000년대에는 전자전과 사이버전, 그리고 SLBM(잠수함 발사 탄도탄) 시험 등 끊임없이 소위 비대칭전력을 구축하여왔습니다. 재래식 전력을 이용해서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목함 지뢰를 매설하여  우리 병사들을 다치게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북한의 비대칭 전력뿐만이 아니라 재래식 전력을 이용한 도발에 대해서 확실한 보복적 조치나 차후의 확실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에 위치한 마양도해군기지에서 3천t급 이상의 잠수함 2척의 건조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하나는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북한은 핵잠수함을 위해 이미 지난 2008년 러시아로부터 노후한 3천t급 잠수함을 넘겨받았으며, 리모델링 작업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 있어 북한은 2017년 초까지 SLBM 장착 등 작업을 마감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3000톤급 핵잠수함을 만든다면 북한은 위력적이면서 매우 작은 미사일과 원자로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북한의 SLBM 시험은 당연히 핵잠수함 개발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우선 SLBM을 발사하려면 잠수함의 크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장거리를 탐지되지 않고 몰래 숨어서 가야하는데 이런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핵잠수함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다음 비대칭 전력은 핵잠수함이라고 인식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핵잠수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래식 잠수함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원자로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마지막으로 핵잠수함에서 사용할 핵연료를 만들 수 있는 기술 등이 필요한데 북한은 이미 재래식 잠수함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잠수함 전력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이미 확보한 농축 기술을 이용하여 우라늄을 농축해서 필요한 핵연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은 이미 핵잠수함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핵잠수함에서의 SLBM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무기로 사용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핵폭발을 이용한 핵폭탄입니다. 이미 북한은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추출해서 만든 플루토늄 핵폭탄과 우라늄을 농축해서 만든 우라늄 핵폭탄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가 원자로를 이용한 핵잠수함과 핵 항공모함인데 항공모함은 북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더티밤(dirty bomb)과 폴로니움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북한의 기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실패한 실험이라고 비웃기도 했으며 미사일 시험이나 SLBM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고 상당한 사거리를 가진 탄도탄도 확보하고 있습니다.  

 

 

원자로도 건설해서 운영하면서 플루토늄을 추출해 핵폭탄을 만들고 있습니다. 핵잠수함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보는 최악을 가정해서 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북한의 핵잠수함에 대비하여 우리도 핵잠수함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행히 우리는 잠수함 기술뿐만이 아니라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핵잠수함 건조와 같은 비대칭 전력의 확보에 대한 우리의 모든 대비를 우리 국민들도 알고 있어야 하며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과 북한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한의 비대칭 전력이 대칭 전력이 되고 우리가 확실한 우위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쯤에는 조그만 집무실과 내실,

그리고 침대와화장실, 샤워실이 있었습니다.

그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했던 지하벙커를 발견한지 벌써 7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히틀러는 지금까지도 인류 최악의 독재자로 남아있습니다.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히틀러가 사망하고 난 이후에도 아직 히틀러는 살아있다는 소문과 남아메리카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한 일간지에서 실제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지켜본 친위대원의 인터뷰가 실리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 2주일을 지켜본 측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로쿠스 미슈씨는 1945년 11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에게 히틀러 자살 당시의 순간을 진술하였으며 이때 작성된 문건이 몇 년 전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으나 비밀에 쌓여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미슈씨는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베를린의 예전 히틀러 지하 벙커 자리를 바라보며 설명했습니다.

 

 

"제2차대전의 전 기간을 통해 경호원 겸 전화당번으로 히틀러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SS친위대 장교 출신의 나는 히틀러가 아내 에바 브라운과 권총 자살한 1945년 4월30일까지 마지막 2주를 함께 지냈다. 히틀러는 제3제국의 종말이 다가오자 그의 총통 집무실 아래에 있는 지하 벙커로 내려온 뒤 미슈씨를 포함한 필수요원 몇명만을 남겨놓고 참모들의 대부분을 해산시켰다. "

 

 

당시 미슈씨는 그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히틀러는 4월22일 소수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나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 남은인원 중에 미슈씨는 베를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4월30일까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2월부터 벙커로 은신, 꼼짝도 않고최후를 맞이했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히틀러는 평소처럼 밖으로 나와 자신의 아파트에도 들렀으며, 공습이 있을 경우 벙커를 찾았으며 벙커 생활은 굉장히 평온했고 히틀러도 침작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최후를 마치기 이틀전 전격 결혼한 애인 에바 브라운도 수주전부터 벙커를 찾았으며, 마지막 2주일은 벙커에서 애인과 줄곧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나치독일의 선전상인 요제프 괴벨스 부부가 6명의 자녀들과 함께 자신의방에서 자살한 것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끔찍한 일을 목격해 지금도 과거의 악몽에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미슈씨에 따르면 히틀러는 연합군측의 무전 도청으로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뒤 4월 28일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에 진격하는 소련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자살을 결심하고 가장 좋은 자살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법을 알게된 히틀러는 청산가리 캡슐로 결정한 뒤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애견인 셰퍼드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운명의 날인 4월30일 "우리는 전쟁에서 졌다. 제군들은 모두 나를 의지해라. 나는 결코 베를린을 떠나지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극단적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히틀러가 자살용으로 마련해 둔 청산가리 캡슐까지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총을 선택하여 숨을 거뒀다고 그는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이틀후인 1945년 5월 2일 소련군이 베를린의 총통 관저에 들이 닥쳤을 때 미슈씨는 27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련군에 체포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8년을 갇혀있다가 1953년 베를린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는 현지 역사단체가 지하 대피소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기자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는데도 차분하면서도 비교적 명확하게 답했습니다. 벙커가 있던 자리는 지난 1980년대 당시 동독정부에 의해 자갈 등으로 메워져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벙커는 물론 히틀러의 절친한 건축가 친구인 알베르트 슈페르가 세운 기념비적인 '신제국' 궁전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창업을 한다는 선택을 한다는게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빌 게이츠, 헨리 포드, 마크 저커버그는 명문대를 그만두고 창업해 부호가 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세계적인 창업성공을 이룬 10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  래리 엘리슨

 

래리 엘리슨은 글로벌 IT기업 오라클이 창업자입니다. 20살에 시카고대 컴퓨터 공학과를 중퇴했습니다. 영화 아이언맨 2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하와이에 '래리 앨리슨 섬'이라는 섬도 갖고 있습니다.


 

2.  아만시오 오르테가

 

오르테가는 학교를 14살에 그만두고 스스로 디자인한 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그가 창업한 의류 유통회사가 바로 ‘자라’입니다. 이제 세계 어디서나 ‘자라’ 매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합니다.


 

3.  리카싱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은 15살에 중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시곗줄 판매원, 찻집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부동산 개발을 주업으로 하는 청쿵그룹을 창업하였으며 홍콩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뷰티·건강 유통망과 에너지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4.  셸던 아델슨

 

셸던 아델슨은 ‘글로벌 카지노의 제왕’으로 불립니다. 카지노회사인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창업자가 바로 아델슨 회장입니다. 이스라엘 일간지인 ‘이스라엘 데일리’를 보유하고 있고, 미국 정치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뉴욕시티대학을 19살 때 중퇴했습니다


 

5.  폴 엘렌

 

폴 엘렌 20살 때 워싱턴주립대를 그만두고 가전소매회사 허니웰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빌 게이츠를 만나서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창업하였습니다. 미국 미식축구팀 시애틀 시혹스, 프로농구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즈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6.  카크 커코리안

 

커크 커코리안 트라신다그룹 창업자는 ‘도박 천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사업에 투자해 성공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중학생 시절 자퇴해 권투선수로 활동하다 조종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5년 별세했습니다.


 

7.  얀 쿰

 

20살에 미국 산호세 대학을 자퇴했고 야후의 보안 책임자로 일하다 창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페이스북에 메신저 앱 와츠앱(WhatsApp)을 190억달러에 매각해 전세계 미디어를 장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그의 주머니에 들어온 현금은 68억달러였습니다.


 

 

8.  수바쉬 찬드라

 

수바쉬 찬드라 지(Zee) TV 회장은 대표적인 인도의 ‘미디어 거물’입니다. 12살에 학교를 자퇴했던 그는 인도 최초 위성방송인 힌디 채널을 1992년 설립하였으며 현재 지 TV 네트워크는 167개국에 5억명의 시청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9.  오르지 오조르 칼루와

 

칼루아는 학내 분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나이지리아 마이두구리대에서 퇴학당했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로부터 35달러를 빌려 사업을 시작했하였고 나이지리아 최대 미디어그룹인 슬록(Slok)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10.  엘리자베스 홈스

 

19살에 스탠퍼드대를 중퇴한 홈스는 의료 연구실에 혈액검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테라노스(Theranos)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테라노스는 최근 의료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으며 그는 세계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이 국익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한국전쟁 발발하기 두어달 전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아치슨 독트린을 발표하였습니다. 2차 대전 이전에는 미국은 외국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정책, 즉 몬로 독트린을 고수하여왔었습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소련의 스탈린에게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아치슨 선언을 한지 두어달 만에 그것을 스스로 번복하는 것은 대국의 위상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정치적 논리를 따진다면 당시 미국이 참전할 이유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아치슨 선언을 스스로 뒤집어엎으면서 한국전쟁 발발 닷새만에 미국의 참전을 선언하였을까요?

 

 

작은 이유로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에 또 다시 시련이 닥친 것을 가슴아파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기독교 탄압을 이겨낸 한국인들이 모처럼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공산당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북한에 이어 남한까지 적화되는 것을 미국 선교사들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며, 미국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탄원은 미국의 참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아무 호위병 없이 헬기를 타고와 전쟁이 전개되는 상황과 한강 이남의 지형을 관찰하였습니다. 이미 인민군이 장악한 지역에 홀로 들어와 지형을 관찰한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이 쌀이며 이불이며 등에 얹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을 보면서 그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였습니다.

 

 

그는 그때 단지 전쟁 전문가의 눈으로 이국인을 바라보듯 한국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국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느꼈으며, 수천년의 역사에서 많은 시련을 가졌던 한국 민족의 시련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을 위한 애국심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전을 결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의 참전 결심이 미국 참전의 결정이었습니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들이 미군과 전쟁을 벌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미국 여론이 최소한 포로수용소 전범은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일본은 미군포로 수용소에서 잔혹한 행위를 한 병력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인 병력이었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미국인들에게는 한통속으로 보였으며 한국은 2차대전 전범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때문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흘렸을까... 때는 바야흐로 미국에서 아메리카 드림이 실현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카우보이의 서부 개척 시대도 지나고 1920~1930년 대의 경제 공황도 끝나고, 2차 대전도 종전되고 미국 경제는 건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징집되어 한국 땅에서 오만 명 이상 전사하고 오만 명 이상 부상당하고 또 많은 이들이 북한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 역사를 잘 몰랐으며, 한국인은 일본의 용병로 여겨지던 때에 맥아더 장군의 한국 민족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해 맥아더는 미국 트루만 문민 정부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새벽 6시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전용기 C-54를 타고 와서 한강 남쪽 제방을 순시했던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스쳐갔다는 사실입니다.

 

 

국군 십만 명이 지키던 삼팔선을 인민군 십삼 만명의 병력이 공격하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이 한강까지 후퇴하는데 사흘밖에 안 걸렸습니다. 이것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국군이 후퇴하였으며 이대로 가면 보름 내에 한국은 공산당 군대에 완전 점령당하게 됨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머리에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인민군의 진격이 빠르면 빠를 수록 보급로는 길어지고, 그 보급로와 후방의 퇴로를 차단하면 적은 궤멸하게 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세를 파악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적으로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참전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30일 새벽4시 57분에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전쟁개입 결심을 받아낸 맥아더 장군은 7월 1일 새벽 세시에 스미스 부대를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투병 병력이 없는 부대였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 평화를 구가하던 때이기에 일본에 주둔한 미국 사령부에는 행정병 등 비전투병과 병력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인민군에 대항하기보다 인민군이 부산마저 함락하는 것을 하루라도 저지시키는 것이었으며, 일차 파병 병력 8천명은 한국 도착 후 며칠 만에 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습니다.

 

 

피난 정부가 있는 부산을 결사적으로 사수하는 근 석달 간의 낙동강 전투에서 십만 명의 미군 병력이 손실되자 미국 워싱턴의 트루먼 정부는 한국전에서 손을 떼고자 하는 방침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중국 장개석 총통의 대만 망명정부처럼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와 더불어 십만 명의 한국인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제주도에서 한국 정부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을 북한이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미군은 철수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있음을 밝히며 오히려 본국으로부터 대규모 병력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사실, 9월 15일 밀물 때의 월미도의 수심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참도들도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라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논리였습니다. 한국전에서 손을 떼는 것을 검토하던 미국 국방성 관리들도 당시 태평양의 시저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려는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가 요구하는 해병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주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승승장구하며 북진하였습니다. 압록강까지 이루는 북한 전지역에 태극기가 휘날리며 그토록 그리던 조국 통일의 순간이 목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김일성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한국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에 외교를 맺고 있던 인도 정부가 중국 정부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맥아더의 북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정보였으며, 이에 안심한 모택동은 백만 대군으로 알려진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인해전술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맥아더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군대와 달랐습니다. 후대 사가의 시각에서 중공군은 일종의 자살 공격대였습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 병력에게는 일주일 분의 미수가루만 지급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파병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침대도, 취사병도, PX 사병도, 이발병도, 행정병도 필요없었다. 단지 그들은 일주일분의 미수가루만 배낭에 메고 진격할 뿐이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추운 지역에서 이런 중공군을 막아 싸우려면 미군도 정규전 이외의 전략이 필요했지만 미국 본토에서 승인하지 않으므로 맥아더 장군은 병력 철수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태평양의 한 작은 섬 웨이크섬으로 호출하며 비밀 회동을 갖습니다. "둘이 마지 못해 악수하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 있었다"고 미국 역사는 기록합니다. 이 비밀 회동에서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자신은 전혀 정치적 야망이 없는 군인임을 맥아더 장군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대권에 도전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트루만은 안심하고 그를 극동 미군총사령관의 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한국을 구출하려는 그의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댓가는 태평양의 황제라 불리던 자리에서 불명예 해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피부색이 다른 우리 민족의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전쟁이 되게 한 인물이며, 그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십만 명의 미국인의 피를 흘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기에 한국과 미국은 혈맹의 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해임당한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자 뉴욕 연도에 7백만이 넘는 환영 인파가 몰려나와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그 날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던 날 뉴욕시 고층 아파들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색종이가 휘날리며 전 뉴욕시를 덮었으며, 연도에 미처 나가지 못한 시민들도 모두 옥상과 베란다와 창가로 모여들어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역사의 명연설문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귀국 연설을 그가 즐겨 부르던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just fade away)라는 말로 마무리하였을 때 전 미국은 함께 울었습니다.


한국인 양경종은 1938년 한국에서 일본군에 징집되어 39년 만주의 소련 국경에서 일본군 공병으로 전투 중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잡혔습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에서 또 다시 소련군 공병으로 전선에 강제 투입되었고...독일군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군에 의해 노르망디 해안지역에 동방대대 소속으로 배치되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

 

이 사람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가 1939년 만주국경 분쟁 시 소련군에 잡혀 적군(Red Army)에 편입되었는데 그는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 하는데 강제 투입되었다가 노르망의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됐다. 붙잡혔을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중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다.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진술했다. -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의 Utah 해안에서

 

 

당시 유타 해안에서 미국 로버트 브루어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병사를 심문하였는데 그들은 브루어 중위에게 자신들이 적군이 된 이유를 위 내용처럼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 동방대대 출신 병사들 중 4명 한국인이었으며 그 중 한명이 양현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대상으로 동방대대를 편상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노르망디에서 독일군으로 붙잡힌 한국인 4명은 모든 것을 조사한 후, 고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양경종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시민으로 생활하였고 슬하에 2남 1녀 자녀를 두었지만 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경험을 이야기 한적 없다고 전해집니다.

 


이름 : 양 경종
생년월일 : 1920년 3월 3일
본적 : 신의주
관동군 입대 : 1938년
노몬한 전투 참전때 소련군 포로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해변에서 미군 포로
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1947년 미국으로 이주
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 부근 거주하다 사망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가 2012년 출판하고 2017년에 한국어판이 나온 제 2차 세계대전의 머릿말에 양경종에 대해 "전쟁에서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에 차례로 징집되어 의도치 않게 베테랑 군인이 되어버린 그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역사적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지는가를 양경종은 강렬하게 각인시키고 있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를 위해 우리나라 군복이 아닌 타국의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한국인들의 기구한 운명이 얼마나 슬펐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